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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블러드-31화 (32/226)

6화

"아니, 이걸 나한테 준다고? SS급이면 진짜 엄청난 건데……."

전시영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블라드 유진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손에는 사이클롭스 로드를 처치하고 얻은 아이템이 들려 있었다.

<아이템 정보>

명칭 : 거인의 발걸음

등급 : SS

방어력 : SS

내구도 : 매우 높음

효과 : 공격 무효화(B급 이하 원거리)

사이클롭스 로드의 가볍고 튼튼한 뼈와 푹신한 가죽으로 제작한 신발. C급 이하의 원거리 공격을 무시함.

아이템 정보를 확인한 전시영의 눈빛은 더욱 이상해졌다.

솔직히 자신이 한 일이라고는 최종 보스의 시선을 끈 것뿐이지 않았던가.

사실상 제대로 된 타격을 단 한 번도 넣지 못했기에, 아이템을 받기가 꺼려졌다.

하지만 묵묵부답인 유진의 입에서 그 이유를 듣는 건 불가능했다.

"이거 진짜 내가 갖는다? 무르기 없어?"

"그래."

"이야! 언제는 자꾸 따라다닌다고 뭐라 하더니, 은근히 즐기는 거 아니야? 이런 거까지 주고……."

그의 담담한 반응에 의심을 거둔 그녀는 신난 표정으로 아이템 정보를 반복해서 읽었다.

그러더니 이내 거인의 발걸음을 신은 채로 거울 앞에서 사뿐거리며 돌아다녔다.

블라드 유진은 그런 전시영을 잠깐 쳐다보았다가, TV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대성체 미궁 공략에 성공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국 헌터계는 대규모화하기 직전의 대성체 미궁을 공략하는 데도 성공했습니다. 양산의 드라코 도무스를 공략한 지, 한 달 만의 쾌거입니다. 연달아 이어진 승전보에 외신들도 한국 헌터계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드라코 도무스 공략 이후로 면역이 된 모양인지, 뉴스 캐스터의 어투는 평온했다.

하지만 좋은 소식을 또 전하게 되어 기쁜 듯, 표정이 매우 밝아 보였다.

사실상 유진과 전시영 단둘이서 공략에 성공한 거였지만, 내용은 한국 헌터계가 한 것처럼 포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인간들 사이에서 명성이 커져 봐야 하등 쓸모가 없는 거였으니까.

‘뉴스는 더 이상 볼 게 없군. 정보창이나 둘러봐야겠어.’

TV에서 시선을 거둔 유진은 홀로그램을 켜서 사이클롭스 로드를 쓰러뜨리고 얻은 것들을 살펴보았다.

<능력치 정보>

이름 : 블라드 유진(Vlad Eugene)

레벨 : 834(봉인율 53%)

등급 : S(Lv. 601~900)

종족 : 뱀파이어

종족 효과 : 강체, 불로불사

엄청난 무력을 자랑하던 최종 보스를 두 마리나 쓰러뜨렸지만, 봉인율은 고작 2%밖에 낮아지지 않았다.

대규모 미궁이 아닌 데다가, 트리 페 디타스를 쓰러뜨리면서 대폭 성장한 탓이었다.

SS급에 오르지 못한 건 아쉬웠으나, 그래도 성과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괜찮은 공격 스킬을 얻은 거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지.’

그는 곧장 새로 얻은 스킬로 시선을 돌렸다.

<종합 스킬 정보 A급>

1. 폭사(A)

2. 초열지옥 역풍(A)

……

<스킬 정보>

명칭 : 초열지옥(焦熱地獄) 역풍(逆風)

등급 : A        위력 : A+

범위 : 직경 50m

사거리 : 시야 범위

재사용 대기 시간 : 5분

소모 자원 : 피의 권능(변경)

효과 : 해당 좌표에 대폭발

폭발을 일으키는 황색 구체를 원하는 위치로 이동시킴. 목표의 체내에서 터트릴 수도 있음.

놀랍게도 초열지옥 역풍은 A급으로 책정되었다.

