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정현철의 차를 탄 블라드 유진은 한국 헌터 협회 건물 지하 주차장에서 내렸다.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으로 이동한 그는 곧장 협회장실로 들어갔다.
최근 헌터 협회 주변에는 기자들이 쫙 깔려 있었기에, 협회장을 만나려면 이런 식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는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도 협회장을 찾아갈 수 있었지만, 일단은 인간들이 하자는 대로 따라 주기로 했다.
똑! 똑! 덜컥!
정갈하게 두 번 노크하고 곧장 문을 연 정현철은 유진이 먼저 들어갈 수 있게 옆으로 비켜섰다.
그는 고개를 살짝 까딱인 후, 안으로 거침없이 진입했다.
"아, 오셨습니까?"
그러자 처음 보는 중년 남자와 안지홍이 소파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우락부락한 덩치에 큼지막한 대검을 멘 독특한 외견의 안지홍과는 달리, 중년 남자의 인상은 평범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국 헌터 협회장, 이상식입니다. 진작에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늦어서 죄송합니다."
"……서로 원하는 걸 얻자고 제안한 일인데, 미안할 거까지야."
"너그럽게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식 협회장의 태도는 정현철과 마찬가지로 초지일관 깍듯했다.
각 나라에서 헌터 협회가 갖는 위상을 생각하면, 웬만한 사람에게는 고압적으로 나와도 할 말이 없었다.
그만큼 헌터들은 인간 생존에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말았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은 이제껏 그 어떤 헌터도 보이지 못한 업적을 세운 자가 아니었던가.
미궁 공략대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혼자 이룩한 거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그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시도조차 못 해 볼 위업이었으니까.
헌터 업계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자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상식은 유진에게 자리를 권하며 슬쩍 운을 뗐다.
"이건 블라드 유진 님의 보상안과 요청하셨던 자료입니다. 한번 보시죠."
스윽!
그가 서류를 천천히 넘기자, 협회장은 곧장 설명을 시작했다.
"협회에서는 미궁 정화에 도움을 준 타국 헌터들에게 소정의 보상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바티칸 시국에서 오신 유진 님께도 당연히 적용되는 규정이지요."
"어떻게 줄 텐가."
"당연히 전액 현금이고 면세 혜택도 있습니다. 계좌로 곧장 보내 드리겠습니다."
"계좌가 없다면?"
"해외 계좌라도 상관없……. 아니, 이 자리에서 곧장 한국 계좌를 만들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대처가 마음에 드는군."
그는 교황청 지하에서 천 년 만에 깨어난 존재.
태어났다는 기록이나 신분증, 경제 활동을 한 흔적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했다.
이상식 협회장은 유진이 교황청의 비밀 병기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곧장 말을 바꾸었다.
불현듯 상대가 원하는 걸 깨닫고 그대로 실행에 옮긴 것이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어째서 한국 헌터 협회장 자리를 꿰차고 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물론 피의 군주인 그에게 인간의 돈은 별 필요 없는 것이었다.
그냥 준다니까 받아들였을 뿐.
협회장은 그런 블라드 유진의 내심은 짐작지도 못한 채, 진지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였다.
"보상안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다음은 대성체 미궁에 관한 정보입니다."
대성체 미궁이란 파편이 아니라, 성체 규모의 미궁을 생산하는 미궁이었다.
대규모, 대성체, 성체, 파편 순으로 작아지는 것이다.
이상식은 그가 잘 볼 수 있도록 탁자 위에 큼지막한 사진을 쭉 깔아 주었다.
그러고는 지도를 펼쳐 한 지점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오래전부터 존재해 온 대규모 미궁은 아니지만, 이곳도 만만치 않습니다. 만약 10년 전이었다면, 아마 4대 미궁과 비슷한 수준으로 취급되었을 겁니다."
"제주도로군."
"그렇습니다. 바다 때문에 미궁의 파편이 퍼져 나가지는 못했지만, 대신에 엄청난 양의 마기가 내부에 축적된 상태지요. 아마 유진 님께서 만족할 만한 수준일 겁니다."
