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18화 (19/226)

18화

결국에 한국 헌터계는 아크웰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3대 미궁 중 하나인 드라코 도무스를 공략한다는 건 크나큰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고르 아스페라 공략에 성공한 러시아가 어떻게 되었던가.

대규모 미궁이 정리되고 나자, 무수히 생성되던 성체 미궁의 증식 속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러시아는 서서히 전력을 회복하면서 여유롭게 성체 미궁 공략에 나설 수 있었다.

"드디어 마지막이로군."

안지홍은 거대한 덩치의 미궁 보스를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한국 헌터계는 곧장 미궁 공략대를 조직하여 충주까지 길을 뚫기 위해 노력했다.

교황청의 비밀 병기가 내건 조건을 만족하기 위해 최상위 전력을 몽땅 차출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곳에는 안지홍, 전시영과 더불어 수백 명의 헌터들이 파견된 상태였다.

덕분에 충주 직전까지 오기는 했지만, 공략대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부하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도 벅차 보이는군. 최대한 빨리 끝내야겠어."

"언제는 느긋하게 잡았어?"

안지홍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전시영은 코웃음을 치며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지만, 보스의 덩치는 이제껏 봐 왔던 그 어떤 녀석보다 거대했다.

"고오오오오!"

족히 수십 미터는 될 듯한 높이에 사방으로 뻗은 다섯 줄기의 큼지막한 살덩이.

충주 성체 미궁의 보스는 새파란 불가사리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놈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촉수를 뻗으며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마기를 끊임없이 집어삼켰다.

"이 정도 수준은 진짜 오랜만이네. 아주 그냥 피가 끓어오르겠어."

전시영은 불가사리의 측면으로 달려가며 양손에 푸른 불꽃을 피워 올렸다.

그러더니 거대한 두 줄기의 화염을 가공할 기세로 뿜어 댔다.

"연옥의 숨결."

콰아아아아!

그녀가 발출하는 불길은 블라드 유진이 연옥에서 경험했던 ‘정화하는 불’과 닮아 있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신성한 화염이 쏟아지자, 불가사리는 괴이한 소리를 내며 촉수를 꿈틀거렸다.

초고온의 화염에 살덩이가 빠르게 불타올라, 무시무시한 작열통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킈이이이익!"

놈은 눈이 없는데도 마치 보이는 것처럼 매우 정확하게 전시영의 위치를 찾아냈다.

그러고는 거대한 촉수를 뻗어 지면을 거칠게 퍼 올렸다.

쿠콰콰콰콰콰! 타닷!

"차핫!"

그녀는 잽싸게 허공으로 몸을 띄우며 불가사리의 촉수를 발바닥으로 강하게 밀어 찼다.

반동을 이용하여 옆으로 쭉 쏘아지듯 이동하자, 녀석의 공격 범위에서 빠르게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고는 공중에서 신형을 틀며 균형을 유지하고, 검지를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초열지옥(焦熱地獄) 역풍(逆風)."

삐이이잉―!

어디선가 귓가를 간질이는 듯한 고주파 음이 들림과 동시에 전시영의 손끝에서 샛노란 구체가 생성되었다.

그 상태로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노란 구슬이 그대로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닌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문득 불가사리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었다.

"좀 뜨거울 거다."

삐이이이이이―!

어느새 귓가에 울리던 고주파 소리는 보스 몬스터의 몸속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거슬리는 소리가 엄청난 속도로 정점에 달했을 때, 굉음과 함께 빛줄기가 불가사리의 피부를 뚫고 분출되었다.

쿠화아아아아앙!

내부에서 시작된 대폭발에 불타는 살점과 뜨거운 혈액이 마치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후―!"

전시영은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자신의 손끝에 입바람을 불며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쉬이이이이익! 쿠후우웅!

놀랍게도 불가사리는 세 개의 촉수를 놀려 그녀를 공격했다.

초열지옥 역풍에 당했던 쪽은 회복을 위해 뒤로 뺀 다음, 다른 촉수들을 동원한 것이다.

몸통 중앙에 대폭발이 있었음에도 녀석은 큰 무리 없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걸 맞고도 멀쩡해?"

필살기에 해당하는 스킬을 전개하고도 별 효과를 보지 못하자, 그녀의 얼굴은 오기로 가득했다.

전시영은 무수히 쏟아지는 촉수를 피해 좌우로 잽싸게 움직였다.

쉬이이이! 쿠화앙!

불가사리의 촉수가 떨어질 때마다 지면에 거대한 상처가 생겨 발 디디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놀라운 균형 감각과 재빠른 움직임으로 공격을 피하며 반격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오른손을 쫙 펼친 채로 다섯 개의 샛노란 구체를 동시에 만들어 낸 것이다.

"약점이고 나발이고, 이번엔 뒈지지 않고 못 배길 거다. 초열지옥 연쇄역풍(連鎖逆風)!"

삐잉―! 삐잉―! 삐잉! 삐잉! 삐잉!

다섯 번의 고주파 음이 거의 동시에 들리는 순간, 위기를 느낀 불가사리는 회피를 시도했다.

