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희한한 곳이군. 종교 관련 시설이 아닌데도 예수상이 있다니.’
유진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작은 백색 석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머리를 돌렸다.
안으로 들어간 전진우의 움직임에 맞춰서 건물 외벽을 따라 천천히 이동한 것이다.
내부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는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목표를 추적할 수 있었다.
레이스 트래킹의 효과가 계속 발휘되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암흑화.’
스으으으으!
녹턴에서 내린 유진은 자신의 몸을 안개로 바꾸며 창틈을 통해서 안으로 침투했다.
만약 건물 내부에 A급 헌터가 있다면, 그의 기척을 감지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유진은 추적을 강행했다.
아무런 위험 부담도 지지 않고 고급 정보를 빼낼 수는 없을 테니까.
스윽!
일정 거리를 두고 뒤를 따르던 그는 전진우가 멈춰서자 숨을 죽이며 기다렸다.
이윽고 녀석은 두리번거리며 어두컴컴한 복도를 살피더니, 어떤 방으로 슬그머니 몸을 밀어 넣었다.
놀랍도록 은밀하고 민첩한 움직임이었다.
‘잠시만 기다려 보자.’
유진은 미동도 하지 않고 어둠과 동화되어 있다가 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추적을 재개했다.
스르르르륵!
암흑화한 그의 육신은 전진우가 들어간 문틈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그러자 이윽고 웬 남자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상하군. 아무것도 없을 리가 있나."
"제 실력을 의심하는 겁니까? 고작 B급에 불과하지만, 잠행 관련 능력에서는 한국 최고라고 자부합니다."
"그거야 나도 잘 알지. 그래서 당신을 고용한 거니까."
"제 정보는 정확하다고 자부합니다. 변복을 여러 번 했기에 당연히 추적도 없을 테고요."
밀실 안에는 두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고, 전진우는 그 앞에 서서 설명하는 중이었다.
탁자에는 성당 내부를 찍은 사진이 놓여 있었는데, 언뜻 아크웰의 얼굴이 보였다.
"음. 알겠네. 의뢰는 성공한 거로 하지."
"그럼 나머지 대금을 치러 주십시오."
"가져가게."
스윽! 지이익!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가 탁자 위의 가방을 앞으로 밀자, 전진우는 곧장 지퍼를 열어 보았다.
"정확하군요."
"이제 돌아가게. 함구하는 거 잊지 말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비릿한 미소를 지은 전진우는 가방을 둘러메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자가 소리도 없이 방을 나서자, 밀실 내부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단단한 얼음 같던 분위기는 소파에 앉은 백발의 남자가 입을 열면서 서서히 풀렸다.
"교황이 사람을 보냈다더니, 그냥 의례적인 행사였던 모양이오."
"그 늙은이가 또 무슨 수로 우릴 괴롭히려 드는 건지 걱정이 많았소이다. 지난번에도 외교관을 보내 성기사단의 지원을 끊는다며 으름장을 놓지 않았습니까?"
"그랬지요. 거의 멸망에 이른 한국 땅에서 지원 없이 어찌 버티라고 그런 망발을……."
"어쨌거나 이번에는 이상한 수작을 부리려는 게 아니라니 다행입니다."
"그럼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겠군요."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블라드 유진의 검은 안개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교황청 내부에 파벌이라…….’
1천 년 전, 일족이 성기사단의 위세에 눌려 멸망의 길을 걷던 때.
당시의 교황청은 도무지 뚫을 수 없는 방패와 무적의 창을 지닌 괴물이었다.
성기사단 휘하의 성자들은 마치 한 사람처럼 교황 아니, 신의 뜻을 따랐다.
하지만 현재의 교황청 내부는 두 패로 나뉘어 서로 견제하는 형국이었다.
성기사단의 일원으로 보이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그는 꽤 유용한 정보를 건질 수 있었다.
까맣게 염색한 머리칼을 단정하게 빗어넘긴 중년 남자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탁자의 서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교활한 교황이 이리도 단순한 수를 낼 리가 없을 텐데요."
