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한국 헌터 협회의 대회의실.
이곳에는 서울의 멸망을 저지하고 있는 한국 헌터계의 희망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하루하루 미궁의 파편을 정화하는 것도 벅찬 지경에 최상위 헌터들이 협회에 집결할 이유는 없었다.
만약 이들이 반드시 모여야 한다면, 파편을 날려 대는 성체 미궁을 공략할 때뿐일 터였다.
하지만 오늘은 미궁의 파편 정화 작업에서 각 길드의 핵심 인재를 보내야 할 만큼 중대한 사안이 있었다.
바로 교황청 외교관 아크웰이 한국 헌터계에 엄청난 제안을 했기 때문이었다.
"잠깐만요.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뭐라고 하셨죠?"
방금 무슨 엄청난 폭로라도 터진 듯, 회의장은 시끌시끌하기 그지없었다.
리브라 길드의 정현철이 단상에 서 있는 아크웰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헌터들의 웅성거림은 점차 줄어들었다.
일단 논란이 되는 건 둘째치고 교황청 외교관의 대답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서슬 퍼런 정현철의 눈빛과 뭔가 과열된 분위기에 아크웰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성난 한국 헌터들에게 끌려가 몰매를 맞을 것 같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아크웰은 한숨과 함께 방금 했던 이야기를 반복했다.
"……드라코 도무스를 공략하자는 제안을 하러 왔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교황청 외교관의 말이 이어지자, 회의장의 분위기는 다시 가열되기 시작했다.
현시점의 한국 헌터계에 3대 미궁을 공략하자는 제안은 사실상 자폭 명령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한국 헌터계의 힘만으로는 파편의 확장을 막는 것도 벅찬 거 모르십니까? 교황청에서 오셨다면, 잘 아실 텐데요. 우리가 혹한의 역경에서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를 말입니다."
웅성거림이 살짝 가라앉았을 때, 리브라 길드의 정현철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날 선 비판을 쏟아 냈다.
언사가 다소 거칠기는 했으나, 이자의 말에는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러시아의 리고르 아스페라는 교황청의 주장으로 공략하게 된 거였고, 한국은 그곳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약속했던 드라코 도무스 공략 또한 무기한 연장되고 말았다.
다음 차례로 양산의 드라코 도무스 공략을 해 주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 없을 정도로 헌터계 전체가 몰락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교황청이 직접적인 위험 범위 내에 들어감으로써 힐러 지원도 줄어든 상황.
염치가 있으면 교황청 외교관이 저딴 발언을 결단코 할 수가 없었다.
"블라드 유진 님의 예상대로 반응이 거칠군."
아크웰은 나직이 중얼거리며 복잡한 눈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놀랍게도 자신을 이곳에 보낸 유진은 수백 킬로미터 밖에서도 상황을 정확하게 예상하고 있었다.
"설명할 수 있게 기회를 주십시오."
단상에 바로 선 아크웰은 한국식으로 고개를 숙이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기브르 길드의 마스터 이진화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양손을 펼쳐 보였다.
발언 기회를 달라는 움직임에 헌터들의 웅성거림이 줄어들었다.
"교황청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으니까 외교관께서 대규모 미궁을 공략하자고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숙원 사업이나 마찬가지인데요."
부드럽게 말을 받았으나, 아크웰의 등에는 더욱 식은땀이 흘렀다.
이번 작전은 교황청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에 아크웰은 눈을 질끈 감더니, 크게 심호흡한 후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 교황청의 지원은 없습니다."
"뭐라고요?"
"그게 지금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우리끼리 미궁을 정화하는 게 수월했으면, 애초에 이 지경까지 왔겠어요?"
"옳소! 굳이 빚질 필요 없이 우리끼리 해결하면 될 일이지요."
아크웰의 발언이 끝나자 협회 강당에 모인 헌터들은 일제히 목소리를 높였다.
당연히 그들은 말도 안 되는 작전을 하자며 이 자리를 만든 교황청 외교관에게 역정을 쏟아 냈다.
아크웰의 발언이 한국 헌터계가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인내심의 한계를 가뿐히 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놓고 욕을 들어먹는 지금까지도 아크웰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유진 님의 말대로 했다가 만약 잘못되기라도 하면, 난 진짜 끝장인데……."
이탈리아어로 정말 작게 중얼거린 터라, 아크웰의 발언은 아무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만약 저 말을 한국 헌터들이 이해했다면, 한 번 더 난리가 났을 것이다.
