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대계>
“무슨 일입니까?”
“오, 자네 왔는가?”
키큘러스는 멀뚱히 서 있다가 날아오는 시안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키큘러스뿐만이 아니라 다른 공작들이 모두 나뭇가지 위에 서서 아래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마치 기다렸던 것이 왔다는 듯.
“세상에… 이게 무슨 에너지입니까… 도대체 뭘 하길래.”
시안은 땅 아래서 뿜어져 나오는 어마어마한 에너지에 기가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엄청나지? 이게 키큘러스와 아크라, 스웜의 원래 탄생 목적이라네. 후후.”
온 키큘러스를 감싼 거대한 에너지의 파동은 차츰차츰 어딘가로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키큘러스, 로르발의 코어 부분으로. 안 그래도 어마어마했던 에너지는 어느 한 곳에 모이자 더욱 강렬하게 기감을 자극했다. 이제는 마치 작은 태양과도 같은 느낌을 발하고 있었다.
“원래 탄생 목적이라니… 이거 원래 인간종을 위해 개발되었던 것 아니었습니까?”
라가오페에게 듣기로는 키큘러스와 아크라는 인간종의 보호와 발전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들었는데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스웜이라니. 스웜은 게르나를 몰아내기 위해 만들어졌던 것이 아니었던가?
시안은 키큘러스의 말이 이해가 잘 가지 않았기에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런 시안을 보며 키큘러스는 흥분된 표정을 가라앉히지 못 한 채 대답하였다.
“후후. 인간종을 위한 것이 분명하지. 하지만 겸사겸사란 말도 있지 않은가. 세상에 한 가지 목적만을 가지고 생긴 물질은 없지. 칼도 상대를 벨 때 쓰기도 하지만 두드려 팰 때 쓰기도 하지 않는가?”
“…뭔가 비유가 좀 잘못된 것 같지만 그 부분은 넘어가지요.”
“뭐… 기다리면 알 걸세. 자네가 집 가는 데에는 전혀 지장 없을 것이니 그렇게 불안한 표정으로 지켜보지 않아도 되네.”
“…쩝.”
속내를 들킨 시안이 민망한 듯 고개를 돌렸다. 이런 거대한 에너지가 불러올 변화라면 분명 작은 변화는 아닐 것이기에 혹여라도 자신을 집에 돌아가게 해 줄 법진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까 하여 걱정했는데 키큘러스의 표정을 보니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아래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에너지에 딱히 살의나 파괴적인 기운이 담겨있지도 않았기에 시안은 조용히 기다리기로 했다.
☆ ☆ ☆
로르발을 지탱하는 거대한 코어. 그 안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하지만 코어와 사람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주위에 북적북적한 스웜의 물결에 의해 그 형체가 가려지고 있었으니까. 코어가 위치한 공간은 거대하기 그지없는 공간이었는데 그곳은 모조리 스웜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점차 공간은 여유 있어지고 있었다. 스웜들이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갔으니까.
코어와 사람이 있는 위치로는 어마어마한 수의 은빛 물결이 달려들어 하나로 합쳐지고 있었다. 코어에 닿은 은빛 물결, 스웜은 자신들이 조달해 온 아크라의 에너지를 모조리 넘기고 가루가 되어 스러지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뿌리 아래를 가득 메우고 있던 스웜들은 빠른 속도로 흩날려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고, 그 자리를 계속해서 새로운 스웜이 밀려들어 메웠지만 속도를 보아하니 조만간 스웜들은 모조리 사라지게 될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과정이 진행될수록 둥근 코어는 점점 은빛으로 차오르고 있었고, 그 안에 서 있던 사람은 그 은빛 액체에 서서히 잠겨가고 있었다. 마치 투명한 구 안을 은빛 액체로 채워가고 있는 듯한 모양새.
그 광경을 두 명이 지켜보고 있었다. 하나는 콘-라드, 그리고 하나는 라가오페.
그들은 거대한 법진의 에너지를 보며 혹시 모를 비상사태에 대비하고 있었지만 그 거대한 에너지에 비해 프로젝트는 전혀 무리 없이 부드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허… 진짜 되네… 라가오페, 너 정말 대단하구나.”
“뭐… 오랫동안 연구했으니까요.”
“그나저나… 네가 되고 싶은 욕심은 없는 거야? 신이 되는 계획이라며?”
그러자 라가오페가 웃으며 대답했다.
