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스킬 등급 향상이라…….’
원래라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다.
유진의 모든 스킬은 EX급을 초월한 상태였으니, 그저 새로 얻은 스킬에 여의주를 사용해 버리면 될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봉인으로 인해 등급이 낮아져 있었다.
홀로그램이 알려 준 대로 신중하게 선택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일단 등급이 낮은 폭사는 제외.’
C급인 폭사보다는 차라리 다른 B급 스킬을 선택하는 편이 훨씬 나아 보였다.
원거리 공격이라는 게 마음에 들긴 하나, 폭사는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스킬이었다.
피의 권능이 좀 많이 들긴 하지만, 원거리 공격은 소수혈인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그렇다면 남은 건 흡혈, 혈성쇄혼술, 암흑화, 소수혈인, 권능 폭발이었다.
선택지가 많아져서 한 가지를 선택하기가 왠지 망설여졌다.
‘C급 때긴 했어도 보스 프리클 플라워는 흡혈에 저항할 수 있었다. 보스 트롤도 그랬고. 하지만 이걸 올리기에는 영 아깝군.’
만약 흡혈을 올린다면, 능력을 빼앗았을 때 최소 등급이 상승하게 될 터였다.
폭사처럼 D급으로 시작하지 않고, B급이나 A급인 채로 흡수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능력을 올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혈성쇄혼술도 전투에서는 쓸 수가 없어. 암흑화…….’
그는 세 번째 슬롯의 암흑화 스킬을 바라보며 문득 아까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암흑화에 녹턴의 은신 능력까지 펼쳤으나, A급 헌터들은 어렴풋이 유진의 존재를 알아챘다.
게다가 한 명은 특별한 능력이 있는지, 실체를 꿰뚫어 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인간들이 알아보는 건 단지 귀찮을 뿐이지, 크게 곤란한 건 아니었다.
‘결국에 소수혈인과 권능 폭발로 좁혀지는군.’
애초부터 그는 전투 관련 능력을 올리기를 바랐다.
이무기는 유진이 보유한 가장 강력한 공격인 소수혈인을 몇 번이나 막아 내곤 했기 때문이었다.
1천 년 전에는 소수혈인의 공격력이면, 그 어떤 인간도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뱀파이어 로드의 공격을 간단히 막아내는 괴물들이 득시글한 세상.
앞으로 이무기보다 더한 보스 몬스터가 나타날지도 모르니, 미리 대비해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더욱 강한 힘이 필요하다.’
그는 고심 끝에 한 가지 스킬을 선택했다.
[여의주를 사용하여 ‘권능 폭발’ 스킬을 A급으로 향상합니다.]
<스킬 정보>
명칭 : 권능 폭발
등급 : A 위력 : A+
지속 시간 : 10분
재사용 대기 시간 : 23시간
소모 자원 : 피의 권능
효과 : 모든 스킬 등급 1단계 향상
권능 폭발이 A급으로 성장했지만, 정보창에 큰 변화는 없었다.
단지 지속 시간이 두 배로 늘어나며 재사용 대기 시간이 1시간 줄어들었을 뿐.
사실 24시간이나 23시간이나 별 차이가 없었으나, 지속 시간 10분은 꽤 마음에 드는 옵션이었다.
권능 폭발을 사용하면 뱀파이어의 종족 특성인 강체도 향상될 테니까.
‘10분 동안은 엄청난 무력을 발휘하겠지.’
털썩!
침대에 누운 유진은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무기의 수투를 끼고 있었으나, 이질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벌써 세 번째로 미궁의 파편을 정화하는 거였지만, 오늘은 정말이지 만족스러운 날이었다.
그의 마음에 쏙 드는 아이템을 두 개나 얻었기 때문이었다.
내일은 또 어떤 물건이 튀어나와 자신을 기쁘게 할지 벌써 기대가 되었다.
희미한 미소를 지은 유진은 침대에 누워 뒤척거리며 잠을 청했다.
"아크웰에게 관 모양 침대를 가져오라고 해야겠군."
