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밤이 깊어지자 유진은 잠에 빠져들었다.
피의 권능을 얻기 전에는 야간에만 활동하고 돌아다녔으나, 언젠가부터 인간들과 똑같은 패턴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아마도 고위 뱀파이어가 된 이후로 그렇게 된 듯했다.
"으음."
아침 햇살이 얇은 백색 커튼을 뚫고 들어와 얼굴에 비치자, 그는 눈을 번쩍 떴다.
꽤 오랜 시간 잠을 잤음에도 불구하고 눈곱은커녕 부은 흔적조차 없었다.
스르륵!
침대에서 일어난 블라드 유진은 커튼을 옆으로 젖히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인간이었던 시절 매일같이 맞이하던 뜨거운 태양이 그의 새하얀 피부를 빛내 주었다.
그야말로 음료수 광고에나 나올 법한 자태였다.
"……어? 저기다!"
"와! 엄청나게 잘 생겼어! 저게 사람이야, CG야?"
눈을 감고 햇빛을 만끽하던 중이었는데, 어디선가 들려온 다급한 외침이 분위기를 와장창 깨 버렸다.
이윽고 웅성거리는 소음이 사제관 앞을 가득 메웠다.
"어제 양수역의 영웅이시죠!? 잠시 인터뷰 좀 할 수 있을까요?"
"아니, 우리가 먼저예요. 우린 이탈리아어 통역도 가능합니다. 야! 어서 뭐라도 빨리 말해 봐."
"어제 뉴스에 나왔던 사람 맞아?"
"그런 분이 우리 성당에 머물고 계셨어?"
"교황청에서 왔다잖아. 헌터 협회에서 보도 자료를 냈대."
하필이면 오늘은 일요일이라 아침 미사 시간과 겹쳐 버렸다.
그래서 그런지, 기자들과 미사를 드리러 온 신도들이 사제관 앞을 꽉 채우고 있었다.
신도들은 대성당으로 들어가야 했으나, 웬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구경하러 와 본 모양이었다.
‘뭐야. 이 상황은.’
유진은 무심한 눈빛으로 군중을 쳐다보았다.
그런 그를 향해 쏟아지는 건 온갖 질문과 플래시 세례였다.
찰칵! 찰칵!
"흠."
인간들이 많은 건 하등 신경 쓰지 않았지만,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건 영 거슬렸다.
덜컥! 촤아악!
그는 사람들의 관심을 무시한 채,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쳐 버렸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아크웰은 일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녀석이 꼭 필요했다.
‘아직도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군.’
뭐가 어떻게 됐건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었다.
철컥! 스윽!
유진은 방문을 열고 침대로 다가가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이윽고 뭔가 이상한 시선을 느낀 아크웰이 인상을 쓰며 잠에서 깨어났다.
녀석은 눈을 비비며 고개를 마구 흔들더니, 꽤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를 알아보았다.
"누구……. 제 방에는 왜 들어오셨어요?"
"문제가 생겼다."
"예?"
"시끄러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전 가만히 잠만 자고 있었는데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으나, 블라드 유진에게서는 답변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그는 열린 방문 너머의 창문을 힐끔 바라볼 뿐이었다.
이제 이런 행동이 익숙한 모양인지, 아크웰은 힘겹게 일어나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잠시 후, 창문을 열어 본 녀석의 비명이 사제관에 울려 퍼졌다.
"으악! 저게 다 뭐예요?"
"……."
유진은 팔짱을 낀 채, 현관을 향해서 고개만 까딱거릴 뿐이었다.
알아서 해결하라는 의미였다.
"이걸 어떡하지?"
정말로 곤란하다는 표정이었으나, 어쨌든 이 일을 해결하긴 해야 했다.
녀석은 대충 고양이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황급히 사제관을 나섰다.
"여기 가만히 계세요! 어떻게든 해결하고 돌아오겠습니다."
덜컹!
아크웰이 나가고 혼자 남겨진 그는 다시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저 녀석,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바깥의 상황을 해결한다면, 어제 범했던 무례를 눈감아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언제까지나 녀석이 깔끔하게 일을 처리해야겠지만.
* * *
‘이건 뭘까?’
블라드 유진이 주머니를 뒤지자, 광택 나는 무언가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이 물체는 프리클 플라워를 학살하며 얻은 에너지 코어였다.
원래는 시커먼 마기에 오염되어 있었으나, 몬스터의 몸에서 빠져나오며 신비로운 푸른 빛을 뿜어 댔다.
"어제 그 녀석이 D급이었군. 보스는 C고."
