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파주시 북쪽의 래틀 스네이크 서식지.
이곳은 소규모 헌터 팀들의 주요 사냥터 중 하나였다.
래틀 스네이크의 맹독은 매우 위험하지만, 해독제 덕분에 다소 등급이 낮은 헌터라도 손쉽게 사냥할 수 있었다.
어쩌다가 C급이나 B급 에너지 코어가 나오기라도 하면, 레벨을 수월하게 올릴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해독제가 꽤 비싼 만큼, 부산물을 얻더라도 금전적 이득은 별로였다.
"그래도 아깝긴 합니다. 괜찮은 파밍 장소였는데요."
"그렇다고 이렇게 방치할 수는 없죠. 토벌 가능할 때 무조건 밀어야 합니다."
"물론 옳은 말씀입니다. 그저 저는 다른 곳을 공략하면 좋을 거 같아서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이해는 합니다. 중간급 헌터들은 소속을 가리지 않고, 파주에 자주 오니까요."
파주시의 오염 지역으로 가기 직전, 수백 명의 헌터들이 모여 진형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협회에서 임시로 조직한 미궁 토벌대였다.
한국 헌터 협회는 정기적으로 헌터들을 모집하여 미궁을 토벌하곤 했다.
미궁은 너무도 난도가 높은 곳이라, 제아무리 규모가 큰 길드라도 토벌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날아온 미궁의 파편이 오염 지역을 자꾸만 넓히기에, 어떻게든 토벌을 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간신히 평형을 유지 중인 전선이 하염없이 뒤로 밀릴 것이다.
아마 1년도 채 못 가서 서울까지 오염 지역으로 잠식될 가능성이 컸다.
"이번에는 규모가 좀 크군요."
"아무래도 해독제가 많이 풀린 덕분입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독무가 가득한 곳으로 이 정도 규모를 투입할 수가 없겠죠."
바글바글하게 모인 헌터들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이들은 한국 헌터계의 최상위권이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왼쪽의 정현철은 S급 헌터를 보유한 리브라(Libra) 길드의 부길마.
오른쪽의 이진화는 기브르(Guivre) 길드의 마스터로, 둘 다 A급 최상위의 헌터였다.
누구든 대규모 토벌대를 이끌기에 손색이 없었으나, 이번에는 정현철이 대장을 맡았다.
아무래도 S급을 보유한 리브라 길드의 상징성 때문에, 협회에서 편의를 봐준 듯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진화는 전혀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그런 것까지 따져 가며 토벌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지는 않았으니까.
"슬슬 출발하시죠."
"그럽시다."
두 사람은 합심하여 미궁 토벌대를 이끌고 파주시 북쪽의 문산리로 진입했다.
그런데 이곳저곳에 래틀 스네이크들의 사체가 무질서하게 널려 있는 게 아닌가.
마치 떼죽음이라도 당한 듯, 놈들은 반으로 동강 난 채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죠?"
"아무리 봐도 일반적인 하급 헌터가 잡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가 봐도 그렇네요. 사냥한 지 시간이 꽤 지난 거 같은데, 부산물 채취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몬스터를 사냥하다 보면, 몇몇 개체는 부산물을 채취할 수가 없는 경우도 존재했다.
훼손이 심하거나 다른 무리의 습격으로 전투를 이어 나갈 때, 사체를 놔두고 가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수백 구나 되는 몬스터 사체를 그냥 두고 간다는 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상흔은 단 한 가지밖에 없군요."
"똑같은 무기를 쓰는 다수가 이런 일을 벌였거나, 한 사람이……."
"일단 앞으로 좀 더 가 보죠. 굳이 전투하지 않아도 되니까, 우리에게는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이런 대학살을 벌일 정도의 단체가 적이라면, 매우 곤란해질 겁니다."
"그건 또 다른 문제겠군요."
이진화의 말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려던 정현철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곰곰이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니, 자신이 직접 했어도 이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전이라면 어려웠겠지만, 이제는 래틀 스네이크의 해독제가 있었으니까.
"일단 무슨 일인지 알아보는 게 우선입니다. 물론 토벌에 지장이 없다면, 미궁 정화가 최우선이고요."
"별일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미궁 토벌대는 래틀 스네이크 학살 현장을 지나서 계속 북진해 올라갔다.
깔끔한 사체가 대부분이라 부산물은 꽤 돈이 될 테지만,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때가 아니었다.