흡혈로 가져오느라 위력이 줄었을 테니, 원래 S급 이상의 스킬이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아마 유진의 등급이 오르면, S급까지는 무난하게 성장할 것 같았다.

‘위력도 준수하고 무엇보다 원거리라는 게 마음에 드는군.’

전시영의 스킬을 복사해 온 거지만, 양심의 가책 따위는 없었다.

애초에 종족이 다른 데다가, 스킬의 대가는 이미 거인의 발걸음으로 지급했으니까.

이 정도만 해도 뱀파이어 로드의 입장에서는 상당한 아량을 베풀어 준 것이었다.

한창 능력치와 스킬을 확인하고 있는데, 문득 광고로 넘어갔던 TV 화면이 다시 뉴스로 바뀌었다.

[……속보입니다. 스페인의 S급 헌터 루시아 헤레라 레예스가 한국에 전격 입국했다는 소식입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이미 며칠 전에 입국을 마치고 한국에서 활동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그녀가 헌터 협회와 어떤 활약을 벌일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루시아는 스페인이 마기에 완전히 물든 이후, 프랑스로 이동하여 활동하던 헌터였다.

여러 번의 영입 시도가 있었지만, 그녀는 끝까지 프랑스나 이탈리아에 망명하지 않았다.

자국 국토를 회복하기 위해서 프랑스 전선을 전전하며 미궁 정화에 힘을 쓰고 있었다.

그런 세계 최정상의 S급 헌터가 갑자기 한국행 비행기를 탄 것은 꽤 이례적인 일이었다.

한창 거인의 발걸음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던 전시영도 TV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여자가 무슨 꿍꿍이로 한국에……. 설마?"

그녀가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누군가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덜컥!

노크도 잠시, 대뜸 문이 열리는 게 아닌가.

그곳에는 어색한 표정의 아크웰이 큰 키의 여인과 함께 서 있었다.

"아하하! 소, 손님 오셨는데요."

* * *

태양광을 받아 반짝이는 백금발, 차갑고 이지적인 눈빛, 새하얀 피부까지.

스페인의 S급 헌터 루시아 헤레라 레예스는 미인의 조건을 대부분 충족한 사람이었다.

털털하고 약간 남성적인 매력이 있는 전시영과는 완전히 정반대라고 할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루시아라고 불러 주십시오."

놀랍게도 루시아는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게다가 정중하게 고개 숙이는 자세가 전형적인 대한외국인의 모습이었다.

"어? 한국말이 유창하시네요."

"이탈리아어도 할 줄 알지만, 다들 한국어를 쓰시는 것 같아서요."

"한국이니까요. 여기 한국인도 계시고."

아크웰은 손바닥을 펼쳐 전시영을 조심스럽게 가리켰다.

그녀의 괄괄한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지라, 최대한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미 전시영의 심사는 상당히 뒤틀려 있었다.

"위대한 스페인의 S급 헌터께서 별 볼 일 없는 아시아 변방의 소국까지 뭐 하러 오셨을까?"

"당신과 그다지 관계없는 일입니다만. 그나저나 이 여자가 사제관에 있어도 되는 겁니까?"

"난 서울대교구청에 허락을 받았거든?"

루시아가 아크웰을 돌아보며 질문하자, 전시영이 발끈하며 눈을 부라렸다.

아무래도 두 사람은 이미 아는 듯했고, 노골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블라드 유진은 슬쩍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으르렁거리던 전시영과 루시아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찾아온 용건은?"

"아, 그게……."

"나라 잃은 백성이 원하는 게 뭐겠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도와 달라고 하는 거겠지."

"아직 제 말은 시작도 안 했습니다만. 마음대로 넘겨짚지 마시죠."

"그럼 어디 해 봐. 뭐라고 하는지 들어나 보자."

"……."

그녀에게 정곡을 찔린 모양인지, 루시아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오염 지역에 완전히 잠식당한 스페인은 국가로서의 기능을 대부분 상실한 상태였다.