아무리 현대에 적응했다 하더라도 뱀파이어에게는 침대보다 관이 더 편한 법이었다.
* * *
"아아! 지금부터 파주시 미궁 토벌대 관련 브리핑과 협회 대책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착석해 주십시오."
한 남자가 스크린 앞으로 나가며 리모컨으로 빔 프로젝터를 작동시켰다.
그와 동시에 회의실 내의 조명이 꺼졌다.
타다다닥!
브리핑이 시작되자, 협회 직원이 잽싸게 뒤편으로 달려가 형광등을 꺼 준 것이다.
발표자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한 후, 포인터로 화면을 넘기며 설명을 시작했다.
"저희 미궁 토벌대는 13시 05분경 파주시에 도착하여 30분 만에 토벌 준비를 마쳤습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오염 지역에 진입하자마자 본 광경은 떼죽음을 당한 래틀 스네이크 무리였습니다. 이건 그때 찍은 증거 사진입니다."
"보고서에 쓰여있는 대로 그 많은 몬스터를 죽이고도 부산물을 채취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걸 그냥 지나칠 수도 있나요?"
협회 임원 한 명이 미간을 좁히며 질문하자,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서의 첫머리부터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발표자는 사진을 넘겨서 래틀 스네이크의 사체 더미를 보여 주고는 설명을 이어 갔다.
"그렇습니다. 그것도 상당히 상태가 좋은 사체였지만,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허!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구먼."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래틀 스네이크가 파 놓은 동굴 속에 갇혀 있었던 헌터 팀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단 한 명이 이런 일을 벌였다고 증언했습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군."
발표자의 브리핑은 이제 동굴에서 미친 듯이 빠져나오던 래틀 스네이크 무리와 전투를 벌인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이후로는 오염 지역이 사라짐과 동시에 완벽하게 파괴된 미궁의 파편까지.
파주시가 완벽하게 대한민국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증거 사진이 뒤를 이었다.
"그러니까 미궁 토벌대에서는 래틀 스네이크 몇 무리를 상대한 것밖에 없다는 겁니까?"
"결과론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덕분에 북쪽 전선이 몬스터 웨이브에 당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아예 성과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
"성과가 있고 없고를 묻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전력을 유지했으니, 이대로 다른 미궁을 공략할 수는 없는 겁니까?"
"아, 네. 조정이 좀 필요하나 충분히 가능합니다."
발표자는 슬쩍 리브라 길드의 부길마 쪽으로 시선을 돌린 뒤,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대답했다.
아무래도 길드 사이에 어떤 합의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그럼 잘된 일 아닙니까? 아군 전력을 전혀 잃지 않고 미궁을 정화했잖아요."
"문제는 이 남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겁니다. 잠시만 이쪽을 주목해 주십시오."
발표자는 PPT 화면을 맨 마지막으로 넘기며 붉은 레이저 포인터를 흔들었다.
그곳에는 토벌대에 참가했던 A급 헌터들의 증언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검은 말을 탄 은발의 남자가 하늘을 질주하고 있었다고요? 이게 뭔 소리야?"
"그러게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협회 임원과 부장들이 의문을 표하자, 발표자는 어색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이건 그저 A급 헌터들의 증언일 뿐이었다.
발표자 또한 리브라 길드의 팀장 위치에 있어서 토벌대에 참가하였으나, 은발의 남자는커녕 말발굽 소리조차 듣지 못했으니까.
웅성거림이 커지기 시작하자, 리브라 길드의 부길마 정현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생각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예, 정 부길마님. 직접 목격하셨다니, 증언이 좀 필요하겠군요. 가감 없이 말씀해 보십시오."
"검은 말과 은발의 남자는 아마도 은신 관련 능력을 펼친 모양입니다. 당시에 A급인 이진화 마스터와 강성주 마스터도 말발굽 소리를 들었습니다. 실체를 잠깐이나마 본 건 저뿐이지만요."
이진화와 강성주는 일부러 크게 고개를 끄덕여 정현철의 발언에 힘을 실어 주었다.
