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느긋하게 해안가를 정리하고, 대성체 미궁으로 길을 뚫으려 했던 계획은 전면 수정되었다.
성체 미궁이 성장하여 대규모화하는 걸 막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공략에 들어가야 했다.
"무시무시하군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니……."
"몇 년만 더 지났어도 한국은 깡그리 사라져 버렸을 거야. 대규모 미궁이 되면, 제주도에서 본토까지 충분히 파편을 날릴 수 있을 테니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요. 몇 달 동안 그저 손 놓고 있었더라면, 대규모 미궁이 둘이나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대규모 미궁이 제주도에만 생기겠나? 대성체 미궁이 있는 곳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겠지. 미궁에서 흘러나오는 마기는 상호 작용을 하니까."
전시영의 말대로 제주도에 대규모 미궁이 생긴다면, 본토에도 연쇄 반응이 일어났을 터였다.
미래를 완벽하게 예측할 수는 없지만, 대성체 미궁이 우르르 대규모로 성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녀의 말에 조지훈 전략부장은 크게 주억거리며 지도를 펼쳤다.
"어쨌거나 사전 작업은 거의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제 대성체 미궁만 치면 되는군요."
"당신들은 배 타고 멀리 떨어져 있어."
"그리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괜히 해안가에 있다가 돌아다니던 몬스터에게 당하지나 말고."
"예, 당연히 그래야지요."
조지훈은 곧장 무전기를 뽑아 들고는 어디론가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정박하고 있던 배에 얼른 탈 것을 보내 달라는 요청이었다.
이윽고 전기 카트 몇 대가 도로 위의 장애물을 피해서 올라오자, 조지훈은 그걸 타고 제주항으로 돌아가 버렸다.
블라드 유진과 전시영을 보조하기 위해 왔다고는 하나, 아무런 능력도 없는 전략부장이 할 일은 없었다.
그저 호위로 따라온 군인들과 함께 배에 실린 식량이나 관리하는 게 전부였다.
"어휴! 진작 좀 돌아가라고 말해 주지."
조지훈은 괜히 도롯가에 서 있는 전시영을 돌아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 * *
블라드 유진은 자신을 따라 움직이는 전시영을 바라보았다.
제주도의 대성체 미궁은 혼자서 공략해 보려고 했는데, 그런 계획은 초장부터 틀어지고 말았다.
이 여자가 정말이지 끈질기게 그의 뒤에 따라붙었기 때문이었다.
혼자라면 녹턴을 타고 올 수도 있었겠지만, 전시영과 조지훈이 함께하는 바람에 배를 이용해야 했다.
‘실력은 나쁘지 않으니 뭐라도 도움이 되겠지.’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사실상 누가 함께하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유진은 양산의 드라코 도무스와 비슷한 크기까지 성장한 대성체 미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크기는 비슷했으나, 확실히 축적된 마기의 양은 훨씬 적어 보였다.
봉인율이 10%나 낮아지면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으니, 혼자서도 공략이 가능할 것 같았다.
츠츠츠츠츠!
그런데 문득 대성체 미궁의 거대한 육각 기둥에서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어? 저거 왜 저러는 거지?"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전시영이 도로를 따라서 달려와 그의 곁에 멈춰 서며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대한 육각 기둥에서 무언가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쿠구구구구!
"이, 이게 대체……."
산전수전을 다 겪은 S급 헌터인 전시영조차도 처음 보는 장면이라, 어안이벙벙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쿵! 쿠웅!
놀랍게도 육각 기둥에서 거대한 형상이 빠져나와 한라산 중턱에 발을 내려놓는 중이었다.
불그스름한 피부에 우락부락한 근육으로 뒤덮인 몸체, 정수리에 난 뭉툭한 뿔, 미간 쪽에 달린 커다란 외눈까지.
신화에나 나올 법한 사이클롭스와 흡사한 외모의 거인이 육각 기둥을 통해서 걸어 나왔다.
아마 저 녀석이 대성체 미궁의 보스이리라.
이는 이제껏 단 한 번도 보고된 적이 없는 현상이었다.
