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대군주의 역병은 물음표로 표시되어 아직 개방할 수 없었던 스킬이었다.
피의 군주 고유의 능력이라 S급으로 올라가자마자 봉인이 풀린 것이었다.
‘실로 오랜만이다.’
교황청 성기사단으로부터 도망 다니던 시절, 블라드 유진은 일대 다수의 전투 상황에 자주 처할 수밖에 없었다.
일족의 수효는 적지만, 성자들은 엄청나게 많았으니까.
우르르 몰려오는 성기사단을 상대할 때 대군주의 역병은 최고의 약화 능력이었다.
"이거 한 방이면, 성자들을 학살할 수도 있었지."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스킬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스킬 정보>
명칭 : 대군주의 역병
등급 : S 위력 : S+
범위 : 직경 1km
지속 시간 : 1시간
재사용 대기 시간 : 24시간
소모 자원 : 피의 권능
효과 : 스킬 효과 감소(20%), 체력 감소(20%)
피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박쥐들이 공기 중에 미세한 마기를 퍼뜨려 범위 내 일정 크기 이상의 생명체를 감염시킴.
역시 다시 살펴봐도 대군주의 역병은 대단했다.
아직 S급에 불과하여 예전보다 못한 느낌이 들었으나, 이 정도도 굉장한 효과였다.
성자들의 신성 공격 위력은 물론이고, 회복 능력을 비롯한 모든 스킬 효과를 왕창 날려 버리니까.
같은 위력을 내려면 자원을 더 쏟아부어야 할 텐데 체력까지 감소시키지 않았던가.
하루에 반드시 한 번은 목숨을 구해 주는 비장의 한 수였다.
‘드디어 S급인가. 봉인율은 과연 얼마나 떨어졌을까?’
유진은 아직도 떠올라 있는 마지막 글귀를 보며 반색했다.
S급은 레벨 601에서 900까지였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범위가 세 배나 늘었기에, 봉인율은 대폭 낮아졌을 터였다.
그는 왠지 기대감 가득한 눈빛으로 능력치 정보창을 켜 보았다.
<능력치 정보>
이름 : 블라드 유진(Vlad Eugene)
레벨 : 621(봉인율 65%)
등급 : S(Lv. 601~900)
종족 : 뱀파이어
종족 효과 : 강체, 불로불사
고작 중간 보스 하나를 잡았을 뿐인데, 봉인율은 3%가 낮아졌고 레벨이 53이나 올랐다.
그렇다면 최종 보스는 이보다 훨씬 더 봉인율을 많이 낮춰 줄 터였다.
80%대였던 초반처럼 봉인율이 5%씩 떨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직 EX급에 오르기는 멀었으나, 이 정도면 그리 나쁘지 않은 속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이건 어떻게 써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데."
블라드 유진은 이제 잠재력 해방석과 미궁 열쇠 파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궁 열쇠 파편은 아이템 등급만 비공개되어 있을 뿐, 효과야 뻔한 것이었다.
드라코 도무스는 두 갈래로 이루어진 미궁이었으나, 반대편에 나머지 하나가 있으리라 장담할 수는 없었다.
어느 쪽으로 가든 최종 보스를 만날 수 있게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존재했으니까.
‘아니면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오른쪽 길을 다시 공략해야 할 수도 있겠지.’
어떻게 되든 유진에게 중간 보스 공략 정도야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만약 그가 왼쪽 길을 전부 진행했을 때 한국 헌터들이 진입한다면, 얼추 중간쯤에서 만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면 중간 보스를 다시 공략할 수고를 덜게 될 것이다.
중간 보스가 낮춰 줄 봉인율이 조금 아깝긴 하지만, 블라드 유진은 그런 것에 전혀 연연하지 않았다.
"이미 동급을 한 번 잡았으니, 극적인 변화는 없을 터."
비슷한 수준의 몬스터만 잡아선 봉인율이 별로 줄어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열쇠보다는 이게 문젠데…….’
유진은 각도가 바뀔 때마다 색이 변하는 오묘한 빛깔의 작은 돌조각을 바라보았다.
잠재력 해방석은 정말이지 듣도 보도 못한 물건이었다.
연옥 입장권처럼 성능을 쉽게 유추할 수 있는 이름도 아니고, 설명까지 두루뭉술했다.
대체 이 글귀를 보고 누가 효과를 알아볼 수 있단 말인가.
아무래도 직접 사용해 보지 않는 한 효과를 알아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피의 군주에게 잠재력이라니."
