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쿠구구구구구!
블라드 유진은 기괴한 소리를 내는 거대한 육각 기둥의 앞에 서 있었다.
이것이 바로 세계 3대 미궁 중 하나라는 양산의 드라코 도무스.
속칭 드래곤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미궁이었다.
그는 주변을 가득 메운 채, 대기를 무섭게 진동시키는 거대한 마기와 정면으로 맞서는 중이었다.
‘영향이 아예 없지는 않군.’
뱀파이어에게 마기는 물과 공기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기압이 엄청나게 높아지거나 수심이 깊어지면, 사람의 육신은 견딜 수가 없는 법.
아무리 뱀파이어라도 한계를 초월하는 고농도의 마기에는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전신을 옭아매는 강력한 마기를 느끼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척! 척!
이토록 강력한 마기라면, 뱀파이어라도 쉽사리 접근하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은 뱀파이어 일족의 정점에 선 어둠의 군주, 금세 고농도 마기에 적응하며 드라코 도무스에 다가갈 수 있었다.
"뒤따라올 인간들을 좀 도와줘야겠군."
고오오오오오!
그가 양손을 펼치자 주변의 짙은 마기가 요동치더니, 빠른 속도로 시야가 넓어지기 시작했다.
대규모 미궁에서 흘러나와 지표면 근처에 축적되던 마기가 유진의 체내로 쭉쭉 빨려 들어가 버린 것이다.
가히 놀라운 광경이었지만, 이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주변에 가득하던 마기는 오염 지역이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로 옅어져 버렸다.
‘마기는 다시 축적될 테지만, 시간이 걸릴 터. 인간들이 진입하기에는 훨씬 수월하겠지.’
마기를 모조리 빨아들인 유진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뒤쪽을 잠깐 응시했다.
자신의 발자취를 바짝 따라붙고 있을 미궁 공략대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거리가 너무 멀었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잠시 그러고 있던 그는 수십 미터 높이의 대규모 미궁 하단부로 몸을 밀어 넣었다.
처음 미궁의 파편에 들어갈 때처럼 거침없는 움직임이었다.
스윽!
흑색 표면은 매우 단단해 보였지만, 파문이 일며 그의 육신을 부드럽게 통과시켰다.
3대 미궁 드라코 도무스 내부로 들어간 블라드 유진은 작게 침음을 흘렸다.
"흠."
외부와는 달리, 대규모 미궁에 충만한 마기가 상상을 초월하는 농도였기 때문이었다.
순간적으로 숨이 턱턱 막힐 만큼 강력한 마기에 적응하느라, 그조차도 시간이 꽤 걸릴 정도였다.
아마 A급 최상위 수준의 헌터가 아니면, 들어오자마자 그대로 졸도해 버릴 것만 같았다.
‘마기뿐만 아니라, 규모도 엄청나군. 이 내가 잠깐이지만 압도될 정도라니.’
츠츠츠츠츠!
마기는 유진의 새하얀 피부를 타고 흐르며 기묘한 스파크를 일으키고 있었다.
잠시간 미친놈처럼 마구 부딪쳐 왔다가 거대한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조아리는 것 같이 이내 고분고분해졌다.
유진은 끝도 없이 펼쳐진 드라코 도무스의 내부를 여유롭게 쭉 둘러보았다.
미궁은 지구상에 존재하지만, 동시에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고작 아파트 한 채 크기의 육각 기둥에 들어왔다고 이토록 광활한 대지가 존재할 수는 없었다.
척!
그는 시커멓게 죽은 흙을 밟으며 정처 없이 걸어갔다.
미궁 내부로 들어왔다면 암흑화를 시전하여 몬스터의 시선을 피하는 게 정상이나, 지금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블라드 유진의 주변에는 몬스터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꽤 오랫동안 걸어가자, 그는 드라코 도무스의 전경을 얼추 알아볼 수 있었다.
"대단하군. 솔직히 이 정도일 줄은 몰랐거늘."
유진의 1차 목적은 드라코 도무스에서 성배를 찾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봉인율을 낮춰야만 했다.
그는 일반적인 헌터와 달리, 봉인을 해제해야만 레벨을 올릴 수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성체 미궁의 몬스터들은 더 이상 봉인율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택한 것이 바로 3대 미궁.
