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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블러드-29화 (30/226)

4화

희미한 미소를 지은 유진은 오른손에 소수혈인의 기운을 끌어 올려 하나로 합치기 시작했다.

스이잉! 치잉―!

프라고르와 아라고르의 두꺼운 목덜미와 몸통을 보아하니, 손톱에만 적용해서는 가죽도 꿰뚫지 못할 것 같았다.

적어도 평소보다 세 배 이상은 길어져야 제대로 된 타격을 줄 수 있을 터였다.

‘3.5m가량 되는군. 레벨과 등급이 오른 영향인가.’

우우웅!

성장한 소수혈인의 칼날이 기분 좋은 울림을 만들어 냈다.

피의 권능을 밀어 넣을 수 있는 한계가 이전보다 늘어났다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가자. 녹턴."

"이히히힝!"

소수혈인을 오른쪽으로 크게 떨친 그는 왼손으로 녹턴의 갈기를 살짝 잡아당겼다.

그러자 공중에 둥둥 떠 있던 유령 군마가 투레질하며 무시무시한 질주를 개시했다.

두두두두두!

희미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허공을 질주한 녹턴은 프라고르의 근처에서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금류처럼 맴을 돌았다.

프라고르는 맨 처음 대성체 미궁 밖으로 나와 육각 기둥을 옮기는 중인 사이클롭스 로드.

두 번째로 기어 나온 아라고르보다는 이 녀석을 먼저 처치해야 했다.

그래야 육지로 옮겨진 육각 기둥이 대규모 미궁으로 거듭나는 참사를 차단할 수 있으니까.

"크와아아악!"

후우우우웅!

그가 접근하여 공격할 것처럼 움직이자, 프라고르는 대뜸 육각 기둥을 휘둘렀다.

지면에서 공격하는 전시영보다 블라드 유진이 더 위협적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녹턴을 조종하여 날아드는 육각 기둥을 간단히 피해 내기는 했지만, 그는 꽤 먼 곳까지 튕겨 나가고 말았다.

콰우우우우!

‘후폭풍이 엄청나군. 만만치 않은 놈이야.’

그저 허공을 격하는 것만으로도 이런 효과를 낼 수 있다니, 금방 대규모 미궁이 될 거라는 메시지가 거짓은 아닌 듯했다.

후우우우웅!

프라고르의 공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녀석은 기회를 노리고 달라붙는 유진을 경계하며 연신 육각 기둥을 휘둘렀다.

하지만 복부와 다리 쪽에서 올라오는 뜨끔한 통증 때문인지, 이내 유진에게 고정하고 있던 외눈을 돌렸다.

"으하하하! 이제야 제대로 먹히는군! 내 불맛이 어떠냐?"

화르르르륵!

아라고르의 시선을 끌던 전시영이 이쪽의 기회를 포착하자마자, 공격 방향을 바꾼 것이다.

푸른 화염이 하반신을 달구자, 프라고르는 곧장 그녀를 향해서 육각 기둥을 휘둘렀다.

후우우웅! 쿠화아아앙!

웬만한 빌딩 크기의 물체가 지면에 쑤셔 박히자, 무시무시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호위를 자처했던 형제, 아라고르마저 휘청거릴 정도로 엄청난 위력이었다.

하지만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블라드 유진은 예외였다.

"기회다. 녹턴."

"이히히힝!"

두두두두두!

불타는 갈기를 잡아당기자, 기회를 엿보던 녹턴은 쏘아진 포탄의 탄환처럼 맹렬하게 돌격했다.

마치 허공에 한 줄기 붉은 선이 쭉 그어진 것 같았다.

촤학! 푸쉬―익!

가공할 속도에 힘입은 소수혈인은 시뻘건 칼날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파묻혔다.

이미 그의 공격이 끝났는데도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덜컥!

공격 중에 뭔가 멈칫하는 듯한 유진의 움직임 직후, 그대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사이클롭스 로드의 목을 절반쯤 베고 지나간 그는 문득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소수혈인의 붉은 기운이 힘없이 점멸하더니, 이내 자취를 감추는 게 아닌가.

‘하마터면 위험할 뻔했다. 적절한 순간에 끊어 버리지 않았다면, 팔이 떨어져 나갔을 테지.’

이제껏 블라드 유진은 소수혈인이 뚫지 못하는 물질을 본 적이 없었다.

삼두마룡 트리 페 디타스조차 길이가 부족하여 완벽하게 잘라 내지 못했을 뿐이지, 칼날 자체는 충분히 잘 들어갔다.

