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휘이이잉! 퍽!
블라드 유진은 자신의 앞에 떨어진 시커먼 물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묘한 마기를 뿜어 대는 검은 바위, 바로 미궁의 파편이라 불리는 물체였다.
이것은 완성된 미궁이 축적된 에너지를 이기지 못하게 되면 사출하는 것으로, 상당한 거리를 날아와 바닥에 박히는 게 특징이었다.
그런 다음에는 시커먼 기운을 모락모락 발산하며 주변을 오염시켰다.
그와 더불어 온갖 종류의 괴물을 마구 소환해 냈다.
바로 지금처럼.
"크웨에엑!"
미궁의 파편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는 정말이지 기괴한 모습이었다.
일견 사람처럼 생겼으나 머리통 전체가 네 갈래로 나뉘어 마치 커다란 꽃을 연상케 했다.
안쪽 면에 촘촘히 돋아난 이빨을 보니, 주로 물어뜯어서 공격하는 모양이었다.
‘개구리 인간과는 영 다른 모습이군.’
정윤규 교수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으나, 몬스터에 관한 정보는 별로 없었다.
그 많은 몬스터의 종류를 다 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일반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종도 많았으니까.
"으. 프리클 플라워야!"
"이제 여기도 오염 지역이 될 거야. 도망쳐!"
누군가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듣고 나서야 유진은 상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빨이 가시처럼 돋아나 있다고 해서 프리클 플라워(Prickle Flower)라니, 참 단순한 작명법이었다.
"츄르륵!"
휘리리릭!
놈이 꽃잎처럼 생긴 입술을 활짝 벌리자, 큼지막한 목구멍에서 촉수가 튀어나왔다.
끝에 예리한 가시와 갈고리가 달린 거로 봐선, 저 촉수로 먹잇감을 당겨 오는 듯했다.
쉬이익! 카앙!
하지만 그의 정면으로 날아들던 갈고리는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튕겨 나갔다.
그저 파리를 쫓듯 좌우로 휘두른 손에 충돌했는데, 어째서 저런 소리가 날 수 있을까?
몬스터인 프리클 플라워도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모양인지, 고개를 갸웃하며 재차 촉수를 날려 보냈다.
하지만 결과는 방금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휘리리릭! 카앙!
"지능은 높지 않은 모양이로군."
귀찮은 듯 왼손을 휘저어 재차 촉수를 튕겨 낸 유진은 오른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러자 대략 10m 정도였던 그와 프리클 플라워의 거리가 극단적으로 단축되었다.
마치 순간 이동이라도 한 듯한 움직임이었다.
덥석!
"킈익?"
블라드 유진은 오른손을 가볍게 뻗어 녀석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런데 그에게 붙잡힌 프리클 플라워가 옴짝달싹 못 한 채 바들바들 떨더니, 그대로 가만히 서 있는 게 아닌가.
당차게 휘둘러 댔던 갈고리 달린 촉수도 그저 축 늘어져 버렸다.
츠츠츠츠츠!
‘그때 그 개구리 녀석보다는 훨씬 낫군. 그런데 왜 맛이 다른 거지? 혈액의 색상 때문인가?’
유진은 마치 입속에 피가 들어온 것처럼 입맛을 다시고 혀로 입술을 핥았다.
혈액을 빨아들이는 주체는 손이었는데도 말이다.
어디로 흡수하든 맛을 보는 데는 별 상관이 없는 듯했다.
"크뤠엑!"
털썩! 퍽!
이윽고 프리클 플라워는 비쩍 마른 상태로 무릎을 꿇고, 바닥에 그대로 머리를 처박았다.
정윤규 교수와는 달리, 과다 출혈로 사망해 버린 것이다.
한동안 피 맛을 음미하던 그는 눈을 번쩍 뜨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미궁의 파편에서 뛰쳐나온 프리클 플라워들이 사람을 습격하며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날렵하게 움직이며 촉수를 연신 쏴 대는 모습은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프로그맨보다 프리클 플라워가 훨씬 강하구나. 그래서 좀 더 먹을 만했던 거였어.’
고수는 잠깐의 움직임만 보고도 수준을 예측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유진은 어느 몬스터가 더 강한지, 바로 판별해 낼 수 있었다.
