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유진은 겁에 질려 벌벌 떠는 아크웰을 달랑 들고 차량으로 되돌아갔다.
"자, 잠시만요."
녀석은 아직도 혼란한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는지, 보닛에 손을 올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그런 아크웰의 뒷덜미를 잡아서 조수석에 집어넣은 다음, 운전석에 탑승했다.
텅!
"어어? 운전할 줄 모르시잖아요?"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지?"
티디딩! 부르릉!
블라드 유진은 태연하게 대답하며 차량에 시동을 걸었다.
그러자 녀석은 자신의 옷 주머니를 더듬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차 키는 대체 언제 가져가신 거예요?"
"방금."
그는 아크웰이 경악하든 말든 일체의 신경도 쓰지 않고, 그대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한데, 척 봐도 유진의 운전 실력은 예사롭지 않았다.
취미로 서킷에 나가서 레이싱을 하던 정윤규의 기억을 고스란히 얻은 데다가, 그의 동체 시력과 반응 속도는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었다.
우우우웅! 끼긱! 우우웅!
상당히 난폭하긴 했으나, 차량은 매우 빠른 속도로 검문소를 지나 여주시를 빠져나갔다.
검문소의 병사들은 곧바로 전선에 동원되었기에, 아무런 제재 없이 떠날 수 있었다.
"으어어! 처, 천천히 좀 가 주실 수 없나요?"
난데없는 광란의 질주에 아크웰은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누가 봐도 사고가 날 것만 같은 속도였지만, 유진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보는 눈이 많아."
그는 전선 주변을 날아다니는 드론을 잠깐 쳐다보더니, 앞으로 고개를 돌리며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 * *
"휴! 일단 살아서 돌아오긴 했군요. 장벽 너머에서 난리가 났던데, 뭘 어쩌신 거예요?"
명동성당 사제관으로 돌아오자마자 아크웰은 질문을 퍼부어 댔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은 녀석의 궁금증을 풀어 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저 품속에서 꺼낸 빛나는 종이를 휙 던져 줄 뿐이었다.
"이건 뭐죠?"
"봉인된 물건. 풀 방법을 알아 와라."
"음……."
한데, 아크웰은 대답 대신 눈살을 찌푸리며 희미한 보랏빛을 머금은 종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감정이라면 저도 할 수 있는데요?"
약간 의기양양하게 말하자, 유진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는 뭔가 흥미롭다는 듯이 녀석을 잠깐 바라보더니, 빛나는 종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감정인지 뭔지 얼른 해 보라는 의미였다.
"아, 예. 바로 해 보겠습니다."
아크웰은 눈치 빠르게도 종이를 잡고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코앞에서 가톨릭 기도문을 외웠지만, 유진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저 말뿐인 기도문에 영향을 받는 뱀파이어는 아무도 없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감정!"
번―쩍!
주기도문이 끝남과 동시에 아크웰의 손에서 백광이 치솟았다.
"……."
어차피 스킬을 쓰는 거면서 기도문은 왜 읊냐는 듯 물끄러미 쳐다보자, 녀석은 뒷머리를 긁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감정 스킬에 확률이 있어서요. 이상하게도 기도하면, 성공 확률이 높더라고요. 보세요. 한 방에 성공했잖아요."
스윽!
유진은 아크웰이 내민 종이를 받아들고 홀로그램에 비춰 보았다.
<아이템 정보>
명칭 : 연옥 입장권
등급 : A
내구도 : 일회용
효과 : 연옥 개방
연옥으로 향하는 게이트를 일시적으로 열 수 있음. 감옥 문은 단 하나만 개방 가능함.
‘이해가 잘되지 않는군.’
이 종이가 연옥 입장권이라는 건 명칭을 읽어 보면 바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맨 아래쪽에 적힌 내용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이것이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 아이템인지도 모호했다.