"게다가 래틀 스네이크 서식지에서 발견한 헌터 팀도 은발의 남자와 검은 말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럼 그들의 증언도 들을 수 있습니까?"
"협회 청사에 출석하지는 못했으나, 증언을 녹화해 둔 영상이 있습니다. 그들을 구한 직후에요."
정현철이 눈짓하자, 발표자는 재빨리 화면을 넘겨서 동영상을 재생해 주었다.
회의장에 모인 사람들은 모자이크 처리된 헌터들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방금 막 구해져서 횡설수설하고 있었으나, 은발 남자에 관한 내용은 꽤 정확해 보였다.
그런데 영상이 끝나자마자 회의장 한쪽 구석에서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었다.
"미궁 전략부장님?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전략부장은 빔 프로젝터와 연결된 컴퓨터로 다가가더니, 인터넷 기사를 화면에 띄웠다.
"아, 네. 혹시 기억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얼마 전에 이런 뉴스가 뜬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양수역에서 프리클 플라워를 학살하는 은발 남자의 사진이 찍혀 있었다.
물론 헬리콥터에서 찍은 뉴스 화면을 확대한 거라, 첫 사진의 화질은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 기술이 워낙 좋기에 드론으로 찍은 선명한 사진도 다수 존재했다.
"저 사람이 바로 그 의문의 은발 남자란 말입니까?"
"아무래도 그런 듯합니다. 엄청난 미남자라, 한동안 화제가 되기도 했죠."
"뭐 하는 사람인데요?"
"그게……. 교황청에서 파견된 분입니다."
"교황청!"
회의장 내부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미궁의 파편이 전 세계를 오염시키는 현 세태에서 가톨릭교회의 위상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들은 실로 어마어마한 수효의 힐러와 뛰어난 실력의 성기사들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기하게도 다른 종교에서는 이런 현상이 없었는데, 가톨릭은 조금 달랐다.
"갑자기 가톨릭교회라."
협회 임원들은 침음을 흘리며 황급히 의견을 나누었다.
어쨌거나 미궁을 정화하고 몬스터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수많은 헌터가 목숨을 걸어야만 했다.
그런 헌터들의 희생을 줄여 주는 존재가 바로 힐러.
힐러들을 교황청에서 충분히 공급하지 못한다면, 그대로 멸망해 버릴 나라는 수두룩했다.
대부분, 아니 모든 나라에서 힐러는 극진한 대우를 받을 정도로 수효가 적었으니까.
한창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협회 홍보부장이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그때 미궁 전략부장님이 언질 주셔서 보도 자료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요?"
"나름대로 조사를 해 보니, 교황청 외교관과 함께 명동성당에 거류 중인 거로 확인되었습니다."
"아, 그래요?"
홍보부장의 발언이 있자, 협회 임원들의 표정은 한순간 밝아졌다.
만약 이 모든 게 사실이라면, 협회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전선을 앞으로 미는 것뿐만 아니라, 완벽하게 단절된 다른 도시와의 연결도 가능했다.
은발 남자가 단신으로 미궁을 정화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린다면 말이다.
"어떻게든 이 사람을 붙잡아야 한다는 말이로군요."
협회장의 한 마디에 회의장은 그야말로 침묵에 휩싸였다.
어떤 이들은 희망에 불타는 눈빛으로 화면의 사진을 바라보았고, 몇몇은 불안한 표정으로 귀엣말을 나누었다.
같은 사안을 두고도 협회 내부에서 의견이 갈린 것이다.
은발 남자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이들은 쉽사리 믿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홍보부장."
"예, 협회장님."
"교황청에 저 사람의 신분을 문의해 본 적은 있습니까?"
"아무래도 실례가 되는 것 같아서 연락해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명동성당에 직접 가서 좀 알아보는 건 어떻습니까?"
"정식으로 말입니까?"
"가톨릭교회에 신분 확인을 요구하기보다는 다른 방법이 좋겠군요."
협회장은 신중한 표정으로 홍보부장과 전략부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인간들이 귀찮게 구는 것을 피하고자 했던 유진의 생각과는 일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