대규모 미궁의 최종 보스도 그랬는데, 놀랍게도 프라고르의 목뼈가 소수혈인을 저지해 냈다.

물론 조금도 파고들지 못한 건 아니었다.

저항력이 엄청나긴 했지만, 분명히 그의 손에는 뼈를 뚫고 들어가는 감각이 남아 있었다.

그저 녹턴을 타고 고속 이동 하는 중이라, 절삭을 다 마치지 못했을 뿐.

"봉인 탓에 등급이 낮아서 그럴 수도……."

목에 큼지막한 상처가 생겼지만, 프라고르는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왼손으로 상처를 꾹 누른 다음, 바닥에 내리찍었던 육각 기둥을 오른쪽 어깨에 척 걸칠 뿐이었다.

그러고는 시뻘겋게 물든 외눈으로 저만치 멀어진 블라드 유진을 주시했다.

한데, 상당한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그의 육감을 자극하는 뭔가가 있었다.

‘이 느낌은…….’

섬뜩한 감각이 느껴지자마자, 유진은 잽싸게 녹턴의 갈기를 잡아당겼다.

두두두두! 쉬이익!

유령 군마가 마치 곡예를 하듯, 빠르게 고도를 높이는 순간이었다.

피유우우웅! 츠츠츠츠츠!

엄청난 굵기의 붉은 광선이 프라고르의 눈에서 발출되더니, 허공을 우악스럽게 훑었다.

일순간 공기가 맹렬하게 달아오르며 팽창을 거듭했고, 이온화한 가스가 사방으로 마구 쏘아졌다.

다행히 사이클롭스 로드가 쏘아 낸 광선은 어디에도 적중하지 않고 높은 곳으로 쭉쭉 올라가기만 했다.

애초에 그를 노린 공격이었기에, 그런 결과가 발생한 것이다.

츠이이이이!

"……."

블라드 유진은 반쯤 녹아내려서 피부를 자극하고 있는 자신의 의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초고온으로 달궈진 입자가 마치 항성풍(恒星風)처럼 쏘아져 오른팔을 덮친 결과였다.

물론 기체는 열 전달력이 낮아서 금방 힘을 잃고 미약한 대류 현상만을 남겼다.

덕분에 고작 팔에 화상을 입는 정도로 끝났지만, 붉은 광선의 위력은 굉장했다.

정통으로 맞는다면, 무지막지하게 강력한 육신을 지닌 그라도 낭패를 볼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스으읏!

그가 피의 권능을 슬쩍 끌어 올리자, 피부가 꿈틀거리더니 오른팔에 가득하던 화상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목을 꾹 누르고 있던 프라고르 또한 태연하게 손을 떼는 게 아닌가.

어느새 소수혈인이 가한 상처는 굵직한 흉터만 남았을 뿐, 지혈이 다 된 상태였다.

삼두마룡 만큼은 아니지만, 사이클롭스 로드도 상당한 회복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기세에 눌릴 만도 하나, 블라드 유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저 무심한 눈빛으로 먼지구름이 가득한 지면만 살필 뿐이었다.

"저기 있군."

이윽고 무언가를 발견한 그는 슬그머니 고도를 낮췄다.

바닥에 지름이 100m가량 되는 거대한 구덩이가 생길 정도로 강력한 공격이 펼쳐졌지만, 전시영은 용케 살아남았다.

"콜록! 콜록!"

흙먼지에 파묻혀 있던 그녀는 격하게 기침을 해 대며 바깥으로 빠져나오는 중이었다.

블라드 유진은 그런 전시영의 근처로 날아가며 말을 걸었다.

"시선을 좀 끌어 줘야겠어."

"케헥! 우웩! 아니, 간신히 살아 나왔는데 괜찮냐는 말보다 그게 먼저야?"

"공략이 우선이지 않나?"

"어……. 그렇긴 한데, 그래도 전우 걱정 좀 하라고!"

"꽥꽥 소리 지르는 걸 보니, 멀쩡한 모양이군. 붉은 광선의 위력이 상당하니, 주의하면서 시선을 끌어."

"뭐? 꽥꽥?"

두두두두두!

전시영이 반문했으나, 이미 유진은 녹턴의 희미한 말발굽 소리만 남기고 하늘 높이 올라간 뒤였다.

"와! 씨. 진짜 개 어이없네? 혼자서 두 마리의 시선을 다 끌란 말이야?"

그녀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블라드 유진은 전시영에게 자세한 설명을 해 줄 수가 없었다.

