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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블러드-2화 (3/226)

2화

아크웰은 비아 델 바부이노 거리의 남성 의류점으로 달려가 여러 종류의 옷과 신발을 사 왔다.

맨발에 허름한 셔츠, 10세기 감성의 웨이스트코트를 걸친 유진을 데리고 공항으로 갈 수는 없었으니까.

옷을 사 오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블라드 유진은 멀끔한 모습으로 변한 상태였다.

온몸에 치덕치덕 발려 있었던 시퍼런 프로그맨의 혈액은 온데간데없었다.

"어, 어디서 씻으신 겁니까?"

"씻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깨끗해지신 거죠?"

"……."

녀석이 질문을 던졌지만, 그는 답하지 않고 바닥에 놓인 옷가지들을 살펴보았다.

젊은 친구답게 아크웰은 나름 눈썰미를 발휘하여 유진에게 어울릴 만한 옷을 가지고 왔다.

그는 생소한 것들은 옆으로 젖혀 둔 채, 셔츠와 코트를 주워 입었다.

긴 은발이 좀 튀긴 했으나, 이제 시선을 확 끌 정도로 옷차림이 이상하지는 않았다.

* * *

"제발 그만 좀……. 헉!"

파리를 경유하여 인천으로 들어가는 에어 프랑스 여객기.

한창 잠을 자던 아크웰은 신음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뭔가 엄청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기내에는 작은 생활 소음만 있을 뿐이었다.

아마 아까 보았던 무시무시한 광경 때문에, 악몽을 꾼 듯했다.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던 와중, 문득 어떤 시선이 느껴졌다.

슬그머니 옆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블라드 유진이 아크웰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왜요?"

"……."

녀석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으나, 그는 그저 눈짓으로 다른 좌석을 가리킬 뿐이었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이어폰을 끼고 영화를 보는 중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전혀 알지 못했으나, 아크웰은 이제 저 행동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아는 대로 설명을 해 보라는 뜻이었다.

녀석은 눈치껏 알아서 설명해 주었다.

"아, 저건 비행하는 동안 지루하지 않도록 하는 장치예요. 영화나 드라마 같은 걸 볼 수……."

일단 설명하긴 했는데, 유진은 별로 관심 없다는 듯이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이럴 거면, 애초에 왜 질문을 했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아크웰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삐쭉이며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블라드 유진에게 항변하는 듯한 모습이었으나, 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잠을 자는 줄 알았던 그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는 게 아닌가.

"읍!"

녀석은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유진은 그 모습을 전부 목격한 듯했다.

뭔가 표정이 오묘하게 일그러졌다가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여기서 아크웰을 질책할 마음은 없는 모양이었다.

* * *

대략 열 몇 시간 뒤, 한국 인천 국제공항.

유진과 아크웰은 입국 절차를 밟고 짐을 찾았다.

공항 밖으로 나가자, 클러지 셔츠를 입은 사제 몇 명이 나와 있었다.

"환영합니다. 교황청 외교관님. 김경현 안토니오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아크웰 페리티노 바오로입니다. 만나서 반갑군요."

"듣던 대로 한국어가 유창하시네요."

"제가 공부를 좀 많이 했습니다. 하하!"

"이쪽으로 오시죠."

아크웰이 서울대교구청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유진은 그야말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뱀파이어는 다양한 언어에 능통한 법이지만, 한국어는 전혀 접해 보지 못했다.

그러던 중, 사제들이 쭈뼛쭈뼛 다가와서 그의 짐을 받아 주었다.

‘아무래도 이들은 내가 누군지 모르는 모양이군.’

유진의 정체를 알았다면, 제아무리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제라도 이렇게 친절할 수는 없을 테니까.

이윽고 두 사람은 사제들과 함께 차를 타고 명동으로 향했다.

텅!

"잠시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

짐과 함께 차에서 내린 아크웰은 명동성당 한복판에 블라드 유진을 두고 서울대교구청으로 들어갔다.

말도 안 통하는 사람을 외국에 혼자 놔두고 자리를 비우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김경현 안토니오가 혼자만 따라오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교구청 안쪽으로 들어가자, 김태호 스테파노 추기경이 녀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자한 얼굴의 중년 남자가 밝게 웃으며 아크웰을 반겼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별말씀을요. 배려해 주신 덕분에, 정말 편하게 왔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환영회라도 해 드리고 싶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저는 괜찮습니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이건 두 번째 명령서입니다. 혼자서 읽어 보시고 나중에 몰래 절 찾아오십시오. 저자에게 들켜서는 안 됩니다."

