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피떡이 된 안지홍을 향해서 소리친 전시영은 양손에서 시퍼런 화염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는 안지홍이 추락하면서 생성한 커다란 구덩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삼두마룡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최종 보스는 엄청나게 강력한 놈이었지만, 이쪽의 전력도 승부를 걸어 볼 만한 정도였다.
"온몸이 저릿저릿하구먼. 굉장한데?"
커다란 구덩이에서 불쑥 튀어나온 안지홍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온몸에 묻은 흙을 털어 냈다.
분명 방금 지면에 처박혀 피떡이 되었는데, 잠깐 사이 완전히 멀쩡한 상태로 돌아왔다.
초월적인 재생 능력으로 상처를 순식간에 원상 복구한 것이다.
가히 몬스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능력이었다.
푸슈우웅! 쿠화아아아!
한편, 안지홍 대신 앞으로 나섰던 전시영은 재차 날아든 삼두마룡의 브레스를 막아 내고 있었다.
이번에는 가운데에 있던 녀석이 아가리를 쫙 벌리며 검은 뇌전을 마구 쏟아 냈다.
"연옥의 숨결!"
콰아아아아! 치지지직!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달려간 그녀가 양손을 쫙 펼치자, 푸른 화염이 앞으로 쭉 방사되었다.
연옥의 ‘정화하는 불’을 닮은 불꽃은 트리 페 디타스가 쏟아 낸 검은 뇌전을 효과적으로 차단했다.
중간에서 마주친 두 기운은 맹렬하게 힘겨루기를 하며 빠르게 소멸하는 모습을 보였다.
놀랍게도 전시영은 뛰어난 공격력으로 삼두마룡의 브레스를 완벽하게 막아 낸 것이다.
다소 지친 듯한 안지홍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한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콰우우우우!"
푸슈우웅! 쿠화아아아!
왼쪽에 있던 트리 페 디타스의 머리가 포효하더니, 난데없이 검은 뇌전을 쏘아 내는 게 아닌가.
몸은 하난데 머리가 각각 브레스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한 모양이었다.
"이게 뭔……."
다른 방향에서 엄청난 위력의 공격이 쇄도해 오자, 전시영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한 녀석의 브레스도 간신히 막는 상태라, 도무지 힘을 배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위험을 무릅쓰고 연옥의 숨결을 나눌 필요가 없었다.
"티란누스의 방패!"
스핑―! 촤좌좍! 쿠화아아앙!
뒤에서 안지홍이 툭 튀어나오며 거대한 녹색 방패를 펼쳐서 측면을 완벽하게 방어해 준 덕분이었다.
이번에는 허공에서 공격을 받아 내지 않았기에, 충격을 받고 튕겨 나가는 일은 없었다.
물론 바닥에 꽤 긴 홈이 파이며 쭉 밀려나긴 했지만.
콰가가가각! 척!
전시영의 바로 옆까지 밀려난 안지홍은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씩 미소를 지었다.
그녀와는 달리 직접적으로 충격을 받아 내고 있었기에, 온몸에 힘을 준 탓이었다.
"연속으로 두 번이나 막으려니 힘에 부치는구먼."
"아저씨, 근육 자랑하면서 그딴 소리 하지 마."
"자랑하는 게 아니라, 이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이윽고 두 S급 헌터에게 쏟아지던 브레스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제아무리 강력한 마기를 지닌 대규모 미궁의 최종 보스라고 해도, 저런 가공할 공격을 무한정 반복할 수는 없는 듯했다.
빠르게 가늘어진 번개 줄기가 사라지자, 안지홍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이제 한숨 좀 돌리겠네."
"방심은 금물이야. 분명 이게 끝이 아닐 테지."
하지만 전시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분명히 이 정도로 끝은 아닐 터였다.
마치 웃고 있는 듯한 여섯 개의 붉은 눈이 그 사실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쿠우우우…….
연옥의 숨결을 중지하며 손에 붙은 불꽃을 털어 내던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아래쪽을 보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응?"
아까보다 바닥을 이루는 바위가 좀 더 시커먼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불현듯 위쪽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길쭉한 형체가 난데없이 튀어나와 이쪽으로 떨어지는 게 아닌가.
"아, 아저씨 피해!"
"흡!"
쿠후우우우웅!
하늘에서 낙하하고 있는 물체는 마기의 안개에 가려져 있었던 삼두마룡의 꼬리였다.
아직 외곽에는 짙은 마기가 가득했기에, 저 거대한 물체가 휘둘러지는 걸 눈치채지 못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좌우로 갈라지며 잽싸게 몸을 날렸는데, 뚝 떨어지던 꼬리가 급격하게 궤도를 변경했다.