이번에는 정말이지 심상치 않은 공격이 펼쳐질 거라는 걸 감지한 모양이었다.

녀석의 거체가 꿈틀거리자,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엄청난 진동이 느껴졌다.

쿠구구구구구구!

"흥! 피해 봤자 소용없다."

초열지옥 연쇄역풍은 세계 최정상급 위력을 지닌 스킬이었다.

소모하는 에너지가 기본형의 열 배나 되지만, 다섯 개의 역풍이 연쇄 작용을 이루어 더욱 거대한 파괴력을 발휘했다.

정통으로 맞는다면, 성체 미궁의 보스 정도야 그대로 녹아내려 버릴 터였다.

물론 그러기에는 이 녀석의 덩치가 과도하게 커서 효과가 어떨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뚝!

불가사리가 몸을 빼내려 했지만, 고주파 소리가 딱 끊기며 시퍼런 피부가 불쑥 솟아올랐다.

마치 기포가 생기는 것처럼 꿀렁거리더니, 이윽고 어마어마한 폭음이 대기를 강타했다.

쿠웅―! 쿵―! 쿠구궁!

아까보다 소리는 작았지만, 위력은 더욱 강력했다.

놈의 몸속 깊은 곳에서 초열지옥 역풍이 연속으로 터졌기 때문이었다.

"고오오오오오!"

전신이 너덜너덜한 걸레짝이 되었지만, 불가사리는 살아 있었다.

그뿐이랴, 녀석은 회복을 위해 뒤로 쭉 빼 두었던 촉수를 당겨 와서 반격을 가하기까지 했다.

쉬익! 쿠화아앙!

난데없이 휘둘러진 촉수에 전시영은 재빨리 물러서야만 했다.

어느새 그녀의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단번에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사용한 탓에 강인한 S급 헌터의 육신에도 무리가 온 것이다.

"결국에 공을 다 빼앗길 것 같은 느낌인데."

아무래도 이 녀석의 약점이 체내에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한편, 안지홍은 큼지막한 대검을 들어 올리며 불가사리의 주변을 크게 돌았다.

전시영의 맹공 덕분에 보스를 면밀하게 살필 기회가 생긴 것이다.

녀석은 불가사리와 비슷한 형태였지만, 관족이 전혀 없었고 속도도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대체 어느 불가사리가 저렇게 빨리 촉수를 수축하고 휘두르면서 공격을 가한단 말인가.

꽤 오랜 시간 놈을 살피던 안지홍은 눈을 빛내며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겼다.

"저건 왜 저러고 있는 거지?"

불가사리 보스의 행동 패턴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촉수를 어지럽게 놀리며 공격하는 한편, 기민한 움직임으로 공수 분배를 정확히 했다.

시커멓게 탄 촉수는 슬쩍 뒤로 빼서 회복하며 전시영에게는 새로운 먹잇감을 던져 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하나의 촉수는 항상 뒤로 빼 두었다.

거리를 두고 살펴보니 고정적으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촉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안지홍은 은밀하게 공격에 가담하지 않는 촉수 쪽으로 접근해 보았다.

쿠구구구구구!

"음?"

그러자 불가사리의 움직임이 급격하게 변하는 것이 아닌가.

녀석은 슬그머니 회전하며 전시영에게 몸통을 아예 내주고는 후방의 촉수를 저 멀리 빼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안지홍은 눈을 빛내며 미소를 지었다.

"이거였군."

타닥! 쉬이이이익!

순간적으로 자세를 낮추자, 안지홍의 신형이 지워지듯 말끔하게 사라졌다.

대검을 들고 있어서 묵직한 공격을 날릴 것 같지만, 놀랍게도 이자의 스타일은 속도 위주였다.

일순간 모습을 감추었던 안지홍은 불가사리가 보호하려 했던 촉수 근처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이윽고 녹색 섬광이 동심원을 그리며 번득이는 게 아닌가.

"페르디티오의 칼날."

스각! 촤좌좍!

단 한 번의 검격에 안지홍은 수십 미터의 범위를 깡그리 쓸고 지나가 버렸다.

페르디티오의 칼날은 러시아의 4대 미궁 최종 보스를 쓰러뜨릴 때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기술이었다.

전시영의 화염 공격처럼 화려함은 없었으나, 그 어떤 단단한 물체도 모조리 잘라 버릴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놀랍도록 빠르고 강력한 공격에 불가사리의 촉수는 대번에 떨어져 나갔다.

쿠우웅!

"그오오오오오!"

촉수가 떨어져 나가자, 괴성이 들려옴과 동시에 보스의 몸이 엄청난 속도로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쩌저적! 쩌저저저적!

마치 말라비틀어진 바닷가의 불가사리와 마찬가지의 모습으로 새하얗게 변하며 부스러졌다.

"의외로 간단하게 이기기는 했는데, 피해가 너무 크……. 음?"

쐐애애애액!

무력하게 박살 난 보스와 부하 몬스터들과 혈전을 벌이는 공략대를 보며 안지홍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기묘한 파공성이 들려오는 게 아닌가.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며 대검을 휘둘러 보았지만, 시커먼 물체는 지척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푸욱!