정현철과 이진화는 한시라도 빨리 학살자의 정체를 알아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런데 어디선가 희미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두두두두두!
"응? 이게 무슨 소리죠?"
"부길마님도 들으셨습니까?"
"네. 혹시 이 소리 들리는 사람 있나?"
정현철은 얼른 뒤를 돌아보며 휘하 헌터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다들 고개를 저으며 아무런 소리도 못 들었다는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아무래도 A급 이상에게만 들리는 모양이군요."
"그럼 다른 A급에게 물어보죠."
두 사람은 얼른 후위를 맡은 베릴 길드에 가서 질문했다.
그러자 베릴 길드의 마스터인 강성주가 손가락을 딱 튕기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그게 말발굽 소리였나요? 뭔 소리가 들리길래 저도 길드원들에게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못 들었다고 하더군요."
"우리가 잘못 들은 게 아니……."
두두두두두!
정현철과 이진화가 확신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재차 말이 질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동쪽 언덕 위쪽으로 시커먼 무언가가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어엇!"
그걸 가장 먼저 목격한 정현철이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검붉은 형상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에도 정현철은 희미한 형체 중에서 뭔가를 딱 포착했다.
"왜 그러십니까?"
"어……. 은발?"
"예?"
* * *
어찌 되었건 미궁 토벌대는 맡은 바 임무를 다해야 했다.
그들은 원래 목표했던 곳으로 이동하여 래틀 스네이크가 파 놓은 구멍을 찾아냈다.
몇 년 전, 파주시에 떨어진 미궁의 파편은 점점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그랬기에 놈들이 파 놓은 동굴을 따라 들어가지 않는다면, 미궁의 실체조차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굴속이 포화 상태가 되지 않으면 밖으로 나오지 않던 래틀 스네이크가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게 아닌가.
쿠구구구구!
"샤아아아!"
"해독제 마시고 각각 동굴 입구를 포위해!"
"나오는 놈들을 모조리 잡아라!"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당황했지만, 헌터들은 재빨리 진형을 만들고 주변을 수색하여 다른 동굴을 찾아냈다.
그러고는 래틀 스네이크를 모조리 쳐 죽였다.
그렇게 한참 전투를 벌이고 나자, 동굴에서 튀어나오는 놈들은 어느새 뚝 끊겼다.
한데, 동굴 속에서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 형상이 있었다.
"사, 살려 주세요!"
"뭐야? 여기서 사람이 왜 나와?"
토벌대는 진흙 범벅이 된 채로 기어 나오는 자들을 붙잡고 끌어 올려 주었다.
정현철은 일단 건강 상태부터 확인하고는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캐묻기 시작했다.
그들의 정체는 블라드 유진을 따라서 래틀 스네이크 동굴로 들어갔던 헌터 팀이었다.
팀장은 곧바로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자신들이 마지막으로 목격했던 것들을 털어놓았다.
"미, 미궁의 파편이!"
"그게 뭐 어쨌단 말입니까?"
"정화된 것 같습니다."
"예?"
"마기가 점점 사그라지고 래틀 스네이크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그 은발 남자를 따라가다가 포기했는데……."
"잠깐만, 은발 남자요?"
"네. 그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고 난 이후에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마기가 점점 옅어지고 오염 지역도 범위가 좁아졌어요. 여기 이걸 보십시오."
팀장은 바닥의 흙을 한 줌 쥐어서 정현철의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마기에 물들어 시커멓게 변했던 흙은 원래의 황갈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뿐이랴, 주변을 둘러보니 아까와는 풍경이 사뭇 달랐다.
말라비틀어진 건 똑같지만, 온통 검은색이었던 나무의 표면이 제 색깔을 되찾은 것이다.
"오염 지역이 해제되었구나. 한발 늦었군."
정현철은 허탈한 표정으로 이진화와 강성주를 쳐다보았다.
그들도 자신과 똑같이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 * *
두두두두두!
‘암흑화에 녹턴의 은신 능력까지 사용했는데도 날 알아봤어?’
아무래도 A급을 상회하는 헌터들의 감각까지 속이기에는 아직 유진의 능력은 다소 부족했다.
물론 그들도 완벽하게 꿰뚫어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저 희미한 이미지만 포착했을 터.
그래도 앞으로는 조금 조심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정체가 너무 드러나면 귀찮아질 테니까.
두두두두! 슈우우우!
그는 명동성당에 내려서며 으슥한 곳에서 암흑화를 해제했다.
