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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블러드-5화 (6/226)

5화

"크르르륵!"

뚜드드득! 푸확!

블라드 유진에게 붙잡혔던 보스 프리클 플라워는 꿈틀거리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마치 최후의 발악이라도 되는 듯, 잎 위쪽에 달린 안구에서는 피눈물이 흘렀다.

그러더니 등 뒤에서 뭔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새로운 촉수를 뻗어 댔다.

그에게 제압당해서 촉수를 운용하기가 힘드니, 자신의 몸을 꿰뚫어서 타개책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슈화아악! 카앙!

하지만 유진은 잠시 오른손을 떼서 흡혈을 멈추고, 촉수 끝의 갈고리를 후려쳐 버렸다.

"크륵! 크르륵!"

마지막 회심의 일격이 무력화되자, 보스의 움직임은 급격하게 둔화했다.

아무래도 혈액을 너무 많이 빼앗겨 후속 공격을 펼칠 순 없는 모양이었다.

주르륵! 턱!

녀석의 촉수는 힘없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는 재차 오른손을 투명하게 만들어서 보스 프리클 플라워의 목덜미를 부여잡았다.

"폭사(爆射)?"

이윽고 블라드 유진은 뜻 모를 말을 내뱉더니, 보스에게서 손을 뗐다.

그러자 간신히 서 있던 녀석은 그대로 무릎을 꿇더니, 처량하게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가 과다 출혈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피를 빨았기 때문이었다.

스윽! 츠츠츠츠츠!

보스 프리클 플라워의 거대한 덩치를 붙잡고 있느라, 피범벅이 되었던 옷은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의 육신이 주변의 혈액을 몽땅 흡수해 버린 것이다.

아마 바티칸에서도 이런 방법으로 프로그맨 혈액을 처리했던 모양이었다.

쿠구구구구구!

‘붕괴하는군.’

헌터에 관해서 무지했던 정윤규 교수도 보스를 잡으면 미궁이 닫힌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유진은 당연하다는 듯이 저 멀리서부터 무너지는 공간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먼지로 변해 흩어지던 경계는 그를 순식간에 지나쳤다.

그와 동시에 어두컴컴한 미궁의 풍경이 현실 세계로 빠르게 역전되었다.

쩌적! 찌지지직!

문득 괴상한 소리가 들려서 뒤를 돌아보니, 지면에 박혀 있던 미궁의 파편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있었다.

파스스스!

큼지막한 육각 기둥 형태의 검은 물체는 먼지가 되어 자취를 감췄다.

또 다른 미궁의 파편이 날아오지 않는 이상, 이곳은 마기에 오염되지 않을 터였다.

이제 현대의 헌터가 어떤 놈들과 싸우고 있는지 얼추 조사는 끝났다.

일직선으로 쭉 파편을 깨부수며 양산에 있다는 3대 미궁을 향해서 나아가면 임무는 완료되는 것이다.

‘돌아가 볼까?’

학살 현장을 서성이던 그는 양수역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몬스터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쳤던 사람들이 어디에선가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형상의 프리클 플라워가 쫓아오다 말고 종적을 감췄기 때문이었다.

"어어?"

그들은 피범벅이 된 현장에서 홀로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블라드 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 저 사람이 몬스터를 처리했나 봐."

"맞아. 프리클 플라워와 싸우는 모습을 봤어! 저렇게 길고 번쩍이는 은발을 기억 못 할 리가 없지."

"금방 죽을 줄 알았는데……. 설마 전부 저자가 다 죽인 건가?"

"여기 숨어서 봤는데, 혼자서 미궁의 파편도 정화해 버렸다니까? 대단한 헌터인 모양이야."

"나는 영상도 찍었다고!"

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무심하게 걸어가는 그의 뒤를 따랐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떠나는 외국인의 모습이 신기하고 고마운 모양이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용기 내어 유진의 앞으로 다가가 감사를 전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어요."

"고맙습니다. 헌터님!"

"이것 좀 받아 주세요. 이거 제가 만든 포션인데, 아주 효과가 좋습니다."

양수역 노점에서 헌터들을 대상으로 장사하던 상인들은 급하게 챙긴 물건 일부를 그에게 그냥 주기도 했다.

‘이렇게 칭찬받을 일인가?’

유진은 속으로 의문을 표했지만, 무표정을 유지하며 물건들을 받아들었다.

어느새 양손에는 에코백 두 개가 들려 있었다.

물건을 넣어갈 곳이 없었기에, 상인들이 어디에선가 급하게 공수한 가방이었다.