“저건 신혈을 가진 사람에게밖에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애초에 인간의 피가 섞여 고작 베타1에 머물러야 하는 신혈의 모든 가능성을 끌어올리기 위해 만들어진 계획이니까요. 전쟁신 브록시안의 직계 자손이 아니면 사용조차 불가능하지요. 제가 진짜 연구소에서 프로젝트 만들어서 들고 나온 이후로 로르발 님을 보고 얼마나 안심했는지 모릅니다. 아? 우리 콘-라드 씨는 전쟁신의 아. 들. 이니까 대신 집어넣어도 되었으려나요? 후하하하!”
라가오페는 웃겨 죽겠다는 듯 배를 잡으며 웃었고 콘-라드는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는 내가 진짜 신의 아들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니까. 완전 잘났고 재능도 넘치고 환생까지 했잖아.”
“흐후… 세상이 참 넓지요?”
“…그렇더라고.”
콘-라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 나무 안에 자신보다 약한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아니, 둘 있기는 했다. 스틸과 라가오페.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민망한 건 마찬가지였다.
“뭐… 너무 자책하지 마시지요. 어떻게 보면 인간종에서는 50등 안에 드는 것 아닙니까.”
“그거 참 자존심 상하는데.”
한때 제국의 황제이자 최강자였던 콘-라드는 투덜거렸다.
“뭐… 괴물 같은 사람들은 참 많으니까요. 저기에서 나오면… 로르발 님은 신으로 가는 계단을 우선 한 계단 오르게 됩니다.”
“음? 저기서 나오자마자 바로 알파가 되는 것 아니었어?”
콘-라드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라가오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게 쉬울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진작에 만들었지요. 신혈에 담긴 알파, 브록시안의 가능성을 모조리 끌어올리려면 이것 가지고는 모자랍니다.”
“허… 그다음은 나에게 말 안 해 주었잖아?”
콘-라드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라가오페가 웃으며 말했다.
“로르발 님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다음 단계는 알아서 밟아가겠지요. 뭐… 거의 다 끝나가는군요.”
대화를 나누고 있던 사이 어마어마한 숫자를 자랑하던 스웜들은 모조리 가루가 되어 사라졌고 로르발이 들어있는 코어는 스웜이 넘겨준 아크라와 기묘한 액체에 가득 차 은빛으로 찬연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은빛의 액체는 코어의 안에서 찰랑거리고 있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코어의 안을 어마어마한 속도로 회전하며 안쪽의 어딘가로 흡수되고 있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 액체가 코어 안의 로르발의 칠공을 통해 흡수되는 것을 살필 수 있었다.
직경이 몇 미터는 되는 코어였기에 그 안에 가득 차 있는 액체의 양이 적은 양이 아니었는데, 액체들은 빠른 속도로 로르발의 몸 안으로 흡수되는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로르발은 거대한 에너지의 격류 속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뀌어가고 있었다.
뚜두두둑, 우드득.
듣기만 해도 섬찟한 소리가 났지만 라가오페는 그 모습을 보며 다음 단계를 밟기 위해 다가갔다.
“좋습니다. 잘 되어가고 있군요. 보자… 아크라에 들어있던 에너지를 넣었으니… 다음 단계를 진행할 수 있겠군요. 그거 좀 건네주십시오.”
콘-라드는 그 말에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구슬을 건네주었다. 엄지손톱만 한 구슬과는 다르게 콘-라드가 건네준 구슬은 어른 주먹 두 개를 합친 것 같은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콘-라드는 구슬을 건네주면서도 입맛을 다셨다.
“후… 그나저나 엄청 아깝네. 이거 먹으면 나도 막 강해지고… 그럴 수 있는 거 아닌가? 베타3의 정수인데…….”
“무라칸의 정수를 먹는다고 강해지거나 그러진 않습니다. 애초에 무라칸들이 신혈을 위해 만들어진 녀석들이니까요. 그리고 그거 진짜 힘들게 만든 거니까 어서 주십시오.”
“에잉…….”
콘-라드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구슬을 던져 건네주었고 라가오페는 이를 받아 커다란 구체 안에 다시 집어넣었다.