그는 급하게 나가느라 아크웰이 두고 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프로그맨을 사냥할 때는 에너지 코어가 하나도 나오지 않았는데, 어제는 세 개나 주울 수 있었다.
미궁 하수인들에게서 두 개, 보스에게서 한 개가 나온 것이다.
‘D급 두 개에 C급 하나라……. 헌터들은 이걸 팔아서 돈을 벌거나, 자신의 레벨을 올리는 모양이군.’
에너지 코어는 현대 산업의 핵심이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물질이었다.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으면서도 막대한 전력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게다가 다양한 방향으로 에너지 코어를 활용하는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 중이었다.
"내 레벨은……. 안 되는군."
혹시나 해서 C급 에너지 코어를 가슴팍에 갖다 대 보았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봉인으로 인해 명목상으로만 C급일 뿐, 본신은 EX급을 아득히 넘어서는 초월자니까.
‘계급이 돈으로 결정되는 사회. 하지만 크게 다르지 않다.’
유진은 원래 헝가리 대공국에 작은 영지를 가진 귀족이었다.
그때는 사실 힘을 지닌 자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는 원시적 약육강식의 세계였다.
귀족층이 아닌 일반 농촌 사회는 그야말로 암흑시대와도 같았다.
경작하는 자들은 온통 농노였고, 부와 명예는 권력을 지닌 영주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뱀파이어가 되고 난 이후에도 삶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권력 대신 무력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척도가 되었을 뿐.
‘적의 모가지를 수도 없이 비틀고 피를 빨았지.’
사실상 마기로 인해 전 세계가 홍역을 치르고 있는 현대의 모습은 1천 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강력한 힘을 지닌 헌터가 대우받았고, 그들이 부와 명예를 다 가질 수 있었다.
물론 그런 부차적인 것들은 블라드 유진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찰그랑!
그는 손목에 감긴 은색 사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육신을 구속하고 권능의 발현을 방해하는 성물.
‘성가시지만 당장은 풀 수 없다. 하지만 봉인율이 낮아져 EX급에 다시 오른다면, 풀 방법이 있어.’
성물의 강력한 힘이 느껴졌지만, 유진은 이것을 풀어 낼 자신이 있었다.
물론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지금은 은색 사슬에 깃든 신성력으로 인해 마음껏 운신할 수가 없었다.
아마 교황이 원하면 다시 금제가 가해지리라.
‘성물을 완전히 풀어 낼 때까지는 네놈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하지만 그 이후에는 날 깨운 걸 후회하게 될 거야.’
덜컥!
한창 상념에 잠겨 있는데, 나갔던 아크웰이 초췌한 얼굴로 되돌아왔다.
자다 일어나서 고양이 세수만 하고 나간 터라, 원래도 엉망진창이었지만.
지금은 더욱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깡그리 보내 버렸습니다."
"……."
"싹 다 집에 보냈어요. 잘했죠?"
녀석은 이른 아침부터 자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토로했다.
미사 시작 직전이라서 그런지, 신도들은 금방 사제관 앞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궁금하기는 해도 사제관에서 나온 사람이 양해를 구하는데, 계속 이 자리에 서 있을 수는 없었다.
신도들이 사라지고 나자, 아크웰은 기자들을 불러모았다.
"……그러고는 그냥 교황청에서 파견을 나왔다고 해 버렸어요. 자꾸 귀찮게 하면 교구의 지원도 끊어 버린다고 하니까, 도망치듯 사라지던데요?"
"잠깐."
"예?"
"어제는 은밀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죠."
"그런데?"
"이렇게 된 마당에 뭐 어쩌겠어요? 그냥 교황청에서 왔다! 하고 힘으로 찍어 눌렀습니다. 협박이 잘 먹히더라고요."
"……."
녀석은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듯이 의기양양했으나, 유진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권위로 짓누른다고 해 봤자, 효과는 미미할 것이다.
이미 TV에도 그의 모습이 나왔고 이곳저곳에 많이 알려진 상태였다.
언론들도 교황청의 높은 위상을 잘 알지만, 큰 화제가 된 걸 가만히 놔둘까?
저널리즘의 특성상 아크웰이 협박한 거로 온갖 이야기가 파생되어, 사실무근의 소문이 나돌 것이다.
하지만 유진은 녀석의 그런 행동이 마음에 들었다.
‘일단 일 처리를 하긴 했군. 게다가 교황이 원하는 것과는 반대가 되었어.’
놀랍게도 아크웰은 교황의 뜻에 반하면서까지 유진의 요구 사항을 들어 주었다.
대체 왜 저런 선택을 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저 마음에 들었으면 그걸로 족했다.
