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자, 침입자는 깜짝 놀라 눈을 치켜떴다.
이제껏 자신의 은신 능력을 간파한 자는 몇 없었으니까.
그것도 어렴풋이 은신한 자가 있다는 것 정도만 알뿐이었지, 이토록 정확하게 위치를 특정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뒤편에 불쑥 나타난 자는 밤바람에 은발을 휘날리며 침입자를 직시하고 있었다.
마치 그자의 모습이 정확하게 보인다는 듯이.
타닷!
침입자는 잽싸게 몸을 튕겨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내렸다.
사람 손가락 굵기밖에 되지 않는 가지인데도 흔들림조차 거의 없었다.
마치 깃털이 붙어 있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몸놀림이 가볍군. 은신 능력도 출중한 편이고. 완벽한 암살자야.’
그 모습을 본 블라드 유진은 눈에 이채를 띠었다.
명동성당에 들어오자마자 들켜 버렸지만, 그건 그가 고위 뱀파이어기 때문이었다.
뱀파이어는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도 꿰뚫고 간파할 수 있었으니까.
만약 이자가 은신 능력을 과신하지 않고 조금 더 천천히 접근했다면, 유진도 쉽게 알아채지는 못했을 터였다.
감각의 범위 안으로 들어와서 은신을 썼기에, 간단히 눈치챌 수 있었을 뿐.
‘요즘 인간들은 참 다양하고 강해서 좋구나.’
타닥! 츠츠츠츠!
그는 바닥으로 내려서며 오른손에 피의 권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시뻘건 기운이 뭉쳐 마치 다섯 줄기의 칼날처럼 변했다.
그러자 침입자 또한 허리춤에 걸려 있던 쇄겸(鎖鎌)을 빼 들고 휭휭 돌리기 시작했다.
훙! 훙! 훙!
남자는 끄트머리에 추(錘)가 달린 사슬을 빙글빙글 돌려서 상대가 섣불리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살짝 여유를 두고 가볍게 잡은 왼손의 낫을 언제든 출수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다.
상대가 멀 때는 추의 궤도를 변경하여 공격하고, 거리가 좁아질 때는 왼손의 낫을 휘두르는 것이다.
쉬이이익! 카앙!
느닷없이 추의 궤도가 변화하며 정수리로 날아들자, 유진은 소수혈인을 휘둘러 막아 냈다.
피의 권능과 충돌했으나, 놀랍게도 추는 그저 튕겨 나갈 뿐 파손되지는 않았다.
‘예사로운 물건은 아니군. 공격력이 강한 것 같지는 않은데, 매우 단단해.’
쇄겸은 상당한 강도를 지닌 데다가,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1천 년 전 헝가리 대공국과 루마니아에서 활동하던 사람이 쇄겸을 봤을 리가 만무했다.
대처하기에 까다로운 무기라, 블라드 유진은 일단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쉬이이익! 후우웅!
이번에는 추가 날카로운 각도로 날아온 다음, 낫이 풀려나와 횡으로 휘둘러졌다.
그와 동시에 상대의 육신이 마치 지워지듯 사라지는 게 아닌가.
카강! 스윽!
"음?"
소수혈인을 곧추세워 공격을 막아 내자마자, 쇄겸 또한 그대로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그자는 연계 공격을 퍼부을 것처럼 살기를 쏘아 보내서 그의 시선을 끈 다음, 잽싸게 줄행랑을 놓았다.
아무래도 목표에게 직접 발각되었으니, 전투보다는 도주를 택한 모양이었다.
침입자는 순간적으로 은신 능력을 발동하여 시야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뱀파이어의 코앞에서 은신 능력을 써 봐야 무용지물이었다.
‘그래도 빠르군.’
상대는 건물 위를 자유자재로 뛰어다니며 빠르게 도망치는 중이었다.
아주 잠깐 종적을 놓친 찰나에 놈은 벌써 저 멀리 달아나고 있었으니까.
‘나와라. 녹턴.’
푸화아악! 다그닥! 다그닥!
"이히히힝!"
블라드 유진은 녹턴을 불러서 침입자를 쫓기 시작했다.
암흑화를 사용하면 이동 속도가 대폭 늘어나지만, 하늘을 나는 것보다 빠를 수는 없으니까.
두두두두두!
유령 군마가 허공을 질주하자, 순식간에 침입자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상대도 난데없는 말발굽 소리를 들었는지, 깜짝 놀라며 신형을 홱 틀었다.
‘B급이지만 암살자 계열이라 그런지, 녹턴을 감지하는군.’
휘리릭! 카앙!
