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극한의 산>
“흠…….”
시안은 안쪽을 들어가자마자 온몸을 짓누르는 기묘한 기운에 침음을 흘렸다.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에.
극한의 산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죽음의 위기 정도로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알파인 자신에게도 확실히 부담을 주고 있었다. 온몸의 체내계수가 들쭉날쭉 하는데 이걸 버티기 위해서 상당히 신경을 써야만 했고 실제로 전투력이 야금야금 깎여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어떻게 루크라족이 드라쿤과 하리쟌의 사이에서 버틸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갔다. 이 안에서 자신들은 온전히 전투력을 보존할 수 있다는 전제가 성립되면 이곳을 끼고 싸운다면 능히 그 둘을 상대로 싸워낼 수 있을 것이다.
당장 자신만 해도 전투력의 상당 부분이 깎여나간 상태였으니. 정상 쪽으로 갈수록 더 심해진다고 하니 드라쿤들과 하리쟌이 쉽사리 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 하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반대로 말하면 이들 역시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나저나… 이제는 어떻게 하지…….”
가장 좋은 것은 이곳을 몰래 통과하여 돈-나시안 대륙 쪽으로 넘어간 다음 라가오페를 찾아 정중하게 원래 대륙으로 돌려달라고 부탁하고 다시 수련을 하는 것이다. 짐승들 입장에서는 자신이 이곳으로 도망간 것으로 알 테니 다시 라시안 대륙을 뒤지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 것인가가 문제였다. 이들은 자신에게 동맹의 의무를 요구하기 위해 라가오페를 도와준 것이다. 순순히 바깥으로 내보내 줄지가 의문이었다.
‘에잉… 모르겠다. 우선 부딪쳐 보자.’
산 정상에서 느껴지는 강대한 기운들이 속속들이 자신이 서있는 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아마 드라고나를 비롯한 짐승들의 충돌을 느끼고 아래로 내려오고 있는 것이리라.
저들의 힘을 보니 힘으로 해결할 생각은 단번에 사라졌다. 특히 저들 중 셋은 저 바깥에서 치고받고 있는 드라고나와 동급, 혹은 약간 아래로 보였다. 이곳에서의 페널티까지 생각한다면 아웅다웅하다가는 단번에 갈려나갈 것이다.
‘뭐… 그래도 동맹이라는데 뭐라고 하겠어.’
시안은 마음을 편하게 먹고 내려오는 그들을 기다렸다.
아래로 내려온 자들 중 위엄이 넘치는 복장을 한 자가 대뜸 시안을 향해 대단하다는 의미를 전달하는 영파를 쏘아 보냈다.
<라가오페의 기억에서 본 그대로 생겼구나. 반갑다. 그나저나 정말 용감하기 그지없구나! 우리가 브록시안의 핏줄을 믿고 너희들에게 기대를 건 것을 잘 한 것 같다!>
“……?”
시안은 지금 이 작자가 무슨 소리를 하나 싶어 눈을 가늘게 뜨고 루크라를 쳐다보았다.
<저기 저 바깥의 짐승 놈들은 우리도 바깥에서 상대하기 심히 부담스럽거늘 쉬운 길을 놓아두고 용감하게 저곳을 뚫고 들어올 생각을 하다니! 그대에게는 과연 브록시안의 피와 우리 루크라의 피가 흐르는 것이 틀림없구나!>
“저기… 쉬운 길이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시안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어보자 루크라들은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시안에게 안심하라는 표정을 지으며 시안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다시 한 번 말해다오. 이해할 수 없었다.>
‘아하… 말은 알아들을 수 없겠구나.’
생각해보니 저들이 영파로 말했기에 자신은 알아들은 것이지 왕국어로 말을 하면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시안은 머릿속으로 다시 한 번 아까의 말을 떠올렸다.
<저기… 쉬운 길이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러자 루크라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라가오페라는 자가 전해준 것이 없었는가?>
<…전해준 것이라니요?>
그러자 루크라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분명 동맹의 의무에 대하여 이야기할 것이 있으니 그대를 이곳으로 불러달라고 했는데.>
<…….>
<그러더니 라가오페가 자신이 알아서 전달해주겠다고 하더군.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우리를 찾아온 것인 줄 알았는데.>
<…….>
<우리는 자네가 그 공간이동인가 뭔가… 그걸로 올 줄 알았다. 편한 길을 찾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앞으로 싸울 일이 많을 텐데 그 정도 여유는 부릴 수 있으니.>
<…….>
<그런데 이렇게 가장 험난한 길을 뚫고 찾아오다니. 라가오페라는 자의 말을 듣고 걱정했는데 그자가 잘못 본 것이 틀림없구나. 그래, 약한 자가 강자를 제대로 평가할 수는 없지. 전사의 피를 제대로 타고났구나!>
‘…….’