"분명 우리가 모르는 뒷공작을 해뒀을 겁니다. 외교관 말고도 서울대교구청을 예의 주시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외교관이라는 자가 지난번처럼 그저 전령 역할일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이번에는 다른 자를 써 보심이 어떨지요."
"그럽시다. 전진우 말고도 움직일 말은 또 있으니까요."
스윽!
대화가 끝나자 두 사람은 조용히 일어서더니,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한 사람은 그대로 안쪽의 책장에 숨겨진 비밀 문으로 들어갔고, 백발의 노인은 복도로 나왔다.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던 그자는 전진우와 마찬가지로 지하로 내려가 차를 타고 건물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확인한 유진은 창문을 통해 밤하늘로 올라간 다음, 대기하고 있던 녹턴의 등에 올라탔다.
‘잘만하면 교황청 내부의 알력을 이용할 수도 있겠군.’
그는 벌써 저 멀리 도로의 붉은 불빛이 되어 사라져 가는 백발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그렇게 기다리자, 이윽고 건물 내부의 비밀 문으로 들어갔던 남자가 감각에 걸려들었다.
전진우의 추적이 의미 없어진 시점이라, 유진은 흑발 중년 남자에게 레이스 트래킹을 걸어 둔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 이것도 별로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일단 저쪽은 가만히 놔둬야겠군. 괜히 들쑤실 필요가 없겠어."
적의 적은 아군이라.
교황과 대립하는 이들을 굳이 견제할 이유는 없었다.
"가자."
"이히히힝!"
그는 녹턴을 타고 밤하늘을 아무런 소리도 없이 질주했다.
* * *
명동성당으로 돌아온 블라드 유진은 계획대로 차근차근 미궁 공략을 개시했다.
서울의 안전 구역과 맞닿은 곳을 정화해 버리면, 사람들의 시선을 너무 많이 끌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약간의 편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대규모 미궁은 아니지만, 오염 지역의 꽤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서 미궁의 파편을 정화한 것이다.
그러자 상당히 넓은 지역이 마기가 걷힌 안전한 땅이 되었다.
마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유진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생명이 말라붙은 삭막한 광경이 원상 복구된 것은 아니었다.
척!
"음?"
아무도 없는 문경시 이안면 인근을 거닐던 유진의 발치에 작은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시커멓게 죽은 토양의 겉면으로 작은 녹색 식물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던 것이었다.
변함없이 냉랭하기만 하던 그의 얼굴에 미세한 변화가 생겼다.
‘이런 땅에서도 싹을 틔우다니. 생명이란 참 경이롭군.’
어둠의 군주, 피의 제왕 뱀파이어는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니라 언데드의 일종이었다.
하지만 생명의 고귀함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속된 말로 그 고귀함을 빼앗고 갈취해서, 진정으로 고귀한 자가 되려는 게 뱀파이어니까.
"이 정도 거리면 성체 미궁을 정화해도 인간들이 눈치채기는 힘들겠지."
성체 미궁은 파편을 쏘아 내 오염 지역을 넓혀가는 주체였다.
위성으로 세세하게 살핀다고 해도 이곳의 오염 지역이 해제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는 어려웠다.
유진은 그저 성체 미궁만 정화했을 뿐, 이 주변에 돌아다니는 몬스터는 그냥 놔두었다.
몬스터 녀석들은 오염되지 않은 땅으로 이동하여 먹잇감을 찾아 헤매기 마련이었으니까.
물론 이곳으로 와 봤자 생명체라고는 이제 막 자라나는 식물 몇 종뿐이었다.
저놈들은 그저 의미 없이 문경시 인근을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나저나 레벨이 영 오르지 않는군.’
교황청 성기사단의 존재를 파악한 지 벌써 한 달째.
꽤 큼지막한 미궁에 들어가서 보스 몬스터를 학살하고 다녔지만, 그의 레벨은 이전과 큰 차이가 없었다.
이런 어중이떠중이들을 상대해 봤자, 봉인율이 별로 낮아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척! 척!
