8화
전시영은 루시아가 전개하려는 스킬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러시아의 리고르 아스페라에서 최종 보스를 쓰러뜨릴 때, 완벽한 기회를 창출했던 바로 그 기술이었으니까.
루시아의 전신에는 백색 뇌전이 충만한 상태였다.
치지지직! 치지지직!
강력한 스파크가 마치 울부짖는 맹수처럼 위협적으로 튀어 올랐다.
이윽고 그녀의 몸이 뇌전에 완전히 뒤덮이자, 엄청난 밝기의 백광이 터져 나왔다.
"텔룸 콩쿠수스(tēlum concúsus)!"
창날에서 발사된 거대한 빛의 화살은 눈 깜짝할 새에 지척까지 도달했다.
암흑화한 상태의 그는 엄청난 속도로 움직일 수 있었지만, 도무지 공격을 피할 틈이 보이지 않았다.
빛의 화살이 워낙 빠른 데다가 크기 또한 거대했기 때문이었다.
하는 수 없이 블라드 유진은 회피 일변도의 전투태세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스이잉! 치잉!
오른손에 소수혈인을 뽑아내자마자 하나로 합친 그는 붉은 칼날을 곧장 화살촉의 끄트머리에 쑤셔 박았다.
콰칭―! 드드드드드!
그러자 사방으로 원형의 충격파가 퍼져 나가며,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바닥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고농축 에너지로 이루어진 빛의 화살이 붕괴하면서 사방으로 무시무시한 힘을 발산한 것이다.
광풍이 몰아치고 돌가루가 흩날렸기에, 유진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루시아는 자신의 공격이 막혔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
이제껏 텔룸 콩쿠수스가 이런 식의 반응을 보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래도 그녀는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바람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
루시아의 심장은 쿵쿵거리며 강렬하게 뛰고 있었다.
자신의 공격을 이토록 가볍게 막아 낼 정도라면, 한국까지 찾아온 의미가 있을 테니까.
그런데 흙먼지가 걷힌 순간, 저만치 앞쪽에 서 있어야 할 그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게 아닌가.
"헙!"
순간적으로 루시아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앞에 있어야 할 적이 없다면, 남은 곳은 딱 한 방향뿐이었으니까.
불길한 느낌이 드는 순간, 그녀는 몸을 돌리며 쾌속하게 깃발 창을 휘둘렀다.
움직임을 놓쳤다는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그대로 공격을 가하는 결단력이 돋보였다.
쿠후우우웅!
폭풍 같은 반격이었으나, 루시아의 깃발 창은 그저 허공만 가르고 말았다.
분명 자신의 후방을 점했다는 확신이 들었는데, 그새 몸을 빼냈는지 유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전투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루시아의 미간은 절로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의 농락은 허용하지 않겠습니다. 후읍!"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쉰 다음, 깃발 창을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러자 흰 천의 회전 궤도를 따라서 백색 뇌전이 점점 크기를 더해 갔다.
이윽고 루시아의 머리 위에는 무시무시한 방전을 일으키는 거대한 원반이 생겨나 있었다.
백색 원반에서 발생하는 진동은 너무나도 위협적이었다.
"이제 나오지 않고는 못 배기실 겁니다. 에네르지아 디스쿠스(ĕnergía discus)!"
그녀는 곁눈질로 주변을 빠르게 살피더니, 어느 한 곳으로 장창을 냅다 휘둘렀다.
이번에는 블라드 유진의 기척을 확실히 알아챈 모양인지, 루시아의 공격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쉬이이이익―!
놀랍게도 그곳에는 안개로 변한 그가 숨어 있었다.
‘예상보다 더 강하다. S급에 오른 암흑화로도 오래 속일 수는 없군.’
눈을 가늘게 뜬 유진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거대한 백색 원반을 주시했다.
루시아의 전투 방식은 빠르고 과격했으며, 스킬의 위력 또한 매우 뛰어났다.
