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이대로는 절대로 공략할 수가 없다고!"
전시영은 블라드 유진의 코앞까지 다가와 항의했다.
중간 보스를 처치하느라, 미궁 공략대원들의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다.
대규모 미궁까지 몬스터 무리를 뚫고 오면서 지친 거야 헌터들에게 큰 영향은 없었다.
그 정도는 조금만 쉬어도 회복 가능하니까.
하지만 전투로 인한 부상과 바닥까지 소모된 힐러 자원은 복구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최종 보스 직전에 잠시 쉬어 가는 건 모든 헌터들의 국룰 아니었던가.
하지만 엄청난 일을 벌인 유진의 표정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뭐 이런 무례한 사람이 다 있어? 일을 벌여 놓고 쳐다도 안 보는……."
턱!
전시영은 독설을 마구 내뿜어 대다가 어깨를 짚는 손길에 시선을 홱 돌렸다.
그러자 웃는 얼굴의 안지홍이 고개를 살짝 가로젓는 게 보였다.
"아니, 아저씨는 화도 안 나?"
"말하기 전에 저길 먼저 봐."
"뭐? 어디?"
안지홍이 가리킨 곳을 쳐다본 순간, 그녀의 말은 뚝 끊기고 말았다.
한곳에 모여 쉬고 있던 공략대원들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규모 미궁의 중심부로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A급 헌터들은 버티기 힘들어했다.
중간 보스까지는 어찌어찌 견디는 게 가능했지만, 다리를 건너서부터는 아예 에너지가 회복되지 않았다.
게다가 조금씩 정신과 육체가 피폐해지는 느낌까지 받고 있었다.
"마기가 너무 강해서 회복되지 않는 모양이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우리에게 불리해."
전시영은 러시아의 리고르 아스페라를 겪어 보았으나, 그건 10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도 드라코 도무스는 양산에 자리 잡고 있었으니, 그만한 세월 동안 마기가 축적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그동안 그녀도 성장했기에, 당시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안지홍의 설명이 끝나자, 전시영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아무리 괄괄한 성격의 그녀라고 해도 동료들을 챙기지 못한 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미리 말씀 좀 해 주지 그러셨습니까? 그럼 협의하고 조금 더 빨리 움직일 수도 있었을 텐데요."
안지홍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지만, 유진은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막말해서 미안해. 내 판단이 성급했어."
전시영은 그런 그를 향해서 사과를 건넸다.
아무런 상의 없이 행동부터 하긴 했으나, 블라드 유진의 판단은 이 상황에서 가장 적합했다.
게다가 일면식도 없는 미궁 공략대의 헌터들을 신경 써 주었으니, 되레 고마움을 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안지홍은 상태가 좋지 않은 A급 헌터들을 돌아보며 그에게 감사를 전했다.
"공략대원들을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유진은 공략대원들이 어떻게 되건 아무런 상관도 없는 존재였다.
이대로 좀 더 시간이 지났다간 최종 보스에서 힘도 못 쓸 게 뻔하니, 곧바로 문을 열었을 뿐.
‘그렇다고 굳이 저들의 오해를 풀어 줄 필요는 없지.’
그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안지홍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그러고는 곧장 몸을 돌려 엄청나게 넓은 검은색의 평지를 묵묵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뭐라 할 말이 없네."
"됐어. 저분도 별 신경 안 쓰는 것 같은데, 우리도 얼른 출발하자. 쟤들 다 말라 죽겠다."
"응."
두 사람은 공략대원들과 함께 벌써 저만치 멀어진 블라드 유진의 뒤를 따랐다.
* * *
최종 보스의 방은 엄청난 넓이를 자랑했다.
사실 이렇게 넓은 공간을 방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끝없이 이어진 시커먼 대지를 33인의 미궁 공략대는 하염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이동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에 지칠 만도 하건만, 그들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지금 쓰러졌다가는 체내로 침투하는 마기로 인해 결단코 일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점점 더 강해진다. 내가 흡수하는 양을 넘어선 지 오래야.’
