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장벽이 있는데요?"
블라드 유진의 손에 달랑달랑 들린 아크웰은 한 줄기 희망을 보았다.
10m가 훌쩍 넘어 보이는 높고 두꺼운 장벽이 전선을 양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나들 수 있을 만한 공간은 중앙의 좁다란 틈뿐이었다.
이 장벽은 제작 각성자들이 모여 만든 것으로, 어마어마한 방어력을 자랑했다.
마치 중세 성벽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거지만, 강도가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건 사람이 아니라 몬스터를 막기 위해 세워진 거였으니까.
"저기 보세요. 장벽 위에 경계병도 있습니다. 그냥 지나가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아무래도 넌 여기 있는 게 좋겠군."
"그렇죠? 저야 전투하고는 거리가 머니까요. 한데, 유진 님은 어쩌시려고요?"
"……."
그는 아크웰을 바닥에 내려놓고 장벽 위쪽과 중앙의 출입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장벽에는 정말이지 미세한 틈도 존재치 않아서 제아무리 헌터라도 기어 올라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삼엄한 경계가 펼쳐져 있는 출입구로 나갈 수도 없었다.
‘암흑화의 현재 등급으로는 저 많은 인간의 시선을 피할 수가 없겠지. 최대한 사람이 적은 곳을 통과해야겠군.’
유진의 고민을 눈치챈 모양인지, 아크웰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무리하지 않고 여기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본 것이다.
하지만 이윽고 녀석의 바람은 산산조각으로 박살 나고 말았다.
척!
블라드 유진은 오른발을 뒤로 빼며 무릎을 살짝 굽혔다.
그러고는 곧장 장벽을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
슈화아아악!
"헉!"
그의 육신이 시커멓게 변하며 공중으로 솟구치자, 아크웰은 깜짝 놀라 헛바람을 삼켰다.
대체 저 미끄러운 벽을 어떻게 평지처럼 달릴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번에 장벽 위로 올라간 유진은 그림자에 동화되며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아크웰은 입을 쩍 벌린 채, 장벽 위를 한참 동안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미 유진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도 말이다.
"미쳤네. 아니, 저걸 대체 어떻게 넘어가? 아……. 사람이 아니었지."
* * *
한낮임에도 대지는 칙칙한 빛으로 뒤덮여 있었다.
미궁의 파편에서 흘러나오는 마기가 범위 내의 모든 물체를 오염시켰기 때문이었다.
도로를 따라 줄지어 선 가로수와 공원의 관목들은 바싹 말라비틀어졌다.
당연히 사람은커녕 새나 곤충 등 작은 생물 따위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기괴한 모습의 몬스터들만 이곳저곳을 기웃거릴 뿐이었다.
스윽!
"그웍? 킁킁!"
옆으로 시커먼 그림자가 지나가자, 가로등을 무기 대용으로 든 거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는 마치 먹잇감의 냄새라도 맡은 듯,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예상과는 달리, 생명체는 포착되지 않았다.
"그르륵!"
놈은 자신의 머리를 벅벅 긁으며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너무 가까웠다.’
거인의 옆을 지나가던 자는 암흑화한 유진이었다.
얼마나 다가가면 눈치채는지 확인하려 조심스럽게 접근해 보았는데, 의외로 감지 범위가 꽤 넓었다.
그는 멀찍이 떨어진 상태로 녀석의 외형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대략 4m 정도 되어 보이는 신장과 그에 걸맞은 큰 덩치, 덕지덕지 붙은 살덩어리가 축 늘어진 형태의 괴물.
죄다 이놈들이 뽑아 쓴 모양인지, 도시의 가로등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트롤이라고 했던가. 상당히 크고……. 추악하게 생겼군.’
사실 프리클 플라워도 혐오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트롤은 덩치가 워낙 큰 데다, 살덩이에 묻은 오물에서 악취가 흘러나왔기에 더욱 불쾌한 느낌이었다.
놈은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본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나, 유진은 기습할 마음이 없었다.
그의 목표는 바깥에 나와 있는 잔챙이가 아니라, 미궁 내부에 도사리고 있을 보스였으니까.
스으으윽!