"아, 네. 잘 둘러대겠습니다."

"사제관에 방을 마련해 뒀으니, 푹 쉬시지요. 김경현 안토니오가 안내해 줄 겁니다."

"감사합니다."

녀석은 김태호 추기경에게 한국식으로 꾸벅 인사하고는 교구청을 나섰다.

한데, 짐을 지키고 있어야 할 블라드 유진이 보이지 않았다.

"어? 어디로 가셨지?"

아크웰은 황급히 주변을 돌아다니며 그를 찾았다.

하지만 명동성당 구석구석을 들쑤시고 다녀도 유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교구청 사람들한테 좀 봐 달라고 하는 건데!"

녀석의 마음은 무지하게 복잡했다.

명령대로 한국에 들어왔으나, 블라드 유진을 잃어버린 건 임무를 실패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교황 성하를 뵐 낯이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길을 잃었을 그가 걱정되었다.

"안 되겠어. 도움을 요청해야 해."

아크웰은 수색을 포기하고 서울대교구청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했다.

그러다가 교구청과 성당 건물 사이로 접어드는 중에, 저 멀리 익숙한 은색 장발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어디론가 가 버린 줄 알았던 그가 성당 정문 쪽에 서 있었던 것이었다.

"아……."

교구청으로 달려가던 녀석은 발걸음을 멈춘 채, 감탄사를 터트리고 말았다.

두 팔을 펼친 형상의 투박한 예수상과 마주한 블라드 유진의 모습은 그야말로 한 폭의 성화(聖畵)와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예수상의 끝에 걸린 석양과 길게 내려온 건물 그림자 속에 서 있는 유진은 매우 대비되어 보였다.

마치 선과 악이 대치하는 장면처럼 느껴졌다.

"이, 이럴 때가 아니지."

아크웰은 황급히 바닥에 놓인 짐을 챙긴 뒤, 그를 향해 달려갔다.

* * *

‘내가 이런 곳에 머물 줄은 상상도 못 했군.’

유진과 아크웰은 명동성당 사제관의 방 하나를 빌릴 수 있었다.

당분간은 이곳에 머무르며 한국의 상황을 확인할 예정이었다.

성당 내부에서 잔다는 사실이 영 불쾌했지만, 방을 내주었으니 뭐 어찌할 텐가.

그는 그저 신이 허락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벌써 주무실 거예요? 아직 9시밖에 안 됐어요."

"어디 가는 건가?"

"네, 출출해서 먹을 것 좀 사 오려고요. 혹시 먹고 싶은 게 있나요?"

"……."

유진은 황당한 눈빛으로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뱀파이어에게 뭐가 먹고 싶냐니,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질문을 할 리가 없을 테니까.

‘아직 내가 누군지 모르는구나.’

아크웰의 대답에서 한 가지 사실을 알아낸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걸어갔다.

이제 이런 행동이 익숙한 듯, 녀석은 어깨를 으쓱이며 그대로 사제관을 나섰다.

달칵! 쵹쵹쵹쵹!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복도를 걸어가는 소리가 멀어지자, 어두컴컴한 방안에 가만히 앉아 있던 유진이 눈을 번쩍 떴다.

새카맸던 눈빛은 어느새 검붉은 색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정보를 좀 모아 봐야겠군. 모르는 게 너무 많아.’

블라드 유진은 최근에 목격한 거의 모든 것이 생소했다.

입고 있는 옷부터 신발을 벗고 들어와야 하는 방, 사용법을 도저히 알 수 없는 온갖 다양한 물건까지.

21세기의 인간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뭔가 조치가 필요할 것 같았다.

쓰스스스스!

검붉은 안광이 사그라지자, 이내 그의 모습은 어둠과 완벽하게 동화되었다.

이는 바로 고위 뱀파이어들만 사용할 수 있다는 암흑화(Obscuration) 능력이었다.

햇빛이 강렬한 낮에는 제한적이지만, 이렇게 어둠이 내려앉은 밤이 되면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했다.

10세기경, 유진은 이 능력을 통해서 성기사나 성자들의 공격과 수색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뿐이랴, 되레 그들을 습격하여 몰살해 버리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 상태라면 성스러운 기운이 가득한 명동성당에서도 완벽하게 자취를 감출 수 있었다.

