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전략부장님이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지난번에는 너무 갑작스러운 방문이라, 정보를 많이 못 드린 것 같아서요. 최근 미궁과 오염 지역의 동향 분석 자료입니다."
"이런 것까지 챙겨 주실 필요는 없었는데요."
"아무리 비공식이라도 교황청의 행사인데, 저희도 성의를 보여야지요."
헌터 협회의 미궁 전략부장은 양질의 정보를 예쁘게 포장해서 아크웰을 찾았다.
"그래도 최근에는 사정이 나아진 모양이군요. 영토를 넓히셨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미궁 두 곳을 정화하면서 그렇게 된 것이죠. 이곳과 이곳입니다."
전략부장은 지도에 표시된 두 장소를 강조하며 아크웰의 반응을 살폈다.
그런데 여주시의 트롤 전선을 콕 짚자, 녀석의 눈빛이 살짝 변화했다.
얼굴을 면밀하게 쳐다보고 있던 전략부장은 그 미세한 떨림을 포착할 수 있었다.
게다가 지도 다음 장의 주요 방문자 정보를 보여 주니, 눈빛의 흔들림은 더욱 심해졌다.
전략부장은 아크웰의 반응을 보려고 일부러 이런 식으로 서류를 배치한 것이었다.
"여주시의 몬스터 웨이브 직전에 교황청 외교관이 다녀갔더군요. 혹시 이때 전선 검문소를 통과하셨습니까?"
"예, 그랬죠. 정보 수집차 방문했는데, 상황이 좋지 않아 보이더군요. 그래서 바로 빠져나왔습니다."
"아! 그랬던 거로군요. 저희에게 준비할 시간이 있었다면, 전선 정보도 함께 전달해 드렸을 텐데요. 아쉽습니다."
"부장님께서는 최선을 다해 주셨으니, 그걸로 족합니다."
"한데, 그때 뉴스에 나왔던 분은 어디 가셨습니까?"
전략부장은 뭔가를 확신한 듯, 넌지시 블라드 유진에 관해 물었다.
그러자 아크웰의 눈빛이 되레 차분해지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게 아닌가.
마치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에 관해서는 왜 물어보는 건지, 진지하게 궁금해서 되묻는 듯했다.
"예? 그분은 갑자기 왜……."
"지난번 양수역에서의 일도 그렇고, 협회 차원에서 감사를 드릴까 해서 말입니다."
"굳이 그런 게 필요 없는 분입니다. 게다가 자신이 노출되는 걸 원치도 않으시죠. 그저 교구청 시찰차 나왔다가 사건에 휘말렸을 뿐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아……. 그렇습니까? 도시 외곽에서 말을 타고 다니신다는 소문이 있던데, 혹시나 알고 계신 게 있나 해서 여쭈어봤습니다."
"말이요? 갑자기 무슨 말요?"
"커다란 검은 말을 타고 날아다니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갈기가 불타는 듯한 모양새라던데요."
"그런 게 있을 리가요. 저와는 거의 붙어 지내시는데, 말 같은 건 본 적도 없습니다. 게다가 말이 날아요?"
"말이 좀 안 되긴 합니다만."
"농담도 심하시군요. 아, 이게 한국식 밈(meme) 뭐 그런 겁니까?"
아크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하자, 전략부장은 곧바로 떠보기를 그만두었다.
여기서 더 질문을 던졌다가는 마치 교황청 외교관을 취조하는 듯한 인상을 줄 수도 있었으니까.
"역시 헛소문인 모양입니다. 세상에 하늘을 나는 말이라니! 몬스터가 아니고서야 그럴 리 있겠습니까?"
"그렇겠죠. 몬스터를 길들일 수도 없을 텐데요."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말씀을 드렸군요."
"아닙니다. 어쨌거나 양질의 정보를 이리 직접 가져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전략부장은 아크웰에게 꾸벅 인사를 한 뒤,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사제관을 나섰다.
그러고는 뭔가 찜찜한 표정으로 명동성당을 떠났다.
"여주시에 다녀간 것은 확실하고. 은발의 남자에게 검은 말이 없다는 것도 맞는 거 같은데……. 이거 원 반응이 너무 태연하니 헛갈리는구먼."