꿈틀거리며 왼쪽으로 휘어진 꼬리 끝은 정확하게 전시영의 뒤를 쫓았다.
안지홍보다는 그녀가 좀 더 위협적이라고 느낀 모양이었다.
"이, 이런!"
트리 페 디타스의 꼬리에 달린 가시는 굉장히 컸으나, 끝은 엄청나게 날카로웠다.
마치 거대한 창날 같은 끄트머리에 찔린다면, 결단코 무사하지 못하리라.
위기의 순간이었지만, 반대편으로 피했던 안지홍은 그녀를 도와줄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전시영의 옆으로 시커먼 그림자가 소리도 없이 다가오는 게 아닌가.
마기가 뭉친 것처럼 보이는 검은 안개에서 시뻘건 칼날이 불쑥 튀어나왔다.
콰―칭!
"으윽!"
귀청을 찢을 듯한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휘둘러지던 꼬리의 궤도가 급변했다.
트리 페 디타스의 가시는 붉은빛을 발하던 큼지막한 칼날과 부딪치고도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대신에 그 충격력을 고스란히 받아 옆으로 튕겨 나가기만 할 뿐이었다.
큰 피해를 주지는 못했으나, 전시영을 위기에서 구하는 데는 최상의 결과였다.
쿠콰콰콰콰콰!
바닥에 처박힌 삼두마룡의 꼬리는 바위를 찢어발기며 옆으로 쭉 밀려났다.
"헉! 헉!"
그녀는 그제야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리는 것을 멈추었다.
스슥―! 척!
전시영의 근처에는 붉은 칼날을 갈무리한 블라드 유진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검은 안개가 뒤따르다 흩어지며 자취를 감추는 중이었다.
유진은 그런 그녀의 곁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며 한마디 말을 남겼다.
"움직여."
"뭐라고!?"
얼빠진 표정으로 반문하던 전시영은 이내 잽싸게 몸을 돌려 달릴 수밖에 없었다.
트리 페 디타스의 꼬리가 꿈틀거리며 재차 솟구쳐 올랐기 때문이었다.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꼬리가 한 번 공격이 끝났다고 가만히 있을 리가 있나.
챠르르르륵!
삼두마룡이 꼬리 끝에 달린 수십 개의 가시를 정렬하자,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방울뱀이 가까이 다가온 적에게 경고하는 듯한 소음이었다.
물론 그보다는 훨씬 더 크고 위협적이었지만.
쉬이이이이! 콰쾅! 콰아앙!
하지만 트리 페 디타스의 꼬리 공격은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괜찮습니까? 전시영 랭커님!"
멀찍이 떨어져 있던 공략대에서 지원 공격이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A급 최상위 헌터들의 다양한 스킬이 한데 뭉쳐서 쏟아지자, 삼두마룡은 꼬리를 거둬들일 수밖에 없었다.
가시는 블라드 유진의 소수혈인에도 흠집조차 없을 정도로 단단했지만, 꼬리의 피부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무지막지하게 쏟아진 공격에 움찔거리며 물러서는 걸 보면 말이다.
전시영은 멀리서 소리치는 리브라 길드의 부길마 정현철을 향해서 괜찮다며 손을 들어 보였다.
"길드 마스터인 나보다 널 먼저 챙기는구먼.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좋을 때지."
"전투 중인데 쓸데없는 소리 자꾸 할 거야?"
"크흠!"
어느새 다가온 안지홍이 불쑥 말을 걸자, 그녀는 도끼눈을 뜨며 돌아보았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미궁 공략대는 훌륭하게 트리 페 디타스의 공격을 막아 냈다.
이제는 놈에게 반격을 가할 차례였다.
안지홍은 살짝 떨어진 곳에 서서 삼두마룡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진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하실 건지요. 제 생각에는 우리가 녀석의 머리를 하나씩 맡아서 상대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꼬리 견제는 공략대에서 하고 말이야."
전시영이 의견을 덧붙이자, 블라드 유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머리를 하나씩 맡아서 봉쇄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각자 따로 움직이기는 하지만, 저 녀석의 몸통은 하나.
유진과 S급 헌터들이 세 방향에서 압박하면 자기들끼리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불협화음이 시작되면, 승기는 이쪽으로 넘어오게 될 것이다.
"대신 가운데 머리는 내가 맡지."
그는 두 사람에게 시선도 주지 않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안지홍이 빠르게 따라붙으며 반론을 펼쳤다.