블라드 유진은 선두에서 마기를 흡수하여 공략대원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마기의 영향을 덜 받으면 조금이나마 컨디션을 회복할 수 있기에, 아무도 모르는 도움을 준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한계에 봉착하고 말았다.
계속해서 강해지는 마기에 뒤로 흐르는 양이 훨씬 더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딘지 알고 가는 겁니까? 그냥 지평선만 끝없이 펼쳐져 있어서 어디가 어딘지 전혀 모르겠습니다만."
안지홍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유진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앞으로 쭉쭉 걸어가기만 할 뿐이었다.
‘느껴진다. 거대한 마기의 흐름이.’
블라드 유진은 전신을 압박하는 마기의 흐름을 따라서 이동하는 중이었다.
이제껏 그는 이런 방식으로 손쉽게 미궁의 보스를 찾아내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감각을 잔뜩 곤두세워서 마기의 자취를 쫓아갈 필요가 전혀 없었다.
"예? 대답 좀 하지? 사람이 아니라 목석인가? 진짜 답답해 죽겠네."
전시영이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툭툭 치며 말하자, 유진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부르고 있다."
"누가 뭘 불러?"
"놈이 우리의 침입을 눈치챘어. 자신 있으면 와 보라고 존재감을 드러내는군."
"대체 그런 걸 어떻게 느낀다는 거야? 온통 그냥 지긋지긋한 마기뿐인데."
마치 뜬구름 잡는 듯한 그의 말에 그녀는 혼잣말을 구시렁거렸다.
척! 턱!
그러다 블라드 유진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자, 하마터면 등허리에 이마를 박을 뻔했다.
전시영은 자신도 모르게 마기의 영향이 덜한 그의 뒤편에 바짝 따라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왜 멈춥니까? 부딪힐 뻔했잖아요."
안지홍과 전시영은 뒤늦게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는 S급 헌터도 제대로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유진의 움직임에 아무런 기척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그의 시선은 살짝 오른편으로 돌아가 있었다.
두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그저 시커먼 바위로 이루어진 평지만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 대체 뭐가 있다는……."
한데, 전시영이 안지홍을 돌아보며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쿠구구구구구!
난데없이 맹렬한 진동이 느껴지더니, 지면이 쫙쫙 갈라지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어어어?"
안지홍은 대검을 뽑아 들며 공략대의 최전방으로 나섰다.
그러면서 뒤로 빠지자는 수신호를 반복해서 보냈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은 제자리에 선 채, 마구 찢어지는 대지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이러다가 지진에 휘말리겠습니다! 어서 갑시다!"
"아, 일단 우리부터 빠지자고! 아저씨!"
전시영은 안지홍의 팔을 붙잡고 공략대와 함께 물러나는 것을 택했다.
그러는 동안, 갈라진 틈에서 시커먼 형체가 불쑥 튀어나오며 주변의 지반을 마구 끌어내렸다.
하지만 결단코 그가 서 있는 곳까지는 그 여파가 미치지 않았다.
블라드 유진은 최종 보스의 거대한 육신이 이곳까지 닿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규모 미궁의 최종 보스 ‘삼두마룡 트리 페 디타스’가 도전자를 맞이합니다.]
[편안한 최후를 원한다면, 당장 자결할 것을 추천합니다.]
이윽고 헌터들의 눈앞에 강렬한 경고 문구가 떠올랐다.
"사, 삼두마룡?"
전시영의 의문 어린 목소리가 들린 직후, 마기에 휩싸인 검은 형체가 빠르게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사방에 가득 들어차 숨이 턱턱 막히게 했던 마기의 안개가 걷히며 트리 페 디타스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콰우우우우우!"
경고 문구에 쓰여 있는 것처럼 최종 보스는 거대한 드래곤의 형태였다.
검은빛으로 번들거리는 비늘은 중간 보스와 비슷했지만, 그 외에는 닮은 점이 전혀 없었다.
우선 트리 페 디타스의 덩치는 마룡 카제르시안보다 세 배 이상은 큰 듯했다.