시안은 지금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지금 이 사태는 누구 때문에 벌어진 것인지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라가오페… 쿠쿠타란… 드라고나… 라이오나… 크로나… 루크라… 어억…….’
금방이라도 뒷목을 잡을 것 같은 제스처를 취하던 시안은 문득 라가오페가 전하려던 동맹의 의무가 무엇인지가 퍼뜩 생각이 나 다급하게 물었다.
<잠깐! 제대로 설명을 해주시지요. 동맹의 의무가 무엇입니까? 나는 라가오페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루크라들이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저 짐승들이 사는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단 말인가?>
<아니… 그게…….>
웬 얼간이 짓을 했느냐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루크라를 보며 시안은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뭐, 되었다. 그런 건 사실 중요하지 않으니. 중요한 건 이렇게 그대가 우리의 눈앞에 서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저기를 뚫고 왔다는 것만으로 그대의 강함은 증명되었다.>
<…….>
<우선 자리를 좀 옮기지. 저 녀석들의 드잡이질도 어느덧 끝나가는 것 같으니.>
바깥에서 번쩍이던 섬광은 어느새 가라앉은 상태였다. 아마 녀석들도 갑작스런 사태에 열이 받아서 그런 것이지, 사생결단까지 갈 생각은 없었는지 서로 피해가 커지기 전에 물러나는 듯 보였다. 아니면 극한의 산 안에서 지켜보고 있는 루크라들을 경계하는 것일 수도 있고.
루크라들은 소란이 멈추자 경계태세를 조금 낮추고 시안을 데리고 조금 더 높은 산 정상 쪽으로 향해 올라갔다.
극한의 산 정상은 아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높은 압력이 작용하고 있었다. 체내계수를 쥐어짜려고 드는 그 압력은 물론 시안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전투력 자체는 상당히 감소시키고 있었다. 이 정상에서 발휘할 수 있는 힘은 땅에서의 절반도 되지 않을 듯했다.
산 정상에는 마치 분화구처럼 움푹 파여 있는 거대한 구덩이가 있었고 그 아래에는 사람 크기보다 조금 큰, 황금빛으로 빛나는 수정 하나가 박혀 있었다.
굉장히 아름답고 커다란 수정이었기에 시안은 호기심이 생겨 자신의 앞에 있는 루크라에게 물어보았다.
<저게 무엇입니까?>
그러자 루크라가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의 신물이라네. 아주 귀중한 것이지. 물론 지금은 별 작용을 안 하고… 쓸 데도 없기는 하지만 존재 자체가 의미 있는 물건이라네.>
<아하…….>
신관이 있는데 신물이라고 없을 이유가 없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시안을 보며 루크라는 다음 말을 이었다.
<이야기를 못 들었다니 처음부터 이야기해 주지. 우선 어디까지 알고 있나? 말하기 귀찮으면 기억을 읽어보겠다만…….>
<아닙니다.>
그러기에는 영 껄끄러웠기에 거부한 시안은 라가오페에게 들은 이야기를 쭈욱 해주었다. 그러자 루크라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루크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중요한 부분은 얼추 모두 들었으니 최근의 상황만 이야기해주면 되겠군. 우선 내 소개부터 하지. 라가오페에게 들었다시피… 내가 우리 루크라의 신관이라네.>
<네, 반갑습니다.>
아까부터 이야기하는 것으로 얼추 그 사실을 짐작하고 있던 시안은 놀라지 않고 그 말을 받았다.
<원래 우리는 자네가 강해질 때까지 동맹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우리를 도와 드라쿤과 하리쟌들과 싸울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질 때까지 말이다.>
<…….>
<그대 하나로 인하여 전세가 확연히 바뀔 리도 없고, 이제까지 이어온 대치상태가 깨질 리도 없으니.>
<그런데 왜…….>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자네도 보다시피… 우리가 이제까지 저 바깥의 짐승 놈들과 드라쿤 사이에서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신지 덕분이었지. 이곳은 우리에게도 제약을 가하지만… 훨씬 더 유리하지.>
그 말에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신지 안에서 전투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루크라족의 알파들이라면 얼마든지 저 둘을 상대로도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이다.