양산의 드라코 도무스를 공략한 직후, 블라드 유진은 안지홍에게 한 가지 요청을 했다.
이와 비슷한 수준의 미궁을 찾아 달라는 내용이었다.
한국 헌터 협회에 요구했으니, 당연히 결과는 자국 내부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본 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안지홍이 살짝 반색하며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럼 다음 목표는 여기로 하시는 겁니까?"
"사진만 봐서는 알 수 없지."
"물론입니다. 어차피 공략대가 회복되고, 국내가 안정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그때까지 확실한 정보를 가져오겠습니다."
이상식 협회장이 일목요연하게 정리했지만, 블라드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지원은 필요 없다."
"예? 아무리 그래도 3대 미궁에 준하는 곳입니다. 공략대를 꾸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필요한 게 있으면 나중에 연락하지."
"……알겠습니다."
순간적으로 이상식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수긍했다.
현 세태에서 갑은 한국 헌터 협회가 아니었다.
혼자서 양산까지 길을 뚫고 드라코 도무스 공략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유진이었지.
"제주도에 다녀올 동안, 모든 요구 사항을 확실히 이행하도록."
"예!"
이상식 협회장의 각 잡힌 대답을 들은 그는 서류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할 말은 다 끝났다는 의미였다.
소파에 앉아 있던 이상식과 안지홍, 정현철은 동시에 일어서며 그를 배웅해 주려 했다.
정현철은 올 때 그랬던 것처럼 블라드 유진을 명동성당까지 태워다 줄 작정이었다.
"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그런데 문득 협회장실 바깥에서 소란이 일더니, 굉음과 함께 문이 터져 나가는 게 아닌가.
콰아아앙!
"여! 어딜 간다고?"
* * *
"음. 이거 맛있네. 새로 나온 맛인가 봐. 그쪽도 먹어 볼래?"
명동성당 사제관 가장 안쪽 방에는 불청객이 찾아와 있었다.
불청객의 정체는 한국의 S급 헌터, 미치광이 방화광이라 불리는 전시영.
그녀는 각양각색의 젤리를 손가락으로 튕겨서 입 속에 집어넣는 중이었다.
블라드 유진은 그런 전시영을 흥미로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한량처럼 보이는 건 둘째치고, 저 괴상한 자세로 젤리를 던져 먹는 게 엄청난 묘기임은 확실하니까.
"별 이상한 게 꼬여 버렸군."
"이상하다니! 목숨을 걸고 함께 싸운 전우끼리 너무한 거 아니냐?"
그녀는 식탁 의자에 앉아 뒤로 몸을 눕힌 채, 두 개의 의자 다리로만 까딱거리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저 상태로 젤리를 높이 튕겨 받아먹고 있었으니, 천 년 묵은 뱀파이어의 눈에도 신기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눈빛도 잠시, 그는 허공으로 튀어 오른 젤리를 낚아채며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탁!
"사제관에 외부인이 들어오는 건 금지되어 있을 텐데. 얼른 나가."
"그쪽도 어차피 외부인 아닌가? 교황청 사람이긴 해도, 사제가 아닌 거로 알고 있는데 말이지. 서울대교구청에 다 알아봤다고."
"어쨌거나 이곳은 내 영역이다.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
"그렇게 나오실 줄 알고, 김태호 추기경한테 출입 허가서를 받아 왔지."
유진이 축객령을 내리자, 전시영은 청바지 뒷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러고는 경망스럽게 팔랑거렸다.
척!
종이를 펼쳐 읽어 본 그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사제관 출입 허가서 같은 게 존재할 리가 없었지만, 이 문서는 김태호 추기경이 쓴 게 맞는 것 같았다.
"그러게. 협회에서 집 준다는 걸 왜 거절해? 어련히 알아서 한적한 곳에다가 딱 만들어 줄 텐데. 어차피 양산 근처에는 빈집 천지일 거 아니야."