그렇다는 말은 프리클 플라워보다 강력한 몬스터의 피는 더 맛있다는 사실을 시사했다.
무표정했던 그의 얼굴에 긴 호선이 그려졌다.
입매가 위로 살짝 올라간 것만으로도 인상이 극명하게 변했다.
블라드 유진의 모습은 마치 선하게 웃고 있는 광고 속의 배우와 순간적으로 닮은 느낌이었다.
"몸 상태가 얼마나 돌아왔는지 좀 볼까?"
스윽!
원래의 냉랭한 얼굴로 돌아온 그는 인간들을 습격하는 프리클 플라워의 후방으로 접근했다.
"키엑?"
콰직―!
* * *
[……현재 전선에 있던 헌터의 일부가 후방으로 빠져 양수역으로 이동 중입니다만, 피해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옥도가 펼쳐지려는 그 순간, 영웅이 나타났습니다. 드론으로 촬영된 장면을 잠깐 보시죠.]
화면이 전환되고 TV에는 공중에서 찍은 양수역의 모습이 나오기 시작했다.
현장은 너무도 끔찍했기 때문에, 대부분이 블러(Blur) 처리가 되어 화면이 뭉개져 보였다.
하지만 긴 은발을 휘날리며 프리클 플라워들을 학살하는 남자의 모습은 선명하게 찍혔다.
그자는 맨손으로 몬스터들을 마구 유린하는 중이었다.
프리클 플라워의 촉수를 잡고 바닥에 내동댕이치거나, 몸속에 손을 집어넣어 심장을 꺼내더니 터트리기도 했다.
"오! 주여……."
TV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아크웰은 저도 모르게 신을 찾았다.
유진이 한국 헌터계에 동화되는 건 어차피 예정된 수순.
기존의 계획도 다른 헌터들과 함께 미궁을 정화하고 오염된 땅을 원래대로 되돌리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런 식으로 급하게 하려던 건 아니었다.
"이거 큰일인데."
블라드 유진은 헌터가 아닐뿐더러, 그가 교황청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되었으니까.
뱀파이어를 내세웠다는 게 들통나면, 가톨릭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지고 교황의 위치도 위태로워질 것이다.
"혹시 저분을 아십니까?"
"예?"
미궁 전략부장이 질문을 던지자, 아크웰은 화들짝 놀라며 답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아까 무의식중에 유진을 아는 것처럼 반응했던 사실이 불현듯 떠오른 것이다.
미궁 전략부장과 대화 중이었기에, 그것도 한국어로 지껄이고 말았다.
발뺌할 수도 없게 제대로 걸려서, 녀석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 예. 맞습니다. 교, 교황청에서 파견된 헌터분이죠. 비밀리에 지원하려 했는데, 먼저 전선으로 나가 버리셨네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요. 그런데 왜 굳이 비밀리에?"
"아무래도 스페인 쪽에 집중한다고 공표했는데, 전력을 빼기가 좀 그래서 말이죠."
"아! 그렇군요. 이탈리아에 스페인 사람이 엄청나게 들어와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 예. 그런 상황이죠."
"뉴스에 나왔으니, 이제 은밀한 활동은 불가능하겠군요."
"교황청 입장에서는 조금 곤란합니다."
"그럼 최대한 저분의 신상이 알려지지 않도록 협회 차원에서 신경을 쓰겠습니다."
"과연 그게 될까요?"
"일단 뉴스 영상이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조치를 해야죠. 노출을 막고 시간이 좀 지나면, 관심이 사그라질 겁니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허허! 네."
전략부장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아크웰을 배웅했다.
한국 헌터 협회에서는 교황청이 한국을 버렸다는 의견이 팽배한 상태였다.
가톨릭교회에 너무 편의를 봐준다는 이상한 주장까지 올라와서 협회의 분열을 초래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잡소리는 쏙 들어갈 터였다.
양수역에 나타난 영웅이 교황청 사람임을 외교관이 확인해 주었으니까.
미궁 전략부장은 재빨리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어, 홍보부장! 나야 나, 방금 뉴스 봤지? 양수역에 나타난 헌터가 교황청 사람이라네. 아! 속고만 사셨나. 진짜라니까? 얼른 보도 자료 만들어서 돌려."