시안이 이해한 표정을 짓자 신관이 심각한 표정으로 다음 말을 이었다.
<한데 요즘 들어 신지의 힘이 점점 약화되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밀려나고 있다는 표현이 정확하겠지.>
<왜 그렇습니까?>
그러자 루크라가 저 멀리, 신지 바깥쪽의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결계 때문에 그렇다.>
하늘을 가리키는 루크라의 신관을 보며 시안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결계라니요? 키큘러스로 만든 그 결계를 말하는 겁니까?>
그러자 신관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허접한 결계 말고… 악사라이가 직접 운카라를 이용해 만들어 낸 저 결계 말이다.>
그리고 루크라의 신관은 하늘 위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구름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
시안이 이해가 안 가는 표정을 짓자 루크라의 신관은 추가적으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건… 사로잡은 드라쿤의 기억을 읽어내어 알아낸 사실이다.>
그리고 쭈욱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 ☆ ☆
수천 년 전, 루크라와 드라쿤들의 대립이 극심할 때.
악사라이는 상당히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왜냐하면 여차하면 자신들의 신지로 도망가 버리는 루크라들 때문. 자신들이 날아다닐 수 있다고 하여도 전투력에 큰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었기에 악사라이 입장에서는 큰 고민이었다. 어차피 알파 정도 되면 수십 킬로 바깥도 공격할 수 있었기 때문. 그리고 실수로 녀석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면 유리하던 상황도 한순간에 뒤집히기 일쑤였다.
여차하면 안에 숨어 공격을 퍼붓는 루크라들을 보던 악사라이는 문득 저놈들이 하는 짓을 자신들이라고 못 할 게 무엇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희만 홈그라운드가 있으면 불공평하니 우리도 홈그라운드를 만들겠다.>
하늘은 홈그라운드가 될 수 없다. 그렇기에 저 녀석들의 신지만큼 막강한 이점을 가질 수 있는, 홈그라운드를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새로이 짜 올릴 여유는 없었다. 그런 걸 만드는 것을 루크라들이 두고 볼 리가 없으니까. 악사라이는 강대하지만 그랑-라 역시 그에 못지않게 강했다. 분명 나와서 분탕질 치며 박살을 내고 다시 신지 안으로 도망갈 것이다.
그러던 와중 악사라이는 날아다니던 중 자신들의 발아래 깔려있는 구름을 보며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정확히 말하면 저 멀리, 대륙의 동북쪽 반도를 넘어 거대한 구름산의 지하에 몸을 묻고 사는 괴수, 운카라가 내뿜는 밀도 높은 연기가 섞여 있는 구름을 보고.
그 종족들은 섬의 지하에 살면서 땅 밑의 용암을 파먹고 구름과 유사한, 동시에 이능에 굉장히 밀도 높게 반응하는 연기를 뿜어 올리는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연기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구름과 합쳐져 대륙의 상공을 떠돌고 있었다. 실제로 드라쿤들이 사는 창공은 그런 구름들로 잔뜩 휩싸여 있었고, 그 연기들은 드라쿤들이 이능을 쉽사리 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마침 운카라들이 사는 곳은 루크라들의 신지와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방해받을 염려가 없었던 악사라이는 그곳에서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운카라의 연기가 섞인 구름을 이용, 희대의 결계를 제작해 내기에 이른다.
거의 신에 가까운 권능을 가진 악사라이가 그 권능을 이용하여 오로지 자신들의 적대종족인 루크라들은 제압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결계.
그것이 현재 신지의 상공을 제외한 대륙 전역을 감싸고 있는 구름결계, <아쿤-칼>이다.
<아쿤칼>
사실 운카라 종들은 드라쿤의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중립에 가까웠으며 누가 자신들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여 산의 지하로 누가 침범하면 매섭게 공격을 퍼부었다. 거기다 성격은 어찌나 더러운지 질 것 같으면 거침없이 자폭했다.
살아있는 녀석들이 필요했던 악사라이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차피 자신에게 필요한 건 저 녀석들이 아니라 저 녀석들이 만들어내는 연기이니까.
