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결전>
시안은 앞으로 다가올 전쟁에 대비해 전력으로 몸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빠르게 악사라이의 부활을 준비하고 있는 드라쿤들을 구경하였다.
그리고 그런 드라쿤들을 보고 있는 시안을 향해 악사라이가 머릿속으로 염파를 보내왔다.
<이제 헤어질 때가 되었구나. 솔직히 이 몸에 나 같은 절대자가 갇혀 있는 것은 낭비지, 낭비.>
“하긴…….”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악사라이 같은 자가 아무런 능력도 발휘하고 있지 못 한다는 것은 전시에 낭비이다. 그것도 코앞에 강대한 적이 닥쳐왔을 때는 더더욱.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떠난다고 해서 네 능력이 사라지거나 그러지는 않을 테니. 그건 온전히 네 육체를 기반으로 개화한 네 능력이다.>
그 말에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악사라이에게 듣기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자신의 혼이 아니라고 한다. 자신의 혼을 받아들이기 위해 진화해 나간 육체이지.
자신의 혼의 조각이 떠난다고 하여도 시안의 육체가 온전히 제 기능을 하는 이상 선이 보이지 않거나 그런 일은 없다고 한다.
“이러면 어느 정도 균형이 맞을까요?”
시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머릿속에서 악사라이가 대답했다.
<어느 정도 맞게 되겠지. 내가 한 드라쿤의 아이 중 하나의 희생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면.>
시안이 들은 부활의 의식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이러했다.
드라쿤의 아이 중 하나의 몸을 빌려 악사라이라는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악사라이의 접속자가 알파가 되면 그 몸을 기반으로 커 나간 혼은 충분히 자아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접속자의 몸 자체가 악사라이의 몸으로 적합하지는 않다. 악사라이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드라쿤. 드라쿤의 육체를 가져야만 그 강대함을 뽐낼 수 있다.
악사라이가 말한 것이 이것이었다. 알파가 되어야 부활할 수 있지만 접속자의 몸을 빼앗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
원래 제대로 된 악사라이의 접속자라면 악사라이는 부활에 성공하자마자 상당 부분의 힘을 되찾고 단번에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겠지만 그러기에는 시안의 몸속에 있는 혼의 파편이 너무 작았다. 아마 악사라이가 부활에 성공한다고 하여도 예전의 성세를 되찾으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악사라이의 힘, 지극히 일부를 이어받는다고 하여도 드라고나 하나 정도를 상대할 정도는 된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균형이 맞아떨어진다.
<결국 루크라들이 드라쿤과 싸우는 동안 나와 네가 ‘나’를 상대하면 된다. 살아남은 드라고나와 크로나 말이지. 아마 시간을 많이 주지는 않겠지… 저들에게도 이미 라이오나를 죽이고 도망친 녀석이 있다는 사실이 귀에 들어갔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부활에 성공하게 되면 그 기파가 상공을 떨어 울릴 것이다.>
“뭐… 결계 걷히자마자 쳐들어올 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던 사실 아니었습니까.”
시안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런 시안을 본 악사라이는 피식 웃으며 영파를 보냈다.
<그런 마음가짐이라면 되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단번에 결판이 나겠지. 둘 중 하나겠지. 우리가 쓸려 나가거나, 저 녀석들을 쓸어내어 버리거나. 아마 지는 쪽은 뿌리가 뽑히게 될 것이다.>
그 말에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크라들이 이긴다면 자신을 살려둘 리 없으니 모조리 죽일 것이다. 결계가 없으니 자신들은 후퇴하여 도망갈 장소도 없다.
반면 자신들이 이긴다면 루크라들은 잠시 시간을 벌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과 악사라이가 차근차근 힘을 회복하게 되면 결국에는 쓸려나갈 것이다. 자신은 몰라도 악사라이는 결코 루크라들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니.
<얼마 후면 모조리 결계가 쓸려나갈 것이다. 그때까지 회복에 최선을 다하라. 저자들은 우리에게 시간을 주지 않을 것이니. 그나저나 자신 있느냐, 힘이 회복이 덜 되어도?>
시안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까지 모든 힘을 회복하는 것은 무리이다. 하지만 저번 전투를 통해 강해진 것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상대할 만은 할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아쉬운 적은 처음이군…….’