방금까지는 정보 통제를 하겠다고 했지만, 전략부장은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었다.
아크웰은 그 사실도 모르고 황급히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그러고는 교구청에서 내준 차량에 탑승하며 외쳤다.
"어, 얼른 양수역으로 갑시다. 빨리요!"
"그……. 거기는 이제 통제 구역이 되었습니다."
차량 DMB로 뉴스를 보고 있던 교구청 사람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대꾸했다.
몬스터가 바글거리는 곳으로 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크웰은 짧은 한숨을 쉬며 단호하게 말했다.
"근처까지만 가 주세요. 그다음부터는 알아서 걸어갈 테니까."
"예, 뭐 그런 거라면야."
통제 구역까지 안 들어간다는 말을 들었으나, 교구청 사람은 여전히 불안한 표정으로 차를 몰았다.
부우웅!
* * *
츠츠츠츠츠!
"크웨에에……."
블라드 유진은 프리클 플라워의 목을 움켜쥔 채, 혈액을 한껏 빨아들였다.
그러고는 녀석을 옆으로 휙 하고 던져 버렸다.
철퍽―!
혈액이 거의 다 빠져 바싹 마른 모습의 프리클 플라워는 바닥에 고인 피 웅덩이에 머리를 처박았다.
몇몇 상인들의 피해가 있긴 했으나, 양수역에 나뒹구는 것들은 대부분 몬스터 사체였다.
그의 재빠른 대응 덕분에, 놈들은 멀리 퍼지지 못하고 미궁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죽임을 당했다.
이제 이 일의 원흉을 제거할 차례였다.
"바티칸에서 봤던 거와 미묘하게 달라. 어떻게 들어가는 거지?"
유진은 미궁의 파편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스윽! 치지직!
손을 뻗어 만져 보자, 시커먼 돌의 표면이 물결치기 시작했다.
분명 날아와 꽂힐 때는 엄청나게 단단한 것 같았는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쑥!
그대로 팔을 넣어 보니, 아무런 저항감도 없이 어깨까지 쑥 들어갔다.
잠깐 고민하던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몸 전체를 집어넣었다.
"호오……."
이윽고 유진의 눈앞에는 괴상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분명 방금까지 양수역의 학살 현장에 있었건만, 지금은 삐죽삐죽하게 기이한 각도로 꺾인 앙상한 나무가 가득한 곳이었다.
바닥에는 불쾌한 냄새와 함께 시커먼 액체가 흐르고, 사방은 어두컴컴했다.
하지만 뱀파이어인 그에게 어둠은 아무런 제약이 될 수가 없었다.
찰박! 찰박!
그때 어디선가 액체를 밟는 소리가 들려오자, 유진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프리클 플라워를 닮은 거대한 살덩어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크웨에에에엑!"
휘리리리릭!
놈이 꽃잎처럼 널찍한 살덩이를 펼치자, 목구멍에서 네 개의 촉수가 튀어나왔다.
일반적인 프리클 플라워의 촉수보다 굵고 갈고리도 훨씬 컸다.
하지만 고작 그딴 거로 천 년 넘게 살아온 뱀파이어의 몸에 상처를 낼 수는 없었다.
카앙! 카가강!
유진은 손날을 휘둘러 공격을 모조리 쳐 낸 다음, 주먹을 굳게 말아쥐었다.
그러고는 자세를 낮추면서 왼발로 지면을 강하게 찍었다.
푸확―! 쉬이익!
시커먼 액체가 원을 그리며 퍼져 나가는 순간, 이미 그는 보스 녀석의 코앞까지 짓쳐 들어간 상태였다.
투―쾅!
순간적으로 사라졌다가 불쑥 나타난 블라드 유진은 보스 프리클 플라워의 가슴팍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피격된 녀석의 몸통은 마치 공간이 수축하는 것처럼 살덩이가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그런 다음, 어마어마한 속도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퍼어엉!
"크웨에에……."
보스도 다른 프리클 플라워와 마찬가지로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유진은 그런 녀석의 머리에 오른손을 올려놓았다.
"쓸 만한 게 있었으면 좋겠구나."
츠츠츠츠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