스윽!

소리도 없이 방을 나선 그는 순식간에 명동성당을 빠져나갔다.

부우우웅! 우웅!

성당 앞 사거리에는 차들이 상당한 속도로 내달리는 중이었다.

‘이건 알아.’

이미 아크웰로부터 도로에 관한 설명은 귀에 못 박히도록 많이 들은 상태였다.

사람 모양의 청록색 신호가 켜지면, 흰색 선이 반복된 곳으로만 건널 수 있다는 사실은 잘 알았다.

이곳까지 오면서 인간들이 하는 행동을 유심히 살펴봤으니까.

유진은 가만히 주변을 지켜보며 기다리다가, 사람들이 건널 때 같이 발걸음을 옮겼다.

‘어떤 사람이 좋을까?’

일단 그가 길을 건넌 이유는 이쪽에 사람이 많아서였다.

늦은 저녁임에도 큼지막한 건물 앞쪽에는 수많은 인간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삐뽀! 삐뽀!

녹색 불빛이 번쩍거리며 흰색 차가 들어오면, 건물 안쪽에서 백의를 입은 사람들이 나와서 침대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매우 급한 모습에 흥미를 느낀 유진은 턱을 매만지며 주변을 더 둘러보았다.

‘지위가 높거나 지식이 많으면 좋겠는데…….’

아직 시간은 많았다.

그는 침착하게 건물 근처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면면을 확인했다.

그러다가 뭔가 각각의 인간마다 확연하게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이들 사이에서도 계급이 있다. 입은 옷마다 역할도 다른 것 같고.’

블라드 유진은 그중에서 가장 계급이 높아 보이는 사람 앞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환자예요?"

"아무 말 말고 따라와라."

그의 눈이 검붉게 빛나자,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중년 남자가 순간적으로 비틀거렸다.

그러고는 초점 없는 눈으로 유진의 뒤를 따라 건물을 나섰다.

* * *

"크으으으!"

"으음!"

블라드 유진은 흰 가운을 입은 남자의 팔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의 손은 투명하게 변하여 혈관과 뼈가 다 드러나 보이는 상태였다.

그런데 마치 상대의 피가 손을 통해서 이쪽으로 넘어오는 듯한 게 아닌가.

츠츠츠츠츠!

중년 남자는 연신 괴로운 신음을 흘렸지만, 눈을 까뒤집은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아무래도 지금은 무슨 짓을 하든 항거할 수 없는 상태인 듯했다.

그때 유진이 왼손을 내밀어 상대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남자의 검은 눈이 새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제 좀 알겠군."

이윽고 그는 정신을 잃은 중년 남자를 조종하여 병원 앞쪽으로 걸어가게 했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딱 튕기며 그자의 옆으로 휙 지나갔다.

"내가 왜 여기 있지? 어우! 머리 띵해 죽겠네."

남자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응급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 *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분 아니, 저자가 뱀파이어라고요?"

"그렇습니다."

"허!"

같은 시각, 아크웰은 서울대교구청에서 김태호 추기경을 만나는 중이었다.

사제관을 나서면서 두 번째 명령서를 읽은 녀석은 황당함에 걸음을 멈췄다가, 이곳으로 황급히 올라왔다.

추기경을 통해서 명령서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미궁 내부에서 피를 빠는 괴물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 봤지만, 1천 년 전의 흡혈귀가 존재한다는 건……."

"솔직히 믿기 힘들지요?"

"예, 그러네요."

"저도 교황 성하로부터 이 편지를 받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그저 허황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겠죠. 이제 미궁에, 몬스터에 이종족까지 나타나는 세상이 되었는데요."

"중요한 건 저 뱀파이어를 이용하여 3대 미궁을 정화하고 성배를 찾는 거지요."

"성배가 그렇게 대단한 물건인가요? 이런 짓까지 해야 할 만큼?"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교황 성하의 뜻이 그러하니……."

김태호 추기경이 말끝을 흐리자, 아크웰은 힘겹게 주억거렸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살짝 숙였다.

"너무 길어지면 저자가 눈치챌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만 가 보죠."

"위급할 때는 이 주문을 외우십시오. 성물로 뱀파이어를 제어할 수 있습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녀석은 복잡한 표정으로 교구청을 나서서 사제관으로 터덜터덜 돌아왔다.

스으으윽!

어디선가 어둠을 지배하는 존재가 자신의 뒤를 따르고 있는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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