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달칵!
"으어엇?"
사제관 방문을 열고 슬그머니 들어가려던 아크웰은 깜짝 놀라 괴상한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어두컴컴한 거실에 블라드 유진이 가만히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윤기 나는 은발과 티 없이 깨끗한 피부에 달빛이 비치자, 왠지 기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누가 그랬던가?
천사는 가장 무시무시한 형태로 다가와 근엄하게 호통치고, 악마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달콤한 말을 속삭인다고.
지금 유진의 모습은 그 말에 딱 어울리는 것 같았다.
"안 주무셨어요?"
"뭘 사 온다더니. 빈손이군."
"그게……. 그 앞에서 먹고 왔죠. 하하!"
녀석은 뒷머리를 긁으며 어색하게 답했다.
그러자 블라드 유진은 의자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걸어가며 무심하게 툭 한마디를 던졌다.
"편의점에 다녀왔나?"
"예? 아, 그럼요."
꼬르륵!
그런데 공교롭게도 때마침 아크웰의 배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게 아닌가.
사제관 제일 안쪽 방의 거실 분위기는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소화되는 소립니다."
"그렇군."
철컥!
의심스러울 만한 모습이 가득했으나,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방문을 열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
녀석이 인사했지만, 유진은 말없이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아크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먹을 걸 사러 나간다고 말했으면, 뭐라도 손에 들고 돌아왔어야 했다.
녀석은 교구청에만 들렀다가 돌아온 자신을 책망하며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어? 편의점은 어떻게 알고 계신 거지?"
게다가 방금 블라드 유진이 한 말은 한국어였다.
아크웰에게는 언어 통역 능력이 있었기에, 그 말을 알아들은 것이다.
녀석은 황당한 표정으로 안방 방문을 쳐다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아크웰은 유진의 앞에 화이트보드를 갖다 놓고 커다란 한국 지도를 걸었다.
지도에는 미궁의 파편에 오염된 지역과 그렇지 않은 곳, 국지전이 일어나는 경계가 따로 표시되어 있었다.
척 봐도 수도권을 제외한 대부분이 오염 지역으로 잠식된 상태였다.
"명령서가 내려왔습니다."
"뭐라던가?"
"3대 미궁을 모두 정화하라고 하더군요. 그러려면 일단 헌터가 되어 미궁 정화 작업에 참여해야 합니다. 아무래도 혼자서 이 미친 난관을 뚫고 지나갈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면서 녀석은 빨간색 자석을 떼어 지도의 오른쪽 아래에 딱 붙였다.
"대규모 미궁의 위치는 여기 양산입니다. 거기까지 가는 것도 문제지만, 분명 우리 힘만으로 대규모 미궁을 정화하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 한국 헌터들의 도움이 꼭 필요한 상황이죠."
아크웰은 한국 헌터계에 동화되어 미궁을 공략하자고 주장했다.
물론 현재로서는 녀석의 의견이 옳은 것 같았다.
‘아직 내 힘은 모두 깨어나지 않았으니까.’
1천 년 동안 잠들었던 블라드 유진은 권능의 대부분이 함께 봉인되어 버렸다.
지금은 그저 잡기에 불과한 수준으로만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모든 한국 헌터들이 힘을 합쳐도 불가능한 목표를 이 상태로 이룰 수는 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크웰의 말을 들었다.
물론 무심한 표정으로 별 관심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어쨌든 아직 정보가 너무 부족합니다. 어떤 헌터가 강력한지, 어느 지역이 공략하기 편한지조차도 모르는 실정이죠."
"그 정도 정보는 교구청에서 지원해 주지 않나?"
"이쪽도 수도권 방어 때문에 바쁜 상황이라서요. 우리에게까지 신경을 쏟을 여유가 없을 겁니다."
미궁 출현 이후 속속 헌터들이 각성해 나가면서 가톨릭은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했다.
사제 중에서 각성자가 나오면, 높은 확률로 신성력을 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귀하디귀한 힐러와 탱커가 쏟아져 나오니, 어느 헌터계든 로마 가톨릭교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이라, 교구청도 수도권 전선 유지를 위해 사제들을 왕창 파견한 상태였다.
"그럼 정보는 어떻게 얻지?"
"발품을 팔아야죠. 제가 한국 헌터 협회를 찾아가 보겠습니다. 아마 교황청에서 왔다고 하면, 홀대하지는 못할 거예요."
"……."
유진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아크웰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계속 말을 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유진 님은 여기 그냥 계시면 돼요. 힘이 필요할 때 요청하겠습니다."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나."
"명령서에 적혀 있던데요?"
"그렇군. 알았다."
그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일어나 안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러자 녀석은 입 모양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대충 ‘저걸 확 그냥.’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덜컥!
물론 블라드 유진이 다시 밖으로 불쑥 나오자, 아크웰은 입을 오므린 채 황급히 화이트보드를 치워 댔다.
우당탕탕!
"아하하! 죄송합니다."
실수로 화이트보드를 넘어뜨린 녀석은 어색하게 웃으며 잽싸게 사태를 수습하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 * *
‘저런 허술한 녀석에게 모든 조사를 맡길 수는 없지. 아무래도 내가 직접 가 봐야겠군.’
아크웰이 사제관 밖으로 나가자마자, 유진은 곧바로 외출 준비를 했다.
그는 응급실 의사의 혈액을 빨아들이며 기억을 일정 부분 흡수한 상태였다.
응급 의학과 교수 정윤규의 개인사는 깡그리 배제한 채, 학문과 상식을 위주로 빼냈다.
덕분에 블라드 유진은 한국과 현대 사회에 관해서 얼추 파악할 수 있었다.
이제 한국어를 사용할 수도 있으니, 혼자 돌아다녀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아무도 없군.’
