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1화
[긴급 속보 : 대한민국, 4대 미궁을 두 번째로 정복하다. 러시아 이후 10년 만의 쾌거!]
붉은 배경에 수 놓인 강렬한 문구가 블라드 유진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이윽고 한낮의 별 의미 없는 미궁 관찰 프로그램이 중간에 끊기면서 난데없이 뉴스가 방영되었다.
시청률도 거의 나오지 않는 프로그램은 치워 버리고, 뉴스를 5시간이나 앞으로 당겨 온 것이다.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으나, 헤드라인에 박힌 문구를 보면 그럴 만도 했다.
이제껏 한국에 이토록 반가운 소식이 전해진 게 대체 언제였을지 모를 정도였으니까.
헤드라인이 지나간 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TV 밖으로 흘러나왔다.
이런 소식을 전하는 게 믿기지 않는지, 항상 침착해야 할 뉴스 캐스터의 감정은 살짝 격앙되어 있었다.
[……긴급 속보입니다. 한국 헌터계는 교황청에서 파견된 랭커와 함께 양산의 대규모 미궁 ‘드라코 도무스’ 공략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공략대는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놀라운 성과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헌터 협회에서 공개한 자료 화면을 보시죠.]
대규모 미궁 공략 작전은 교황청 비밀 병기의 요청에 따라 빠르게 진행되었다.
사실 양산까지 길을 뚫은 건 유진이었기에, 공략대가 한 일은 충주까지 성체 미궁을 정리하는 거였다.
조금 멀리 나가긴 했지만, 평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활동이라서 누구도 대규모 미궁 공략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 상황이라 자료 화면은 협회에서 준 미궁 외부의 전투 영상을 그대로 쓸 수밖에 없었다.
물론 드라코 도무스 내부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대규모 미궁에는 유진을 비롯한 33인의 헌터들만 들어갔으니까.
덕분에 그의 모습은 전파를 타지 못했다.
하지만 언론사는 결단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기자들은 한국 헌터 협회에서 언급한 ‘교황청의 비밀 병기’가 무엇인지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해 낸 상태였다.
어느새 공략대 전투 장면은 지나가고, 화면에는 명동성당의 사제관에서 찍힌 유진의 사진이 떠올라 있었다.
‘추측뿐이지만, 상당히 정확하군.’
사실상 최근에 입국한 교황청 측 사람이라고는 그와 아크웰뿐이었다.
게다가 블라드 유진은 프리클 플라워를 상대하면서 한 번 얼굴을 알리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런지 추측성 기사라도 정확성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슬슬 존재가 드러나고 있었으나,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이만큼 강한 자가 반쯤 폭삭 망한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으면, 알려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턱! 턱!
유진은 반짝이는 은잔을 연신 던졌다 받으며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제 이 녀석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데."
깨끗하고 만듦새가 좋긴 했지만, 수수한 형태의 은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평범한 외관과는 달리, 이 물건에는 매우 거창한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는 홀로그램창을 열어 은잔의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아이템 정보>
명칭 : 광진(光進)의 성배 엘―칼릭스
등급 : EX
내구도 : 일회용
효과 : 차원문 개방, 마기 축출
특징 : 세트 아이템
내부에 엄청난 신성력을 품고 있는 성물. 토리노의 수의와 함께 사용 가능. 차원문을 열어 천상계의 존재를 끌어들임.
‘천사 강림이라…….’
1천 년 전, 블라드 유진이 활동하던 시절에는 성자와 교황청 기사단이 가장 성가신 존재였다.
태양이 떠올라 일족이 어둠으로 숨으면, 귀신같이 찾아와서 신성력이 담긴 철퇴를 후려갈겼으니까.
그들은 신성력을 기반으로 한 헌터였으나, 기본적으로는 인간에 불과했다.
야음을 틈타 뱀파이어들이 반격을 가했을 때, 혈액을 빼앗기고 죽어 버리는.
하지만 성배의 아이템 정보가 말하는 천상계의 존재란 어떠한가.
‘그 시절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일족 전체가 한 줌의 재로 변했을 터.’
아마도 혈액 한 방울도 남지 않은 채, 일족은 모조리 소각되었을 터였다.
당연히 쇠락한 일족의 명운을 걸고 피의 권능을 유진에게 남겨 두는 안배 따윈 시도조차 못 했을 테고.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방관할 수는 없지."