"크흡!"

불의의 습격에 안지홍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복부를 꿰뚫려 버렸다.

스잉! 콰직! 콰직!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든 안지홍은 징그럽게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연속으로 쑤셔 댔다.

그렇게 수십 번의 칼질에 당하고 나서야 검은 물체는 움직임을 멈췄다.

복부를 꿰뚫은 물체는 대검에 잘려 나갔던 불가사리의 촉수였다.

시커멓게 변해 버린 굵직한 촉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안지홍의 옆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문득 고개를 돌려 보니, 전시영이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 방 먹었네. 최후의 발악에 당한 거야?"

그러자 안지홍은 입술을 비틀며 나직이 말했다.

"괜찮아. 이 정도는."

덥석! 콰직! 찌걱! 뚜드드득!

보스의 촉수를 붙잡고 쑥 빼내자, 혈액과 찢어진 근육 조각이 왕창 묻어 나왔다.

하지만 안지홍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턱!

이런 일이 익숙하기라도 한 듯, 촉수를 뽑아 앞으로 가볍게 던져 버렸다.

복부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면, 다량의 혈액과 함께 내장이 쏟아져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안지홍의 육신은 평범한 이와 전혀 달랐다.

이미 촉수를 뽑아낼 때부터 구멍은 새살로 거의 다 메워졌고, 금세 원상 복구된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전시영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하! 참 속 편한 능력이야."

"미안하지만 이것도 엄연히 에너지가 소비되는 스킬이라네."

그녀는 안지홍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저 멀리서부터 시작되는 공간의 붕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쿠구구구구구!

충주의 성체 미궁은 이제 완전히 정화된 것이다.

* * *

미궁 공략대는 갖은 고생을 다 겪으며 양산에 간신히 도착했다.

충주를 돌파한 직후부터는 오염 지역이 없었지만, 그들의 고난이 끝난 건 아니었다.

수많은 몬스터가 공략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미궁 공략대는 그런 놈들을 하나하나 격파하며 양산까지 쭉 내려왔다.

마기에 물든 땅이 아닌 데다가 보스 몬스터도 없어서 놈들을 처리하는 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무수한 전투를 치르느라 헌터들이 지쳤을 뿐이었다.

"일단 오늘은 여기서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다들 너무 전투를 많이 치렀습니다."

"아무래도 그러는 게 좋겠군. 이대로는 드라코 도무스에 다다라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겠어."

정현철의 보고에 안지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체계적인 피로도 관리와 전력 투입 덕분에 미궁 공략대의 인력 손실은 그리 크지 않았다.

다만 당장 투입할 만한 사람이 별로 없을 뿐이었다.

"캠프 설치하고, 전원 휴식에 들어간다. 본부 지원은 언제쯤 들어오지?"

"아마 일주일 정도는 걸릴 겁니다."

오염 지대가 아니라면, 현대 무기를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었다.

한국은 교황청 비밀 병기와 미궁 공략대의 활약으로 엄청난 넓이의 토지를 확보한 상태.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잘 활용해야만 했다.

아마 한국군은 오염 지대의 경계에 방벽을 설치하고, 미친 듯이 전력을 투사하며 이곳까지 내려올 터였다.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비밀 병기와 만나면 될 듯했다.

"드디어 만나게 되는 건가. 그자의 얼굴이 궁금하군."

"나도 그래. 얼마나 대단한 작자길래 이런 미친 짓을 벌일 수가 있는 거지?"

안지홍의 말에 전시영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세계 3대 대규모 미궁, 드라코 도무스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남서쪽 언덕에서 웬 왜소한 체형의 사람이 이쪽으로 터덜터덜 걸어오는 게 아닌가.

그녀는 안지홍의 어깨를 툭툭 치며 언덕을 가리켰다.

"우린 이제 막 도착했는데, 혹시 아저씨 길드원 중에 정찰 나간 사람 있어?"

"그럴 리가. 이 주변에는 몬스터가 없다는 보고를 이미 받았는데? 저건 누구지?"

두 사람을 비롯한 미궁 공략대원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남서쪽 언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잠시 후, 이국적인 외모의 청년이 다가오는 게 아닌가.

변변찮은 공격 스킬 하나 없다던 교황청 외교관이 이곳에 나타나자, 헌터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지홍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아크웰에게 말을 걸었다.

"그쪽은……. 교황청 외교관 아니오?"

"안녕하십니까? 생각보다 좀 늦게 오셨네요?"

"늦다니? 최선을 다해서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아, 여러분이 늦었다는 게 아닙니다. 그저 어떤 분이 좀 빠르셔서요."

"그러고 보니 혼자시군. 그 비밀 병기라는 분은 어디 있습니까?"

안지홍이 주변을 둘러보며 묻자, 녀석은 저 멀리 보이는 대규모 미궁을 엄지로 가리키며 말했다.

한데, 아크웰의 대답을 들은 공략대원들은 동시에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너무도 황당한 답변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이미 먼저 진입하셨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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