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교황청 외교관은 교황을 대신해 인종 차별에 반대하며 종교의 자유와 군비 축소, 지역의 평화와 협력을 추구했다.
하지만 미궁과 이종족, 몬스터가 지구에 등장하며 이제는 각국의 협력을 이끄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아크웰 페리티노."
"예."
"세인트 존스 타워 쪽으로 가서 은발의 남자를 찾아라. 명령서는 가는 중에 읽고."
아크웰은 선임 외교관이 준 작은 봉투를 받아들고 멀뚱멀뚱 서 있었다.
대체 이런 명령이 왜 내려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갈색 머리칼이 왠지 녀석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거긴 지금 몬스터가 우글우글하지 않습니까? 오전에 미궁의 파편이 떨어졌다고 들었는데요."
"아마 그렇겠지."
"그럼 위험하지 않을까요? 성기사단도 파견되지 않았잖습니까?"
"어차피 너도 헌터지 않나? 몬스터 정도야 충분히 때려잡을 수 있을 텐데?"
"아니, 저는……."
"교황 성하의 명령이다. 잔말 말고 어서 가!"
"아, 네."
왠지 다급해 보이는 선임 외교관의 호통에 아크웰은 부리나케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 녀석이 헌터로 각성한 것은 맞았다.
각성자가 되면서 언어를 몰라도 통역하는 능력이 생겼기에, 외교관 학교를 빠르게 졸업할 수 있었다.
게다가 헌터라면 어느 정도 무력도 갖췄을 테니, 이런 시국에 꼭 필요한 인재였다.
"내가 어떻게 몬스터와 싸워?"
헌터가 되었으나, 그렇다고 누구나 몬스터와 싸워 이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아크웰의 능력은 전투와 거리가 좀 멀었으니까.
어쨌거나 그래도 명령은 명령.
바티칸 시국의 일원으로서 따르기는 해야 했다.
녀석은 천천히 걸어가며 명령서를 쭉 읽어 보았다.
"하, 한국?"
놀랍게도 교황의 명령서에는 한국으로 가라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스윽!
뒤쪽을 펼쳐 보자 두 장의 비행기 표와 여권, 신용 카드가 들어 있었다.
아마 이걸 이용하여 대한민국까지 가라는 의미일 터.
"하필이면 그 악명 높은 한국이야. 왜?"
한국은 좁은 땅덩어리에 대규모 미궁이 발생함에 따라, 거의 멸망의 길을 걷는 중이었다.
국토 대부분이 몬스터로 잠식된 나라에 가서 대체 뭘 하란 말인가.
"어휴!"
답답한 모양인지, 아크웰은 긴 한숨을 내쉬며 세인트 존스 타워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쿠콰콰콰!
"크에에엑!"
"키야악!"
멀리서 몬스터의 괴성이 들려오는 걸 보니, 이곳에 미궁의 파편이 떨어진 게 확실한 듯했다.
이미 세인트 존스 타워는 반파되었고, 경제 사무국 소속 직원들은 대피한 상태였다.
사실상 저곳으로 이동하는 사람은 아크웰 페리티노밖에 없었다.
"제, 젠장할!"
교황청 외교관이 되면서 녀석은 단 한 번도 욕설을 입에 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절로 욕지거리가 치밀어 올랐다.
어찌나 겁을 먹었는지, 아크웰은 자신이 욕을 했다는 사실조차도 인지하지 못했다.
콰직!
"크웨웩!"
세인트 존스 타워를 향해 다가갈수록 몬스터의 괴성은 더욱 커졌다.
덩굴 가득한 성벽을 돌아 원형의 낮은 계단을 올라가자, 시커먼 기운을 발산하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사람 키는 훌쩍 넘을 듯한 육각 기둥 형태의 큼지막한 바위, 매끈한 표면에 흐르는 끈적끈적한 마기(魔氣).
틀림없는 미궁의 파편이었다.
"으으!"
아마 저곳에서는 몬스터가 끊임없이 기어 나올 것이다.
한데, 놀랍게도 멀쩡하게 서서 돌아다니는 몬스터는 하나도 없었다.
죄다 피떡이 되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아크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이게 어찌 된……."
성기사단이 온 줄 알았으나, 그들의 은빛 갑옷은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쩌적! 콰드득!
"크어어어!"
바로 그 순간, 미궁의 파편 뒤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잠시 이어지던 괴상한 신음이 끊기자, 뭔가가 옆으로 휙 날아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죽으면서 독무(毒霧)를 마구 내뿜어 대는 프로그맨이었다.
"헙!"
혀를 길게 빼문 채로 갈기갈기 찢어진 몬스터의 사체를 보자, 아크웰은 헛바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녀석이 소리를 낸 탓인지, 미궁의 파편 뒤에서 누군가가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명령서에 기재되어 있던 은발을 치렁치렁하게 기른 남자가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아……."
공포에 잔뜩 질렸지만, 아크웰은 긴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남자의 외모가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긴 은발에는 윤기가 흘렀고, 피부는 마치 도자기처럼 매끄러웠다.
그뿐이랴,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는 마치 흑요석을 보는 듯했다.
척! 척! 척!
남자는 맨발로 프로그맨들의 사체를 툭툭 밀어내며 아크웰에게 다가왔다.
"호, 혹시? 블라드 유진 님입니까?"
유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우아한 손동작으로 아크웰이 든 종이를 빼앗아 들었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기에, 녀석은 명령서를 탈취당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이름이 뭐지?"
"아크웰 페리티노입니다. 그냥 아크라고 불러 주십시오."
녀석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러자 블라드 유진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시리도록 차가운 웃음이었다.
"가자."
찰박! 찰박!
그가 맨발로 피범벅이 된 바닥을 밟으며 이동하자, 아크웰은 저도 모르게 그 뒤를 따랐다.
앞으로 걸어가긴 하는데, 녀석의 시선은 자꾸만 뒤쪽에 있는 미궁의 파편으로 향했다.
저걸 저대로 놔뒀다가는 이 일대가 오염되어 몬스터 천지가 될 테니까.
"미궁의 파편은 그냥 놔둬도 되나요?"
"……."
아크웰이 질문을 던졌지만, 유진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반파된 옛 성벽을 뛰어넘어 로마 시내로 걸어갈 뿐이었다.
"자, 잠시만! 같이 가요!"
미궁의 파편에서 간신히 시선을 뗀 녀석은 황급히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