육각 기둥을 통해서 바깥으로 빠져나오는 건 일반적인 몬스터뿐이었으니까.
"저, 저게 미궁에서 생성된 부하 몬스터라고? 저렇게 큰 녀석이 어떻게 일반 몬스터야?"
전시영의 말대로 저 정도 크기의 녀석이 최종 보스가 아닐 확률은 거의 없었다.
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외눈 거인을 주시하는 유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혹시 왜 저러는지 알아?"
"……모른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평온한데?"
"어디에 있든 어차피 똑같은 몬스터. 처치해 버리면 그만이지."
"쳇! 우문현답이네."
간결한 대답에 전시영은 작은 투덜거림을 내뱉었다.
순간적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의 심지를 닮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차라리 나와 주면 우리에겐 고마운 일이지. 마기로 가득한 미궁 내부에서 싸울 필요가 없으니까."
"난 뭘 하면 되는데?"
"지난번처럼 시선 끌어. 녹턴."
그녀의 역할을 알려 준 블라드 유진은 나직한 목소리로 녹턴을 불렀다.
오랜만에 동반자 정보창 밖으로 나온 녀석은 신기하다는 듯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호출하자, 작은 목소리도 곧장 알아듣고 잽싸게 날아와 옆에 섰다.
유진은 그런 녀석을 타고 사이클롭스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윽고 반투명한 홀로그램 화면이 불쑥 떠올랐다.
놈에게 가까이 다가가니, 미궁 내부에 있을 때와 같은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성체 미궁의 최종 보스 ‘사이클롭스 로드 프라고르’가 이주를 결심했습니다.]
[최종 보스의 이주를 차단하지 못한다면, 근시일 내로 대규모 미궁이 생성될 겁니다.]
‘이주?’
프라고르는 대뜸 자신이 빠져나온 육각 기둥을 짊어지더니, 북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쿠웅! 쿵!
딱 전시영이 서 있던 곳이라, 녀석이 도망갈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쿠화아아아앙!
이윽고 그녀의 초열지옥 역풍 스킬이 터졌다.
공간을 초월한 노란 구체가 목표의 몸속에서 폭발하려 했지만, 사이클롭스 로드는 한 걸음 물러나는 거로 간단히 피해 버렸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공격을 그저 육감만으로 회피한 것이다.
블라드 유진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전투를 지켜보았다.
‘덩치가 커서 굼뜰 것 같지만, 의외로 빠르고 감이 좋아. 재미있는 녀석이다.’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전시영은 곧장 오른쪽으로 달려가며 확실히 시선을 끌었다.
자신의 역할은 최종 보스를 쓰러뜨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한 것이다.
놈이 자신에게 등을 보이자, 유진은 눈을 빛내며 소수혈인을 시전했다.
스이잉! 두두두두두!
손끝에서 불쑥 튀어나온 시뻘건 기운이 사이클롭스 로드의 심장이 있을 법한 위치를 정확하게 꿰뚫었다.
사람과 비슷하게 생긴 녀석이니, 왼쪽 견갑골 아래를 한번 노려본 것이다.
그런데 프라고르가 어깨에 짊어진 육각 기둥을 뒤로 강하게 젖힘으로써 공격을 간단히 막아 내는 게 아닌가.
프시이잉―!
다섯 줄기의 붉은 칼날은 육각 기둥만을 꿰뚫고 말았다.
미궁으로 가는 차원문인 육각 기둥을 들이밀었으니, 허공을 찌른 것과 다름없는 결과가 나왔다.
"이히히힝!"
슈우우우웅!
공격이 실패한 직후, 블라드 유진은 곧장 녹턴의 갈기를 잡아당기며 수직으로 솟구쳐 올랐다.
프라고르가 대뜸 육각 기둥을 휘두르며 반격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기둥의 표면은 미궁의 출입구였으나, 모서리 부분만은 다른 듯했다.
쿠후우우우웅!
빗나간 육각 기둥이 지면에 쑤셔박히자, 엄청난 위력의 충격파가 퍼져나갔으니까.