결계가 조금만 더 유지되어 준다면, 혹은 자신이 조금만 더 빨리 일어나 라이오나를 잡고 회복할 시간을 가졌다면 한결 더 여유 있는 싸움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상대는 그 시간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시안은 한숨을 내쉬며 악사라이의 말에 대답했다.
“할 만합니다.”
그러자 악사라이가 눈에 이채를 띠며 말했다.
<분명 회복할 시간이 모자랄 텐데… 강해지는 속도가 굉장하구나.>
“그러면 뭐하겠습니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데……. 흐휴, 그나저나 준비가 다 되었나 보군요.”
<그래. 다음에는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고. 목 비틀려 들지는 말고 말이야.>
자신에게 농을 걸어오는 악사라이의 영파를 들으며 피식 웃은 시안은 저 멀리서 다가오는 드라쿤들을 보며 부활을 위해 몸을 일으켰다.
한가운데에 라이오나의 탈릭 스톤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마 저것을 이용하여 악사라이를 살릴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라이오나를 끌고 들어올 함정을 준비한 것이고.
‘이런 것까지 계산에 넣고 있었다니…….’
시안은 이 상황을 예측한 악사라이를 보며 역시 머리 좋은 사람은 인생 살기가 편해 보인다는 생각을 하였다.
☆ ☆ ☆
거칠게 뿜어져 나오는 기파를 보며 루크라의 신관, 카툰-할은 인상을 찡그렸다. 이 거대한 영파. 게다가 갑작스럽게 태어난 알파치고는 그 기세가 너무 강대했다.
따라서 카툰-할은 하나의 사실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살아났구나… 악사라이. 알파에 이를 접속자가 없는 줄 알았는데 어찌…….>
카툰-할은 마음이 급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까지는 시간이 자신의 편이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이야기가 다르다. 라이오나는 죽어버렸고 악사라이는 부활했다. 결계가 걷히자마자 승부를 보아야 한다, 최대한 빠르게. 악사라이가 점점 강해져서 원래 자신의 힘을 되찾게 되면 신지가 있다고 해도 승산은 없다.
카툰-할은 황금수정으로 가서 ‘나’들을 조종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열쇠는 없지만 원래 신관들은 ‘나’들을 조종할 고유의 권리를 부여받으니 열쇠가 없어도 상관없다.
결계가 사라지고 저들이 갈 곳이 사라지는 순간 진격해 들어갈 것이다.
☆ ☆ ☆
“콘-라드 씨, 오랜만입니다.”
콘-라드는 눈앞에 나타난 시안을 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시안 씨군요. 이제 곧 있으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 말에 시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그래서 준비를 하려고 들렀지요. 어차피 결계가 유지되는 동안은 시간이 좀 있습니다. 일주일도 안 남았지만…….”
그러면서 시안은 그동안 있던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콘-라드가 놀라운 표정으로 시안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라이오나를 잡았습니까?”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어찌해서 전쟁 전에는 겨우 잡을 수 있었지요. 하지만 이래도 겨우 균형이 맞을까 말까입니다. 어찌 보면 밀리는 느낌도 들고요.”
루크라와 드라쿤들의 힘이 비등하다는 전제하에 결국에는 자신과 악사라이, 그리고 드라고나와 크로나의 힘의 균형에 의해 결판이 나게 될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저들이 극한의 산을 끼고 싸우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 악사라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진다. 시간은 자신들의 편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저들은 시간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 말에 콘-라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큰일이군요… 혹시 라이오나의 탈릭 스톤은 없습니까? 그것만 있다면 도움이 될 무기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적의 수준은 신국 시절보다 떨어지지만 라이오나의 탈릭 스톤 안에 있는 에너지로는 뭘 해도 강대한 위력이 나올 것이다. 그렇기에 시안을 향해 물어보았지만 시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미 사용하였습니다. 제가 이번에 온 것은 공간이동의 반지를 찾기 위함입니다.”
“아… 그런 거라면… 여기 있습니다.”