작전이 실패하면 당신은 외교관에서 잘리는 거로 끝이겠지만, 우리는 국가 전체가 멸망의 길을 걸을 거라고.
"자자, 너무 날이 서 있는 것 같군요. 역정만 내지 말고, 교황청 외교관께서 말씀하실 수 있도록 기회를 줍시다."
기브르 길드 마스터 이진화가 다시 한번 나서서 중재했지만, 헌터들의 웅성거림은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사그라졌다.
이진화는 2 대 8 가르마를 쓸어넘기며 아크웰을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계속 설명하시죠."
"네, 작전 개요는 이렇습니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상당히 뛰어난 헌터 강국입니다. 다들 러시아의 대규모 미궁 공략 작전을 기억하실 겁니다. 10년 전의 일이죠."
아크웰은 빔 프로젝터에 몇 장의 사진을 띄우며 러시아의 대규모 미궁을 거론했다.
S급 헌터 스무 명에 A급 헌터 100명을 투입한 결과는 참혹했다.
공략은 성공했지만, 고작 S급 헌터 열 명만이 살아 돌아왔으니까.
"하지만 이 표를 좀 보십시오. 지난 세월 동안 헌터들은 굉장한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아크웰은 화면에 커다란 표를 띄우며 말했다.
교황청 외교관의 설명대로 10년 전과 지금의 헌터들은 같은 등급이라도 질적으로 전혀 달랐다.
보유한 스킬의 수가 월등히 많은 데다가 등급도 높았고, 아이템까지 훨씬 좋았다.
현재 A급 상위권 헌터는 그 당시의 S급과 거의 맞먹는 수준이었다.
아크웰은 평균 지표보다 좀 더 한국 헌터들을 치켜세워 주며 설명을 이어 갔다.
"특히나 한국 헌터계는 그런 격차가 더욱 두드러집니다. 지난번에는 자력으로 미궁을 정화하는 쾌거를 올렸지 않습니까?"
"상당한 희생이 있었지요. 그리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한국 헌터계는 래틀 스네이크 소굴 옆에 있던 성체 미궁 하나를 정화한 바 있었다.
원래 공략하려던 곳을 유진이 먼저 해결해 버렸으니, 남은 전력을 돌려서 다른 곳을 친 것이다.
다행히 공략에는 성공했지만, 피해가 상당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미궁을 정화하지 않으면, 한국에 희망은 없었다.
미궁의 파편이 날아오는 것과 정화 횟수를 맞추지 않으면, 자꾸만 영토가 줄어들기만 할 터였다.
그렇게 된다면, 최후의 보루인 서울에 남은 건 멸망뿐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헌터들도 그 사실을 잘 알았기에, 아크웰의 말을 헛소리라 치부하고 내쫓을 수가 없었다.
어찌 되었건 미궁 공략은 이루어져야 했으니까.
"그래서 말씀하고자 하는 요점이 뭡니까?"
"……."
리브라 길드의 정현철이 살짝 퉁명스럽게 묻자, 아크웰은 잠시 침묵했다가 고개를 번쩍 들며 말했다.
"S급 헌터 두 명과 A급 최상위 헌터 20명만 있으면, 대규모 미궁을 공략할 수 있습니다."
"허! 대체 누가 그딴 평가를 한 겁니까? 아니, 그게 된다고요?"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요?"
아크웰의 말이 끝나자, 앞자리에 앉은 헌터들이 헛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러자 비장한 목소리로 그들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우리에게는 교황청에서 온 비밀 병기가 있습니다."
쿠우웅!
바로 그 순간, 대회의실에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정적이 흘렀다.
아크웰의 발언이 놀라워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회의실 뒤편의 문을 거칠게 열며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비밀 병기? 그딴 게 다 무슨 소용이야?"
붉은 단발머리를 휘날리며 들어온 날카로운 인상의 여성.
호리호리한 체형이었지만, 키는 180cm 정도로 상당히 큰 편이었고 보기 드문 근육질이었다.
입가에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으나, 그녀의 형형한 눈빛에는 심신을 내리누르는 듯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얼굴을 가로지르는 얇은 흉터 때문에, 더욱 위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늦으셨군요."
"바쁜 사람 오라 가라 하는 것도 띠꺼운데, 시간까지 지켜야 하나?"
