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10화 (11/226)

10화

유령 군마와 함께 잠깐의 유희를 마친 유진은 명동성당 근처에 착륙했다.

검은 아스팔트에 시뻘건 불꽃이 말발굽 모양으로 남았지만, 잠시 후에 휙 사라져 버렸다.

‘신경도 안 쓰는군.’

불타는 검은 말이 도심에 나타났으나, 인간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걸어갈 뿐이었다.

아무래도 이 녀석이 일반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홀로그램을 켜서 유령 군마의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동반자 정보>

명칭 : 부케팔로스의 영령(임시)

등급 : A+

효과 : 비행, 화염 방사, 은신

명마 부케팔로스의 영혼. 기수에 따라서 능력치가 달라짐. 강한 자를 태울수록 더욱 강해지는 유령 군마.

유령 군마는 비행을 제외한 다른 능력이 미미한 편이라서, 공격이나 잠입용으로 쓰기에는 어려울 것 같았다.

물론 유진은 이 녀석에게 탈 것 이상의 효과를 기대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런 보조가 필요 없을 정도로 그는 막강한 능력을 보유했으니까.

‘어떻게 돌려보내는 거지?’

정보창의 아래쪽을 살펴보자, 동반자를 홀로그램에 수납할 수도 있다는 문구가 존재했다.

그곳의 빈칸을 톡톡 건드려 보자, 유령 군마가 투레질하며 유진의 그림자 속으로 뛰어들었다.

마치 그 안에 녹아들 듯 사라진 녀석은 이윽고 동반자 정보 한쪽 구석에 작은 아이콘으로 변해 있었다.

"이히히힝!"

슈우우욱!

유령 군마 아이콘은 홀로그램 구석에 서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저 안쪽이 매우 안락한 모양이었다.

유령 군마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유진은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남들이 보기에 녀석은 무시무시한 외모를 자랑했으나, 그의 눈에는 그저 귀여운 애완동물로만 느껴졌다.

‘이름을 지어 줘야 할까?’

동반자 정보에는 유령 군마의 명칭 옆에 임시라는 표시가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연옥을 빠져나와 유진의 소유가 되면서 원래 이름을 잃어버린 듯했다.

부케팔로스는 알렉산더 대왕과 수많은 전투를 함께한 군마의 이름이었다.

그와 똑같은 이름을 짓기에는 영 길고 부르기 번거로웠다.

‘어둠 속을 거니는 한 마리 말이라……. 야상곡(Nocturne)이 좋겠군.’

[유령 군마의 이름을 ‘녹턴’으로 정하겠습니까? 동반자의 이름을 바꾸기 위해서는 동일 등급의 에너지 코어가 필요합니다.]

신중하게 선택하라는 글귀가 떠올랐지만, 딱히 다른 이름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수락.’

그러자 유령 군마의 명칭이 녹턴으로 바뀌며, 그 옆에 붙어 있던 임시라는 단어가 사라졌다.

동시에 녹턴의 아이콘이 시뻘겋게 불타오르며 강렬한 기운을 쏟아 냈다.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음으로써 한 단계 성장한 모양이었다.

"뭔가 강해진 느낌이군."

다시 귀여운 검은 말 모양의 아이콘으로 돌아온 녹턴은 앞발을 구르며 기뻐했다.

그걸 보며 피식 미소를 지은 유진은 사제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블라드 유진은 거실에 나와 화이트보드를 찾았다.

지난번 아크웰이 작전을 설명한답시고 펼쳐 둔 것이었다.

커다란 한국 지도도 알록달록한 자석의 힘으로 딱 붙은 채 그대로 있었다.

‘지금 보니 정말 엉망진창의 작전이로군.’

만약 녀석의 작전대로 진행한다면, 절반도 가기 전에 미궁에 파묻혀 버릴 터였다.

전선 근처의 보스 몬스터는 상대할 만했으나, 안으로 가면 갈수록 엄청나게 강해질 테니까.

아마 봉인이 제대로 풀리기도 전에 한계에 봉착하고 말 것이다.

어차피 그는 한국 말고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대륙의 대규모 미궁도 처리해야 했다.

초장부터 무리하기보다는 안전한 방향이 좋을 것 같았다.

교황청의 명대로 움직이는 거긴 하지만, 능력을 넘어서는 일까지 처리해 줄 의무는 없으니까.

달칵!

"뭐 하세요?"

아크웰은 점심이 다 되어 가서야 눈을 비비며 방 밖으로 나왔다.

가만 보면 저 녀석은 하는 일도 없이, 유유자적 노닐기만 하는 것 같았다.

