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계시록?"
전시영과 아크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얇은 책자를 주시했다.
어떤 상황이건 무미건조한 반응을 보이던 블라드 유진조차도 꽤 흥미로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만큼 루시아가 내뱉은 말은 상당히 의외였다.
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되었을 때 기록한 신약 성경의 마지막 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분명히 이 책자를 러시아의 리고르 아스페라에서 얻었다고 말한 바 있었다.
그 말인즉, 요한계시록과는 별개의 물건이라는 사실을 뜻했다.
하지만 이어진 루시아의 말은 더욱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이 계시록에는 미궁의 근원과 다른 차원의 존재에 관해서 쓰여 있습니다."
그녀의 말에 그는 눈에 이채를 띠며 고개를 미묘하게 모로 돌렸다.
‘다른 차원의 존재라……. 성배의 아이템 정보에도 그런 설명이 있었지.’
루시아는 책자를 덮은 채 앞으로 밀던 손을 멈췄다.
"제 제안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스페인 임시 정부의 요청에 응한다면, 계시록을 넘기겠다는 의지를 손짓 하나로 명확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낡은 책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솔직히 스페인 임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따위는 있으나 마나였다.
하지만 대충이나마 들은 계시록의 내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이 세상의 근원이라니, 궁금하긴 하군.’
블라드 유진은 미궁과 몬스터, 강력한 헌터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살아가는 게 즐거웠다.
무미건조한 1천 년 전의 과거와는 아예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아마 대성체와 대규모 미궁을 공략하러 세계를 떠돌다 보면, 언젠가는 스페인에 당도하게 될 터.
미리 스페인에 방문하는 대가로 미궁 사태의 근원을 알아보는 것은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턱을 괸 채 잠시 루시아를 공허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안을 수락하겠다."
"가, 감사합니다!"
루시아는 책자 위에 손을 포갠 채로 고개를 깊이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다른 뜻이라도 있는 모양인지, 계시록을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는 다갈색 눈동자를 빛내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죄송하지만 아직 절차가 남았습니다. 계시록을 넘기기 전에 먼저 확인해 봐야 할 것이 있거든요."
루시아의 태도는 시종일관 비굴하거나 뻔뻔하지 않았다.
상대가 부담스럽지 않도록 최대한 정중하고 담백하게 행동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눈빛은 상당히 도전적이었다.
유진은 그런 루시아가 무엇을 원하는지 대번에 파악하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발하지."
* * *
블라드 유진은 숙소에 아크웰만 남겨 둔 채, 한적한 장소를 찾아서 이동했다.
녹턴을 타고 가는 게 더 수월할 테지만, 일행이 많아서 그럴 수는 없었다.
결국에 세 사람은 전시영의 차를 타고 양수역 근처에서 내렸다.
이곳에서 그는 프리클 플라워를 사냥하고, 폭사라는 스킬을 얻은 적이 있었다.
원래는 오염 지대와 인접한 전선이 형성되어 매일같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장소였지만, 지금의 풍경은 사뭇 달랐다.
역 근처에 바글바글하던 헌터 물품 노점상과 음식점은 온데간데없고, 한적한 동네로 변해 버린 것이다.
이게 다 양산의 대규모 미궁, 드라코 도무스가 정화되며 일어난 결과였다.
마기가 약해져서 미궁의 파편이 적게 날아오고, 그만큼 인간의 반격이 수월해졌으니까.
"10년 전에 계시록을 얻었다면, 공개해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지. 그래야 이 사태를 해결할 실마리를 빨리 찾을 수 있는 거 아니야?"
전시영은 역 주차장에 차를 대며 작게 투덜거렸다.
계속 딴지를 거는 걸 보니, 유진이 스페인으로 향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그녀가 그런 식의 의견을 피력하는 건 당연한 반응이었다.
대규모 미궁과 대성체 미궁을 정화하긴 했지만, 아직 한국의 절반 이상은 오염 지역으로 뒤덮여 있었으니까.
"백방으로 다녀 봤지만, 책자의 언어를 해석할 수 있는 이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 내용이 어떤 파급을 일으킬 줄 알고, 공개한단 말입니까?"