에네르지아 디스쿠스는 그런 그녀의 성향이 모두 들어간 기술이었다.
한데,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전하며 날아드는 백색 원반을 향해서 그가 대뜸 마주 달려드는 게 아닌가.
아마도 에네르지아 디스쿠스는 루시아가 보유한 최강의 기술일 텐데, 블라드 유진은 정면 대결을 택했다.
지금껏 회피하기만 하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이걸 기다렸다.’
그는 손아귀에서 암자색 기운을 줄기줄기 뽑아 올리며 눈을 빛냈다.
츠츠츠츠츠!
[EX급 스킬 ‘천계도살검’이 시전되었습니다.]
[‘S급 헌터 루시아 헤레라 레예스’가 끝없는 공포를 느낍니다.]
쩌어어어엉! 후아악!
백색 원반과 5m 길이의 시커먼 검이 부딪치자, 어마어마한 위력의 충격파가 발생했다.
놀랍게도 에네르지아 디스쿠스는 천계도살검에 의해 반으로 쪼개져 버렸다.
마치 강한 충격을 받은 CD처럼 좌우로 갈라지더니, 각기 다른 방향으로 튕겨 나갔다.
퍼어엉―! 퍼엉!
원반의 파편이 날아가 박힌 곳에서는 굉음이 펑펑 터졌다.
고농축 에너지를 붙잡고 있던 스킬이 스러지며, 사방팔방으로 힘을 마구 분출했기 때문이었다.
철거되어 가고 있던 수십 채의 가건물은 이윽고 형체도 없이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루시아가 전개한 스킬의 위력이 너무도 강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목표로 삼았던 유진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지만.
지잉! 슉!
미세하게 진동하며 소리를 내던 천계도살검이 이윽고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벌써 3초가 지나 버린 모양이었다.
에네르지아 디스쿠스를 쪼개고도 아주 잠깐의 여유가 있었지만, 그는 전혀 아까워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싸움은 서로의 실력을 알아보기 위한 친선 대련이었으니까.
척! 척!
블라드 유진은 상대를 향해서 뚜벅뚜벅 걸어가며 양손에 소수혈인을 전개했다.
스이잉! 스잉―!
그러자 시뻘건 빛을 발하는 열 개의 칼날이 마치 공작새의 꼬리 깃털처럼 쫙 펼쳐졌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으나, 번득이는 핏빛 손톱에선 죽음의 기운이 물씬 풍겨 오고 있었다.
스슥!
바로 그 순간, 그의 신형은 루시아의 시야에서 또 사라졌다.
검은 안개로 변해 흩어지는 것까지는 포착했지만, 정확하게 파악하는 건 시간이 좀 필요했다.
암흑화한 블라드 유진의 위치를 알아내려면 최대한 감각을 돋워야 했으니까.
슥!
"흐아압!"
순간적으로 기척을 느낀 루시아는 왼쪽으로 몸을 틀며 장창을 떨쳤다.
쿠후우우웅!
창대에 달린 흰 천에서 우레가 일며 커다란 반원을 그렸으나, 이번에도 무기에 닿는 감각은 없었다.
쉭―!
대신 그녀는 눈앞에 불쑥 나타난 시뻘건 칼날을 볼 수 있었다.
반사적으로 창대를 퉁겨 올리며 냅다 옆으로 내지르려는 순간, 다섯 줄기나 되는 소수혈인의 움직임이 멈췄다.
뚝.
그와 동시에 루시아도 공격을 중단했다.
우우우웅!
붉은 칼날이 목울대 앞에서 섬뜩한 진동음을 발하며 울었다.
하지만 그녀의 창날도 유진의 복부 앞에서 멈춘 상태였다.
서로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하기 직전에 대련을 중단한 것이다.
또르륵!
극도로 긴장한 탓인지, 이마에서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물론 담담한 표정으로 소수혈인을 거두는 그의 것은 아니었다.