순간적으로 크게 피어오른 먼지구름이 걷히고 나니, 바닥에 거대한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확실히 감이 좋아. 천계도살검을 신중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겠어."
천계도살검은 지속 시간이 고작 3초인 데다가, 재사용에 일주일이 걸리는 스킬이었다.
만에 하나 빗나가기라도 한다면, 큰 낭패로 이어질 터.
프라고르의 움직임을 보니, 완벽한 순간이 왔을 때만 사용해야 할 것 같았다.
문제는 그런 기회를 어떻게 만드느냐였다.
‘일단 좀 약화해 놓고 싸워야 기회를 창출할 수 있겠지.’
[‘권능 폭발’로 인해 ‘대군주의 역병’이 SS급으로 적용됩니다.]
츠츠츠츠츠! 촤라라라락!
유진이 팔을 좌우로 펼치자, 시커먼 박쥐 형상의 마기가 무수히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권능 폭발로 인해 강화된 대군주의 역병이 펼쳐진 것이다.
박쥐들은 프라고르의 머리 쪽으로 날아가서는 하나뿐인 눈 주변에서 맹렬하게 날갯짓을 해댔다.
그러자 사이클롭스 로드가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며 괴로워했다.
"그우어어어!"
아무래도 체력이 25%나 감소한 상황이니, 극도의 무기력증을 느낄 터였다.
게다가 시력 의존도가 높은 녀석이라, 시야가 가려지는 게 매우 불편한 모양이었다.
녀석은 박쥐들을 내쫓으려고 손을 마구 휘둘렀다.
터어엉!
그러다가 자신의 얼굴에 따귀를 날리기도 했다.
"초열지옥. 연쇄역풍!"
콰과과과광!
그가 대군주의 역병으로 기회를 만든 덕분에 전시영의 공격은 흐름을 타고 있었다.
무수히 날아든 박쥐로 인해 시야가 방해되다 보니, 프라고르의 뛰어난 감각이 일시적으로 무력화된 듯했다.
그녀의 초열지옥 역풍을 육감만 믿고 피하는 모습은 더 이상 보여 주지 못했다.
전시영은 무방비 상태의 사이클롭스 로드에게 무차별 공격을 퍼부었다.
더불어 기회를 포착한 블라드 유진도 잽싸게 전투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최종 보스 프라고르의 대응은 만만치 않았다.
"크와우와!"
녀석은 육각 기둥을 바닥에 내리찍어서 세우더니, 안쪽으로 팔을 쑥 집어넣었다.
뭔가를 찾는 듯 잠시 뒤적거리던 사이클롭스 로드는 이내 뒤로 잽싸게 물러났다.
그러자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쿠우웅! 쿵!
난데없이 그곳에서 프라고르와 똑같이 생긴 녀석이 불쑥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하늘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블라드 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고도를 낮췄다.
‘최종 보스가 두 마리?’
[성체 미궁의 최종 보스 ‘사이클롭스 로드 아라고르’가 형제의 이주를 돕기 위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생긴 모습을 보니, 저 두 녀석은 쌍둥이인 듯했다.
"쿠오오오오!"
육각 기둥을 들지 않은 아라고르는 괴성을 지르며 흉포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형제를 경호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곤란하게 되었군. 이러면 한 녀석은 천계도살검 없이 쓰러뜨려야 한다는 소린데……."
고작 3초의 지속 시간 동안, 두 사이클롭스 로드를 모조리 처치하는 건 요원한 일이었다.
놈들이 공손하게 목을 늘어뜨리지 않는 한,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이클롭스 로드들을 공략할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녀석들이 기어 나온 곳은 대규모 미궁이 아니라, 그 전 단계에 불과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블라드 유진은 혼자가 아니었다.
이런 곳까지 따라온 전시영이 매우 귀찮았지만, 지금은 나름 괜찮은 조력자였다.
그가 한 녀석을 상대하는 동안, 그녀가 충분히 시선을 끌어 줄 수 있으니까.
‘상대가 강력한 만큼 봉인율도 낮아질 테니, 나한테는 좋은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