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놀랍게도 잠재력 해방석은 스킬의 봉인을 풀어 주었다.
원래라면 EX급에 올라야 쓸 수 있는 기술이었지만, 예외적으로 S급임에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스킬 정보>
명칭 : 천계도살검(天界屠殺劍)
등급 : EX 위력 : EX+
사거리 : 5m + α
지속 시간 : 3초
재사용 대기 시간 : 7일
소모 자원 : 피의 권능
효과 : 타락, 재생 억제
검에 닿는 모든 물체는 신성력을 잃고 타락함. 생명체는 영혼이 타락함과 동시에 부패하게 됨.
‘지속 시간이 고작 3초라…….’
천계도살검은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지속 시간이 심각하게 하향되어 고작 3초밖에 사용할 수 없는 데다가, 재사용 대기 시간은 무려 일주일.
정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 아니었다.
하지만 트리 페 디타스를 상대하는 현재로서는 그야말로 최고의 무기였다.
"콰우우우우!"
강렬한 백광이 번쩍인 이후, 삼두마룡의 공격은 블라드 유진에게 집중되었다.
당장이라도 안지홍을 끝장낼 것처럼 굴더니, 급격하게 태도를 바꿔 버렸다.
그의 몸에서 흐르던 빛줄기에서 뭔가 위협을 느끼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푸슈슈슈슈슝!
두 개의 머리에서 발출된 검은 뇌전은 수백 가닥으로 나뉘어 화망(火網)을 만들었다.
고속으로 비행하는 유진을 요격하기 위해서, 일부러 브레스를 짧게 끊어 쏜 것이다.
"이히히히힝!"
두두두두두!
녹턴은 빠르게 방향을 전환하며 검은 뇌전 사이를 요리조리 날아다녔다.
덕분에 트리 페 디타스가 쏟아 낸 회심의 일격을 피할 수 있었지만, 도무지 천계도살검을 사용할 각이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든 접근하여 검을 휘둘러야 하는데, 견제가 너무 거셌기 때문이었다.
‘이대로는 끝도 없겠어.’
블라드 유진은 녀석과 거리를 벌린 채, 지면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삼두마룡의 꼬리에 얻어맞고 날아간 전시영이 절뚝거리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무지막지한 공격을 정통으로 맞았으니, 상당한 부상이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공략대의 힐러들이 대부분 탈진한 탓에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가 없었다.
포션으로 생채기는 말끔하게 지울 수 있지만, 골절된 것까지는 회복하는 게 불가능하니까.
피유우웅! 츠츠츠츠!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멀찍한 곳에서 희미한 빛무리가 그녀의 근처로 날아드는 게 아닌가.
지쳐 쓰러진 공략대원들 틈에서 힐러 한 명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전시영에게 회복 능력을 걸어 준 것이다.
"푸우―!"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낸 모양인지, 힐러는 시커먼 핏덩이를 내뱉으며 그대로 바닥에 엎어져 버렸다.
뚜둑! 뚝―!
덕분에 그녀의 걸음걸이는 원상태로 돌아왔다.
포션으로 외부의 상처를 치료해 두었으니, 회복 능력이 딱 골절된 부분에만 작용한 덕분이었다.
유진은 그런 전시영의 근처로 날아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타라고?"
"시간이 없다."
그가 사투를 벌이는 중인 안지홍 쪽을 바라보자, 그녀는 표정을 굳히며 몸을 날렸다.
두두두두두!
녹턴은 희미한 말발굽 소리를 내며 허공을 질주했다.
등에 모르는 사람이 탄 탓에 불만이 가득해 보였지만, 주인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전장으로 복귀한 블라드 유진은 전시영을 안지홍의 근처에 내려다 주었다.
그러고는 허공으로 날아오르기 직전,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물러나 있을 테니, 내가 접근할 수 있도록 시선을 끌어."
"뭐? 이 지경이 되었는데, 그게 가능하겠어?"
도무지 대답할 처지가 아닌 안지홍을 대신하여 전시영은 황당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이토록 패색이 짙은 상황에 삼두마룡의 시선을 끌어 달라니.
극도로 지친 S급 헌터 두 명이 맡기에는 너무 힘든 임무였다.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적인 답변을 하려는데, 트리 페 디타스와 혈전을 벌이던 안지홍이 뒤로 휙 돌아보며 외쳤다.
"알겠습니다! 시선? 까짓것 해 보죠!"
그러고는 곧장 티란누스의 방패를 펼쳐 삼두마룡의 공격을 방어했다.
바닥에 두 발을 단단히 박아 넣은 채, 결단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사실 오로지 방어를 굳히는 것만 해도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지만, 안지홍은 전의를 불태웠다.
이제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으니, 블라드 유진의 요청에 모든 것을 걸어 볼 요량인 듯했다.