조수석에 앉아 있던 루시아는 서릿발같이 차가운 말투로 전시영의 말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걸고넘어졌다가 되레 일침을 당하자, 그녀는 눈을 부라리며 괜히 조수석을 노려보았다.
"하여간 마음에 안 드는 여자야.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말이지."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덜컥!
그는 두 사람이 말다툼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곧장 차에서 내렸다.
미궁 전선 근처에 지어져 있던 불법 가건물은 깡그리 철거된 상태였다.
이만한 크기의 공터라면, 루시아가 원하는 검증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으리라.
블라드 유진은 단단한 시멘트 바닥을 밟으며 앞으로 쭉 걸어가더니, 천천히 뒤돌았다.
"이쯤이면 좋겠군."
"널찍하니 괜찮네요."
철컥! 드르륵!
걸음을 멈춘 루시아는 자신의 가슴팍에 오른손을 올리더니,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돌렸다.
"뇌신의 흉장. 전투 모드 전개."
츠츠츠츠츠!
그러자 번쩍이는 백색 뇌전과 함께 수수하던 그녀의 옷차림이 순식간에 변화하기 시작했다.
청백색 빛줄기가 쏟아져나오더니, 이윽고 루시아는 무기와 방어구를 완벽하게 갖춘 모습이 되었다.
철컥!
은빛 갑옷을 갖춰 입은 그녀는 마지막으로 투구 덮개를 거칠게 내렸다.
이것이 바로 스페인의 잔 다르크라고 불리는 루시아의 진면모였다.
스윽! 척!
그녀가 손에 쥔 무기는 끝 쪽에 흰 천이 달린 금속 장창이었다.
거추장스럽게 왜 장창과 깃발을 합쳐 놓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흰 천의 역할은 무궁무진했다.
자세히 보면 깃발 부분에서 간헐적으로 백색 스파크가 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자의든 타의든 저 깃발에 닿으면 초고압 전류에 감전되어 옴짝달싹 못 하게 될 터였다.
물론 웬만한 생명체는 그대로 절명할 확률이 높았다.
후우우웅! 척!
깃발 창을 한 바퀴 휘둘러 본 루시아는 유진을 바라보며 턱을 슬쩍 쳐들었다.
"시작하시죠."
"그러지."
그녀는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깃발 창으로 큰 원을 그렸다.
후웅! 훙! 파라라락! 치지지직!
회전이 점점 빨라질수록 펄럭이는 흰 천에서 스파크가 튀는 빈도가 높아졌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전개되었지만, 유진은 가만히 서서 그런 루시아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풀고르 글로부스(fulgor globus)!"
쉬익―! 후우웅! 쿠콰콰콰콰!
그녀가 장창을 강하게 내려치자, 백색 뇌전의 크기가 수백 배로 확대되었다.
방전하는 번개 구체는 마치 나무줄기처럼 뻗어 나가며 지면에 날카로운 상흔을 남겼다.
딱딱하게 굳은 시멘트 바닥이었으나, 거칠게 뿜어지는 에너지의 향연을 버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무시무시한 공격을 받아 내는 그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스윽―!
순간적으로 블라드 유진의 신형이 검은 안개로 변하며 확 흩어졌다가, 백색 뇌전의 범위 밖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암흑화한 상태로 가볍게 옆으로 이동하여 공격을 회피한 것이다.
초장부터 정면 대결을 벌이는 건 별로라서 그냥 피했는데, 매우 적절한 선택인 듯했다.
쒸이이잉―! 뻐버버벙!
조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곳으로 날아간 번개 구체가 굉음과 함께 폭발했기 때문이었다.
목표 주변의 모든 물체를 간단하게 찢어발기는 모습을 보고, 유진은 작게 주억거렸다.
S급 헌터답게 루시아는 전시영과 비슷하거나 조금 넘어서는 수준의 공격력을 갖추고 있었다.
쉬이익―!
"차핫!"
루시아는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더니, 상당히 큰 동작으로 깃발 창을 휘둘렀다.
대놓고 후려갈기는 정직한 수법이었지만, 이 일격을 막거나 피할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을 것 같았다.
단순하긴 하나 엄청나게 빨랐으니까.
쿠후우웅! 콰아아앙!