땀방울의 주인은 깃발 창을 내지른 채 굳어 버린 루시아였다.
차르륵!
한동안 그 자세를 유지하며 멍하게 서 있던 그녀는 눈을 빠르게 깜짝이며 무기를 거두었다.
그러고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검증은 끝났습니다."
대련 종료를 선언했지만, 유진은 루시아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두 S급 헌터의 대련으로 인해 초토화된 공터로 향하고 있었다.
‘안지홍이나 전시영보다는 좀 더 강하다.’
블라드 유진은 세 명의 S급 헌터들을 두루 겪어 보았다.
직접 맞붙은 건 루시아뿐이었지만, 한참 높은 수준인 그의 눈에는 세 사람의 우열이 객관적으로 보였다.
유진은 문득 루시아를 돌아보며 왼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우아하게 손끝으로만 그의 손을 살짝 붙잡았다.
"뭐 하는 거지?"
"예? 아, 악수하자는 게 아니……."
"검증 끝났으니, 계약금을 달라던 거였는데."
"앗! 죄, 죄송합니다."
황급히 손을 내린 루시아는 가죽 주머니에서 계시록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유진은 건조한 눈빛으로 그녀를 훑더니, 곧장 책자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템 정보>
명칭 : ??? 계시록
등급 : EX
내구도 : 파괴 불가, 분량 소실
효과 : 알 수 없는 언어 기록
천상계와 마계, 미궁의 근원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음. 책자의 절반이 사라져 후반부 내용을 알 수 없음.
‘마계와 미궁이라…….’
미궁의 존재는 현대에 깨어나서 알게 되었지만, 마계라는 단어는 달랐다.
뱀파이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말이었다.
‘수천 년 전 어떤 현상으로 인해 차원을 뚫고 넘어온 마족이 뱀파이어의 시초니까.’
피와 어둠의 군주가 되고 나서야 그는 일족의 비사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마계라는 단어는 머릿속에서 아예 지워 버리다시피 했다.
이제는 지구와 완전히 단절된 그쪽 세계에 연연해 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뜻밖의 곳에서 마계라는 단어와 마주하게 되자, 더 이상 일족의 과거를 외면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파라라락!
블라드 유진은 계시록을 쭉 넘겨 보았다.
알 수 없는 문자로 쓰여 있었지만, 놀랍게도 내용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계시록을 펼치는 순간, 글자가 꿈틀대며 그가 아는 언어로 변환되었기 때문이었다.
유진이 습득한 언어가 상당히 많아서 그런지, 처음에는 버벅거리더니 이제는 꽤 익숙한 한글이 되었다.
아무래도 가장 최근에 흡수한 기억이 정윤규 교수의 것이라서 그런 듯했다.
책자는 매우 얇아서 전체를 살피는 건 금방이었다.
문제는 후반부가 소실되어 중요한 부분을 알 수가 없다는 거였다.
탁!
한데, 반쯤 찢어진 마지막 페이지를 본 순간 그의 눈빛이 돌변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문양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일족의 인장이다.’
책자의 표지 안쪽에는 뾰족한 두 개의 삼각형 아래에 붉은 타원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늑대의 살기 어린 눈과 박쥐의 뾰족한 귀를 형상화한 일족의 상징.
하지만 정확하게 누가 이 책을 집필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인장만 박혀 있었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아예 아무런 추측도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지구에 넘어온 일족이 집필한 건 아니야. 그랬다면 이 여자가 미궁에서 이걸 얻었을 리가 없지.’
그는 계시록을 붉은 복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으며 루시아를 돌아보았다.
"나머지 반을 찾아야 하는군."
"제가 살펴보기에도 아마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좀 막막한데."
유진이 회의적인 눈빛으로 복주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루시아가 꽤 확신에 찬 눈으로 설명을 덧붙였다.
"힌트가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무미건조하던 그의 눈빛이 오랜만에 일족의 인장을 봤을 때처럼 살짝 빛을 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