"저기요! 잠시만 비켜 주세요! 잠시만요!"

그런데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인파의 뒤편을 바라보니, 아크웰이 길을 트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윽고 녀석은 그의 앞까지 다가와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골랐다.

"대체 여긴 왜 오신 겁니까?"

"……조사 차."

"그건 제가 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아크웰이 따지고 들었지만, 유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개찰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길 뿐이었다.

‘곤란하군. 저길 어떻게 통과하지?’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암흑화를 쓸 수는 없었다.

지금은 환한 대낮이라, 이들의 시선을 완벽하게 피하지는 못할 터.

게다가 모두가 그를 주목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그런데 블라드 유진이 개찰구를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자, 아크웰은 한숨을 쉬며 한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연식이 좀 되어 보이는 준중형 승용차가 서 있었다.

"교구청에서 차를 빌려 왔습니다. 전철은 안 타도 돼요."

"잘되었군."

"가시죠."

그는 녀석을 따라서 양수역 외곽으로 이동했다.

유진을 구경하기 위해 몰린 인파를 뚫느라, 아크웰은 진땀을 빼야 했다.

개중에는 마침 근처에서 제작 각성자들을 취재하던 기자도 있었으니까.

"레게노 저널의 기자 변형신입니다. 잠시 인터뷰를 좀 할 수 있을까요?"

기자가 명함을 내밀며 인터뷰 요청을 하자, 녀석은 이탈리아어로 거절 의사를 밝히며 황급히 차량에 탑승했다.

일단 외모가 한국인이 아니니, 기자도 섣불리 말을 더 붙이지 못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말이 통해야 인터뷰든 뭐든 할 게 아닌가.

부우웅!

유진과 아크웰을 태운 교구청 차량은 빠르게 양수역을 빠져나갔다.

* * *

"전 이제 죽은 거나 마찬가지네요. 어휴! 어휴!"

명동성당의 사제관으로 돌아온 뒤, 아크웰은 연신 한숨을 내쉬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하소연의 내용은 왜 단독 행동을 해서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었냐는 것이었다.

교황청에서는 최대한 조용하게 처리하길 바라는데, 시작부터 망했다며 녀석은 한참을 징징댔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은 아크웰의 말을 하나도 듣고 있지 않았다.

그저 의자에 걸터앉은 채로 간간이 허공에 손가락을 휘저으며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폭사라……. 어떤 건지 감도 안 잡히는군.’

하지만 유진의 상념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 건방진 외교관 청년이 코앞까지 다가와서 계속 짹짹거렸기 때문이었다.

"앞으로는 그러시면 안 돼요. 진짜 저 크게 문책받는단 말이에요. 아시겠죠?"

드르륵!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없이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훤칠하게 큰 키에 도저히 적응이 안 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

하지만 눈빛에는 기이한 위엄이 서려 있었다.

변화한 분위기에 섬뜩한 느낌을 받은 아크웰은 저도 모르게 뒤로 한발 물러나고 말았다.

"왜, 왜요?"

"이유를 모르겠군."

"무슨 이유요?"

"내가 편해진 이유."

콰드드득! 뚜득!

유진이 가볍게 쥐고 있던 의자 등받이가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부스러졌다.

그저 악력만으로 단단한 원목 의자를 가루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히익!"

녀석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순간적으로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오늘 낮의 사건으로 잊고 있었다가, 이제야 블라드 유진의 정체를 상기한 모양이었다.

그는 아크웰을 무심하게 바라보다가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내가 뭘 한 거야?"

녀석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더니, 목숨을 부지한 것에 감사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유진은 침대에 앉아 허공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놀랍게도 그런 그의 눈에는 다양한 색상의 광선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글귀가 보였다.

헌터들만이 쓸 수 있다는 홀로그램, 바로 그것이었다.

<능력치 정보>

이름 : 블라드 유진(Vlad Eugene)

레벨 : 355(봉인율 80%)

등급 : C(Lv. 301~400)

종족 : 뱀파이어

종족 효과 : 강체, 불로불사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능력치창이었다.

1천 년 전, 헝가리 대공국 시절에는 이 화면을 수도 없이 보면서 살았다.

미궁이 등장하며 그 반향으로 헌터가 많아짐에 따라 개인 홀로그램은 흔한 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미궁 발생 이전에는 특별한 소수만 이런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뱀파이어, 성녀, 성자.’

지금의 헌터가 과거에는 이런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그중에서 성자는 전부 교황청이 거두어서 기사단으로 키워졌다.

