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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블러드-8화 (9/226)

8화

"크우우우!"

보스 트롤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시커먼 호숫물을 헤치며 밖으로 걸어 나왔다.

대략 5m 높이의 신장에 우락부락한 근육질 몸매.

살덩이가 축 늘어져 있던 일반 트롤들과는 용모 자체가 달랐다.

그야말로 제왕이라고 할 만한 녀석이었다.

"크르르르!"

놈은 물가에 놓아둔 시커먼 몽둥이를 집어 들며 으르렁거렸다.

아무래도 보스라, 무기도 아무거나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잠시 녀석은 유진의 반응을 보더니, 이윽고 부지불식간에 달려들어 몽둥이를 내려쳤다.

후우웅! 콰앙!

마치 유성이라도 떨어진 듯, 바닥이 움푹 파였다.

그와 동시에 사방으로 엄청난 충격파가 퍼져 나갔다.

일격에 직경 5m의 구덩이가 생겼지만, 보스 트롤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콰광! 쿠콰콰콰콰!

"크워어어어!"

놈은 무자비하게 몽둥이를 휘둘러 방금까지 그가 있던 자리를 초토화하기 시작했다.

수십 번의 몽둥이세례가 쏟아지고 나서야 녀석의 행동은 멈췄다.

쓰스스스!

이윽고 어디선가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불어와 시커먼 먼지를 날려 보냈다.

"크으?"

하지만 겹쳐진 수십 개의 구덩이에는 유진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무지막지한 공격이 퍼부어졌다 하더라도 살점이나 뼛조각 정도는 남는 법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다는 건 그가 이미 공격 범위 밖으로 탈출했음을 의미했다.

보스 트롤은 시뻘건 안광을 빛내며 주변을 빠르게 돌아보았다.

"그래도 감은 있는 놈이군."

"크웍! 크륵! 크륵!"

그가 멀찍한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보스 트롤은 마치 고양이가 채터링 하듯 불쾌한 소리를 냈다.

유진의 여유로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쿵! 쿠구구구궁!

"크와아아아!"

놈은 무지막지한 속도로 달려와 재차 공격을 퍼부었다.

보폭이 워낙 넓은 데다가 몸놀림도 재빨라서, 녀석이 다가오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슈팍! 쿠화앙!

하늘 높이 들어 올려졌다가 대각선 아래로 내리꽂히는 몽둥이의 위용은 무시무시했다.

속도도 속도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두꺼운 강철도 종잇장처럼 찢어 버릴 것 같았다.

게다가 몽둥이에서 피어오르던 마기가 가공할 속도로 쏘아져 주변의 모든 것을 다 때려 부수고 있었다.

집채만 한 바윗덩이가 수십 조각으로 갈라지고, 마기에 오염된 나무들이 우수수 잘려 나갔다.

콰아앙!

"꽤 빠르다만, 거기까지다."

어디선가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보스 트롤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확 솟구쳐 올랐던 먼지가 걷히자, 어느새 다가온 유진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왼손으로 몽둥이 자루를 내리누르고, 오른손으로는 놈의 엄지손가락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붙잡힌 녀석의 시커먼 얼굴이 점점 붉어지는 게 아닌가.

게다가 아무리 힘을 줘도 몽둥이는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크워어어!"

보스 트롤은 괴성을 지르며 그를 향해 왼 주먹을 후려갈겼다.

오른팔이 봉쇄되었지만, 투지를 잃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녀석은 헛방을 쳐야만 했다.

스으으윽!

몸을 시커먼 안개처럼 변화한 유진이 팔을 타고 올라 어느새 코앞까지 짓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움직임이었으나, 놈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공격을 펼쳤다.

큼지막한 입을 벌려서 유진을 물어 버리려 한 것이다.

"크와아악!"

쩍!

그러나 거기까지도 예상한 모양인지, 그는 녀석의 어깨를 밟고 순식간에 방향을 바꾸었다.

"폭사."

유진이 주먹을 내지르자, 두 줄기의 검은 송곳이 튀어나와 보스 트롤의 오른쪽 눈을 꿰뚫었다.

순간적으로 고개가 뒤로 확 꺾이며 놈은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한데, 녀석의 반응은 이제껏 봐 왔던 트롤과는 사뭇 달랐다.