블라드 유진은 트롤을 지나친 채, 오염 지역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면 갈수록 짙은 마기가 피어올라 마치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미궁의 파편에서 흘러나온 마기가 누적되다 보니,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사악한 기운임은 분명하지만, 피의 권능과는 뭔가 결이 다르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기가 중첩된 지대를 지나쳤다.
아마 평범한 사람이 이곳을 걸어갔다면, 질식해서 죽거나 마기에 오염되어 미쳐 버렸을 터였다.
하지만 유진의 표정은 산책을 나오기라도 한 듯 담담하기만 했다.
이 이질적인 마기는 되레 그의 능력을 한 단계 더 끌어 올려 주고 있었으니까.
‘결이 달라도 못 쓸 건 없지.’
뱀파이어 로드는 악의 종주라고 할 수 있는 존재.
생소한 마기를 직접 활용하지는 못해도 간접적으로나마 긍정적인 효과를 받는 건 가능했다.
마기를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려면, 좀 더 연구가 필요할 것 같았다.
‘여기로군.’
고오오오!
암흑화 스킬 덕분에 유진은 오염 지역을 거의 직통으로 건널 수 있었다.
전투 한번 없이 미궁의 파편 앞까지 도달한 것이다.
은신 능력이 있는 헌터도 이런 일은 해내지 못할 터였다.
헌터들의 스킬은 지속 시간과 재사용 대기 시간이 존재하니까.
뱀파이어의 고유 능력인 암흑화는 그런 제약이 전혀 없었다.
물론 봉인 때문에 등급이 낮아져서 들키면 그대로 풀려 버리겠지만.
‘뭔가 조금 다른데.’
블라드 유진은 바티칸과 양수역에서 갑자기 날아든 미궁의 파편과 마주한 적이 있었다.
어디서 사출되는지는 모르지만, 포탄처럼 날아와 바닥에 박혔던 파편은 모두 육각 기둥 모양이었다.
물론 트롤을 토해 내는 눈앞의 것도 기본적인 형태는 똑같았다.
단지 표면에서 생성된 마기가 마치 불타는 것처럼 일렁인다는 게 다른 점이었다.
잠깐 미궁의 파편을 살펴본 그는 금방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오래돼서 그런 거로군.’
미궁은 정형화된 장소가 아니었다.
마치 생명체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한 형태로 진화했다.
그러니 오래된 미궁일수록 내부가 복잡할 확률이 높았고, 그만큼 많은 마기를 뿜어 냈다.
다량의 마기가 풀려나오니, 저렇듯 시커먼 불꽃 형상이 나타난 것이다.
슈웅! 슈슈슝!
"크뤠에엑!"
"그워억!"
무심코 접근하려는데 파편의 표면이 꿀렁거리더니, 수십 마리의 트롤을 불쑥 토해 냈다.
내부가 과포화되면, 미궁은 이런 식으로 몬스터를 내보내게 되어 있었다.
‘웨이브가 시작될 수도 있겠군.’
과포화 상태가 오랫동안 이어지는 경우, 미궁은 몬스터를 대량으로 뱉어 내기도 했다.
그럼 오염 지역도 가득 차게 되니, 몬스터들은 이주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오염되지 않은 인간의 땅으로 이동할 확률이 높았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장벽은 어마어마한 난관에 봉착하게 될 터였다.
물론 인간들이 어떤 개고생을 하든 뱀파이어 로드인 블라드 유진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지만.
그는 트롤들이 흩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미궁의 파편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시커멓게 불타는 육각 기둥의 표면으로 몸을 쑥 집어넣었다.
방해를 받기 전에 얼른 들어가서 보스 몬스터만 잡고 나올 생각이었다.
"크웍?"
하지만 유진의 계획은 초장부터 어긋나고 말았다.
미궁의 파편으로 들어가자마자 그의 눈에 보인 것은 한곳에 우글우글 모여 있는 트롤 무리였다.
족히 서른 마리는 넘어 보였는데, 미궁 밖으로 차례차례 나가려고 대기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런."
* * *
콰직―!
"케르륵!"
입구에 모여 있었던 서른 마리 남짓의 트롤 무리는 대부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무기는 들고 있지 않았으나, 커다란 덩치로 돌진해 들어오는 놈들의 위용은 사뭇 대단했다.