팅! 휘리릭!
"으엇?"
그는 엄지를 튕겨서 녀석을 향해 뭔가를 날려 보냈다.
아크웰은 허둥거리다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든 물체를 잡았는데, 그것은 유진이 만지작거리던 에너지 코어였다.
푸른색의 작은 구슬을 손에 쥔 녀석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에너지 코어 아닌가요?"
"어제 얻은 거다. D급이지."
"이걸 왜 저한테 주세요?"
"일을 제대로 했으니까."
"이 비싼걸……."
"활동비로 써, 그리고 오늘은 좀 나가야겠다."
"어딜요?"
아크웰이 질문을 던졌으나, 유진은 대답해 줄 마음이 없는 듯했다.
그저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신고 물끄러미 녀석을 쳐다볼 뿐이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기자들을 상대하느라 지쳤지만,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선물을 주셨으니까 순순히 가는 겁니다. 다음에는 목적지를 알려 주셔야 해요."
괜히 허리를 꼿꼿이 세운 아크웰은 마지못해 간다는 듯이 미적거리며 다시 신발을 신었다.
‘역시 사람을 움직이는 건 돈의 힘인가.’
* * *
아크웰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유진을 돌아보았다.
"어……. 음."
양평과 마찬가지로 전선은 남한강을 따라서 형성되어 있었다.
이 세종대교를 건너면, 온통 마기와 몬스터가 가득한 오염 지역이었다.
그런 탓에 여주시는 정확하게 반으로 토막 나고 말았다.
교각 검문소 앞에 멈춰선 녀석은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진짜 여기가 맞나요?"
"그래."
"왜 하필 이런 곳에 오신 거죠? 여길 넘어가면 바로 전선인데요."
"……."
"알겠습니다. 일단 저기까지만 가는 거예요. 전선 너머로는 절대로 안 갈 겁니다."
유진이 말없이 턱짓하자, 아크웰은 투덜거림을 멈추고 검문소로 진입했다.
교차로 앞에서 근무 서던 군인들이 꼼꼼하게 탑승자의 신원을 확인하며 차량을 통과시키고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의 차례가 왔지만, 수색을 한다든지 특별한 검문 절차 같은 건 없었다.
"통과하십시오. 충성!"
교황청 외교관 신분증과 교구청에서 발행한 한글 신분 확인서를 보여 주자, 그대로 통과되었다.
역시나 교황청의 위세는 이 머나먼 동방의 소국에서도 대단했다.
"자, 여기가 딱 마지노선입니다. 왜 오자고 하셨나요?"
"계획을 수정해야겠다."
"네?"
"아직은 3대 미궁까지 갈 능력이 안 돼."
"그게 무슨……."
유진은 정윤규의 기억과 인터넷에서 찾은 정보를 통해서 3대 미궁의 수준을 얼추 알아낼 수 있었다.
대규모 미궁은 원래 네 군데였는데, 10년 전 러시아에 있던 리고르 아스페라(rĭgor áspĕra)가 완벽하게 정화되었다.
그곳의 다른 이름은 혹한의 역경으로 세계 4대 미궁 중 하나였다.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던 S급 헌터들이 모여 혹한의 역경을 공략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S급 헌터의 절반이 내부에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무려 스무 명의 S급을 비롯하여 백 명이나 되는 A급 헌터가 동원되었으나, 살아 돌아온 이는 고작 열 명.
S급 헌터가 10명이나 전사한 것이다.
‘고작 C급. 이 상태로 3대 미궁에 갈 수는 없겠지. 차근차근 봉인을 풀고, 수준을 높여 갈 필요가 있다.’
그런 와중에 보스 몬스터에게서 스킬을 빼앗으면 그는 더욱 강해질 터였다.
덜컥! 척!
블라드 유진이 차에서 내리자, 아크웰도 엉겁결에 따라 나왔다.
그는 그런 녀석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헌터로 각성했다고 했었나?"
"아, 네. 통역을 비롯한 비전투 능력뿐이지만, 일단 각성자는 맞습니다."
"충분하군. 따라와."
"네?"
유진은 시커멓게 물든 대지를 향해 거침없이 걸어갔다.
하지만 아크웰은 저 죽음의 땅으로 들어갈 마음이 전혀 없었다.
녀석의 임무는 전투가 아니라 통역이니까.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의지를 꺾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덥석!
"아, 안됩니다!"
"……시끄럽군. 몬스터가 모일 거다."
유진의 손에 목덜미가 붙잡힌 아크웰은 가만히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바닥에 발이 전혀 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