안구에 폭사 스킬이 박혔음에도 쓰러지기는커녕 흐르는 피와 허여멀건 한 액체를 호쾌하게 닦아 버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모로 꺾으며 유진을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폭사 스킬이 녀석의 뇌까지 꿰뚫지 못한 모양이었다.

‘보스라서 확실히 다르군. 게다가 재미있고……. 맛있어.’

블라드 유진은 보스 트롤보다 체중이 훨씬 가벼웠다.

이러면 만약 근력이 비슷할지라도 힘 싸움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놈과 접촉했을 때, 피를 빨아들여서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만들어 버렸다.

그랬기에 녀석의 오른팔을 봉쇄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왠지 흡족한 표정의 유진은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다가오는 보스 트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크르르르르!"

최대 약점인 안구를 공격했음에도 놈은 쓰러지지 않았다.

뇌를 파괴해야 죽는 몬스터인데,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상당히 곤란했다.

"크와아아!"

후아앙! 콰콰콰콰콰!

그냥 내리찍어서는 유진이 쉽게 피한다는 걸 알아챈 모양인지, 보스 트롤은 몽둥이를 횡으로 휘둘렀다.

쿠콰콰콰콰콰!

바닥을 쓸며 다가오는 몽둥이의 위력은 그야말로 불도저가 따로 없었다.

마기에 의해 지면이 녹아내리듯 갈려 나감과 동시에 충격파가 허공을 뒤덮었다.

만약 도약해서 피했다가는 보이지 않는 충격파가 온몸을 가루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단순하지만, 걸릴 수밖에 없는 기술이군.’

하지만 마기의 흐름을 감지한 유진은 함정에 걸려들지 않았다.

암흑화를 사용하여 뒤로 쭉 빠졌다가, 녀석의 눈앞까지 부지불식간에 다가갔다.

"폭사."

스―핑! 퍼벅! 푸확!

그는 재차 녀석의 안구에 시커먼 송곳 두 개를 박아 넣고, 냅다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자 폭사 스킬이 더욱 깊은 곳까지 쑤시고 들어갔다.

"쿠르륵! 쿠륵!"

검은 기운으로 된 송곳이 드디어 뇌를 휘저어 놓았는지, 보스 트롤은 남은 한쪽 눈을 까뒤집으며 고통스러워했다.

츠츠츠츠츠!

유진은 놈의 안구에 주먹을 박아 넣은 채로 흡혈 스킬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투명해진 손을 통해서 트롤의 혈액이 급속도로 빨려 들어왔다.

할짝!

입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으나, 그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마치 피 맛이 느껴지는 듯한 모습이었다.

‘역시 보스의 피가 가장 맛있군. 프리클 플라워보다 훨씬 나아.’

유진은 하얗게 웃으며 숨이 껄떡껄떡 넘어가는 중인 보스 트롤을 바라보았다.

뇌 손상에 이어 혈액까지 부족해지자, 녀석은 무지막지한 회복력을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하고 금세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미궁의 보스 트롤 처치!]

[보상이 주어집니다.]

땡그랑! 챙!

눈앞에 빛으로 된 글귀가 나타나기 무섭게 트롤의 몸 어딘가에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바닥에 떨어진 물체는 에너지 코어와 손바닥만 한 종이였다.

보스를 잡고 나온 아이템이었지만, 그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의 신경은 온통 눈앞의 녀석에게 쏠려 있었다.

"쓸 만한 게……. 없군."

피의 권능을 통해서 살펴보았지만, 이놈에게서 얻을 수 있는 능력은 하나뿐이었다.

바로 트롤의 무지막지한 회복력.

하지만 피의 권능은 이따위 저급한 회복력보다 더욱 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아마 이 스킬은 흡수해 봐야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할 터였다.

유진은 녀석의 남은 혈액을 깡그리 빨아들인 뒤, 홀로그램을 켜 보았다.

자신의 몸에 뭔가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슬슬 잠이 깨는구나.’

<능력치 정보>

이름 : 블라드 유진(Vlad Eugene)

레벨 : 444(봉인율 75%)

등급 : B(Lv. 401~500)

종족 : 뱀파이어

종족 효과 : 강체, 불로불사

<종합 스킬 정보>

1. 흡혈(B)

2. 혈성쇄혼술(B)

3. 암흑화(B)

4. 폭사(D)

5. 소수혈인(B)

6. 권능 폭발(봉인)

7. ???(?)