미리 이 내부로 들어와 강력한 보스 몬스터들을 쓰러뜨리면서 레벨을 올리고, 동시에 성배를 획득할 작정이었다.
성공할 자신은 있었지만, 이렇게 짙은 마기는 예상치 못했다.
‘길은 두 갈래인가.’
블라드 유진이 서 있는 곳은 거대한 원형의 땅덩어리였다.
놀랍게도 이곳은 무저갱의 위에 둥둥 떠 있는 상태였다.
그는 양쪽으로 나뉜 두 갈래의 좁은 길과 깊은 낭떠러지를 살펴보았다.
벼랑 아래에는 시퍼런 불꽃이 언뜻언뜻 비치고 있었다.
유진은 기묘한 푸른 빛을 보자마자 저 아래가 어디로 통하는 곳인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연옥이로군. 빠지면 곤란하겠어."
입장권을 통해 연옥에서 녹턴을 빼내 온 전적이 있었지만, 그건 특전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다른 방식으로 연옥에 떨어진다면, 되돌아올 방법 따위는 없었다.
그저 ‘정화하는 불’에 영혼이 영원히 타오르며 고통받는 게 일상이 될 터였다.
누군가가 구해 주기 전까지는.
‘왼쪽이 낫겠어.’
블라드 유진은 잠깐 앞쪽을 살피더니,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왼쪽 길을 택했다.
오른쪽 길보다 조금 더 동선이 짧은 대신 몬스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몬스터를 상대할 일이 없으니 가까운 쪽을 택했는데, 한참 진행하고 나자 뒤에서 괴상한 일이 벌어졌다.
쿠르르르르르!
왼쪽 길과 연결된 수백 미터 거리의 땅덩이가 무저갱 속으로 순식간에 가라앉아 버린 것이다.
이러면 그의 뒤를 따라올 공략대는 반드시 오른쪽 길을 통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그들은 몬스터를 상대해야 하니, 오른쪽 길이 더 편할 터였다.
유진은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길을 따라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암흑화.’
그의 육신은 검은 안개가 되어 멀뚱멀뚱 서 있는 몬스터 사이를 유유히 지나가고 있었다.
* * *
‘이 녀석이 중간 보스.’
수많은 몬스터 무리를 지나친 블라드 유진은 몸을 잔뜩 웅크린 거대한 녀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동그랗고 울퉁불퉁한 검은 바위처럼 보이는 녀석은 대규모 미궁의 중간 보스였다.
놈의 정체를 곧바로 알아본 그는 품속에서 작은 책자를 꺼냈다.
아크웰이 드라코 도무스에 관해서 조사한 짧은 보고서였다.
세계 3대 미궁은 아직 그 누구의 발걸음도 허용하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미궁의 이름은 주변에 서식하는 몬스터를 위성으로 확인하고, 추측성으로 지은 것에 불과했다.
드라코 도무스(drăco dŏmus), 일명 드래곤의 무덤.
그저 미궁 주변으로 용을 닮은 몬스터들이 우르르 돌아다니기에 붙은 명칭이지만, 내부의 분위기는 얼추 비슷했다.
이곳에는 대략 코끼리만 한 몸통에 거대한 날개와 긴 꼬리가 달린, 해츨링들이 바글거렸다.
중간 보스 또한 그런 녀석들과 비슷한 형태였다.
물론 크기는 비현실적으로 컸지만.
‘마기에 물들었으니 이름은 마룡이 알맞겠구나.’
마룡은 거의 웬만한 7, 8층 높이의 빌딩과 맞먹을 만큼 거대했다.
물론 녀석이 웅크리고 있으니, 날개와 꼬리를 제외한 몸통만 그 정도 크기라는 이야기였다.
놈의 육신에서 흘러나오는 마기만 봐도 웬만한 성체 미궁의 보스는 가볍게 찜쪄먹을 수준인 것 같았다.
‘이 녀석은 잡고 지나갈 수밖에 없겠어.’