콘-라드는 예전에 만들던 반지를 몇 개 더 만들어 놓았는지 시안에게 세 개를 건네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혹시 도망칠 생각이…….”
그러자 시안은 살짝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뭐… 안 되면 저라도 살아야지요. 그리고 숨어서 힘을 키울 생각입니다.”
“…….”
콘-라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질 것 같으면 그게 차라리 최선의 한 수였다.
‘우리도 비상대피소를 만들어 놓아야겠군…….’
쓸모 있을지는 모르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반지를 받은 후 시안은 콘-라드와 이것저것 대화를 나눈 다음에 전쟁 준비를 하기 위해 헤어졌다. 이제는 정말로 결전만이 남았으니까.
시안은 뒤에 이어질 싸움을 생각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진짜로 평화로워졌으면 좋겠구나… 후…….”
☆ ☆ ☆
저 멀리, 거대한 루크라들의 군세가 극한의 산에서 빠져나와 대륙을 짓밟고 드라쿤들이 머무르던 구름섬으로 직진해서 오고 있었다.
상대 진영에는 거대한 여섯 뿔의 하리쟌들을 비롯하여 압도적인 존재감을 뿌리는 일곱 뿔의 드라고나와 크로나가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으로는 루크라를 이끄는 세 명의 신관들이 거대한 존재감을 뿌리며 서 있었고, 그 뒤로는 전신에서 황금빛을 흘려내는 루크라족의 전사들이 줄줄이 나열해 있었다. 그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가진 존재감은 오히려 거대한 덩치를 가진 하리쟌들의 존재감을 찍어 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드라쿤들은 이미 흩어져버린 구름섬을 버리고 공중을 배회하며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거대한 드라쿤들 역시 그 수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결코 루크라들에 비해 그 기세가 약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드라쿤들 중에서도 돋보이는, 압도적인 기운을 뿌리는 존재가 천천히 날개를 흩뿌리며 정지비행을 하고 있었다.
드라고나에 밀리지 않는 압도적인 기운을 흩뿌리고 있었지만 맨 앞에서 날고 있는 드라쿤의 표정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약하다니… 혼의 조각이 작긴 작았구나. 세상에… 내가 이런 몸을 가지고 싸우게 될 줄은…….>
불만의 음성을 사방으로 뿌리는 악사라이의 옆에서 시안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도 그 정도가 어디입니까. 싸울 정도면 되었지.”
<후… 끝나고 한동안 힘을 키우는 데 집중해야겠군. 우선 저 녀석들을 쓸어버리고……. 그나저나 네가 누구를 맡을 건가?>
결과적으로는 난전이 되겠지만 드라쿤들이 마음 편하게 싸우려면 저 두 괴수 녀석들을 견제해야 한다. 그리고 그건 악사라이와 시안의 몫이 될 것이다.
시안은 악사라이의 말을 듣고 곰곰이 고민하더니 맨 앞에 서 있는 거대한 흑표범, 크로나를 가리켰다.
“저 녀석을 제가 상대하지요.”
<좋은 선택이군. 너는 저 녀석에게 쌓인 게 많지. 그나저나 몸 상태는 괜찮은가?>
아직까지 체내계수를 완전히 회복 못한 것처럼 보이는 시안을 보며 악사라이가 묻자 시안이 대답했다.
“뭐… 아직 몸 상태가 좋지 않지만 할 만합니다. 전지의 권능이 있다면서 뭐 그리 궁금한 게 많습니까.”
<그것도 약한 놈들 상대로나 먹히는 거지, 너 정도로 강한 놈 상대론 안 보여. 그게 잘 보였으면 내가 그랑-라나 브록시안이랑 같이 공멸했을 리가 있겠느냐.>
“하긴…….”
시안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네가 자신 있다니… 나는 드라고나 녀석에게 집중하겠다.>
“후…….”
시안은 전신이 긴장되는 것을 느끼며 몸을 풀고 저 멀리 보이는 크로나를 바라보았다.
‘이 새끼… 그동안 너 때문에 고생한 거 이자까지 쳐서 갚아주마…….’