"아무래도 탱커 계열인 제가 중앙에 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블라드 유진은 발걸음을 멈춘 채, 안지홍을 돌아보았다.
마치 마기가 가득 들어찬 듯한 느낌의 검은 눈동자가 차갑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약한 것 같군."
그의 말에 안지홍은 뒷머리를 긁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러시아의 대규모 미궁에서도 살아남은 최상위 실력자에게 약하다니.
살다 살다 처음 들어 보는 말이었기에, 순간적으로 어이없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규모 미궁의 최종 보스와 마주한 상황.
같은 편끼리 불협화음을 일으킬 정도로 안지홍은 아둔한 작자가 아니었다.
"그럼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상황을 봐 가면서 지원하겠습니다."
삼두마룡이 꼬리를 회수함으로써 이제 소강상태는 끝났다.
앞으로 이런 여유는 절대 다시 돌아오지 않을 터였다.
일단 승낙하기는 했으나, 안지홍은 계속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가운데에서 중심을 제대로 잡아 주지 않으면, 최종 보스 공략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다가 안 되겠으면 바꾸겠다는 생각으로, 전투 중에 항상 유진을 주시할 작정이었다.
물론 그게 안일한 마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쉬이이이익! 꽈르릉! 콰―직!
"크으윽!"
트리 페 디타스의 왼쪽 머리를 상대하고 있던 안지홍은 신음을 흘리며 자신의 왼팔을 바라보았다.
검은 뇌전 브레스를 막아 내던 중에 녀석이 불쑥 아가리를 들이밀어 꽉 물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세계적으로 따져 봐도 최강의 방어 능력을 자랑하는 티란누스의 방패가 깨지며 왼팔에 날카로운 송곳니가 박혀 들었다.
단 하나의 이빨에 물렸을 뿐인데도 안지홍의 팔뚝은 절반 이상이 잘려 나갔다.
너덜너덜해진 팔을 붙잡고 얼추 방향을 맞춘 채 딱 고정하자, 이윽고 빠른 속도로 끊어진 부분이 이어졌다.
쩌적! 츠르르릇!
완벽하게 잘려 나간 것이 아니라서, 금방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안지홍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회복 능력이라는 것도 스킬이라, 무한정 재생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젠장!"
파박! 터어엉!
안지홍은 대검을 휘둘러 자신을 깨물려고 다가오던 삼두마룡의 턱을 후려갈겼다.
그러자 왼쪽 머리가 옆으로 팩 돌아갔고, 검은 뇌전이 엉뚱한 곳으로 쏘아졌다.
푸슈우웅! 쿠화아아아!
"으아아아! 이 미친 아저씨야! 여기로 날아왔잖아!"
공교롭게도 브레스는 오른쪽 머리를 상대하고 있던 전시영의 근처로 날아갔다.
다행히 그녀는 잽싸게 바닥을 굴러 공격을 피할 수 있었지만, 수세에 몰리고 말았다.
안지홍은 식은땀을 흘리며 재차 대검을 휘둘렀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전시영에게 사과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녹색 기운이 가득한 대검에 직격당하고도 왼쪽 머리는 별다른 타격을 입은 것 같지 않았으니까.
"어떻게든 목을 공략해야 하는데."
삼두마룡의 약점은 몸통과 연결된 기다란 목이었다.
물론 그곳에도 비늘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서 피부를 꿰뚫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게다가 목이 약점이라는 것도 추측일 뿐, 확실한 정보는 아니었다.
그나마 확률이 높은 곳을 공략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저 팽팽한 대결 구도만 지속될 뿐, 트리 페 디타스의 목을 제대로 타격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 무지막지한 괴물은 거의 무한정 검은 뇌전을 뿜어낼 뿐만 아니라, 엄청난 신체 능력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한 힘과 속도,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 비늘과 날카로운 이빨, 꼬리의 가시까지.
녀석의 무기는 많고도 많았다.
그것들을 뚫고 목을 노리기란 요원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한데, 문득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쑤컹! 푸쉬이이익―!
"오오!"
"나이스!"
검은 안개가 되어 삼두마룡의 지척까지 접근한 블라드 유진이 시뻘건 칼날을 뽑아내어 목을 썰어 버리는 소리였다.
안지홍과 전시영은 각자 전투를 치르느라 바쁜 와중에도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가뭄의 단비 같던 승기는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푸―확!
반 이상 잘린 목의 절단면에서 웬 살덩어리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떨어져 나가던 목을 붙잡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이내 엄청난 속도로 상처 부위가 봉합되기 시작했다.
"……!"
지면에 내려선 유진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점점 불길한 암운이 드리우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