악사라이는 녀석들이 사는 구름섬 주위에 자신의 권능을 쏟아부어 그 지하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에 권능이 스며들도록 만들어 놓았다.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기에 서둘러 자리로 돌아온 악사라이는 차분히 그 결계가 퍼져 나가는 것을 기다렸다.
처음에 루크라들은 이 결계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 하였다. 워낙 멀리 있는 지역에 만들었을뿐더러 퍼지는 속도가 느렸으니. 만약 순식간에 대륙을 뒤덮었다면 루크라들도 무슨 수를 썼을 것이다.
하지만 운카라들이 내뿜는 연기를 기반으로 악사라이의 권능과 조합되어 생성된 구름 결계, 아쿤칼은 차곡차곡, 아주 천천히 대륙의 하늘을 뒤덮어갔다.
아쿤칼 안에서는 드라쿤들의 능력이 대폭 증가하고 루크라들을 얽어맨다.
아쿤칼의 아래에서는 루크라들이 어딜 가건 그 행적을 읽을 수 있다.
아쿤칼은 드라쿤들을 제외한 모든 자들을 땅 아래 묶어두었다. 올라올 수 없도록.
그 외 에도 몇 가지 공능이 있었고 몇 가지 단점도 있었지만 악사라이가 정말 효율적으로 구축해 낸 결계는 사정없이 루크라들의 행동반경을 좁혀나갔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결계를 만들어 낸 악사라이의 권능이 기가 막힐 지경이었지만 이미 늦었다.
이미 루크라들이 눈치를 챘을 때에는 신지를 제외한 대륙 모든 곳이 아쿤칼로 덮여버린 후였다. 그나마 신지 안으로는 저 빌어먹을 결계가 침입해 들어오지 못 하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때부터 바깥으로 드라쿤들을 밀어붙이던 루크라들은 신지 안으로 차츰차츰 밀려들어오기 시작했고, 지금의 대치 상태를 이루기 시작하였다.
이후 악사라이와 브록시안, 그랑-라가 공멸한 이후에도 이 기묘한 대치상태는 끝나지 않았다. 악사라이가 죽어도 악사라이가 설치한 결계인 아쿤칼은 사라지지 않았기에.
하지만 이 기묘한 대치상태가 끝나려고 하고 있었다. 신지의 권능을 밀어붙이며 들어오고 있는 아쿤칼 때문에.
☆ ☆ ☆
<수천 년 동안 멀쩡하던 신지의 권능이 왜 최근에 와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바깥의 구름결계가 최근에 차곡차곡 신지를 갉아먹고 있다.>
그러면서 신관은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을 보니 극한의 산의 경계를 기준으로 바깥의 구름과 안쪽의 구름의 느낌이 아예 달랐다.
극한의 산 상공에도 구름은 있었지만 훨씬 더 청명하고 투명한 느낌이 강했다. 아마 저 구름이 결계가 없는 상태의 구름이이라. 수천 년 전 전 대륙을 뒤덮던.
그에 반해 극한의 산 바깥에 있는 구름은 자신이 라-시안 대륙에 있는 시절에 흔히 보았던, 그런 구름이었다. 그때는 항상 보고 자란 구름이 저것이었으니 별 이상을 느끼지 못 하였는데 저렇게 경계를 두고 보니 그 차이점이 명확하게 보였다.
‘원래부터 하늘로 못 날아가고…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
이쯤 되니 예전의 악사라이나 그랑-라라는 작자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슬슬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싸우다 대륙을 반토막내는가 하면 밀리는가 싶으니 하늘을 모조리 자신의 권능으로 뒤덮어 버리다니.
‘질린다… 질려…….’
루크라들이 악사라이의 부활을 두려워하는 이유를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이쯤 되니 시안은 이들이 자신에게 할 부탁이 무엇인지 슬슬 감이 오기 시작했다.