시대가 시대니 만큼 성녀는 마녀로 오인되어 무수히 화형에 처해졌고, 숨어 사는 게 일상이었다.

원래 로마 가톨릭은 성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으니까.

한편, 뱀파이어와 교황청은 서로의 멸절을 위해서 무수한 전쟁을 벌였다.

‘결국에 나만 남게 되었지.’

일족의 대부분은 햇빛에 취약하여 야간에만 활동할 수 있었다.

그 치명적인 약점으로 인해 일족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최후까지 살아남아서 피의 권능을 모두 얻은 자가 바로 블라드 유진, 마지막 뱀파이어였다.

그는 잠시 과거를 회상하다가 능력치창을 끄고, 홀로그램에 다른 화면을 띄웠다.

<종합 스킬 정보>

1. 흡혈(C)

―대상의 기억과 능력을 선택적으로 흡수할 수 있고, 체력 회복과 재생력을 기하급수적으로 증진함. 능력 흡수는 대상이 한정됨.

2. 혈성쇄혼술(C)

―피의 군주에게만 허락된 현혹 능력. 스킬 등급보다 수준이 낮은 대상의 정신을 조종 가능함. 2단계 이상 낮다면, 제압 절차 또한 불필요.

3. 암흑화(B)

―고위 뱀파이어의 이동 기술. 어둠과 동화되어 완벽하게 육신을 은폐할 수 있음. 이동 속도가 빨라짐.

4. 폭사(D)

5. 소수혈인(봉인)

6. 권능 폭발(봉인)

7. ???(?)

8. ???(?)

……

유진의 레벨과 스킬은 상당 부분이 봉인되어 있었다.

‘흡혈이 C급이라……. 스킬 전부 제 위력이 나오지 않는군. 그래서 보스 녀석의 제압이 풀렸던 건가.’

원래 그의 레벨은 1,775였고, 이는 EX급을 아득히 초월하는 규격 외였다.

하지만 지금은 고작 C급 헌터 수준으로 레벨이 떨어진 상태였다.

물론 뱀파이어 로드의 능력이 레벨만으로 좌우되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표시된 수치는 그러했다.

능력치와 스킬의 위력이 봉인으로 인해서 감소되고, 사용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원래의 능력을 자연히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1천 년간의 수면이 아직 덜 깼을 뿐이고, 봉인은 차차 풀리게 될 테니.

이윽고 유진은 고개를 돌려 4번의 폭사 스킬을 살펴보았다.

<스킬 정보>

명칭 : 폭사

등급 : D        위력 : D―

사거리 : 50m

재사용 대기 시간 : 30초

소모 자원 : 피의 권능(변경)

보스 프리클 플라워에게서 흡수한 능력. 신체 변형을 할 수 없으니, 실체를 어둠의 기운이 대신함. 가시를 쏘아 보내 공격할 수 있음.

"폭사."

스으윽!

의지를 불러일으키자, 손등에서 시커먼 기운이 불쑥 흘러나와 날카로운 가시로 변했다.

언제든 앞으로 튀어 나가서 적을 찢어발길 것만 같은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원거리 공격이라……. 꽤 마음에 들어.’

그는 보스 몬스터로부터 쓸 만한 능력을 빼앗을 수 있었다.

일반적인 헌터들은 몬스터를 사냥하거나 미궁 정화 보상으로 스킬을 얻어야만 했다.

스킬 해방석이라는 물건을 통해서 자신에게 필요한 능력을 갖추어 나가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헌터에게 주어진 능력을 넘어서는 기예이기에, 당연히 스킬 해방석을 얻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유진은 다른 헌터보다 비교적 손쉽게 스킬을 얻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흡혈이 만능은 아니었다.

특정한 조건이나 자격을 갖춰야만 쓸 수 있는 스킬이 다수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오랜만에 느껴 본 맛있는 혈액에 유진의 심장 박동이 살짝 빨라졌다.

사냥의 즐거움과 더불어, 몬스터를 잡고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 게 꽤 재미있었다.

‘그래, 재미.’

과거에는 피를 빨다 실수로 사람 한 명만 죽여도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성기사단이 순식간에 찾아와서 일족들의 목을 가차 없이 잘라 버렸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사람 많은 곳에서 학살을 벌였음에도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물론 그 대상이 몬스터라는 게 좀 달랐지만.

그뿐이랴, 미궁에서 만난 보스 몬스터의 혈액은?

잠시 그때를 회상한 유진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나직이 읊조렸다.

"맛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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