구슬을 넣는 순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안에 있던 은빛 액체들이 격렬하게 반응하더니 로르발을 잡아먹을 듯 달려들기 시작한 것. 액체가 달려든다는 표현은 이상하지만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누구나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압축되고 압축되기 시작한 액체는 마치 의지를 가진 슬라임처럼 변하더니 휘쭉 하고 로르발의 몸을 감싸 먹어치웠다. 그리고 우드득거리는 소리는 더욱 커졌다. 변화는 계속되었다. 우드득거리는 소리가 지하에 끊임없이 울려 퍼졌고, 그에 따라 로르발의 몸은 차츰차츰 다른 존재로의 변화를 계속해 나갔다.
그 모습을 보던 콘-라드가 살짝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무라칸이 되살아나거나… 그런 건 아니지?”
라가오페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단지 마지막 단계이니 저런 과정이 있는 것이지요. 저건 모두 신혈의 가능성을 깨우기 위한 절차에 불과합니다. 인간의 잡스러운 피를 걷어내는 과정이지요.”
“뭐… 그러면 다행이고.
“후… 드디어 완성이 되어가는군요…….”
라가오페는 우드득거리는 은빛의 덩어리가 차츰 인간의 모습을 띄어 가는 것을 보고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 ☆ ☆
거대한 에너지의 파동이 차츰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스틸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토록 거대한 에너지가 박동하였는데도 별로 변한 건 없었다.
하지만 옆에 서 있던 시안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시안은 저 아래서 방금 탄생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강대한 기도. 그러면서 동시에 익숙한 기도.
“동생, 무슨 일 있어?”
스틸 양은 아직 그 기파를 느끼지 못 하였는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시안의 표정을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느꼈는지 시안을 보며 물었다.
그런 스틸을 보며 시안이 대답하였다.
“방금… 무언가가 새로 태어났습니다.”
“허? 어느 정도길래 그렇게 놀라?”
스틸은 동생이 이렇게 당황하는 걸 오랜만에 보았기 때문에 궁금하여 물었다.
“저랑 비슷합니다.”
“엉?”
“…허…….”
“동생, 이번에 벽 한 번 더 넘은 거 아니었어?”
“맞습니다.”
“그러면… 그 베타 4단계일 거 아냐?”
“…아래 태어난 자도… 그 정도 수준입니다.”
모여 있던 강대한 에너지를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가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거 하나 가지고는 자신 정도 되는 강자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경지의 강함은 에너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시안에게로 아래서 새로 태어난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온몸에서 풀풀 흘리고 있는 강대함. 예전과는 천양지차인 기도였지만 상대의 얼굴만은 익숙했다.
“하하! 자네는 이런 세상을 보고 있었나? 정말 어마어마하구먼.”
자신의 강함에 자신도 적응이 안 되는지 로르발은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살피며 신기하단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마 신세계일 것이다. 시안 자신도 침상에서 일어서서 놀랐으니까. 몇 개의 벽을 동시에 뛰어넘은 로르발 공작의 놀람은 더 크리라.
“로르발 씨군요… 세상에,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음… 맞아. 자네라면 알 자격이 있지. 내가 다 설명해 주겠네. 스틸 자네는… 거기서 잠시 기다려 주겠나? 둘이서만 좀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야.”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시안을 향해 친절하게 웃은 로르발은 시안을 불렀고 시안은 스틸 보고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로르발의 뒤를 따라 나무 아래로 몸을 날렸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뭐… 보답으로 주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러네.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자네의 공이 컸으니 말일세.”
“흠… 제가 말입니까? 뭘 했다고…….”
“가서 다 말해주겠네. 후후. 와보면 안다네.”
그러고는 로르발은 빠르게 키큘러스의 아래로 몸을 날렸고 시안은 그 뒤를 따라 날아갔다.
애초에 스웜들이 머무른 공간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그곳에 도착하고 나서도 로르발 공작은 계속해서 어딘가로 이동했다. 밑에 더 깊은 지하가 있는 것을 본 시안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선물이 이 아래에 있습니까?”
“그렇다네.”
온몸에서 넘치는 힘이 기꺼운지 아까부터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는 로르발 공작은 빠른 속도로 아래로 내려갔다. 한참을 더 구덩이 아래로 내려가자 시안은 깊은 곳에 무언가가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흠… 저건……?”
“저게 선물이라네. 내려가지.”
깊은 구덩이에 가볍게 안착한 시안은 바닥에 꽂혀 있는 두 개의 무기를 보고 침음을 흘렸다.
무기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무기들이 볼품없다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저 무기들은 기운을 가지지 못한 것이 아니라 기운을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에 저렇게 얌전하게 생긴 것뿐이었다.
하나의 은빛 창과 하나의 금빛 칼.