유진은 아크웰을 무시한 채, 지도에 숫자를 표기하기 시작했다.

녀석의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에서 검색한 내용을 토대로 공략 순서를 정하는 것이었다.

"또 제 휴대 전화 가져가셨죠? 자꾸 그러시면 안 돼요."

삑!

아크웰은 냉장고에서 빵을 꺼내 토스터에 넣으면서 리모컨으로 TV를 켰다.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는 어처구니없는 눈빛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더 가관이었다.

"드실래요? 아! 죄송합니다. 잠이 덜 깨서 그래요."

"잠이 덜 깨면 간이 붓는 병이라도 있나 보군."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선을 넘을까 말까 간 보는 놈은 가장 먼저 죽는다는 말이다."

"서, 설마 절 죽이시진……."

"효용 가치가 떨어지면, 미궁에 버리고 갈 수는 있겠지."

"헐! 너무하세요. 그래도 제가 감정까지 해 드렸는데."

아크웰은 교묘하게 유진이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피해 가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으나, 직접 언급은 피했다.

자칫 잘못하면 선을 넘어 버릴 것 같은 위험천만한 대화였지만, 녀석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진짜 잠이 덜 깨면, 어딘가에 목숨을 맡겨 놓은 미친놈이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미궁 소식입니다. 어제 여주시에서 난데없이 미궁의 파편 하나가 정화되었습니다. 헌터 협회와 군인들은 갑자기 미쳐 날뛰는 몬스터를 저지하기 위해, 종일 대규모 교전을 벌였습니다. 취재는 김신우 기자입니다.]

마침 뉴스 채널에서 어제의 사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킨 주범이었기에, 두 사람의 시선은 TV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난리가 난 장벽 상황과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드론을 수백 대나 띄웠다는 내용이었다.

"다행히 들키지는 않은 모양이네요. 빨리 빠져나온 덕분인 것 같아요."

아크웰의 말대로 그날 검문소를 통과했던 교황청 사람에 관한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직 교전이 이어지고 있다 보니, 거기까지 조사할 정신은 없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돌아 나올 때는 검문소를 그냥 통과했으니, 조사해 봤자 별다른 걸 찾을 수는 없을 터였다.

녀석이 TV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유진은 지도에 숫자 표시를 마무리 지었다.

"어디 가세요?"

"……."

휙! 턱!

아크웰이 발걸음을 옮기는 그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되돌아온 건 휴대 전화였다.

녀석이 스마트폰을 받아들며 따라나서려 했으나, 블라드 유진은 오른손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이제 차는 필요 없어."

철컥! 스윽!

그 말을 남긴 그가 사제관 밖으로 나가 버리자, 아크웰은 왠지 상처받은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아니, 어디 가시는데요? 저한테는 유진 님을 따라다닐 의무가 있다고요!"

녀석의 외침이 공허하게 울렸지만, 이미 유진은 종적을 감춘 뒤였다.

* * *

"어휴! 이 뱀 새끼들! 독 뿜어내는 거 진짜 귀찮네."

"돈도 많이 들고 말이야. 해독제 있어?"

"아직 한 사람당 하나씩은 돌아가. 서너 시간은 거뜬해."

똘똘 뭉친 열 명의 헌터들은 파주시 북쪽의 오염지대에서 몬스터를 사냥하고 있었다.

이들은 꽤 오랜 기간 한 팀으로 활동한 모양인지, 손발이 척척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오염 지대에서의 몬스터 사냥은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행위였다.

팀장의 오더 실수 한 번에 팀 전체가 몰살할 수도 있어서 집중력 저하를 가장 경계해야 했다.

제아무리 베테랑 헌터라고 해도 전투를 이어 가다 보면, 주변의 변화를 놓치기 마련이니까.

바로 지금처럼.

"포, 포위됐다! 너무 깊이 들어왔어!"

"이런! 얼른 후퇴해!"

팀장은 위험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아챘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챠르르르르!"

상대는 독무를 뿜어 대는 데다가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는 래틀 스네이크.

방울뱀을 닮았으나 아나콘다보다 훨씬 굵었고, 코브라처럼 머리를 꼿꼿이 세운 채로 돌아다니는 몬스터였다.

놈들은 영악하게도 몸을 낮춰 수풀 사이를 기어가서 헌터 팀의 퇴로를 막아 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수십 마리의 방울뱀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쉬아악! 콱!

"커헉! 주, 중독됐어!"

거대한 방울뱀에게 물리자, 미리 마셔 두었던 해독제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해독 효과를 넘어서는 수준의 독이 체내로 주입되었기 때문이었다.