천상계의 존재들이 얼마나 강한지는 알 수 없으나, 이름만 들어 봐도 만만한 놈들은 아닐 것 같았다.
그는 엘―칼릭스의 아이템 정보를 옆으로 치운 뒤, 곧장 다른 창을 띄웠다.
<능력치 정보>
이름 : 블라드 유진(Vlad Eugene)
레벨 : 799(봉인율 55%)
등급 : S(Lv. 601~900)
종족 : 뱀파이어
종족 효과 : 강체, 불로불사
<종합 스킬 정보 S급>
1. 흡혈
2. 혈성쇄혼술
3. 암흑화
4. 소수혈인
5. 권능 폭발
6. 대군주의 역병
……
<스킬 정보>
명칭 : 권능 폭발
등급 : S 위력 : S+
지속 시간 : 30분
재사용 대기 시간 : 20시간
소모 자원 : 피의 권능
효과 : 모든 스킬 등급 1단계 향상
봉인율이 낮아져 S급이 된 이후로 유진이 보유한 스킬 레벨은 거의 한 단계씩 진일보했다.
다른 스킬은 위력이 상승한 것 외에 별다른 차이가 없었지만, 권능 폭발에는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다.
지속 시간이 대폭 늘고 재사용 대기가 3시간이나 줄어든 것이다.
‘이 정도면 전투 내내 유지하는 것도 가능하겠어.’
권능 폭발 외에도 한 가지 변화가 더 있었다.
잠재력 해방석을 쓴 덕분에 물음표로 표시되어 있던 천계도살검이 개방되었다.
아직 불완전하긴 하지만, 그건 등급이 올라가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였다.
‘10%나 낮아졌군.’
중요한 건 삼두마룡 트리 페 디타스를 잡고 봉인율이 55%까지나 낮아졌다는 사실이었다.
S급의 레벨은 900까지였으니, 봉인율이 50% 미만으로 떨어지기만 해도 바로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러면 유진의 등급은 곧장 SS급으로 오르게 될 터였다.
물론 고작 6%라고 해도 갈 길은 아직 멀었다.
양산까지 길을 뚫으며 성체 미궁을 수십 개나 정화했는데도, 낮아진 봉인율은 겨우 2%에 불과했다.
그때보다 훨씬 성장한 상태니, 앞으로 봉인율을 낮추는 건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다른 대규모 미궁을 알아봐야 하나?"
종합 스킬 정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스킬을 쭉 훑어보았다.
전체적으로 수준이 높아졌으나, 별로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이 상태로는 교황청에 대항할 수도 없었고, 혼자서 대규모 미궁을 정화하는 것도 불가능했으니까.
아직은 더 성장해야 할 시기였다.
그는 성배를 내려다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광진의 성배 엘―칼릭스는 토리노의 수의와 함께 사용해야만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되어 있었다.
그전에는 그저 신성력을 발하여 마기를 쫓아내는 수준의 아이템에 불과했다.
문제는 교황청이 이미 토리노의 수의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성배를 보낸다면, 천사들이 강림하여 미궁을 모조리 때려 부수고 돌아다닐 게 뻔했다.
"이렇게 재밌는 세상을 쓸어버리게 둘 수는 없지."
우우웅!
그러자 마치 그런 블라드 유진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모양인지, 은잔이 기묘한 공명음을 토해 냈다.
광진의 성배를 바라보던 그의 시선은 문득 손목 쪽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이무기의 수투 위로 무언가의 존재가 살짝 드러났다.
원래는 보이지 않는 게 정상이나, 정신을 집중하자 은색 사슬이 희미하게 보였다.
이것은 천 년 전부터 유진의 몸에 걸려 있던 금제, 능력이 봉인된 상태에서는 결단코 풀지 못하는 성물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물건도 타락시킬 수 있는 천계도살검이라면, 이따위 금제 같은 건 손쉽게 끊어 버릴 수 있었다.
‘풀면 교황청에서 곧장 알아차릴 거다. 일단은 이대로 두는 게 좋아.’
잠재력 해방석의 효과로 인해 그는 EX급 스킬을 미리 얻을 수 있었다.
덕분에 구속에서 벗어나는 게 가능했지만, 굳이 그러지는 않았다.
다른 대규모 미궁에 손쉽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교황청과 관련되어 있는 게 훨씬 편할 테니까.
아마 교황청의 입김이 작용한다면, 현지 헌터 협회의 지원을 받는 것도 한국에서처럼 수월할 터였다.