<저보고 그곳으로 가서 결계를 부숴달라는 말이군요.>
그러자 루크라의 신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다. 정확히 말하면 아쿤-칼의 핵심 요소인 연기를 생산해 내는 운카라족을 없애 달라는 것이 우리의 부탁이다. 이대로 가면… 우리는 쓸려나가게 될 것이다. 반면 운카라만 없어도 시간은 벌 수 있겠지. 결계의 침식을 막아내고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녀석들의 결계가 쓸려나가게 될 터이니. 그렇게 되면 승기를 잡을 수도 있다.>
그러자 시안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렇게 중요한 종족이라면… 방어가 삼엄하지 않겠습니까? 이야기를 들어보니 저 구름결계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듯한데?>
그러자 루크라의 신관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거기까지 가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
<그들 운카라를 죽일 만한 종족은 현재 대륙에 우리뿐인데… 우리는 이곳에서 저들과 치열하게 대치중인데 굳이 그곳에 방어병력을 배치하여 병력을 분산시킬 필요가 없지. 그들에게도 그 정도의 여유는 없고. 바꿔서 말하면 우리도 그 때문에 그곳으로 갈 수 없다. 결계에 걸릴 테니.>
그 말에 예전 라가오페가 자신에게 해 준 말이 생각났다.
‘몸속에 피를 가지고 나갔다가… 걸렸다는 것이 그런 뜻이었구나.’
그 사실을 모르고 예전에 줄기차게 대륙을 돌아다녔는데도 자신을 잡아 죽이러 오지 않은 걸 보니 자신의 피가 루크라의 피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 특성만 있는 것이지.
어찌 되었든 이야기를 종합한 시안은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
<몰래 가서 깨고 오란 소리군요. 그런데 제가 그… 운카라라는 종족을 이길 수 있습니까? 얼마나 강한지 사실 감이 잘 잡히지 않는군요.>
분명 자신을 부를 때 자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강해야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시안이 궁금한 표정으로 묻자 신관이 갑자기 먼 곳을 쳐다보았다.
<…모르시는군요.>
<사실 어찌 알겠는가. 그들은 우리 영역에서 멀리 있는 데다 그들이 뿜어내는 요상한 연기는 감각을 흐리게 하기 때문에 이 빌어먹을 결계를 확인하고 드라쿤을 잡아 기억을 읽기 전까지는 그런 종족이 있는 줄도 몰랐다. 심지어 우리가 잡은 드라쿤도 그 녀석들을 본 적은 없더군. 땅 속에서 나오질 않는다고 하니. 단지 드라쿤들이 무슨 수작을 부려놨을 수도 있으니 그를 뚫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강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뿐이다.>
<…….>
<잊지 말아라. 이건 할 수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신지의 권능이 어느 정도 약해지면 저들은 서서히 도발을 해올 것이다.>
시안은 골치가 아파 머리를 움켜잡았다.
<그냥 악사라이가 남겨두었다는 그 권능을 부수면 안 됩니까? 결계를 생성한다는… 그럼 싸우지 않아도…….>
그러자 루크라의 신관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 정도로 자신이 있다는 말인가? 그럴 거면 그냥 지금 나가서 드라고나와 크로나, 라이오나를 모두 쳐 죽이고 드라쿤들도 모두 찢어버린 다음에 돌아가면 되지 않는가. 악사라이가 남긴 권능을 부술 수 있다면 그 정도야 식은 죽 먹기일 텐데. 혹시 악사라이가 그 결계를 만들 때 어느 정도의 힘을 쏟아부었는지 보고 싶다면 전해주겠다. 내가 기억을 읽은 드라쿤도 그 광경을 보았더군.>
‘…빌어먹을.’
시안은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안은 곰곰이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위치는 알고 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익숙한 느낌이 들었으니. 아마 로르발 공작과 자신이 치고받았던 그 기묘한 산일 것이다. 자욱한 연기 때문에 감각이 잘 느껴지지 않아 신기했는데 그 연기가 아마 운카라라는 종족들이 뿜어낸 연기인 모양이다.
자신들이 파괴한 범위도 상당했지만 그 거대한 섬, 혹은 산의 크기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후… 그때 모조리 날려버렸으면 이런 일을 안 해도 되었으려나…….’
생각을 하던 시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짓을 하고 있었다면 날아오던 드라쿤 종들의 알파에게 잡혀 이미 죽어있었을 것이다.
고민하고 생각을 정리해보니 당장 중요한 것은 두 가지 정도였다.
첫 번째,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 알아보는 것.
두 번째, 그들을 마무리 짓고 안전하게 도망치는 방도를 마련하는 것.
