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트리 페 디타스의 무지막지한 회복력을 목도한 공략대의 사기는 나락으로 곤두박질쳐질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가루가 되지 않는 이상, 육신을 빠르게 복구할 수 있는 안지홍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절단면에서 살덩이가 튀어나와, 떨어지려는 육신을 붙잡고 회복해 버리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란 말인가.
저런 엄청난 회복 능력은 듣도 보도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피의 권능으로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블라드 유진도 내심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예상을 뛰어넘는 능력이다. 회심의 일격이었는데, 상당히 곤란해졌어.’
소수혈인을 하나로 합쳐서 커다란 칼날을 만들어 내는 건 부담되는 수법이었다.
만약 소수혈인의 등급이 높았다면 별문제가 없었겠지만, 아직은 충분하지 않은 상태였다.
봉인율이 낮아지면서 레벨은 금방 복구가 되고 있었으나, 이상하게도 스킬 성장은 한 박자 늦었다.
스이잉―!
소수혈인을 원래대로 되돌리며 물러나려는데, 문득 원상태로 돌아간 가운데 머리가 눈을 빛내며 그를 노려보았다.
"콰우우우!"
푸슈우웅! 쿠화아아아!
아니나 다를까, 시커먼 뇌전이 날아들어 유진을 요격하려 했다.
하지만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자마자 잽싸게 몸을 빼낸 덕분에, 아무런 피해 없이 브레스를 피할 수 있었다.
스슥―! 촤하악!
암흑화를 해제한 그는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안지홍과 전시영은 좌우의 머리와 맹렬한 전투를 벌였으며, 미궁 공략대는 기다란 꼬리를 향해 공격을 퍼붓는 중이었다.
다들 최선을 다했지만, 거의 동수를 이루는 것이 한계인 상황.
일반적으로 헌터보다는 최종 보스의 유지력이 훨씬 좋을 테니, 패배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물론 이대로 전투가 계속 이어질 때를 상정한 예측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군.’
유진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유령 군마를 호출했다.
"나와라. 녹턴."
푸화아아악! 두두두두두!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녹턴은 시뻘건 화염 갈기를 흩날리며 주변을 한 바퀴 휘돌았다.
그가 공중으로 몸을 띄워 올리자, 유령 군마는 엄청난 속도로 달려와 등을 들이밀었다.
턱!
"이히히히힝!"
자기 등에 유진을 태운 녀석은 반갑다는 듯한 울음소리를 냈다.
"가자."
두두두두두!
녹턴을 타고 허공을 질주하자, 그를 상대하던 가운데 머리가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반격은 지금부터지.’
[‘권능 폭발’로 인해 ‘대군주의 역병’이 SS급으로 적용됩니다.]
츠츠츠츠츠! 촤라라라락!
블라드 유진의 양손에서 시커먼 형체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박쥐 형상의 마기는 맹렬하게 날갯짓을 하며 목표를 향해 날아들었다.
대군주의 역병은 직경 1km 내부의 생명체에게 광범위 디버프를 거는 스킬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용도가 전혀 달랐다.
단 하나의 개체가 목표였기에, 박쥐들은 트리 페 디타스의 육신에만 마기를 뿌려 댔다.
그는 미궁 공략대에 역병의 영향이 퍼지지 않도록 섬세하게 박쥐들을 조종하며 날아다녔다.
이렇게 범위를 설정하면 피의 권능이 더 많이 소모되지만, 아군을 배제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
가운데 머리의 아가리를 피하며 쏜살같이 이동하던 유진은 이윽고 스킬을 중지했다.
그러고는 안지홍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무래도 화염을 내뿜어 브레스를 상쇄해 버리는 전시영보다 훨씬 관찰하기가 편했기 때문이었다.
푸슈우웅! 쿠화아아아! 콰―칭!
티란누스의 방패를 꺼내 든 안지홍은 이전보다 더욱 수월하게 검은 뇌전을 막아 내고 있었다.
한 차례 브레스가 지나가고 나자, 뭔가 이상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스킬 효과 감소 디버프가 제대로 발동된 모양이었다.