"좋아. 아저씨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따라야지. 시선만 끌어 주면 된다 이거지?"
전시영은 양손에 샛노란 구체를 생성하며 오른쪽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남은 에너지를 모조리 쥐어짜 내는 듯, 그녀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쓰스스스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블라드 유진은 암흑화를 시전하며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물론 그가 타고 있던 녹턴도 함께 말이다.
"초열지옥 십지폭쇄(十指爆鎖)!"
전시영은 유진이 사라진지도 모른 채, 트리 페 디타스를 향해서 맹렬한 공격을 쏘아 냈다.
초열지옥 십지폭쇄는 작은 역풍 열 개를 만들어 목표의 주변에서 터트리는 기술이었다.
체내로 침투하여 폭발하지 못하는 만큼, 위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처럼 시선을 끄는 데는 최고의 효과를 발휘하는 스킬이 아닐 수 없었다.
쿠콰콰콰콰쾅!
무시무시한 폭음과 함께 열 번의 연쇄 폭발이 일어나 시선을 교란하자, 삼두마룡의 머리들이 일제히 그녀를 주시했다.
"으아아아! 뭐든 빨리 해!"
푸슈우웅! 쿠화아아아!
트리 페 디타스는 도망치는 전시영을 향해서 검은 뇌전을 마구 쏘아붙였다.
그뿐이랴, 꼬리를 휘둘러 단박에 퇴로를 막아 버리기까지 했다.
"페르디티오의 칼날!"
타다다닷! 스각! 촤좌좍!
그런데 문득 횡으로 휘둘러지던 삼두마룡의 꼬리가 움찔하더니, 잽싸게 회수되어 버리는 게 아닌가.
마치 거북이처럼 방어만 굳히던 안지홍이 달려와 공격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녹색 칼날은 트리 페 디타스의 비늘 사이에 쑤셔 박히더니, 꽤 큼지막한 상흔을 남겼다.
"크롸아아아!"
물론 고작 꼬리를 막은 거라, 세 줄기의 검은 뇌전은 아직 전시영을 향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차핫!"
안지홍은 녹색 대검을 하늘 높이 집어 던졌다.
콰―칭!
안타깝게도 브레스와 충돌한 페르디티오의 칼날은 허무하게 튕겨 나가고 말았다.
그러나 효과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녹색 대검의 방해 덕분에 검은 뇌전의 궤적이 틀어져 전시영은 직격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지! 아저씨! 연옥의 숨결!"
콰아아아아!
그녀는 양손에서 시퍼런 불길을 뿜어내 남은 삼두마룡의 브레스를 막아 냈다.
절묘한 팀플레이 덕분에 두 사람은 서로의 생명을 구하고, 최종 보스의 시선까지 확실하게 끌 수 있었다.
‘좋아. 지금이다.’
어둠 속에서 뛰쳐나온 녹턴은 시커먼 안개에 휩싸인 채,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마치 목표가 가운데 머리인 것처럼 유령 군마는 정면으로 맹렬하게 내달렸다.
그러자 은근슬쩍 소극적으로 활동하던 왼쪽 머리가 대번에 아가리를 들이밀었다.
쉬이이이익! 터업!
수백 개의 날카로운 이빨에 깨물리려는 순간, 검은 안개에 휩싸인 녹턴의 모습이 픽 하고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닌가.
아가리에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자, 삼두마룡의 머리는 고개를 갸웃하며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하지만 유령 군마와 유진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잘했다. 녹턴."
녹턴은 이미 그의 동반자 정보창의 작은 아이콘이 되어 있었다.
애초에 블라드 유진은 유령 군마에 탑승해 있지도 않았다.
그저 시선을 끄는 용도로 먼저 날려 보냈을 뿐이었다.
그는 어느새 트리 페 디타스의 몸통에 올라선 상태였다.
세 개의 목이 연결된 곳에 다다른 유진은 오른팔을 옆으로 쭉 뻗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츠츠츠츠츠!
[EX급 스킬 ‘천계도살검(天界屠殺劍)’이 시전되었습니다.]
[‘삼두마룡 트리 페 디타스’가 끝없는 공포를 느낍니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5m는 가뿐히 넘을 듯한 길쭉한 검이 들려 있었다.
칠흑 같은 몸체에 어두운 보랏빛 오라가 은은하게 감도는 신비한 분위기의 검이었다.
"크워억?"
그제야 블라드 유진의 존재를 감지한 모양인지, 삼두마룡의 머리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그가 서 있는 곳이 자신의 유일한 약점, 목이 연결된 부위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대응하기에는 늦은 상황이었다.
"끊어 내고 파괴하라. 천사조차 타락시키는 검이여!"
츠팟―! 취이이이!