아무래도 미궁의 앞쪽에는 길이 좁았기에, 피할 공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유진은 놈들의 공격을 회피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저 달려드는 순서대로 후려쳐 머리통을 터트려 버릴 뿐이었다.
"폭사."
스―핑! 퍼벅!
그의 손등에서 튀어 나간 두 개의 검은 가시는 마지막 트롤의 한쪽 눈구멍을 꿰뚫어 버렸다.
"그우욱!"
쿠웅!
막강한 회복력을 지닌 트롤이라도 뇌에 심각한 피해가 발생하면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을 통해 이놈들에 관해서 미리 검색해 오길 잘한 것 같았다.
‘시시하군. 맛도 뭐……. 그저 그렇고.’
유진은 마지막 녀석이 죽기 전에 오른손을 투명하게 만들어 피를 잠깐 빨아 보았다.
하지만 프로그맨, 프리클 플라워와 마찬가지로 일반 몬스터는 그리 맛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보스 몬스터의 피를 빨아 봐야지, 그때 그 맛을 느낄 수 있을 듯했다.
척! 척!
온통 피범벅이 된 입구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자, 기묘한 형태의 숲이 나타났다.
하늘이 시커먼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어서 숲은 그야말로 암흑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뱀파이어에게 어둠은 가장 안락한 장소였다.
‘분위기가 나쁘지 않네. 여기서 살아도 되겠어.’
그는 유유자적한 걸음걸이로 어두운 숲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안으로 가면 갈수록 트롤은 바글바글했다.
녀석들은 시커멓게 변한 나무를 뿌리째 뽑아서 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입구에 있던 놈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느낌이었다.
끈적끈적하게 변한 마기에 완전히 잠식되어 두 눈에서 시커먼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으니까.
‘앞쪽의 잔챙이들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별 재미가 없겠어.’
유진은 암흑화 상태로 마기를 잔뜩 머금은 트롤 무리를 그냥 지나치려고 했다.
하지만 녀석들의 감지 범위는 그의 예상보다 훨씬 넓었다.
아무래도 마기를 흡수하면서 바깥의 놈들보다 좀 더 강해졌기에 그런 것 같았다.
"그워어어!"
쿵! 쿵! 쿵! 쿵!
블라드 유진을 발견한 검은 트롤은 미친 듯이 달려와 나무줄기를 휘둘렀다.
후웅! 콰가각!
그런데 분명 방금까지 눈앞에 서 있던 그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게 아닌가.
"그욱?"
나무줄기를 휘둘렀던 녀석이 수박만 한 눈알을 멍청하게 굴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유진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몸을 날린 그가 트롤이 휘두른 나무줄기 위에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멍청하긴."
"그워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뒤에야 놈은 블라드 유진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스―핑! 퍼벅!
폭사 스킬을 사용하자, 큼지막한 검은 가시가 트롤의 눈을 꿰뚫었다.
두개골을 꿰뚫고 뒤통수까지 튀어나올 정도의 위력이라, 제아무리 마기로 강화된 녀석이라고 해도 생존할 수가 없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어 버렸지만, 놈이 쓰러지는 소리는 다른 트롤들의 주의를 끌 만했다.
쿠웅!
"그웍?"
"구옥?"
"끡?"
멍청해 보이는 울음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오자, 유진은 황급히 자리를 비웠다.
* * *
‘넓다.’
상당히 오래된 미궁인 모양인지, 내부는 넓어도 너무 넓었다.
게다가 마기로 오염된 음침한 숲이 자꾸만 방향 감각을 잃게 했다.
마치 미로에 들어온 듯했으나, 유진은 전혀 헤매지 않았다.
그저 마기의 농도가 짙은 곳으로만 가면, 높은 확률로 보스 몬스터를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마기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는 건 미궁 내에서 엄청난 이점이었다.
‘여기 있었군.’
보스 트롤은 마기로 오염된 호수에 가만히 앉아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은 마치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거 같았는데, 자세히 보니 트롤 사체를 깔고 앉은 상태였다.
심기를 거스르는 동족을 왕창 죽여서 왕좌처럼 사용하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의자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