협회장의 의견대로 애송이 외교관을 떠보는 작전은 이대로 실패인 듯했다.
아무래도 은발의 남자는 다른 방법으로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전략부장은 자신의 차량으로 터덜터덜 걸어가서 협회로 돌아갔다.
아마도 상부에 보고하려는 모양이었다.
한편, 같은 시각.
아크웰은 사제관 뒤편으로 나와서 유진을 찾고 있었다.
협회에서 뭔가 눈치를 챈 듯하니, 조심하라는 말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더불어 전략부장이 가져온 정보 서류도 넘겨줄 겸.
"이히히힝."
그런데 사제관 뒤편의 구석진 곳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아니, 이게 웬 말 울음소리야?"
아크웰은 불안한 눈빛으로 조심조심 걸어가 모퉁이를 돌았다.
그러자 일반적인 녀석보다 두 배는 큰 듯한 검은 말이 위풍당당한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시뻘건 불꽃으로 된 갈기와 꼬리, 형형하게 빛나는 눈에서는 시커먼 기운이 피어올랐다.
마치 지옥의 제왕이 탈 법한 외모의 유령 군마가 명동성당에 떡하니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도 방금 헌터 협회 사람에게 그딴 말이 어디 있냐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는데.
게다가 블라드 유진은 그런 유령 군마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불타는 갈기를 정리해 주고 있었다.
누가 봐도 주인처럼 보이는 상황.
아크웰은 허탈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이, 이게 다 뭡니까?"
"말이지 뭐야. 어차피 여긴 오는 사람도 없잖아."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도시에 웬 몬스터가 있어요?"
화들짝 놀란 탓인지, 녀석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다소 높았다.
유진은 유령 군마에게로 향하던 따스한 눈빛을 거둔 채, 아크웰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뭐가 문제지?"
"으읏……."
A급이 되면서 능력치가 상승한 탓인지, 그에게서 느껴지던 압박감은 이전보다 훨씬 심했다.
녀석은 얼른 블라드 유진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랬다가는 당장 심장이 뽑혀 자신의 눈앞에서 처참하게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혀, 협회에서 눈치를 챈 듯합니다. 이걸 좀 보시죠."
아크웰이 서류 뭉치를 건네자, 뭉게뭉게 솟아나던 위압감은 그제야 스르르 풀렸다.
"녹턴, 들어와."
"이히히힝!"
녹턴은 몸을 시커먼 연기처럼 변형시키더니, 그의 그림자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 놀라운 광경에 아크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동자만 굴려 유진의 발밑을 계속 힐끔거렸다.
유령 군마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림자는 그저 석양의 반대 방향으로 길게 늘어질 뿐,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때 그 느낌이 맞았군. 날 감지했었어."
"그럼 래틀 스네이크 서식지의 미궁도 유진 님이 정화하신 겁니까? 파주라던데요."
"그래."
"아니, 왜요? 저한테는 아무런 말씀도 안 해 주셨잖아요. 그래도 우린 함께 일하는 동료인데!"
"……."
오늘 단독 행동한 것에 녀석이 항의했지만, 유진은 귓등으로도 듣고 있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두 사람은 교황청의 명에 따라 함께 움직여야 할 운명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그저 신기하다는 듯이 잘 정리된 서류를 이리저리 들여다볼 뿐이었다.
‘1천 년 전에는 암흑화를 감지하는 인간이 드물었다. 어디서 모습을 드러내든 헛소문만 나돌 뿐, 고위 뱀파이어의 실체를 찾기란 어려웠지. 물론 교황청의 성자들은 달랐지만.’
반복된 전쟁으로 유럽의 정세가 어지럽지 않았다면, 교황청에서도 일족을 찾아내지 못했을 터였다.
9세기 말까지 마자르족의 침략으로 어쩔 수 없이 전투를 벌임에 따라, 뱀파이어의 근거지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암흑화를 꿰뚫어 보는 헌터들이 다수 존재했다.
협회에서 가져온 자료에 따르면, 그날 말발굽 소리를 들은 A급 헌터만 수십 명이었다.
"암흑화의 등급이 낮아져서 그런 것도 있겠군."
"네?"
"아무것도 아니다."