시안은 이를 갈며 크로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크로나와 드라고나의 입이 쩌억 벌어지며 기괴할 정도의 에너지가 꾸역꾸역 그 안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입안에 모여든 에너지는 순식간에 드라쿤들을 향해 터져 나왔고 동시에 대륙이 터져 나가며 결전이 시작되었다.
☆ ☆ ☆
“빌어먹을…….”
현재 콘-라드와 그들의 동료들은 인간종들을 데리고 대륙의 최북단으로 대피한 상태였다. 예전에 게르나들이 살던 지역이었지만 현재는 스웜으로 깨끗하게 정리한 상태인지라 별 무리 없이 피난을 진행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콘-라드를 비롯한 동료들은 전혀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저 멀리 수천, 수만 킬로는 떨어져 있을 격전지의 섬광이 이곳에서까지 보일 정도였으니까. 현재 시간으로는 분명 밤이 틀림없는데 책을 펴고 글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사방이 환한 상태였다. 한 번의 섬광이 아니었다. 지축을 떨어울리는 거대한 섬광이 수십, 수백 발 하늘을 관통하며 교차하고 있었고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그 진동이 느껴질 정도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콘-라드는 새삼 악사라이가 고마워졌다. 만약 언질이 없었다면 대륙에 있던 인간종들은 모조리 죽어 나갔을 것이다. 저건 직격당하지 않는다고 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모르긴 몰라도 저 전투가 끝나면 누가 이기던 간에 대륙의 지형은 완전히 바뀌게 될 것이다.
‘끄응…….’
저 멀리 터져 나오는 보랏빛 섬광을 보니 그 예전, 크로나에게 쓸려나가던 악몽이 떠올랐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때는 하품 하듯이 뿜어낸 섬광이었지만 지금은 거의 수십, 수백 번 가까이 섬광이 허공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는 것.
그것만 보아도 크로나 또한 꽤나 상황이 절박함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콘-라드는 현재 크로나를 상대하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일주일 전 자신을 찾아온 시안과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었으니까.
아마 시안이 크로나를 상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저 멀리 터지고 있는 보랏빛 섬광은 시안이 크로나를 꽤나 몰아붙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생각을 하니 새삼 놀라웠다. 악사라이라는 존재가 대단하다고 하지만 시안 정도로 빠른 시간 내에 강해지지는 않았을 것 같다.
수천 년의 세월을 오로지 힘을 쌓는 데만 집중한 크로나를 단 30년도 되지 않아 따라잡다니.
‘아… 130년인가…….’
어찌 되었건 말도 안 되는 속도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세 종족의 장점만을 고스란히, 그것도 강해지기 위한 장점만 끌어모아 태어난 기적의 존재.
만약 시간만 좀 더 있었다면 정말 전무후무한 존재가 되었을 것이고 이런 전투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시안이 출동해서 몽땅 뚜드려 팼을 테니까. 시끄럽게 한다고.
콘-라드는 이번 사태가 완전히 마무리되길 바라며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고 있는 남쪽 방향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 ☆ ☆
<크아아! 그때 네놈을 먹어치웠어야 했는데!>
크로나는 눈앞에서 금빛 칼을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달려드는 시안을 분통 터진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세 번. 세 번이나 기회가 있었다.
그 예전 요상한 붉은 구체가 열렸을 때.
대수림을 가로질러 도망칠 때.
라이오나와 싸우고 있을 때.
세 번이나 녀석을 잡아먹을 기회가 있었는데 실패했고 다시 나타날 때마다 녀석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괴물같이 강해져 나타났다. 수천 년 살아온 자신도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세 번의 실패 끝에 녀석은 결국은 이렇게 자신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했고 결과적으로 이렇게 자신을 토막 내기 위해 금빛 칼을 휘둘러 오고 있었다.
크로나는 괴성을 지르며 보랏빛 섬광을 다시 한 번 뿜어내었다. 그 옛날, 단 한 번에 제국의 영토를 모조리 날려버렸던 그 섬광은 예전과는 다르게 압축되고 압축되어 한 방울의 이슬과도 같이 눈앞의 적을 멸살하기 위해 날아갔다.