8. ???(?)

……

<스킬 정보>

명칭 : 소수혈인(素手血刃)

등급 : B        위력 : B+

사거리 : 1m + α

지속 시간 : 무한대

재사용 대기 시간 : 없음

소모 자원 : 피의 권능

뱀파이어 로드의 고유 기술. 피의 권능을 손톱 형상으로 만들어 무기 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음.

보스 몬스터의 능력을 빼앗지는 않았으나, 스킬 하나가 개방되었고 봉인율이 5% 낮아졌다.

덕분에 그의 레벨은 빠르게 치솟아 444가 되었다.

더불어 등급도 한 단계 상승했다.

"추억이 많은 기술이지. 왠지 반갑군."

소수혈인은 교황청의 성기사들과 싸울 때 가장 유용하게 사용했던 무기였다.

하지만 피의 권능이라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기에, 사실상 지속 시간은 무한대가 아니었다.

혈액을 흡수하지 못한다면, 결국에 피의 권능은 모두 소진될 테니까.

‘그래도 지금은 피의 권능이 완전히 소모될 일은 없겠군.’

세상천지에 가득한 게 몬스터였고, 심지어 보스의 혈액은 맛있기까지 했다.

게다가 이제 몬스터를 학살하면 인간들이 박수까지 보내 주었다.

"마음에 들어."

흡혈과 혈성쇄혼술이 모두 B급으로 오른 건 매우 반가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숙련도가 부족한 모양인지, 보스 프리클 플라워에게서 얻었던 폭사는 아직 D급 그대로였다.

유진은 능력치와 스킬을 확인하고 나서야 바닥에 떨어진 종이와 에너지 코어에 시선을 돌렸다.

에너지 코어는 주워서 그냥 주머니에 넣었고, 종이만 홀로그램에 비춰 보았다.

<아이템 정보>

명칭 : ??? 입장권

등급 : ?

감정이 필요함.

‘너도 봉인된 거로구나.’

그는 정보가 표시되지 않는 종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쿠구구구구구!

오래된 미궁이라 그런지, 꽤 시간이 지난 뒤에야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두컴컴한 미궁의 풍경은 싹 사라지고 어느새 그는 도심지로 돌아와 있었다.

‘하늘이 맑다.’

오염 지역은 온통 먹구름이 끼어 빛이 제대로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새파란 원래의 색깔을 회복한 상태였다.

아직 대지에 누적된 마기와 이곳저곳을 배회하던 몬스터는 그대로였지만.

왜애애애앵!

바로 그 순간, 저 먼 곳에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장벽을 지키던 헌터들도 오염 지역의 변화를 감지한 모양이었다.

아마도 미궁이 정화된 걸 눈치챈 몬스터들이 난리를 치는 것 같았다.

"얼른 짐꾼 녀석을 데리러 가야겠군."

스으으윽!

암흑화를 사용한 유진은 미궁의 파편이 있던 자리에서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 * *

왜애애애앵!

"얼른 들어가!"

"뭐 하는 거야! 팀원 버리지 말고 챙겨!"

"정신 차리고 입구 방어해!"

여주시의 장벽은 엄청나게 분주해진 상태였다.

사이렌은 끊길 줄을 몰랐고, 헌터와 군인은 출입구를 향해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으으!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혹여나 들킬까 봐 수풀에 숨어 있던 아크웰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투타타타탕!

"올라오는 새끼들 막아!"

급기야 바로 앞의 장벽 위쪽에서 몬스터의 괴성과 총성이 계속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있다가 무슨 변을 당하지나 않을까, 심장이 벌렁거렸다.

척! 척! 척!

그런데 문득 녀석의 앞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크웰은 숨까지 참은 채, 움직이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톡!

이마에서 흐른 식은땀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왜 엎드려 있지? 별짓을 다 하는군."

"으헉!"

느닷없이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녀석은 깜짝 놀라며 옆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혹시나 날아올 공격을 회피하려는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자, 아크웰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곳에는 그리 달갑지 않지만, 이 순간만큼은 너무도 보고 싶은 자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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