얼굴이 시커멓게 변한 팀장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부들부들 떨어 댔다.

당장 해독제를 더 투입하지 않으면, 그대로 중독사할 판이었다.

"팀장을 보호해!"

"일단 해독제부터 먹여! 한 명이……. 으악!"

팀장을 대신하여 지휘하던 부팀장마저 수도 없이 아가리를 들이미는 방울뱀에게 물려 버렸다.

이대로라면 이 거대한 뱀들의 한 끼 식사가 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바로 그 순간, 어디선가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두두두두두!

갑자기 상황에 맞지 않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헌터 팀과 방울뱀들의 전투는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다음 순간 벌어진 상황은 두 무리를 완벽하게 갈라놓았다.

슈화아악! 쿠콰콰콰콰!

불타는 군마가 하늘에서 뚝 떨어짐과 동시에, 시뻘건 기운이 일어나 전방 수십 미터를 쓸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다섯 줄기의 깊숙한 고랑이 파이며 범위 안에 있던 래틀 스네이크들이 순식간에 동강 났다.

"샤아아아! 크엑!"

"으, 으악!"

그 엄청난 위력의 공격에 헌터들도 무사할 수는 없었다.

잽싸게 몸을 굴려 피한 덕분에 직격은 면했으나, 스쳐 맞은 것만으로도 전투 불능에 빠져 버렸다.

이미 지친 상태에서 얻어맞기까지 했으니, 바닥에 처박혀 일어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 어서 해독제를……."

"얼른 마셔."

어쨌거나 방울뱀들이 몽땅 쓸려 나간 덕분에, 헌터들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해독제를 마시고 재정비할 시간을 벌었기 때문이었다.

방금의 어마어마한 공격 때문에, 몇 마리 남지 않은 래틀 스네이크는 줄행랑을 놓았다.

원래 저런 몬스터라서 헌터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해독제를 마시고 포션을 발라 잽싸게 재정비할 뿐이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나타나 자신들을 도와준 사람에게 다가가서 감사를 전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반드시 사례하겠습니다."

팀장이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품속을 뒤져서 구겨진 명함을 찾아 내밀었다.

하지만 불타는 갈기의 말에서 내린 남자는 잠시 명함을 쳐다보다가, 그대로 휙 지나가 버렸다.

"돌아와라. 녹턴."

"이히히힝!"

그자가 타고 온 유령 군마는 그림자 속으로 뛰어들더니,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팀장이 얼빠진 표정으로 바라보고 서 있자, 남자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길 막지 말고 비켜."

그랬다.

이 남자는 곤경에 처한 헌터 팀을 구원하려던 게 아니라, 사냥 중이라 막아 둔 길을 뚫으려고 이곳에 내려선 것이었다.

열 명의 헌터들은 당황한 얼굴로 슬금슬금 옆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 * *

쿠웅!

헌터 팀이 막고 있던 바위를 옆으로 치워 버리고, 동굴 속으로 들어간 유진은 매우 빠르게 전진했다.

도통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그의 발걸음에는 조금도 거침이 없었다.

똬리를 튼 채 기다리다가 불쑥 튀어나오는 방울뱀이 있으면, 소수혈인으로 간단히 토막을 내 버렸다.

이전보다 월등하게 강해진 덕분인지, 트롤보다 상대하기가 수월했다.

‘따라오는군.’

그런 그의 감각에 아까 그 헌터 팀이 걸려들었다.

그들은 랜턴을 켠 채, 유진이 지나온 길을 조심조심 따라오는 중이었다.

거의 학살당하다시피 한 방울뱀의 사체를 주섬주섬 갈무리하면서 말이다.

아마 이게 웬 횡재냐며 얼른 부산물을 챙겼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그런 푼돈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보스를 처치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이나 아이템이 목표였다.

‘돈은 적당히만 있으면 돼.’

그렇게 한참을 방울뱀들이 뚫어 놓은 동굴을 지나치자, 드디어 유진의 앞에 미궁의 파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 것도 오랫동안 이곳에 있었던 모양인지, 시커먼 불길이 표면에 일어나고 있었다.

숨이 턱턱 막히도록 짙은 마기 때문에, 헌터 팀들은 이곳까지 올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아마 중간쯤 어딘가부터 되돌아간 모양이었다.

그도 아니라면 새로운 방울뱀 무리를 만나 전투를 치르고 있을지도 몰랐다.

쑥!

블라드 유진은 헌터들이 어떻게 되건 신경을 완전히 끈 채, 미궁의 파편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한데, 그런 그의 앞에는 꽤 흥미로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흠. 상당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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