"녹턴, 돌아와."
"이히히힝!"
훅!
블라드 유진의 명령이 떨어지자, 은신 능력을 발동한 상태로 기다리던 녹턴이 그림자로 뛰어들며 사라졌다.
이윽고 녀석은 홀로그램 귀퉁이의 귀여운 아이콘이 되어 짚더미에 털썩 누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은 피식 미소를 짓고는 사제관으로 들어갔다.
‘없군.’
외출한 모양인지, 사제관에 아크웰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화이트보드 앞으로 다가가서 지도에 ×를 그려 넣었다.
파주시에 있었던 숫자 1은 지워졌고, 이제 유진의 시선은 2번이 적힌 곳으로 이동했다.
그곳은 안산시 남쪽 화성시 마도면이었다.
이제껏 그가 노린 미궁의 위치는 상당히 떨어진 곳이었다.
미궁이 정화되고 오염 지역이 물러가면, 그곳으로 온갖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새로 얻게 된 영토를 지키려면 전선을 앞으로 밀면서, 황폐화한 대지를 복구해야 하니까.
‘바로 옆은 조금 위험하지.’
웬만하면 적당히 떨어진 곳의 미궁을 노리는 게 좋을 터였다.
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진은 식탁 의자에 앉아 홀로그램을 켰다.
이무기를 잡으면서 능력치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능력치 정보>
이름 : 블라드 유진(Vlad Eugene)
레벨 : 533(봉인율 70%)
등급 : A(Lv. 501~600)
종족 : 뱀파이어
종족 효과 : 강체, 불로불사
<종합 스킬 정보>
1. 흡혈(B)
2. 혈성쇄혼술(B)
3. 암흑화(B)
4. 폭사(C)
5. 소수혈인(B)
6. 권능 폭발(B)
7. ???(?)
8. ???(?)
……
봉인율이 5% 줄어들면서 그의 레벨은 533, 등급은 A가 되었다.
폭사가 C급이 된 것과 더불어 새로운 스킬도 개방되었다.
‘스킬 성장은 그리 빠르지 않군. 그래도 권능 폭발이 열린 건 좋은 일이지.’
<스킬 정보>
명칭 : 권능 폭발
등급 : B 위력 : B+
지속 시간 : 5분
재사용 대기 시간 : 24시간
소모 자원 : 피의 권능
효과 : 모든 스킬 등급 1단계 향상
피의 권능을 폭발시켜 보유한 모든 스킬을 한 단계 향상함. 권능 폭발 상태에서는 종족 효과도 상향됨.
‘드디어 이걸 다시 쓸 수 있게 되었군.’
여기까지는 빠르게 봉인이 풀렸으나, 이 이후로는 시간이 상당히 걸릴 터였다.
그냥 오랜 잠에서 깨어나며 일부 봉인이 풀린 것이기 때문이었다.
찰랑!
유진은 오른팔에 감긴 은 사슬을 무심코 바라보았다.
자신의 능력 절반 이상은 바로 이 성물 때문에 봉인된 거였다.
‘이 봉인은 천천히 해결하기로 하고. 지금은 여의주 정화가 우선이지.’
여의주는 스킬을 최대 A급까지 향상할 수 있는 귀물이었다.
아마 이걸 시장에 내놓으면, 사겠다는 헌터가 수천은 될 것이다.
그만큼 가치 높은 물건이었으나, 마기를 정화하기 전에는 사용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아크웰 없이도 마기를 해결할 방법이 있었다.
‘오히려 내가 더 빠를 수도 있지.’
보랏빛 구체를 한 손으로 쥔 유진은 눈을 감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벌써 세 번의 미궁을 경험하며 그는 이 새로운 마기에 어느 정도 적응한 상태였다.
어둠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고위 뱀파이어가 이런 마기도 못 다뤄서야 말이 되겠는가.
쓰쓰쓰쓰쓰!
블라드 유진은 피의 권능을 이용하여 여의주에서 마기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이윽고 칙칙한 보랏빛 구체는 놀라울 정도로 맑고 깨끗한 분홍빛이 되었다.
"마기를 빼내기만 하면 그게 정화지."
성스러운 기운 없이도 정화 작업을 해낸 그는 여의주를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반가운 글귀가 눈앞을 가득 채웠다.
[여의주를 사용하여 스킬 등급을 올리겠습니까? 결정은 번복할 수 없으니, 대상 스킬을 신중하게 선택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