무려 천 년을 넘게 살아왔으며 수많은 인간을 도살해 온 존재에게 과연 잠재력이라는 단어가 어울릴까?
봉인이 되지 않았다면 1,775라는 무지막지한 레벨의 뱀파이어에게 필요할 법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래도 어떻게 쓰일지 모르는 일이니, 가지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는 중간 보스를 잡고 얻은 두 아이템을 붉은 복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척! 척! 스윽!
유진은 빠른 속도로 가루가 되어 가는 카제르시안의 비늘을 손으로 슬쩍 쓸어 보았다.
중간 보스를 처리하고 얻은 아이템과 새로 얻은 스킬 정리는 끝났지만,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있었다.
‘마기는 충만하지만 별로 쓸 만한 게 없군.’
마룡과의 전투 중에 그는 마룡의 피를 빨아들였다.
흡혈 스킬을 통해 대상의 특성 또는 스킬을 복제할 수 있는 능력은 이 녀석에게도 통했다.
하지만 모든 스킬이 용족 전용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아테르 브레스(āter breath), 드래곤 피어 정도인가."
블라드 유진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검은 가루를 입김으로 불어서 한 번에 날려 보냈다.
흡혈로 건질 만한 스킬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이제 최종 보스를 향해서 전진할 시간이었다.
* * *
드드드드드!
중간 보스를 처치하고 끊어진 길 쪽으로 이동하자, 저 아래의 무저갱에서 시커먼 바윗덩이들이 무수히 솟아올랐다.
이곳에 처음 들어섰을 때, 바닥이 와르르 무너졌던 것과 반대로, 없었던 길이 생성된 것이다.
갑자기 허공에 다리가 생긴 터라, 한번 의심을 해 볼 만도 하건만 유진의 발걸음은 거침없었다.
만약 이 다리가 난데없이 무너진다고 해도 그에게는 녹턴이 있었다.
얼마든지 녀석을 소환하여 반대편의 목적지까지 갈 수 있으니, 돌다리를 두들겨 보지 않아도 되었다.
척!
그러나 마지막까지 바닥이 무너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규모 미궁답게 이곳은 자잘한 함정으로 도전자들을 괴롭힐 의도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저 몬스터의 강력함이 전부인 곳이었다.
‘이건 참 마음에 드네. 공간 전체에 충만한 마기도 괜찮고.’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약간 이질적이지만, 강력한 마기에 전율했다.
다리를 건너자 이곳에 처음 진입했을 때처럼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거대한 원형 공간이 나타났다.
유진의 눈에는 반대편의 끊어진 다리가 가장 먼저 포착되었다.
아마 오른쪽 길로 향했다면, 반대편에서 이 공간으로 들어오게 되었을 것이다.
"공략대는 아직인가."
짙은 마기로 가득한 대기 때문에, 반대편의 중간 보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소리나 불빛 따위가 전달되는 일도 없었다.
헌터들로 이루어진 미궁 공략대는 도착하지 않은 듯했다.
아마 중간에서 아크웰을 만났다면, 곧바로 진입할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블라드 유진이 대규모 미궁으로 진입한 이후, 대규모 미궁에서 다시 어마어마한 마기가 흘러나왔을 테니까.
일단 공략을 시작했을 때는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게 상책이었다.
‘이곳이 최종 보스의 방으로 가는 문.’
그는 자신의 기준으로 왼쪽에 치우쳐 있는 검은색 육각 기둥을 살펴보았다.
굵은 쇠사슬에 칭칭 감긴 채, 커다란 자물쇠로 단단히 잠긴 모습.
미궁의 파편처럼 크기는 작았지만, 그곳에서는 피부가 저릿저릿할 정도로 강력한 마기가 느껴졌다.
아무래도 이 공간에 가득한 마기는 저 육각 기둥에서 흘러나오는 모양이었다.
철컥! 처적!
"역시 안 되는군."
붉은 복주머니에서 미궁 열쇠 파편을 꺼내 자물쇠에 꽂아 보았지만, 돌아가기는커녕 뭔가 걸리는 듯한 소리만 들려왔다.
역시 설명대로 열쇠 파편을 모두 모아야 잠금을 풀 수 있는 듯했다.
문제는 아직 미궁 공략대가 도착하지 않았다는 거였다.
‘늦는군.’
미궁 공략대는 그보다 진입이 늦은 데다가, 중간중간의 몬스터를 모두 상대해야 했다.