"시끄럽군. 계속 떠들면 강제로 끌어내겠다."
"전우끼리 왜 이러시나? 난 어차피 소속도 없으니까, 같이 역경을 헤쳐 나가 보자고. 제주도 간다고 그랬지? 나도 데려가."
전시영은 손톱만 한 젤리를 톡 튕겨서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날름 받아먹었다.
그러더니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에라이! 콧물 맛이네. 냠냠."
아크웰을 내보냈더니 웬 이상한 여자가 거머리처럼 들러붙었다.
협회 측에서도 어쩌지 못했던 모양인지, 전시영은 블라드 유진을 졸졸 따라다녔다.
처음엔 귀찮기 그지없었으나, 어느 순간부터는 나름 괜찮기도 했다.
정윤규 교수의 지식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헌터계의 속사정 같은 것을 아무렇지 않게 풀어 놓았으니까.
아마 어느 곳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았기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데 제약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마 한국 내에서도 그렇겠지만, 앞으로 전 세계가 당신을 주목할 거야."
"왜지? 뉴스에서는 그저 추측 기사밖에 못 내고 있던데."
"일단 한국 혼자 힘으로 대규모 미궁을 정화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돼. 그럼 공략대원 중에서 미친 실력자가 있다는 소리잖아?"
"나름대로 일리 있는 말이로군."
"끽 해 봐야 드라코 도무스에 들어간 헌터는 33명이야. 근데 거기서 32명은 이미 실력이 다 검증되었잖아. 그럼 남은 하나의 변수는 뭐겠어?"
"……."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여자는 일반적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정보를 가진 데다가, 헌터계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유진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은 아크웰 같은 감정 능력자가 아니라, 전시영처럼 이쪽 세계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인간 중에서는 무력도 꽤 출중하니, 원래의 힘을 찾을 때까지 공략 보조 인원으로 써먹을 만했다.
‘이야기하는 게 재밌긴 하군.’
대답은 거의 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그 사실을 전시영도 아는 모양인지, 유진이 흥미 있어 할 만한 이야기를 종종 해 주었다.
쏴아아아아!
새하얀 물거품이 뱃전에 닿아 부스러지자, 그는 물끄러미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내륙에서만 살았던 1천 년 전에는 결단코 보지 못했던 광경이라, 꽤 보는 맛이 있었다.
이윽고 물안개가 걷힐 때쯤, 누군가가 유진과 전시영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의 의전을 전담으로 맡다시피 한 헌터 협회의 미궁 전략부장 조지훈이었다.
호리호리한 체형에 얍삽해 보이는 염소수염이 특징적인 중년 남자.
별로 좋지 않은 인상이었지만, 블라드 유진은 인간이 어떻게 생겼든 아무런 감흥도 없는 존재였다.
뭐하러 왔냐는 시선을 던지자, 조지훈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거의 도착했습니다. 앞에 보이는 저 섬이 바로 제주도입니다."
"……사진과 전혀 다르지 않나."
"지난번에 보셨던 건 몇 달 전의 위성 사진입니다. 최근에 마기가 급속도로 쌓여서 이런 모습이 된 듯합니다."
제주도는 미궁에 잠식되어 온통 시커먼 육각 기둥이 빽빽하게 둘러쳐진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해안가에 그런 미궁의 입구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저 멀리 한라산 중턱쯤 거대한 흑색 육각 기둥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마치 양산의 대규모 미궁과 비슷한 크기였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체되었다면, 이곳도 드라코 도무스와 비슷하게 변했을 겁니다. 물론 그런 사실을 금방 알아내지도 못했겠죠."
"상황이 좀 변했는데, 이제 어떡할 거야?"
조지훈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전시영은 유진을 돌아보며 질문을 던졌다.
그는 큼지막한 육각 기둥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공략해야지. 이번에는 얼마나 내려갈지 궁금하군."
블라드 유진이 대성체 미궁 공략을 선언한 그 시각, 스페인의 S급 헌터가 한국으로 막 입국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