크기는 작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에너지는 그 예전, 제국을 날려버린 그 시절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하지만 시안은 다가오는 그 에너지를 피하지도 않고 그대로 금빛 칼을 휘둘러 쪼개버렸다.
서걱!
피이이잉!
보랏빛으로 찬연하게 빛이 나던 에너지의 응집체는 그대로 쪼개지며 양쪽으로 날아갔고, 땅에서 싸우고 있던 드라쿤들의 베타와 여섯 뿔의 하리쟌들을 그대로 덮쳤다.
쿠와와앙!
시안이니까 받아칠 만한 공격이었지, 아래 있는 녀석들에게는 그런 대재앙이 없던지라 아래서 전투를 벌이던 자들은 그 폭발에 휩쓸려 갈기갈기 찢겨져 나갔다.
하지만 시안에게도, 크로나에게도 거기에 신경 쓸 만한 여유는 없었다. 정말 만만치 않은 상대였으니까.
이곳만 격전지인 것이 아니었다. 대륙의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대결전은 땅덩이를 모조리 쪼개놓고 으깨어 버리고 있었다.
저 멀리에서는 드라고나와 악사라이가 각종 이능들을 선보이며 하늘을 쪼갤 듯한 에너지를 사역하며 상대를 공격하고 있었고 그 근처에서는 드라쿤들의 1급 쿤들과 루크라의 신관들이 피터지게 싸우고 있었다.
서로가 굉장히 필사적이었다. 왜냐하면 알고 있었기에. 이 전투에서 지면 멸족이라는 것을.
루크라들이 이긴다면 악사라이를 비롯한 드라쿤들의 뿌리를 뽑아버릴 것이고, 드라쿤들이 이긴다면 루크라들은 신지에 숨어 잠시 시간을 벌 수는 있을 테지만 결국에는 시간이 지나며 자신의 강함을 회복한 악사라이가 들어가 신지의 황금수정째로 짓이겨 버릴 것이다. 루크라들은 드라쿤들을 못 죽인다고 해도 최소한 악사라이는 무조건 죽여야 했다.
그걸 알기에 루크라들은 악사라이를 죽이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려들고 있었고 드라쿤들은 그런 루크라들을 가로막기 위해 온몸을 내던지며 방어하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그렇기에 양측의 피해는 정말 기하급수적을 쌓여가고 있었다. 지면 끝장이라는 것을 알기에 정말 몸을 사리지 않고 뛰어들었으니까 .
전투에 참여하고 있는 존재들은 짝을 찾기 힘들 정도의 강대한 존재들이었다. 어디 가서 콧김 한 번만 불면 섬 하나 정도는 가볍게 쪼갤 수 있는 자들.
하지만 상대 역시 그런 자들이었기에 사방에서 루크라와 드라쿤들의 숫자는 빠른 속도로 줄어가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구나…….’
시안은 크로나와 싸우는 와중에도 이 기묘한 광경에 대한 한 줄의 평가를 내렸다.
멸족을 막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 서로를 거의 멸족에 가까운 수준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자신을 속였던 신관은 드라쿤들의 공격에 죽어가고 있었고 맨 처음 악사라이를 영접했던 드라쿤 역시 루크라들의 공격에 포위당해 죽어가고 있었다.
평화롭게 공존하면 좋을 텐데 절대강자의 존재가 상대를 위협하기에 그러지 못 한다. 애초에 강자로 태어난 존재들은 한순간에 자신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존재를 머리 위에 두는 것을 용납하지 못 하니까.
살아있어도 그건 노예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자신의 위에 올라설 가능성이 있는 종족은 아예 뿌리를 뽑아버려야 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괜찮다. 소수만이 살아남더라도 이긴 자는 모든 것을 차지하니까.
천적이 없어진다면 오로지 확장만이 남는다. 그리고 루크라와 드라쿤들 모두 살아남기만 한다면 적수를 찾기 없을 정도로 강대한 종족들이다. 이 자리에서 미지근하게 끝내느니 아예 상대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발전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두 종족은 서로를 절멸시킬 각오로 치고받고 있었다.