그러니 아무래도 시간이 더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녹턴을 타고 날아가서 중간 보스 공략을 도울 생각은 없었다.
그 정도도 스스로 해내지 못한다면, 한국 헌터계에 대규모 미궁을 단독으로 공략할 자격 따윈 없었다.
드드드드드!
꽤 오랜 시간을 가만히 기다리자, 문득 묵직한 진동과 함께 반가운 굉음이 들려왔다.
무저갱에서 검은 바위들이 솟아오르며 반대편의 끊어진 다리를 연결하는 소리였다.
드디어 미궁 공략대가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눈을 뜬 유진은 다리를 건너오는 헌터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들은 마치 패잔병과 같은 모습이었다.
"정말 지독한 곳이로군. 숨쉬기도 힘든데, 몬스터의 수준도 엄청나."
"죽을힘을 다해서 쓰러뜨렸는데, 저게 중간 보스라니. 믿을 수가 없네."
헌터들은 퀭한 얼굴로 다리를 건너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휴식을 취했다.
짙은 마기 때문에 이곳에 오래 머무는 건 좋지 않지만,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대규모 미궁의 난이도는 이제껏 한국 헌터들이 경험했던 그 어떤 곳보다 높았으니까.
이 정도 수준의 전투를 경험해 본 사람은 전시영과 안지홍뿐이었다.
물론 이 중에서 가장 멀쩡한 사람도 딱 그 둘이었고.
"당신이 교황청의 비밀 병기?"
전시영은 육각 기둥 앞에 서 있던 블라드 유진을 향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비단 같은 은발의 미남자를 드라코 도무스의 몬스터라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니까.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나 당신 알아. 그때 뉴스에 잠깐 나왔던 사람이지?"
"그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
"어? 아저씨도 알았어? 난 나만 눈치챈 줄 알았는데."
"다들 알면서 그냥 쉬쉬한 거지."
혹시나 교황청 사람에게 무례를 범할까 싶어서 안지홍은 전시영의 앞으로 끼어들었다.
그러고는 서둘러 상황을 중재했다.
"잠깐 이야기 좀 하시죠. 피차 할 말이 많은 듯한데."
안지홍이 미궁 열쇠 파편을 흔들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세 사람은 평평한 곳에 모여 앉아 회의를 시작했다.
"일단 중간 보스를 둘 다 처치하는 건 성공한 듯합니다. 혹시 열쇠 파편을 보여 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지."
붉은 복주머니에서 미궁 열쇠 파편을 꺼낸 그는 중앙에 내려놓았다.
모양을 보니, 안지홍이 가져온 것과 꼭 맞는 형태였다.
전시영은 잽싸게 두 개의 파편을 붙잡고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아귀를 정확하게 맞추었다.
철컥!
"어? 뭔가 자석같이 찰싹 붙어 버리네. 이름도 바뀌었어. 완성된 열쇠래."
그녀는 안지홍에게 열쇠를 넘겨주었다.
아이템의 이름을 확인하고 난 다음, 유진에게도 차례가 돌아왔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이템 정보를 살펴보았다.
"그나저나 이대로는 최종 보스고 뭐고 절대 못 잡을 것 같은데? 안 그래? 아저씨?"
"우리야 버틸 만하다지만, A급 헌터들이 문제야. 당연히 힐러들도 엄청나게 지친 상태고."
두 사람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공략대를 돌아보았다.
A급 헌터 스무 명에 억지로 긁어모은 힐러 열 명이 공략대의 전부였다.
이 전력으로 최종 보스는커녕 중간 보스를 한 번 더 잡는 것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일찍 도착한 것 같은데 휴식이 필요하진……. 응?"
의견을 물으려 시선을 돌렸는데, 안지홍은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분명 방금까지 함께 있던 자가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전시영 또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진을 찾으려 했다.
한데, 바로 그 순간 어디선가 불길한 쇳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철컥! 텅! 터더덩!
[최종 보스의 시련으로 가는 문이 열립니다.]
[죽음이 한 발 앞으로 성큼 다가옵니다.]
"다, 당신 미쳤어? 이게 대체 무슨 짓……."
전시영의 놀란 목소리가 다 끝나기도 전에 육각 기둥에서 시커먼 기운이 빠르게 풀려 나왔다.
번―쩍!
이윽고 눈부신 빛이 터지며 미궁 공략대 전원은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안지홍의 당황한 목소리만이 육각 기둥의 앞에 메아리처럼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