공기를 꿰뚫는 파공음, 살을 찢고 가르는 파육음 따위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저 천계도살검이 지나가고 난 뒤, 쏟아지는 혈액이 내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세 개의 목을 동시에 관통한 흑검은 그대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단 한 번의 검격이었으나, 트리 페 디타스의 목이 너무 두꺼웠기 때문이었다.
푸―확!
이번에도 목의 절단면에서는 시커먼 살덩어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하지만 연결을 시도하려던 살점은 순식간에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천계도살검의 특수 효과로 인해 재생력이 무효화 된 데다가, 빠른 속도로 부패하기 시작했다.
"크뤄어억―?"
쩌적! 쩌저저적!
회복에 실패한 상처는 급속도로 벌어져 목이 엉뚱한 곳으로 꺾이게 했다.
위풍당당하던 삼두마룡의 머리는 도끼질에 당한 고목처럼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슈우우우! 쿠웅! 쿠궁!
이윽고 흉포함이 가득하던 삼두마룡의 붉은 눈에서 빛이 점점 사그라졌다.
그와 동시에 미궁 공략대 전원의 앞으로 반가운 글귀가 떠올랐다.
[대규모 미궁의 최종 보스 ‘삼두마룡 트리 페 디타스’ 처치!]
* * *
트리 페 디타스를 쓰러뜨렸지만, 미궁 공략대는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다.
일단 모두가 손가락조차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블라드 유진은 얼른 보상만 획득하고 빠져나가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드라코 도무스의 보상 획득 방식은 여느 미궁과 사뭇 달랐기 때문이었다.
[최종 보스 처치 보상으로 삼두마룡의 보물 창고가 개방됩니다.]
[보상은 공략 인원 전원이 각각 하나씩 얻을 수 있습니다.]
[주의하십시오. 생존자 전원이 문 앞에 서야만 보물 창고가 열립니다.]
슈우우우! 쿠우웅!
긴 글귀가 연속으로 떠오른 직후, 하늘에서 커다란 석문이 떨어져 내렸다.
그러고는 문에서 푸른빛이 쏟아져 나와 바닥에 커다란 사각형을 그렸다.
아무래도 저곳에 공략대원들이 모두 올라가야 보상을 얻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헌터들이 어느 정도 회복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최종 보스가 쓰러짐으로써 미궁에 가득하던 마기는 싹 사라진 상태였다.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공략대원들은 하나둘 기운을 차렸고, 힐러들의 도움을 받아 부상을 치료할 수 있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저 무시무시한 놈을 무찌를 수 있었군요."
"놈의 목을 완벽하게 잘라 낼 줄은 몰랐어. 아주 그냥 한 방에 썰어 버리던데?"
안지홍과 전시영은 유진의 곁에 다가와 감사를 전했다.
천계도살검을 시전하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그녀는 아직도 약간 흥분한 것 같았다.
그는 그런 S급 헌터들을 뒤로한 채, 문 앞의 사각형 빛무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른 들어가지."
공략대원들은 블라드 유진을 따라서 우르르 빛무리로 올라갔다.
그러자 석문에서 강렬한 청색 광선이 뿜어져 나오는 게 아닌가.
파아아앗―!
이윽고 미궁 공략대는 금은보화와 다양한 아이템들로 가득한 보물 창고로 이동해 있었다.
"우와아!"
"뭐가 이렇게 많아?"
헌터들은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섣불리 움직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미 글귀를 통해서 보상은 하나만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괜히 건드리다가 이상한 게 덜컥 선택되기라도 하면, 기껏 대규모 미궁을 공략한 보람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유진은 혼자 불쑥 앞으로 걸어 나가더니, 보물 창고의 이곳저곳을 거침없이 살펴보았다.
그가 먼저 발걸음을 옮기자, 보상받기 위해서 들어온 헌터들도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당하군.’
보물 창고에 쌓인 아이템은 엄청나게 많았다.
한쪽에는 금화와 온갖 보석이 마치 산처럼 쌓여 있었다.
하지만 헌터들은 그런 금은보화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사치품이 아니라, 강력한 힘을 지닌 아이템이기 때문이었다.
블라드 유진 또한 심상치 않아 보이는 무기나 방어구, 장신구 등이 진열된 쪽을 위주로 돌아보았다.
보물 창고는 엄청나게 넓었고 무수히 많은 아이템이 있었기에 돌아다니던 헌터들과 부딪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는 아이템 사이에서 평범한 형태의 은잔(銀盞)이 눈에 확 들어왔다.
워낙 수수한 형상이라 이상하게도 눈에 잘 띈 탓에, 헌터들이 한 번씩 다 살펴보고 지나갔다.
그러나 은잔을 선택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에게 맞는 강력한 무기나 방어구를 찾는 게 급선무였으니까.
반면에 블라드 유진의 입가에는 뒤틀린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찾았다."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은잔을 집어 들었다.
[‘광진(光進)의 성배 엘―칼릭스’를 획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