"크, 크흠! 그런 의미로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괜히 한 마디를 붙였다가 욕을 먹은 정현철은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 앉았다.
S급 헌터를 보유한 거대 길드의 부길마조차 함부로 하지 못하는 걸 보니, 결단코 평범한 인물은 아닌 듯했다.
처음 만난 거였지만, 아크웰은 상대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억지로 웃으며 살짝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전시영 랭커님."
한국이 낳은 희대의 테러리스트, 최연소 S급 헌터, 미치광이 방화광.
그녀를 지칭하는 별명은 많고도 많았다.
그만큼 전시영은 헌터계에서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러시아의 리고르 아스페라를 복기할 때, 그녀의 무지막지한 화염 공격이 없었다면 피해가 두 배는 더 컸을 거라는 분석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세계적으로도 알아주는 최강의 헌터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설명을 다시 드려야 할까요?"
"됐어. 오면서 대충은 들었으니까."
척! 터엉!
전시영은 대회의실 제일 뒷자리에 앉더니, 앞 좌석에 다리를 올려놓았다.
그러자 묵직한 징이 달린 부츠에서 시뻘건 혈액과 시커먼 그을음이 뚝뚝 떨어졌다.
분명 방금까지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온 것이리라.
덜컥!
"으흠! 오자마자 무슨 분위기를 그렇게 잡나?"
그런데 누군가가 대회의실로 들어오며 전시영이 열어 둔 문을 닫았다.
엄청난 덩치를 자랑하는 중년의 남자.
얼굴에는 세월의 흐름이 꽤 있었지만, 이자의 목 아래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어깨에 걸친 대검을 마치 이쑤시개처럼 다룰 정도로 굵은 팔뚝의 피부는 매끄럽기 그지없었다.
"여, 아저씨. 왔어?"
"늦어서 미안하구먼."
전시영과 인사한 남자는 살짝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크웰은 이자의 정체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리브라 길드의 마스터이자, 한국 최강의 탱커라고 불리는 안지홍이 아니었던가.
리고르 아스페라 공략에서 선봉을 맡았던 자라, 교황청 소속인 아크웰이 모를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나도 얼추 듣고 와서 설명은 필요 없네. 하던 거나 계속하시게."
"아, 네."
일단 대답은 했지만,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진땀을 뺐다.
갑자기 한국의 S급 랭커 두 명이 모습을 드러낸 탓에 머릿속이 엉켜버렸기 때문이었다.
아크웰이 우왕좌왕하고 있자, 기브르 길드 마스터 이진화가 대화의 물꼬를 터 주었다.
"일단 비밀 병기에 관한 설명이 필요하겠군요. 대체 뭘 할 수 있기에, 이런 제안이 가능한 겁니까?"
"비밀 병기는 몬스터의 감각을 속이는 게 가능합니다. 마기의 영향도 받지 않고요."
잠시 숨을 고른 아크웰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
"무력 수준은 S급을 상회합니다. 이를테면, 혼자서 성체 미궁을 클리어할 정도죠."
"음……."
교황청 외교관의 설명에 좌중은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믿기 힘든 이야기였지만, 빔 프로젝터에서 증거 사진이 쭉쭉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비밀 병기의 위력은 충분히 증명되었군. 그래서 우린 뭘 어떻게 하면 되나?"
헌터들이 자신의 의견을 속닥이는 동안, 안지홍은 눈을 빛내며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아크웰은 밝게 웃으며 블라드 유진이 남긴 말을 전달했다.
"아, 네. 충주까지는 알아서 뚫고 오랍니다."
"이제 갓 생긴 파편도 아니고 상당한 크기의 성체 미궁을 몇 개나 뚫어야 하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교황청은 우리에게 희생밖에 강요할 줄 모르나?"
10년 전, 교황청은 한국에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게다가 비밀 병기랍시고 보낸 자도 이제껏 저들이 해 왔던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행보를 보였다.
수십 km의 오염 지역을 뚫고 가려면, 아마도 한국 헌터계의 전력을 모조리 투입해야 할 터였다.
도무지 설득하기가 쉽지 않은 분위기라, 아크웰은 선뜻 안지홍의 말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유진이 한 말이 떠오르는 게 아닌가.
하는 수 없이 아크웰은 그의 말을 전달하고 회의를 끝내려 했다.
"어……. 그분께서 전하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말해 보게."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고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