프랑스에 임시 정부가 있긴 했지만, 거기도 혼란한 상황이라 별반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교황청의 지원 덕분에 전선이 유지되고 있을 뿐, 갈수록 전황은 좋지 않아졌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합쳐서 4천 만에 달하는 난민이 생겼는데, 이들을 수용할 공간은 어디에도 없었다.

난민들은 골칫덩이로 전락하여 인간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조차 없이 사는 중이었다.

아마 루시아가 이끄는 스페인―포르투갈 헌터 연합이 발 벗고 나서지 않았다면, 난민들은 전선으로 내몰리고 말았을 것이다.

"한국의 대규모 미궁을 공략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부디 도와주십시오."

척!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루시아는 다시 한번 고개를 깊이 숙이며 준비해 온 말을 늘어놓았다.

유진을 띄워 주는 듯한 미사여구는 전혀 쓰지 않았다.

그저 담백하게 요구 사항만 전달하고 정중한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실제로는 온갖 상황을 상정하여 다양한 제안을 준비해 왔지만, 현관에서 그를 보자마자 생각을 바꾸었다.

자신보다 더욱 차가운 인상과 심연처럼 깊고 어두운 눈빛에 압도당한 것이다.

이런 인물에게 섣불리 물질적인 제안부터 했다간 시작부터 꼬인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

루시아의 말이 끝나자, 사제관 내부에는 살갗이 시릴 듯한 침묵이 흘렀다.

전시영과 아크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유진의 입술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앞으로의 거취가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굳이 거기까지 가야 할 이유를 모르겠군."

블라드 유진은 교황으로부터 대규모 미궁을 공략하라는 밀명을 받고 움직였다.

교황청 외교관 아크웰과 김태호 추기경만이 그 이면에 숨겨진 임무를 알고 있었다.

바로 대규모 미궁에서 성배를 찾는 것.

어쨌거나 표면적으로는 세계 3대 아니, 이제 2대가 된 대규모 미궁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게 정상이었다.

아크웰과 전시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의견에 동조했다.

부정적인 답변을 들었지만, 루시아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국토를 수복할 수 있게 도움을 주신다면, 에스파냐 임시 정부 차원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겠습니다. 그 어떤 요청이든 완벽하게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는데."

스페인의 임시 정부라고 해 봤자, 헌터들을 이용하여 돈을 버는 작은 조직에 불과했다.

게다가 허울뿐인 애국심으로만 유지할 수 있는 조직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스페인 헌터들의 이탈은 날이 갈수록 가속화되고 있었다.

루시아라는 걸출한 S급 인물이 중심을 잡아 주었기에, 지금껏 임정에 헌터들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런 힘없는 조직이 던지는 공수표를 대체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모양인지, 루시아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당연히 믿기 힘드시겠지요. 그러나 말로만 약속한다는 게 아닙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착수금으로 드리겠습니다."

스윽!

외투를 벗은 루시아는 몸가짐을 바로 한 채,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전시영이 얼굴을 붉히며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 뭐라고? 설마……. 요즘 시대에 순결 뭐 그딴 건 아니겠지?"

"대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겁니까?"

찌릿 하는 눈빛으로 전시영을 째려본 루시아는 품속에서 작은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그녀는 바닥에 비단을 깔아 놓은 뒤, 꽤 큼지막한 물건을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오래된 작은 책자였지만, 표지만 봐도 뭔가 비범한 느낌의 아이템이었다.

"돈이나 귀중품 같은 건 별로 필요 없으실 것 같아서, 러시아에서 얻었던 아이템을 가져왔습니다."

"러시아라면……. 리고르 아스페라?"

예전의 기억이 떠오른 모양인지, 전시영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인간이 최초로 공략에 성공한 대규모 미궁 리고르 아스페라.

그곳의 보물 창고에서 루시아는 무기나 방어구 대신, 볼품없는 책자를 선택했다.

특별한 스킬을 익힐 수 있는 아이템인 줄 알았지만, 이 물건의 정체는 그보다 더 대단한 거였다.

루시아는 검은색 표지의 책자를 양손으로 살짝 덮으며 천천히 앞으로 밀었다.

"이것은 계시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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