웬만한 아파트 정도의 크기라, 고개를 뒤로 한껏 젖혀도 머리 끄트머리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세 개의 길쭉한 목이 붙은 몸통은 거대한 타원형이었다.
그뿐이랴, 목보다 훨씬 굵은 꼬리에는 집채만 한 가시가 수십 개나 박혀 있었다.
"아아……."
전시영은 순간적으로 힘 빠진 신음을 흘렸다.
러시아에서 마주했던 대규모 미궁의 최종 보스보다 트리 페 디타스가 훨씬 더 강력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그저 상대의 무시무시한 외형에서 오는 착각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 당시 리고르 아스페라를 공략했을 때와 지금은 10년의 격차가 존재했다.
그만큼 마기가 축적된 미궁은 그때보다 더욱 성장했고, 당연히 최종 보스도 강해졌을 터였다.
쿠우우우웅! 드드드드!
삼두마룡이 앞발로 대지를 짓이기며 몸을 일으키자, 무시무시한 진동이 공략대를 덮쳤다.
헌터들은 잽싸게 자세를 낮추며 마치 지진과도 같은 현상을 버텨 냈다.
"쿠오! 쿠오오! 쿠오오오!"
피이이잉―!
그러나 곧이어 트리 페 디타스의 괴성이 연속으로 터져 나왔을 때는 귀를 막고 비틀거리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최종 보스 ‘삼두마룡 트리 페 디타스’가 드래곤 피어를 발산합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한 살기가 날아와 공략대를 강타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고도로 정제된 살의에 불과했지만, 놀랍게도 드래곤 피어는 물리력까지 행사하고 있었다.
"크으윽!"
"으윽! 버, 버틸 수가……."
그나마 다행인 점은 공기 중에 가득하던 지긋지긋한 마기가 싹 사라졌다는 거였다.
그래서 엄청난 위력의 드래곤 피어에 당하고도 헌터들은 버티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그 상황을 지켜보던 블라드 유진은 살짝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저놈이 모조리 흡수해 버렸기 때문에, 마기가 사라진 거다. 그만큼 최종 보스는 더 강해졌겠지.’
마기를 수용할 수 있는 총량은 체구에 비례하여 커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점은 트리 페 디타스가 현재의 유진보다 훨씬 많은 마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거였다.
"이, 이건 이길 수 없어."
"그래. 저 큰 놈을 무슨 수로 이기냐고! 우리가 가진 무기로는 백날 쑤셔 봐야 비늘조차 뚫지 못할 거야."
"으으으! 제, 젠장!"
미궁 공략대는 A급 최상위의 헌터와 동급의 힐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실제로 이들은 러시아의 리고르 아스페라를 공략할 때 참전했던 S급 헌터의 수준에 육박했다.
하지만 공략대원들은 일제히 혼란에 빠져 버렸다.
그저 최종 보스가 드래곤 피어를 한 번 발산한 것만으로도 전의를 상실해 버린 것이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세 개의 머리를 까딱거리는 트리 페 디타스의 위용은 그만큼 대단했으니까.
츠츠츠츠츠!
그러던 중, 돌연 가장 오른쪽 머리의 뿔에서 검은색 방전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드는 순간, 엄청나게 굵은 흑색 뇌전이 공략대를 향해 쏘아졌다.
푸슈우웅! 쿠화아아아!
"티란누스의 방패!"
그런데 대검을 뽑아 들고 가장 앞에 나섰던 안지홍이 펄쩍 도약하며 녹색 빛무리를 방출하는 게 아닌가.
스핑―! 촤좌좍!
갑자기 허공에 큼지막한 녹색 방패가 생성되더니, 트리 페 디타스가 쏘아 낸 검은 뇌전을 막아 냈다.
쿠화아아앙! 쉬이익! 쿠우웅!
어마어마한 폭음과 함께 마치 탄환처럼 빠르게 튕겨 나간 안지홍은 시커먼 대지에 쑤셔박혔다.
강력한 방어 기술을 펼쳤으나, 충격을 모두 이겨 낼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