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프롤로그
바티칸 시국, 교황청 지하 깊숙한 곳에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금지가 있었다.
스윽!
그런데 로브를 뒤집어쓴 한 노인이 접근 금지 팻말을 옆으로 치워 버리고, 철문 앞으로 다가갔다.
어떤 이의 접근도 불허한다는 경고가 붙어 있었으나, 그자는 일체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그저 투박한 형태의 열쇠를 녹슨 자물쇠에 꽂고 조심조심 돌릴 뿐이었다.
철컹! 끼기기긱!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았던 모양인지, 철문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힘겹게 열렸다.
저벅! 저벅!
의문의 노인은 그렇게 여러 개의 철문을 통과하여 목적지에 도달했다.
어느새 그자의 앞에는 거무튀튀한 석관이 놓여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 석관인가. 그 전설이 사실이었으면 좋겠군."
노인은 늙수그레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뿌옇게 앉은 먼지를 털어 냈다.
그러자 석관을 칭칭 감은 사슬이 드러났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은으로 된 사슬은 마치 새것처럼 반짝거렸다.
정갈한 모양으로 석관을 싸맨 모습을 보니, 분명 범상치 않은 물건이리라.
스르륵! 척!
그자는 은 사슬을 풀어낸 뒤, 낑낑거리며 석관을 열었다.
아무래도 노쇠한 몸으로는 무거운 뚜껑을 밀어내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그그그그긍! 털썩!
드디어 석관이 열리고 오랫동안 쌓였던 먼지가 확 피어올랐다.
"콜록콜록!"
노인은 격하게 기침하며 팔을 휘저어 먼지를 날려 보냈다.
그러고는 작은 랜턴으로 석관 내부를 비추었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허여멀건 피부의 남자가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블라드 유진(Vlad Eugene). 깨어나라. 저주받은 자여."
드드드드드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석실에 노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석관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노인은 긴장한 표정으로 새파란 눈을 빛내며 난데없이 벌어진 기현상을 지켜보았다.
드드드드! 뚝!
한동안 진동하던 석관은 불현듯 움직임을 멈췄다.
스윽!
큰 키에 살짝 마른 듯한 체형, 윤기가 흐르는 은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에는 퇴폐미가 묻어 나오는 것 같았다.
바로 그게 부유하듯 석관에서 빠져나온 블라드 유진의 첫인상이었다.
척!
석관에서 몸을 바로 세운 그는 이윽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은하수가 뿌려진 밤하늘처럼 반짝이는 눈동자가 드러났다.
피잉!
발을 석관 밖으로 빼내려던 유진은 인상을 쓰며 물러났다.
아직 은 사슬이 석관 주변을 맴돌며 그의 움직임을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옛날 성인들이 온 힘을 다해 만든 봉인이다. 여전히 네 능력으로는 뚫을 수 없겠지."
노인의 말에 유진은 긴 한숨을 쉬며 석관에 걸터앉았다.
"실베스테르 2세가 아니로군."
"이미 네놈이 갇힌 지 천 년이 지났다. 벌써 교황이 100번도 넘게 바뀌었어. 네가 알던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
블라드 유진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가던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동안 불편한 침묵이 이어지고 나서야 그자는 시선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바로 267대 교황, 안드레아다."
교황이 자신의 정체를 밝혔음에도 유진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무료한 눈빛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이제 저렇게 바라보는 것이 대답을 촉구하는 표현이라는 걸 교황은 알 수 있었다.
교황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가 번쩍 떴다.
마치 뭔가 큰 결심을 한 듯한 모습이었다.
"이종족으로 인해 세상이 위기에 처했다. 인류의 존속을 위하여 그들을 처단하라."
"내가 왜?"
"그래야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 테니까."
"……."
블라드 유진은 아무런 감정 없는 공허한 눈빛으로 교황을 바라보았다.
어디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자는 태도였다.
"……자유. 네게 자유를 주마."
쿠웅!
그러자 얼음장 같던 그의 표정에 살짝 실금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