아크웰이 혼잣말에 반응하자, 유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사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날이 어둑어둑해졌을 때, 유진과 아크웰은 뜻밖의 방문을 받았다.
김태호 스테파노 추기경이 사제관 가장 안쪽 방의 문을 두드렸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거처를 좀 옮겨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일단 이것부터 읽어 보시지요."
추기경은 품속에서 온갖 스탬프가 가득 찍힌 국제 우편을 아크웰에게 건넸다.
칼로 깔끔하게 자른 편지 봉투 안에는 이탈리아어 문장이 휘갈겨 쓰여 있었다.
편지를 읽은 녀석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기자들을 힘으로 찍어 누른 게 문제의 발단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게 왜 문제인가."
"교황 성하께서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라 하셨는데, 시작부터 너무 드러내놓고 움직였어요. 유진 님은 TV에도 나오셨고, 교황청 관련 온갖 기사가 인터넷을 떠돌았죠."
"그래서?"
"명동성당에서 시선 끌지 말고 어디 숨어서 활동하라고 하셨습니다. 눈에 띄는 행동은 자제하라는군요."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군."
스윽!
유진은 딱딱한 표정으로 교황의 편지를 빼앗아 읽어 보았다.
하지만 아크웰이 말한 내용과 크게 다른 점을 찾을 수는 없었다.
교황은 정말로 조용한 처리를 원하는 것이다.
‘대규모 미궁을 향해서 길을 뚫다 보면, 분명히 시선이 끌릴 텐데.’
이제껏 미궁 정화 작업은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미궁 내부의 마기를 견디려면, 최소한 B급 수준은 되어야만 했다.
게다가 내부의 몬스터 또한 마기로 인해 강화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미궁은 넓어지게 되어 있었다.
토벌대는 드넓은 미궁을 헤매며 마기와 몬스터를 이겨 낸 다음, 보스를 찾아 상대하는 것이다.
‘시간은 결단코 헌터들의 편이 아니야.’
한국 헌터 협회는 날아드는 미궁의 파편만 처리하며 전력이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이따금씩 미궁을 토벌하는 수준에 그쳤다.
사실 그러고도 실패하는 경우가 많아, 전선에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미궁 정화 작업이 갑자기 팍팍 진행된다고 생각해 보라.
그것도 협회는 가만히 있는데 미궁이 저절로 정화된다면?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으니, 헌터계의 촉각은 그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교황의 말대로 조용히 대규모 미궁만 처리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암흑화 상태로 중간의 모든 미궁을 건너뛰고, 그곳만 노리면 되니까. 하지만 정화할 능력이 안 되겠지.’
S급 헌터 20명에 A급 헌터 100명을 동원하고도, 생존자가 S급 10명뿐인 곳이 바로 대규모 미궁이었다.
그런 장소에 고작 A+ 수준인 블라드 유진 혼자서 쳐들어가는 건, 그냥 죽으라는 말밖에 되지 않았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자, 유진은 교황의 의도를 알 것만 같았다.
"차근차근 진행하라는 소리로군."
"예? 그게 어떻게 그리되죠?"
"한시라도 빨리 대규모 미궁을 정화하라는 말은 없으니까."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애초에 출발할 때도 기한 같은 건 정해 주지 않았잖아요."
유진은 용건이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기한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지원금 이야기도 없었어. 알아서 하라는 소리겠지.’
왠지 앞으로는 돈을 좀 벌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김태호 추기경이 다녀간 뒤, 한참의 시간이 흘러 자정이 넘은 야심한 밤.
스으으윽!
어둠 속에 몸을 녹인 의문의 인물이 명동성당에 발을 들였다.
어둑한 곳만 골라서 움직이는 거도 아닌데, 그자의 모습은 완전히 가려졌다.
게다가 기척 또한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주변과 완벽하게 동화된 초고도의 은신 능력.
그자는 나무 위에 사뿐히 올라 사제관 2층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창문 너머로 언뜻 보이는 은발의 남자.
이 의문의 침입자는 아무래도 블라드 유진이 목적인 듯했다.
대체 뭘 하려고 온 건지는 모르지만,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음?"
그런데 방금까지 방에 홀로 앉아 있던 유진의 모습이 사라진 게 아닌가.
남자가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바로 뒤에서 누군가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놈은 누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