권능 폭발로 인해 SS급으로 상승하여 디버프 효과는 무려
%나 되었다.
‘그 말인즉, 체력 감소 효과도 들어가고 있다는 의미겠지. 어디 이러고도 회복할 수 있는지 볼까?’
체력 감소 효과가 회복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할 터였다.
하지만 삼두마룡을 둔하게 할 수는 있었다.
약해진 체력만큼 빠르고 강한 움직임을 보이는 게 부담스러울 테니까.
치―잉!
블라드 유진은 오른손에 유지하고 있던 소수혈인을 하나로 합치며 거대한 칼날로 바꾸었다.
피의 권능을 쏟아부어 위력과 공격 범위를 극도로 높인 것이다.
소수혈인이 일시적으로 A급이 되었기에 평소보다 칼날의 크기는 더욱 커졌다.
녹턴을 타고 질주하는 그의 모습은 순간적으로 기다란 랜스를 든 기사처럼 보였다.
물론 공격 방식은 랜스 차징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지만.
두두두두두! 푸쉭―! 쩌저저적!
쏜살같이 날아간 유진은 오른팔을 크게 휘두르며 트리 페 디타스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번에는 놈이 고개를 틀어 공격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깊숙한 곳까지 칼날을 쑤셔 박을 수 있었다.
가공할 속도로 비행할 수 있게 해 준 녹턴의 존재 덕분이었다.
목을 완전히 끊어 낼 작정으로 붉은 칼날을 연속으로 휘두르자, 문득 엄청난 위기감이 느껴졌다.
기묘한 기운이 육감을 자극하자마자 급히 녹턴의 방향을 틀었는데, 시커멓고 거대한 물체가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쿠후우우우웅!
무지막지한 파공성과 함께 후폭풍이 일어 유진의 은발을 마구 흩트려 놓았다.
"꼬리……."
일단 피하고 나서 뒤편을 돌아보니, 삼두마룡의 기다란 꼬리가 눈에 들어왔다.
챠르르르륵!
가시들이 정렬하자, 위협적인 소리가 귓가를 자극했다.
‘견제가 약해졌다.’
꼬리는 미궁 공략대원들이 견제하기로 한 부위였다.
가시가 없는 약한 부분에 맹렬한 공격을 퍼부으면, 제아무리 최종 보스라도 섣불리 꼬리를 놀릴 수는 없었다.
체력 안배를 위해서 꼬리가 움직이지 않을 때는 일부러 공격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트리 페 디타스도 무리하지 않았는데, 난데없이 꼬리가 유진의 근처로 날아든 것이다.
이는 공략대원들의 공격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역시나 삼두마룡의 측면과 후방을 오가던 미궁 공략대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느려진 상태였다.
그가 대군주의 역병으로 최종 보스를 약화했지만, 헌터들은 그보다 더 지쳐 있었다.
아무래도 그간 강행군과 마기에 시달린 영향이 큰 모양이었다.
‘그나마 대군주의 역병 덕분에 균형이 유지되고 있는 건가. 그나저나 아쉽게 되었군.’
유진은 문득 소수혈인으로 만든 목덜미의 상처를 바라보았다.
꼬리가 기습적으로 휘둘러짐으로 인해 그의 공격은 중간에 끊기고 말았다.
그것만 아니었더라도 목을 잘라 버리는 게 가능했던 상황이라, 아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런 기회야 녹턴과 함께라면 얼마든지 창출할 수 있었다.
치―잉!
블라드 유진은 소수혈인을 재차 하나로 합치며, 삼두마룡의 목을 자르기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 * *
‘쯧! 5분밖에 남지 않았다.’
정보창을 문득 바라본 유진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트리 페 디타스를 돌아보았다.
저 무지막지한 최종 보스는 50분이 넘는 시간 동안, 공략대의 파상공세를 거뜬히 버텨 냈다.
이는 공략대를 이루는 A급 헌터들이 우수수 나가떨어져 놈의 꼬리가 마음껏 움직인 영향이 컸다.
삼두마룡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꼬리를 놀려 블라드 유진과 안지홍, 전시영에게 기습을 가했다.