가톨릭 교리에서 연옥(purgatory)은 천국으로 가기에는 자질이 부족하나, 지옥에 갈 정도의 죄는 짓지 않은 영혼이 머무는 곳이다.
사실 연옥은 가톨릭이 신교와 차별되는 정체성을 확립하고, 내부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사용한 신앙 개념이었다.
원래는 존재하지 않아야 정상이나, 아무렴 어떠한가.
지금은 미궁이니 헌터니 하는 것들도 지구를 마구 돌아다니는 판국인데.
어쨌거나 아이템에서 거론되는 연옥이 가톨릭 교리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저도 볼 수 있나요?"
"원한다면."
"그럼 잠깐만 살펴보겠습니다."
그가 연옥 입장권을 내주자, 아크웰은 면밀하게 종이를 살펴보았다.
그러던 중, 녀석은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밑에 한 줄이 더 있습니다. 매우 희미하게 숨겨져 있네요. 아마 감정 스킬이 없다면 읽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읊어 봐."
"데리고 나올 수 있는 개체는 A급 하나뿐이라고 쓰여 있네요."
아크웰의 말을 듣고 나니, 아이템의 효과는 더더욱 이해하기 힘들어졌다.
‘아무래도 직접 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겠군.’
스윽!
유진은 연옥 입장권을 검지와 중지로 잡고 빼앗으며 녀석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자 아크웰은 그를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며 답변했다.
시선의 의미를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보통 이런 입장권 같은 아이템은 찢어서 사용합니다."
"스스로 가치를 증명하는군."
"예?"
"이게 뭔지는 확인해 보면 알 터."
찌이익!
블라드 유진은 녀석의 질문을 깡그리 무시한 채, 손가락 사이에 끼워 든 연옥 입장권을 찢어 버렸다.
그러자 두 사람의 사이에서 보랏빛 구름이 튀어나오더니, 순식간에 그의 몸을 감쌌다.
이윽고 유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야말로 일체의 망설임도 없는 행동에 아크웰은 얼빠진 표정으로 거실에 서 있었다.
"와, 진짜 노빠꾸 상남자네.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그냥 들어가?"
* * *
화르르륵!
온통 어둠으로 잠식된 공간, 그 속에서 시퍼런 불꽃이 치솟았다.
거대한 푸른 화염은 허공을 유영하다가 지면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내리꽂혔다.
쿠화아아아!
"크이에에에엑!"
그곳에는 거대한 덩치의 트롤이 있었는데, 철창에 갇힌 상태라 도망도 못 치고 불꽃을 정면으로 맞아야 했다.
시퍼런 화염에 휩싸여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던 녀석은 이윽고 검은 잿더미로 변했다.
하지만 육신이 통째로 불타는 형벌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스스스스스!
한 무더기의 재가 되었던 트롤은 이윽고 원상태로 돌아와 철창을 붙잡고 구슬픈 괴성을 질러 댔다.
"크우우우! 우우!"
놈의 영혼에 남은 죄악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저 ‘정화하는 불’에 고통을 받아야 하는 구조였다.
블라드 유진은 하늘 높은 곳으로 올라간 푸른 화염을 힐끗 쳐다보더니, 철창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그가 접근하자, 안에 갇힌 트롤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크와악! 크악!"
마치 철천지원수라도 만난 듯한 반응이었다.
‘아까 처리한 보스 트롤인가 보군. 눈빛이 낯익어.’
아무래도 토벌당한 보스 몬스터의 영혼은 연옥으로 끌려오게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보스 트롤이 발악하며 철창 밖으로 손을 마구 휘둘렀지만, 유진은 깡그리 무시한 채 그냥 지나쳐 버렸다.
시뻘건 하늘을 돌아다니던 푸른 화염이 재차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에, 재빨리 자리를 피한 것이다.
쉬이이익! 쿠화아아아!
"크아아아아아!"
불꽃이 철창을 감싼 채 잠시 시간이 지나자, 녀석은 다시 재가 되어 부스러졌다가 순식간에 재생되었다.