"저……. 블라드 유진 님?"
그런데 문득 거실에서 인기척이 나며 아크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진의 손끝에 끼워진 채로 빙글빙글 돌던 은잔은 녀석이 다가오기 전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는 TV에서 시선을 거두며 아크웰을 태연하게 쳐다보았다.
"왜."
"여,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요. 잠시 시간 괜찮으신가요?"
블라드 유진은 무심한 눈빛으로 녀석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우물쭈물하던 아크웰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3대 미궁을 공략하셨는데,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
뜬금없는 질문이 들어오자, 그는 녀석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여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요. 그나저나 보상이 대단한 모양이네요."
아크웰은 괜히 TV로 시선을 옮기며 화제를 돌렸다.
뉴스에서는 헌터들이 공개한 드라코 도무스에서 얻은 아이템들이 보도되는 중이었다.
공략에 참여한 자들은 각자 대단한 아이템을 하나씩 얻었다.
그 말인즉, 유진도 삼두마룡의 보물 창고에서 한 가지를 챙겼다는 말이 된다.
보상이 이런 식인지는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하나만은 확실했다.
다른 헌터들이 선택한 아이템 중에서 성배는 없었다는 것.
그럼 드라코 도무스에 성배가 없거나, 매우 낮은 확률로 그가 챙겼다는 말이 된다.
"유진 님께서는 뭐 얻은 거 없으세요? 혹시나 감정이 필요하면, 금방 해 드리겠습니다."
뭔가 어색하던 처음과는 달리, 대화의 물꼬가 트이자 녀석은 꽤 자연스럽게 보상과 감정 쪽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크웰은 김태호 추기경을 통해서 교황청의 밀명을 받은 바 있었다.
유진이 성배를 얻는다면, 성물의 금제를 발동하여 빼앗고 교황청으로 회수하는 임무였다.
만약 그가 얻은 아이템이 성배라면, 곧장 주문을 외울 작정이었다.
그럼 성물이 움직여 뱀파이어를 구속할 테니, 녀석의 임무는 간단하게 끝날 것이다.
하지만 진작부터 속내를 꿰뚫고 있던 블라드 유진은 아크웰의 생각대로 움직여 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툭!
"내겐 쓸모없는 걸 주더군. 시전해 봤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어."
그는 탁자에 반으로 쪼개진 돌조각을 올려 두었다.
부서진 돌멩이의 정체는 잠재력 해방석을 사용하고 남은 잔해였다.
녀석은 곧장 돌조각을 집어 감정 능력을 사용해 보았지만,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는 설명밖에 읽을 수가 없었다.
"아쉽군요. 알겠습니다. 다음번에는 더 좋은 아이템을 얻으시길. 무기나 방어구보다는 좀 더 특별한 게 좋겠네요."
"물론 그럴 생각이다."
뱀파이어에게 인간 헌터나 사용하는 무기나 방어구는 필요치 않을 테지만, 아크웰은 은근슬쩍 그 점을 강조했다.
혹시나 유진이 성배가 아닌 다른 아이템을 주워 오면 곤란하니까.
어쨌거나 오늘은 주문을 외워 성물을 발동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아크웰의 얼굴에 뭔가 생각이 많은 듯한 표정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
그는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슬쩍 지었다.
물론 언제나처럼 블라드 유진의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딩동!
문득 그 순간, 누군가가 사제관의 초인종을 눌렀다.
이 방에 교황청에서 온 손님이 머문다는 건 명동성당과 서울대교구청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었다.
사실상 누군가가 찾아올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초인종이 눌러졌으니, 나가 보기는 해야 했다.
"제가 가 볼게요."
"됐다."
"예?"
아크웰이 현관으로 향하려는데, 소파에서 일어난 블라드 유진이 아크웰의 앞을 지나치며 제지하는 게 아닌가.
이상함을 느낀 녀석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 없이 문을 열었다.
그러자 꽤 익숙한 얼굴이 입구에 서 있었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그럼 가지."
명동성당 사제관까지 유진을 찾아온 자는 리브라 길드의 부길마 정현철이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신발을 신으며 현관을 나섰다.
"어, 어디 가시는데요?"
뒤에서 아크웰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지만, 두 사람은 이미 검은 세단에 올라타고 있었다.
부우우웅!
답변을 듣지 못한 녀석은 현관에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