그렇게 지지부진한 싸움이 이어지자, 대군주의 역병이 고작 5분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난감하게 되었어."
녹턴을 타고 허공을 질주하며 가운데 머리의 공격을 피하던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답답함을 드러냈다.
그만큼 상황이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조만간 대군주의 역병까지 끝난다면, 두 S급 헌터도 무너져 버릴 터였다.
그러면 블라드 유진 혼자서 최종 보스를 상대해야 했다.
그는 레벨이 1,775에 달하는 무지막지한 강자였으나, 지금은 봉인된 상태.
본신의 능력이라면 일격에 처치할 수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혼자 저 녀석을 이기기는 힘들었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유진은 연신 가운데 머리와 꼬리의 공격을 피하면서 가능성 있는 모든 상황을 그려 보기 시작했다.
녹턴의 속도와 소수혈인을 이용한 돌격은 진작에 그만두었다.
목을 거의 다 잘라 내는 건 가능했으나, 꼬리의 견제로 인해 완벽한 절단은 도무지 할 수가 없었다.
‘협력도 소용이 없었지.’
차라리 안지홍이나 전시영이 창출한 기회를 이용하여 기습적으로 들이치려 했는데, 그마저도 번번이 실패하기에 이르렀다.
그래 봐야 가운데 머리와 꼬리가 금방 유진의 뒤를 따라와 위협하기 때문이었다.
재사용 대기가 24시간에 달하는 권능 폭발과 대군주의 역병은 이미 써 버린 상황.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타개책이 보이지 않았다.
"끄아악!"
그러던 와중, 오른쪽에서 억눌린 비명이 불현듯 들려왔다.
전시영이 삼두마룡의 공격에 당해 저 멀리 튕겨 나가며 낸 소리였다.
역풍을 오른쪽 머리의 내부에서 터트리려 했는데, 녀석의 꼬리가 불쑥 날아들었다.
최후의 일격이라 생각하고 극도로 집중한 터라, 기습 공격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무방비 상태로 공격을 허용한 전시영은 복부에 큼지막한 구멍이 뚫린 채로 튕겨 나갔다.
꼬리에 달린 날카로운 가시에 당한 모양이었다.
방어구 덕분에 관통당하지는 않았으나, 상처는 상당히 심해 보였다.
"이런! 전시영!"
안지홍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외쳤지만, 그쪽도 몸을 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가운데 머리가 공격에 가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오른쪽 머리는 유진을 맹렬하게 견제했다.
‘균형이 무너졌다.’
전시영의 이탈은 공략대의 패배를 확실시하는 방아쇠였다.
기세가 오른 트리 페 디타스는 상대적으로 공략하기 쉬운 안지홍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두 개의 머리와 꼬리까지 가세했으니, 박살 나는 건 그야말로 시간문제였다.
그런 위기의 순간, 블라드 유진의 머릿속에 문득 이제껏 생각지도 않았던 한 아이템이 떠올랐다.
‘혹시 이게 효과가 있을까?’
그가 붉은 복주머니에서 꺼낸 물건은 마룡 카제르시안을 잡고 얻은 잠재력 해방석이었다.
등급이 무려 SS+였으나, 별로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아이템.
하지만 지금은 뭐라도 해 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유진은 녹턴의 고도를 높여 삼두마룡의 견제를 회피하면서, 곧장 잠재력 해방석을 사용해 보았다.
파삭―!
그가 손에 쥔 작은 돌을 가슴께에 가져가자, 저절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저 작은 물체에서 발생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강렬한 빛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픠이이이잉! 번―쩍!
마기와 기묘한 붉은 빛으로 가득 찬 대규모 미궁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백광이었다.
잠재력 해방석에서 나온 빛줄기는 유진의 몸을 타고 흐르다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의 몸속으로 한순간에 빨려 들어가 버린 것이다.
[잠재력 해방석을 사용한 결과, 봉인된 스킬이 풀렸습니다.]
[‘천계도살검’ 스킬이 해방됩니다.]
불쑥 나타난 글귀를 읽은 블라드 유진의 입가에는 어느새 짙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이거면 충분하지. 가자. 녹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