정말이지 눈 뜨고는 못 볼 정도로 잔인한 형벌이었다.
‘하나만 개방할 수 있다던 감옥 문은 저 철창을 말하는 거겠군.’
보스 트롤이 갇힌 장소 말고도 연옥 이곳저곳에는 여러 개의 철창이 있었다.
유진은 정화하는 불을 피해 철창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그 안에는 이름조차 들어 보지 못할 정도로 다양한 몬스터가 갇힌 상태였다.
놈들은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바닥에 엎드려 있었는데, 정화하는 불이 올 때마다 비명을 질러 댔다.
무시하려 해도 도무지 그럴 수가 없을 정도의 고통인 모양이었다.
"크우!"
"케르륵!"
철창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이동하자, 몬스터들이 그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연옥을 마음껏 거니는 모습이 신기한 모양인지, 하나같이 철창에 바짝 붙어 이방인을 구경하기 바빴다.
유진은 그런 녀석들을 여유롭게 둘러보았다.
상당한 수준의 보스 몬스터였으나, 하나같이 초췌한 모습.
체내에 충만하던 마기는 정화하는 불에 휩쓸려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저렇듯 마치 시체처럼 추레한 몰골을 할 수밖에 없었다.
슈화아아악! 쿠화아아앙!
"이히히힝! 푸르륵!"
시퍼런 불꽃이 지면을 때리며 철창을 휩쓸고 지나가는데, 어디선가 말의 투레질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는데, 그곳에는 늠름한 덩치의 검은 말이 정화하는 불을 정면으로 맞고 있었다.
화르르륵!
다른 몬스터들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며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지만, 이 녀석은 뭔가 조금 달랐다.
‘정화하는 불의 영향을 받지 않아?’
갈기가 불타는 듯한 형상의 유령 군마는 화염이 다가오는 방향으로 몸을 들이밀기까지 했다.
마치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게다가 다른 녀석들과는 달리, 잿더미로 변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정화하는 불이 날아들 때마다 녀석의 갈기는 더욱 맹렬하게 타올랐다.
그 고고한 자태가 블라드 유진의 시선을 붙잡았다.
‘멋지군. 화염을 맞을 때마다 점점 강해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철창을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제아무리 강해져도 이 봉인은 오로지 형기가 끝나거나 연옥 입장권이 있어야만 풀 수 있었다.
물론 연옥에 불타는 말보다 더 강한 녀석은 얼마든지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이 녀석이 가장 눈에 띄었다.
"나와 함께 갈 테냐?"
그가 손을 내밀자, 유령 군마는 눈을 감은 채 철창 사이로 이마를 들이밀었다.
쓰다듬어 달라는 의미였다.
슥슥!
갈기에 붉은 화염이 일렁이고 있었으나, 뜨거운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녀석이 불길을 조절할 수 있는 듯했다.
‘좋군. 풀어 주자.’
철컹! 쉬이이이잉!
유진이 철창에 손을 갖다 대자, 자동으로 문이 열리며 보랏빛 구름이 튀어나왔다.
구름은 그와 유령 군마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쿠화아아아!
이윽고 시퍼런 불길이 빈 철창을 훑고 지나갔다.
두두두두두!
연옥에서 빠져나온 블라드 유진은 유령 군마를 탄 채 밤하늘을 질주하고 있었다.
반짝이는 불빛으로 가득한 도시 상공을 날아다니자, 마치 무수히 많은 반딧불이 사이를 헤치며 말을 달리는 것 같았다.
천 년을 넘게 살았지만, 겪어 보지 못한 새로운 종류의 경험이었다.
"마음에 드는구나."
유령 군마에 탄 채 허공을 질주하던 그의 입가에 아름다운 호선이 그려졌다.
이제껏 보여 왔던 냉막한 느낌이 아닌, 한없이 따스한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