그녀가 장창을 내리치자, 땅바닥에 균열이 좍좍 그어지면서 큼지막한 구덩이가 생겨 버렸다.
마치 큼지막한 유성이라도 떨어진 듯한 형상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블라드 유진은 루시아의 공격 범위 밖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도저히 눈으로 좇을 수도 없을 만큼 초월적인 속도의 공격이었으나, 그의 움직임이 훨씬 더 빨랐기 때문이었다.
쓰스스스스!
암흑화를 해제한 유진은 문득 자신의 왼쪽 손목 언저리를 내려다보았다.
직접 타격이 전혀 없었음에도 유진의 옷은 조금 찢어지고 검게 그을려 있었다.
피하던 와중에 흰 천에서 발생한 뇌전이 살짝 스친 모양이었다.
대략 몇 미터 정도 거리가 있었는데도 이런 위력이라니, 정통으로 맞는다면 웬만한 몬스터는 그대로 곤죽이 될 것 같았다.
‘초열지옥 역풍보다 범위는 좁지만, 위력은 비슷한 것 같군.’
이제 고작 한 가지 기술을 사용한 상태였으나, 그는 상대의 수준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루시아는 상당한 수준의 원거리 공격에, 뛰어난 근접 박투 능력까지 갖춘 전천후 헌터.
한정적이지만 탱커 역할도 맡을 수 있어서 프랑스 전선에 나타나기만 하면, 서로 모셔 가려고 난리였다.
물론 지금처럼 헌터끼리의 일대일 대전에서도 걸출한 능력을 발휘했다.
콰아앙! 콰광―!
그녀의 공격은 정말이지 거대한 폭풍과도 같았다.
깃발 창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쉴 새 없이 몰아치자, 도무지 반격할 틈이 없었다.
아예 빈틈이 없지는 않았지만, 노릴 만한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흰 천에서 발생하는 백색 뇌전은 공격과 더불어 방어적 성격도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루시아에게 치명적인 빈틈이 생길 법하면, 그곳에는 어김없이 흰 천이 나타나 공격 시도를 사전에 차단했다.
"언제까지 피하기만 하실 겁니까? 어떤 상황이 와도 제 공격은 멈추지 않습니다. 하앗!"
유효타를 먹이지는 못했으나, 루시아는 유진의 움직임을 거의 따라잡는 중이었다.
그녀는 아마도 이 싸움이 격돌하는 순간 끝나 버리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항상 쫓는 자보다 쫓기는 자의 심리가 불안한 건 당연한 일이니까.
하지만 루시아의 예상과는 달리, 그의 내심은 명경지수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점점 빨라진다. 암흑화를 따라잡고 있어.’
놀랍게도 그녀는 유진의 기척을 대번에 알아채고, 무자비한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사실상 루시아의 속도는 처음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대신 위치를 알아채는 시간이 짧아졌다.
갈수록 출발이 빨라졌기에 점점 따라잡히는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쉬이익―!
결국에 그는 그녀의 공격을 직접 받아 낼 수밖에 없었다.
스이잉! 쩌저저정!
오른손에서 다섯 줄기의 소수혈인을 뽑아낸 블라드 유진은 간결하게 휘둘러 깃발 창을 튕겨 냈다.
그러자 드디어 루시아의 무한 돌진이 멈추는 게 아닌가.
마치 엄청난 충격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제자리에 못 박힌 듯 가만히 서 있었다.
"역시 고작 이런 수준으로는 당신을 상대할 수 없군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그녀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창대를 고쳐 잡았다.
절그럭! 척!
금속끼리 부딪치며 날카로운 소리가 나자, 루시아는 한 발을 뒤로 빼더니 자세를 낮췄다.
"지금부터는 진심으로 가겠습니다. 죽고 싶지 않다면, 당신의 진짜 실력을 보여 주십시오."
터어엉! 콰―직!
지면을 강하게 내리찍어 오른발을 박아 넣은 그녀는 흰 천을 붙잡더니, 그대로 쭉 펼쳤다.
마치 커다란 철궁의 시위를 잡아당기는 듯한 자세였다.
멀찍이 떨어져 건물 벽에 몸을 기대고 있던 전시영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팔짱을 풀고 바로 섰다.
"저 기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