괜히 결계를 깨트렸다가 분노한 드라쿤들에게 잡히기라도 한다면 그날이 바로 자신의 제삿날이다. 루크라들이 시선을 끌어주겠다고 하지만 도망갈 길은 무조건 확보해두는 것이 좋다.
좀 더 고민해보던 시안은 결론을 내렸다.
<우선 도망갈 길을 근방에 확보해두고 직접 가서 확인한 다음 해 볼 만하면 간 김에 해결하고, 안 될 것 같으면 우선 도망쳐서 다시 수련한다.>
시간이 없다고 하지만 부딪치면 깨질 걸 알고도 달려들 수는 없다.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될 때 달려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상대가 어느 정도 강한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살핀 후 도주할 방법도 정했다. 도주 하면 역시 공간이동이다. 그리고 시안은 그 분야의 전문가를 아주 잘 알고 있다.
‘콘-라드 씨나 라가오페 씨를 찾아야겠군… 그나저나 어디에서 찾나…….’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니 간단하게 결론이 나왔다. 자신을 만나러 사람을 보냈을 정도라면 공간이동으로 건너왔다는 뜻이다. 그때 라가오페 씨가 말하기를, 대륙 간의 공간이동은 코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힘들다고 말하였다.
그러면 우선 키큘러스의 코어가 복구된 곳들을 중심으로 하나하나 돌아보면 될 것이다.
‘수련은… 가면서 계속 해야겠군…….’
강하면 강할수록 좋다. 어설프게 갔다가 맞아죽느니 최대한 준비를 해 간 다음 단번에 끝내는 것이 좋으리라.
시안은 마음을 다잡고 루크라들에게 떠나겠다고 말을 하기 위해 몸을 옮겼다.
☆ ☆ ☆
“에취!”
“…무슨 일이야?”
갑자기 기침을 하는 라가오페를 보며 콘-라드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라가오페가 허약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초인. 감기에 걸릴 턱이 없다.
궁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콘-라드를 보며 라가오페가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별일 아닙니다. 그런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느낌이 굉장히 좋지 않군요.”
“허… 왜 그러지.”
이곳저곳 코어를 보수하던 도중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라가오페를 쳐다본 콘-라드는 다시 코어와 법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갑자기 라가오페의 품에서 무언가가 번쩍이기 시작했다. 라가오페가 가지고 있던 통신용 아티팩트였다.
꺼내어 받아보니 리비아스였다. 저쪽 대륙에서는 통신이 되지 않을 텐데 이렇게 통신 이적을 걸었다는 것은 리비아스가 이쪽 대륙으로 돌아왔다는 뜻이었다.
“리비아스 씨, 돌아왔습니까?”
<엉. 뭐… 아마란이나 이런 곳 쭈욱 돌아보고 왔는데… 별로 쓸 만한 건 없던데. 그냥 네가 말한 거나 몇 가지 들고 왔지.>
그러자 라가오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하다 문득 이상한 점을 찾았다.
“그런데… 혼자 왔습니까? 시안 씨는요?”
그러자 리비아스가 먼 곳을 보며 딴청을 피웠다.
“…….”
<음… 그게… 내가 찾아갔을 때 자리를 비웠더라고. 그래서 스틸에게 부탁하고 왔지.>
“…그런데요?”
어차피 알과 말만 전해주었다면 이곳으로 올 수 있다. 여기까지는 별문제 될 것이 없었기에 라가오페는 계속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 어마어마한 기파가 퍼져 나오더라고. 도저히 인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그러자 라가오페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리비아스는 공작인 콘-라드의 힘을 수차례 견식한 적이 있다. 그가 저 정도로 말할 인물은 하나뿐이다.
“시안 씨군요.”
<그렇지. 그리고 그대로 쭉 북쪽으로 올라가던데.>
“…북쪽으로요?”
<응, 북쪽으로. 대수림 쪽으로.>
“…음…….”
라가오페는 순식간에 추리를 해냈다. 뭐에 또 잘못 얽혀서 도망칠 일이 생긴 모양이다. 그곳에서 시안을 도망치게 할 자는 단 셋이다. 아마 그 셋 중 하나에 얽혀 시안 씨는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한 루크라의 땅으로 도망친 것이리라.
“정말 재수가 없군요. 편한 길을 마련해 드렸는데도……. 그나저나 살아서 갔으려나 모르겠군요. 큰일인데…….”
라가오페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