유진은 무너지지 않은 마을 회관으로 발을 들였다.
놀랍게도 이 건물은 거의 폐허가 된 주변과는 달리, 내부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거실에는 커다란 관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그 외에 사람이 산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그가 거처로 사용하는 장소였다.
사람이 아닌 뱀파이어였기에, 관 하나만 있으면 어디서든 편히 지내는 게 가능했다.
씻을 필요도 없고 식량은 대충 주변의 몬스터를 잡아 피를 빨면 되니,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유진은 관 뚜껑 위에 걸터앉아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빛줄기로 이루어진 화면이 그의 눈앞에 떠올랐다.
<능력치 정보>
이름 : 블라드 유진(Vlad Eugene)
레벨 : 568(봉인율 68%)
등급 : A(Lv. 501~600)
종족 : 뱀파이어
종족 효과 : 강체, 불로불사
한 달 동안 무려 서른 개의 미궁을 정화했으나, 블라드 유진의 봉인율은 고작 2%가 낮아졌을 뿐이었다.
게다가 그마저도 초반 5회의 미궁 공략에서 얻은 성과였다.
그 말인즉, 이후로
회의 공략에서는 봉인율을 1%도 낮추지 못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이대로는 올해가 다 가도록 대규모 미궁은커녕 S급에도 못 오르겠군."
스윽! 척!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대뜸 품속에서 작은 복주머니를 꺼냈다.
꽉 조여 둔 주둥이를 열자, 그곳에서 알 수 없는 인력이 발생하여 관 모양의 침대를 빨아들이는 게 아닌가.
슈우우우욱!
‘역시 아이템이라는 게 좋긴 좋아. 관을 가지고 다닐 수 있다니, 1천 년 전에는 꿈도 못 꿀 일이지.’
유진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붉은 복주머니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미련 없이 마을 회관을 나섰다.
이곳을 거점으로 삼고 활동하며 꽤 정이 든 장소였지만, 이제는 필요가 없었다.
"녹턴."
"이히히히힝!"
두두두두두두!
그가 나직이 이름을 부르자, 동반자 정보의 한쪽 구석에 아이콘이 되어 있던 녹턴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의 등에 올라탄 블라드 유진은 한 달 동안 시선도 두지 않던 북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 * *
"아……. 오, 오셨어요?"
"살기 좋은가 보군. 이런 호사를 다 누리고 말이야."
"하, 하핫!"
출발한 지 고작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시각, 유진은 놀랍게도 아크웰의 앞에 불쑥 나타났다.
소파에 누워 한가롭게 TV를 보고 있던 녀석은 잽싸게 자세를 바로 하며 입가에 묻은 과자를 털어 냈다.
그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자, 아크웰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따금씩 들르는 블라드 유진이 던져 주는 아이템을 감정하는 것 외에는 하릴없이 시간만 보냈다.
이제 그를 향한 한국 헌터계의 관심도 사그라졌기 때문이었다.
"또 감정이 필요하신가요? 말씀만 하십시오. 곧장 대령하겠습니다."
나태해지긴 했지만, 아크웰은 결단코 유진의 정체를 잊지 않았다.
불현듯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바로 납작 엎드려 극진한 태도를 보였다.
블라드 유진은 그런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 거 말고 네놈이 따로 할 일이 생겼다."
"이번에는 뭔가요? 지난번에 주신 에너지 코어를 현금화해 두었으니, 이번에는 어떤 물건이든 곧장 구할 수 있습니다."
"물건이 아니야."
"그러면요?"
"네놈이 한국 헌터계를 규합해야겠다."
"예?"
그의 요구에 아크웰은 얼빠진 표정을 짓고 말았다.
일단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차치하고, 헌터들을 모아서 대체 뭘 하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궁 공략은 착착 진행되고 있지 않았던가.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는 녀석을 향해 유진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3대 미궁 드라코 도무스(drăco dŏmus)를 공략할 것이다."
"으에?"
상상을 초월하는 선포가 떨어지자, 아크웰은 괴상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내뱉은 말이 철회되는 현실은 결단코 찾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