그만큼 상황이 급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칠지만 똑똑한 인간이니, 금방 알아챌 테지.’

그녀가 움직이는 모습을 하늘에서 확인한 유진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피의 권능을 끌어올렸다.

전시영은 두 마리의 최종 보스를 향해서 연속으로 스킬을 날리며 그의 반대편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아예 녹턴이 날아다니는 하늘을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저러면 에너지가 고갈되어 금방 지칠 텐데도, 유진의 말을 알아듣고 승부수를 띄운 것이다.

‘한 번에 처치하는 건 불가능하다. 욕심을 버려야 해.’

그런 생각을 하며 최종 보스들을 뒤쫓는데, 아래쪽에서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초열지옥(焦熱地獄). 십지폭쇄(十指爆鎖)!"

쿠콰콰콰콰콰쾅!

열 개의 노란 구체가 허공에 무작위로 나타나며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좌표를 정확히 계산하지 않고 쓴 만큼, 스킬이 터지는 위치는 중구난방이었다.

하지만 허공을 수놓은 맹렬한 폭발은 사이클롭스 로드의 시선을 확실히 사로잡았다.

아라고르의 외눈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전시영에게 향하는 순간, 블라드 유진은 녹턴과 하나 되어 달려들었다.

‘지금이다.’

츠츠츠츠츠!

[EX급 스킬 ‘천계도살검(天界屠殺劍)’이 시전되었습니다.]

[‘사이클롭스 로드 아라고르’가 끝없는 공포를 느낍니다.]

[아라고르의 파괴 광선, 라베스 루멘(lābes lūmen) 스킬이 취소됩니다.]

전시영이 프라고르의 시선을 잡아 두는 동안, 유진은 공격 방향을 잽싸게 바꿨다.

어차피 둘 중 하나를 처치할 수 있다면, 대군주의 역병에 걸리지 않은 녀석을 보내 버리는 게 옳은 선택이었으니까.

츠팟―!

허공에 그려진 붉은 선 위로 보랏빛 섬광이 더해졌다.

우중충한 색으로 번들거리는 보랏빛 마기가 사이클롭스 로드의 목덜미를 꿰뚫은 것이다.

일전에는 엄청난 저항력을 느낀 유진이 강제로 소수혈인을 끊어 버렸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마치 도화지를 가로지르는 화가의 붓처럼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쑤컹!

5m 길이의 암자색 칼날은 전시영에게 집중하던 아라고르의 목뼈를 가볍게 갈라 버렸다.

아무런 저항감이 없는 듯, 블라드 유진은 녹턴의 속도를 조금도 줄이지 않았다.

취이이이이!

천계도살검이 훑고 지나가자, 붉은 혈액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와 대지를 적셨다.

이윽고 대각선으로 갈라진 목이 어긋나며, 녀석의 머리통이 주르륵 떨어져 내렸다.

슈우우우! 쿠우웅!

사이클롭스 로드의 눈꺼풀이 몇 번 깜빡깜빡 열렸다 닫히더니, 이내 반쯤 감긴 채로 움직임을 멈췄다.

이윽고 반가우면서도 뭔가 아쉬운 메시지가 유진의 눈앞에 불쑥 떠올랐다.

[성체 미궁의 최종 보스 ‘사이클롭스 로드 아라고르’ 처치!]

[하지만 아직 공략은 끝나지 않았으니, 집중하는 게 좋을 겁니다.]

홀로그램의 글귀대로 아라고르의 명줄은 끊어 낼 수 있었지만, 아직 쌍둥이 프라고르가 남아 있었다.

자신의 형제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지만, 녀석은 원흉인 그를 뒤쫓지 않았다.

놀랍게도 원래 자신의 목표였던 전시영을 향해서 맹렬하게 달려든 것이다.

그러더니 육각 기둥을 강하게 휘둘러 그녀의 몸을 짓이겨 버리려 했다.

슈후우우웅!

"으아아! 제기랄!"

어마어마한 속도로 휘둘러진 검은 기둥이 전시영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온 힘을 다해서 몸을 날리고 있었지만, 분노한 프라고르의 맹추격을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사이클롭스 로드의 공격에 적중당하려는 순간, 되레 블라드 유진에게는 완벽한 기회가 생겼다.

분노에 눈이 멀어 큰 동작을 취한 지금이라면, 목덜미를 확실하게 썰어 버릴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다면 시선을 끌던 전시영이 육각 기둥에 적중당하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쯧! 귀찮게 되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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