놈이 몸을 돌리는 순간, 사슬에 달린 추가 날아들어 유진의 머리를 노렸다.
그러나 그의 무지막지한 동체 시력은 날아드는 추에 새겨진 무늬까지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소수혈인으로 간단히 쳐 내자, 이번에는 낫 부분이 무서운 속도로 휘둘러졌다.
콰칭! 쓰윽!
쇄겸의 빠르고 기상천외한 연계 공격은 모조리 막혔다.
그러자 침입자는 허리춤에서 시커멓게 번들거리는 단검을 꺼내 던지면서 뒤로 몸을 날렸다.
독 묻은 단검으로 말을 무력화하여 추격을 끊으려는 심산인 듯했다.
"폭사."
스―핑! 팅!
녹턴에게 향하던 단검은 힘없이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유진의 손에서 발출된 세 개의 송곳 중 하나에 적중되어, 반도 날아오지 못한 채 튕겨 나간 것이다.
게다가 나머지 두 개의 송곳은 침입자의 다리를 후려갈겼다.
터덩!
"큭!"
방어구 덕분에 큰 피해는 없었으나, 놈은 스텝이 꼬이고 말았다.
침입자는 재빨리 균형을 회복한 다음, 재차 몸을 날리려 했다.
하지만 이미 그가 바로 지척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흡!"
슈화아악! 턱!
유진의 접근을 인지하자마자 상대는 허리춤에서 단검을 하나 더 꺼내 찔렀다.
하지만 회심의 일격은 무력화되고 말았다.
암흑화를 시전한 유진이 몸을 흔들어 공격을 모조리 피해 낸 다음, 단검을 내지르던 손목을 잡아채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이이!"
체중을 뒤로 실으며 안간힘을 써 보았지만, 침입자의 팔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유압 프레스에 끼이기라도 한 것 같았다.
"가만히 있는 게 좋을 텐데."
어느새 대략 1m 길이의 시뻘건 칼날이 식충 식물처럼 아가리를 쫙 벌린 채 도사리고 있었다.
허튼짓하는 순간, 저 무시무시한 기운이 육신을 갈가리 찢어 버릴 터였다.
츠츠츠츠츠!
"크으으으!"
침입자의 손목을 붙잡은 유진의 왼손이 투명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곳을 통해 다량의 혈액이 순식간에 흡수되는 것이다.
"허억!"
온몸에 힘이 쭉 빠지자, 침입자는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천천히 주저앉기 시작했다.
다른 헌터들에게 쇄겸이 예측하기 힘든 무기인 것처럼 흡혈 능력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저 손에 붙잡혔을 뿐인데, 혈액을 강탈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터였다.
‘저항을 포기했다. 죽음을 직감했어.’
블라드 유진은 입술을 핥으며 스산한 눈빛으로 그자를 내려다보았다.
* * *
‘이름은 전진우, B급 암살자 계열 딜러. 단편적인 기억밖에 없군.’
침입자를 제압하여 흡혈 능력을 펼친 유진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예상과는 달리, 전진우에게서 얻은 정보가 너무 적었기 때문이었다.
상대가 B급 헌터였기에 같은 B급의 흡혈 스킬로는 온전한 정보를 얻을 수가 없었다.
‘소속조차 불분명하군.’
그래도 이자의 임무가 암살이 아니라, 그저 감시였을 뿐이라는 것은 알아낼 수 있었다.
블라드 유진은 찜찜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전진우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알아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피 맛은 좋군.’
B급 헌터의 혈액이라 그런지, 맛 하나는 보스 몬스터 못지않았다.
그는 눈을 감은 채, 혈액의 깊숙한 곳에 숨은 능력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기억으로 배후를 파헤칠 수는 없어도 쓸 만한 스킬이 있다면, 복제하는 게 이득이었으니까.
‘은신은 별 쓸모가 없지.’
전진우의 가장 강력한 스킬은 역시나 은신이었다.
하지만 유진에게는 그보다 훨씬 뛰어난 암흑화가 있었기에, 복사해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는 다른 능력을 발견할 때까지 상대의 오른팔을 놔주지 않았다.
‘쇄겸술은 더욱 쓸모없겠고……. 이건 뭐지?’
스킬을 유심히 확인하던 블라드 유진의 눈이 번쩍 뜨였다.
드디어 쓸 만한 것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털썩!
전진우가 바닥에 쓰러지자, 그는 홀로그램을 열어서 흡수한 스킬을 확인해 보았다.