또다시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보랏빛 섬광을 피한 시안은 빠르게 다가오는 크로나의 발톱을 피해갔다. 시안이 피하면서 보라빛 섬광은 뒤에서 싸우고 있던 드라쿤들을 거칠게 덮쳐갔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시안은 공격을 피하며 금빛 칼을 다시 한 번 크게 휘둘렀고 크로나는 그 공격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발톱으로 막아갔다. 어찌나 발톱이 튼튼한지 모든 것을 동강내는 금빛 칼은 발톱에 막혀 더 나아가지 못 하였고 크로나는 그대로 반대쪽 발을 휘둘러 공간을 찢으며 시안을 후려쳐 갔지만 시안 역시 잽싸게 공격을 피하며 한 칼을 더 먹였다.
<쥐새끼 같은 놈!>
크로나는 시안이 요리조리 잘 피한다는 뜻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시안의 상태는 썩 좋지 못 하였다. 시안 역시 지속된 전투 중 계속해서 크로나의 공격에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게다가 아까 미처 피하지 못 하고 한 대 얻어맞은 보랏빛 섬광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체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이긴다.’
체력은 모두 회복되지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은 라이오나와 싸울 때의 자신보다 더 강해져 있었다. 그리고 악사라이가 떠나갔음에도 뚜렷하게 눈앞에 보이는 선은 끊임없이 크로나를 잘라낼 경로를 보여주었다. 더 좋은 소식은 그 동작을 따라 하는 것이 그 예전, 대수림에서 크로나를 피해 도망갈 때처럼 힘겹지가 않다는 것.
이 모든 정황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보여주고 있었다.
“요놈아, 약한 사람 괴롭힐 때 이렇게 될 줄 알았어야지. 넌 오늘 죽었어, 그냥!”
<크아앙! 벌레 같은 자식이!>
“그건 옛날이야기지.”
시안은 끊임없이 칼을 휘둘러가며 크로나의 전신을 불태워갔다. 크로나의 온몸은 이미 금빛 칼이 지나간 자국들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고 그 자리를 끊임없이 태우고 있는 금빛 문신들은 야금야금 크로나의 체력과 에너지를 갉아먹고 있었다.
‘여기는 어느 정도 무난하게 마무리될 거 같고… 전황이…….’
시안은 끊임없이 치고받는 도중 힐끔 눈을 돌려 주변을 바라보았다.
루크라들이 절박하기에 드라쿤들이 꽤나 유리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그다지 유리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시안은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군.
‘강해진 자들이 몇 보인다…….’
죽음의 위기. 당연한 이야기지만 죽음의 위기란 것이 그렇게 비위 맞춰주는 친절한 전투력 상승기가 아니다. 아무리 루크라라고 하더라도.
그렇기에 대부분은 죽는다. 하지만 오늘의 전투에는 루크라 전원이 동원되었다. 당연히 수백의 루크라들이 모두 죽을 위기를 겪으며 전투를 하였고 그 와중에 몇몇 루크라들은 기적과도 같은 확률로 강해지며 살아남았다. 이를 경계한 드라쿤들이 필사적으로 숨통을 끊으려고 하였지만 그걸 극복하고 살아남은 몇몇 루크라들이 고갈된 체력에도 불구하고 정말 괴물과도 같은 힘을 뿜어내며 드라쿤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드라쿤들이 루크라를 반드시 멸망시켜야 할 이유가 하나 늘어난 순간이었다. 저 녀석들이 신지에 들어가서 힘을 키우면 골치가 꽤나 아플 테니 말이다.
‘저쪽은 그렇다 치고…….’
루크라들이 유리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큰 차이는 아니었다. 크게 강해졌다고 하지만 잃어버린 체력과 에너지가 돌아오는 것은 아니니까. 이번 결전에서 그보다 더 중요한 곳이 있다.
시안은 크로나와 치고받으며 악사라이와 드라고나의 결투가 벌어지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의 승자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다.
만약 악사라이가 진다면 볼 것도 없이 단번에 루크라들은 드라고나와 협공해 드라쿤들을 몰살시킬 것이다.
하지만 악사라이가 이긴다면 드라쿤들과 힘을 합쳐 루크라들을 압박해 들어갈 것이고 비등한 세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악사라이 쪽을 바라본 시안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