블라드 유진은 이제껏 모든 몬스터를 암흑화로 피해 왔지만, 중간 보스는 사냥하려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놈의 뒤편으로는 더 이상 길이 이어져 있지 않았는데, 반대편 저 멀리 끊긴 끄트머리가 보였다.
맨 처음에 왼쪽 길로 들어섰을 때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수백 미터 거리의 뒤쪽 길이 무저갱 속으로 사라진 바 있었다.
예상컨대 아마 이 중간 보스를 잡아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리라.
게다가 이 녀석이 뿜어내는 마기를 느낀 유진은 반드시 죽여 없애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그의 봉인율을 낮춰 줄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공간은 널찍하군.’
지금껏 블라드 유진이 보아 왔던 해츨링들은 상당히 비좁은 곳에 날개를 접고 잠들어 있었다.
침입자를 감지하면, 녀석들은 일제히 날아올라 공중을 무대로 활동할 터였다.
아마 저곳에 발을 들인 자들은 수도 없이 내리꽂히는 해츨링들의 공격에 맥을 못 출 것이다.
지상에 발을 붙인 채 마음껏 날아다니는 놈들을 상대해야 했으니까.
아마 중간 보스도 그와 비슷할 테지만, 적어도 이곳은 이전처럼 그리 좁지는 않았다.
운신할 공간이 충분해 보이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룡의 앞으로 다가갔다.
상대가 잠들어 있는 틈을 타서 선제공격을 꽂아 넣고 전투를 시작할 참이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유진의 눈앞에 빛줄기로 이루어진 글귀가 떠올랐다.
[대규모 미궁의 중간 보스 ‘고대의 마룡 카제르시안’이 잠에서 깨어납니다.]
그와 동시에 웅크려 있던 시커먼 녀석의 몸체에서 시뻘건 두 개의 구체가 불쑥 나타났다.
마룡 카제르시안이 깨어나 눈을 번쩍 뜬 것이다.
"크르르르! 쿠오오오오!"
쿠구구구구구구!
놈이 깨어나 몸을 휘감았던 꼬리를 풀어내고, 날개를 펼치자 덩치가 기존의 두 배는 넘어 보였다.
미궁 내부를 쩌렁쩌렁 울리는 포효와 함께 무시무시한 살기가 감각을 꿰뚫고 들어왔다.
한데, 녀석의 기백이 공간 전체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음에도 블라드 유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저 늘어뜨린 새하얀 손에서 시뻘건 무언가를 천천히 뽑아낼 뿐이었다.
스이잉!
실체화한 피의 권능은 1m가 넘는 다섯 줄기의 칼날이 되어 그의 손끝에 머물렀다.
이윽고 기지개를 켠 카제르시안이 블라드 유진을 향해서 아가리를 쫙 벌렸다.
그러자 시커먼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와 일직선으로 쭉 쏘아지는 게 아닌가.
쿠화아아아아!
놈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그를 향해 대뜸 드래곤의 전매특허 중 하나인 브레스를 쏘아붙인 것이다.
하지만 유진을 향해서 날아들던 시커먼 줄기는 대각선 방향으로 굴절되어 지면을 강타했다.
콰치지지지지!
소수혈인이 쏟아지는 무시무시한 에너지의 향연을 간단히 옆으로 밀어냈기 때문이었다.
칼날이 기묘한 각도로 힘을 흘려보내자, 블라드 유진은 가만히 선 채로 브레스를 막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브레스가 직격한 지면은 결단코 무사할 수가 없었다.
쿠콰콰콰콰콰!
마룡의 아가리에서 쏘아진 에너지 덩어리는 바닥을 그야말로 초토화하고 말았다.
대지를 이루는 돌과 흙을 갈아엎은 것뿐만 아니라, 숫제 소멸에 가까운 타격을 선사했다.
지면에 커다란 상처가 생겼다면 긁혀 나온 물질이 있어야 하는데, 그저 깊은 골짜기만 만들어 버렸다.
검은 브레스에 일정 시간 이상 노출된 물질은 완벽하게 소멸했다.
그야말로 소름 끼치는 위력이었다.
하지만 소수혈인으로 녀석의 공격을 흘려 내는 데 성공한 유진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마치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마룡 카제르시안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이윽고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재미있구나. 어디 더 재롱을 부려 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