<스킬 정보>
명칭 : 레이스 트래킹
등급 : C 위력 : C―
최대 대상 특정 : 1명
대상 특정 사거리 : 20m
대상 특정 지속 시간 : 1시간
재사용 대기 시간 : 5분
흔적 감별 지속 시간 : 1분
대상의 흔적을 추적할 수 있는 능력. 특정되지 않은 대상에게도 사용 가능하며, 그럴 때는 흔적을 구분하고 실마리를 뒤쫓아야 함.
"나쁘지 않군."
유진은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뱀파이어는 매우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지만, 레이스 트래킹(Wraith Tracking)은 그보다 훨씬 뛰어난 이능을 선사했다.
아마 앞으로 꽤 요긴하게 쓰일 것 같았다.
‘일단 이건 됐고, 이제 이 녀석을 처리할 차례로군.’
블라드 유진은 바닥에 쓰러진 전진우의 뒷덜미를 붙잡고 가뿐하게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자신과 강제로 눈을 맞추도록 했다.
‘권능 폭발.’
이대로 그냥 혈성쇄혼술을 사용해 봤자, 정신을 제압하는 건 불가능할 터였다.
그래서 그는 권능 폭발을 사용하여 스킬 등급을 일시적으로 A급으로 올려 버렸다.
이러면 대상이 B급이라도 기절한 상태라면, 충분히 기억을 조작할 수 있을 테니까.
‘혈성쇄혼술.’
그의 눈동자가 검붉게 빛남과 동시에, 전진우의 눈은 새하얗게 변했다.
혈성쇄혼술의 효과로 기억이 조작되기 시작한 것이다.
"크어어어!"
저항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이내 녀석은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유진을 응시하며 서 있었다.
"임무는 완수되었다. 돌아가라."
딱!
손가락을 튕기자, 전진우는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더니 바닥에 떨어진 쇄겸을 주워들었다.
그러고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명동성당을 나섰다.
‘대상 특정.’
그런 녀석을 그는 은밀하게 뒤따르기 시작했다.
* * *
암흑화는 어둠과 완벽하게 동화되어 인간들의 시선을 피하는 기술이었다.
아직 B급에 불과해서 A급 헌터들에게 발각될 수도 있는 상태.
혈성쇄혼술로 기억을 조작한 대상이라고 해도 근거리까지 따라붙는 건 위험했다.
전진우는 이런 추적에 예민한 암살자 계열 헌터였으니까.
유진은 녀석과 거리를 벌린 채, 조심조심 움직였다.
‘놓쳐도 상관없으니 좋군.’
레이스 트래킹은 목표가 시야에 들어오지 않아도 상대를 감지할 수 있었다.
이미 20m 거리 내에서 전진우를 특정해 놓았기에, 그는 느긋하게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우우우웅!
골목길로 달려간 전진우는 차를 타고 어디론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예전이라면 당황했겠지만, 이제 블라드 유진에게는 차량보다 훨씬 좋은 탈것이 있었다.
‘나와라. 녹턴.’
"이히히힝!"
슈화악! 다그닥! 다그닥!
그림자에서 솟구쳐 나온 검은 망령은 순식간에 늠름한 말의 형상을 갖추었고, 시뻘건 불길을 피워 올렸다.
그는 곧장 녹턴의 등에 올라타고 전진우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놈은 매우 빠르게 도시 외곽 지역으로 향했다.
어느 허름한 건물의 지하실로 들어간 전진우는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좋은 스킬이야.’
하지만 유진은 녀석을 따라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미리 걸어 둔 추적 스킬 덕분에, 녹턴을 타고 밤하늘을 거닐면서도 전진우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건물 내부까지 확인할 길은 없었다.
레이스 트래킹은 투시 능력까지는 부여해 주지 않았으니까.
"시간이 좀 걸리는데."
1시간이 지나면, 대상 특정을 다시 해야만 했다.
그러려면 20m 거리까지 접근해야 하는데, 건물 내부로 들어가서 찾기에는 위험 요소가 너무 많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녀석은 대상 특정이 끝나기 전에 건물 밖으로 나왔다.
주차장으로 간 전진우는 다른 차량으로 바꿔 타고 다시 도시 외곽 지역을 빙빙 돌았다.
‘곧장 돌아가라는 암시를 걸어 뒀음에도 저러는 건, 추적을 떨치기 위한 오랜 습관인 모양이군.’
녀석의 차는 꽤 오랜 시간을 이리저리 이동하더니, 어느 큼지막한 건물로 들어갔다.
‘이곳은…….’
녹턴을 탄 유진의 발밑에는 팔을 크게 벌린 흰색 동상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