미사 준비 때문인지 사제관은 한산했다.
유진은 얼른 명동성당을 빠져나와서 병원 앞을 지나갔다.
응급실 내부를 슬쩍 살펴보니, 파김치가 된 정윤규 교수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라도 터진 모양인지, 밤을 꼬박 지새운 듯했다.
"기억 고마워. 친구."
그는 정윤규를 향해서 희미하게 웃어 준 뒤, 을지로에서 지하철 2호선에 탑승했다.
물론 유진에게는 신용 카드나 교통 카드는 물론이고, 현금 따위는 하나도 없었다.
암흑화 능력을 통해서 그냥 개찰구를 통과해 버린 것이다.
처음 타 보는 지하철이었으나, 그의 행동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이게 다 정윤규 교수에게서 얻은 기억 덕분이었다.
위이이이잉!
지하철이 움직이는 것은 10세기 사람에게 신기할 만도 하건만, 블라드 유진은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권능의 소모를 막기 위해 암흑화는 해제한 상태였다.
그런데 웬 학생들이 그런 그를 바라보며 수군거리는 게 아닌가.
"와, 되게 예쁘다. 뭐 하는 사람이지?"
"외국인 모델인가 봐."
"키도 엄청나게 크네. 역시 유전자가. 달라. 달라."
여학생들의 재잘거림이 들려오자, 유진은 문득 자신의 머리칼을 내려다보았다.
허리까지 올 정도로 치렁치렁한 은발은 너무도 눈에 띄었다.
탈색을 반복하다 보면, 머리카락은 손상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은발은 마치 은사(銀絲)처럼 반짝였으며, 기묘한 생기가 넘쳐흘렀다.
결단코 인위적으로 얻을 수 없는 머리칼이었다.
‘좀 긴가?’
중간에 경의 중앙선으로 갈아탄 그는 양수역에서 하차했다.
이곳은 몬스터 군단과 헌터가 대치한 주요 격전지 바로 앞이었다.
아크웰이 보여 준 한국 지도와 정윤규 교수의 기억을 토대로, 그는 여기까지 단숨에 올 수 있었다.
‘분위기가 어둡군.’
원래는 이 뒤로 경의 중앙선이 쭉 이어져야 정상이었으나, 기찻길은 끊긴 상태였다.
이제는 이곳이 전철의 종점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 경의 중앙선은 일반 승객보다는 헌터와 보급품을 실어 나르는 용도로 쓰이는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객차에 사람이 거의 없었어.’
아직 양수역은 격전지라고 불릴 수 없는 장소였다.
사실 이곳은 전장으로 가는 길목이고, 의외로 많은 이들이 살아가는 곳이었다.
전쟁 특수로 인해 이 근방의 상점은 장사가 엄청나게 잘 됐다.
전선에서 싸우다 지친 헌터들이 죄다 이쪽으로 몰려오기 때문이었다.
헌터는 씀씀이가 큰 편이다 보니, 고급 일식집이나 파인다이닝(Fine Dining) 식당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포션 팝니다. 수제 포션 팔아요!"
"도핑 포션 있습니다. 샘플도 드려요!"
"악세사리 좀 보고 가세요. 옵션 좋습니다!"
한쪽 공터에서는 제작 능력을 각성한 헌터들이 몰려와 노점을 펴기도 했다.
전선이 코앞이었으나, 의외로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모습이었다.
유진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인간들을 구경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어디선가 기이한 소리가 들리더니, 어떤 물체가 그의 앞으로 날아드는 게 아닌가.
휘이이잉! 퍽!
"음?"
* * *
"상황이 정말 좋지 않군요."
"그렇습니다. 전력을 다해서 싸우고 있습니다만, 전선을 유지하는 데도 벅찬 실정입니다."
아크웰은 헌터 협회의 미궁 전략부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교황청에서 왔다고 하니, 전략부장은 정말이지 극진한 대접을 해 주었다.
게다가 한참 동안 어려움을 피력하고는 슬그머니 아쉬운 소리를 꺼내기 시작했다.
"교황청에 계속 지원 요청을 넣었는데 말입니다. 답변이……."
"아, 그랬군요. 참 유감입니다."
아크웰은 속이 뜨끔했으나, 간신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차분하게 답했다.
사실 교황청은 아직 필사적으로 항전하는 중인 한국보다, 이미 완벽하게 멸절한 스페인을 더 신경 쓰고 있었다.
아무래도 가까운 곳의 위협이 더 두려운 법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아크웰과 블라드 유진이 한국에 파견되지 않았던가.
저 뱀파이어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지는 모르나, 어쨌든 한국 전선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터였다.
"금방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직접 지원이 어렵다면, 교황청에서 다른 방법을 찾겠지요."
그 다른 방법이라는 게 뱀파이어를 이용하여 은밀하게 돕는 거라는 말은 결단코 할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이종족과 협력했다는 오명을 교황청이 쓰게 될 테니까.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아크웰에게 그냥 정보만 쥐여 줬을 뿐 전략부장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으나, 굽신거릴 수밖에 없었다.
교황청의 사자에게 밉보였다가는 그나마 유지되던 지원도 끊겨 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현재 갑은 가톨릭교회고 을은 헌터 협회였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저희는 당분간 한국에 머무를 테니, 또 볼 날이 있겠죠."
"예, 그럼 살펴 가십시오."
아크웰은 미궁 전략부장의 배웅을 받으며 헌터 협회를 나서려 했다.
그런데 문득 벽걸이 TV의 화면이 녀석의 눈에 박히듯 불쑥 들어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거기에 매우 익숙한 얼굴이 한껏 클로즈업되어 나오고 있었으니까.
[……속보입니다. 금일 정오, 양평군 전선에서 미궁 확장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아니, 저분이 TV에 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