명장이 수백 년에 걸쳐 빚어낸 것처럼 매끈하게 뻗어있는 두 개의 무기.
무슨 재질인지 모를 두 개의 무기를 보는 순간 시안은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수로 저따위 걸 만들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무기에 베여나간다면 크로나나 드라고나라고 해도 뼈와 살이 박살이 날 것이다. 물론 결국엔 크로나 손에 박살이 나겠지만… 그 정도로 대단하다는 뜻이었다. 고작 무기 주제에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응축하고 있는 창과 칼을 보며 시안이 궁금하여 물었다.
“저게 무엇입니까? 설마 저것도 신국 시절에 만든 것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정말 어마어마한 기술력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 질문에 로르발은 고개를 저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네. 신국 시절에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신국이 만든 건 아닐세.”
“…그렇다면?”
그제야 시안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래. 라가오페가 설명해 주었겠지만… 저건 예전에 태양신과 전쟁신이 쓰던 무기라네.”
“허…….”
무기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대충 짐작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그런 무기일 줄 몰랐기에 시안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 광경을 보며 기분 좋게 웃은 로르발은 추가적으로 설명을 덧붙였다.
“창의 경우에는 전쟁신께서 자신이 죽인 알파들을 으깨어 압축시키고 필요한 것을 몸에서 뽑아내어 직접 손으로 빚어내 만든 무기들이지. 뭐… 고작 칼 한 자루, 창 한 자루지만 저기에 갈려 들어간 알파 숫자만 해도 어마어마할 걸세. 가히 종족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지. 태양신의 무기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비슷하겠지.”
그 말을 들으니 은빛으로 빛나고 있던 창이 달라보였다. 단순한 무기인 줄 알았는데 그런 흉험한 역사가 있다니.
“저건 어디서 찾으신 겁니까? 라가오페 씨는 저런 게 있는 줄은 모르고 있는 모양이던데요.”
“흠… 내가 라가오페를 만난 건 전쟁이 끝나고 1000년이 흐른 후였다네. 그사이에 꽤나 많은 일이 있었지. 모든 걸 다 말해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나?”
“허…….”
“나에겐 악사라이의 접속자라는 조금 특별한 능력이 있는데… 이걸 이용하면 남들이 모르는 비밀을 쉽게 알 수가 있다네. 그걸로 대륙을 헤집고 다녔다네. 그래… 신세 한탄이나 조금 해 볼까.”
그리고 로르발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동쪽 대륙에 호기심이 생긴 로르발은 신혈의 지배를 받는 가신들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 가볍게 떠난 여행이었기에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고 가신들도 조촐하게 몇 명들만 데리고 떠나왔다. 대륙은 위험하기 그지없었지만 로르발은 모험을 즐기는 성격이었기에 더 즐거웠다. 신혈이란 피에 묶인 채 따분한 삶을 살던 그에게 대륙을 떠돌며 그 신비를 파헤치는 자극적인 삶은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그 와중에 동북쪽 끝의 반도에 도달한 그는 그 너머의 대륙에도 생명이 산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자신의 능력으로는 그쪽까지 여행하는 것은 무리임을 알고 깔끔하게 포기하고 신국 쪽으로 귀환하고 있었다. 그렇게 돌아오던 도중 자신들이 살고 있던 서쪽 대륙에서 거대한 빛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했다.
<미친… 대체 무슨 일이……!>
쌍욕을 하며 속도를 높여 신국 쪽에 도달했지만 보이는 것은 거대한 바다뿐. 어떤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대륙의 반을 먹고 있던 거대한 신국, 브로샨이 단 한 시간도 안 되어 통째로 날아간 것에 경악한 로르발은 이럴 때가 아님을 깨닫고 살아남은 이들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불행인 점 하나와 다행인 점 하나가 있었다.
다행인 점 하나는 살아남은 인류들이 꽤 많은 숫자가 있었다는 것.
불행인 점 하나는 그렇게 살아남은 녀석들이 신국의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여 쫓겨난, 무도한 인간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것. 신국의 시민권을 인정받고 그 안에서 보호를 받고 책임과 권리를 다 하던 성실한 인간종들은 대피할 새도 없이 모조리 날아갔다.
살아남은 연구소, 악사룸에 가보았지만 그곳에 있던 인원들은 이미 숨었는지 도망쳤는지 어딘가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연구소 한가운데 있는 포탈을 지나면 비밀 연구소가 있는 것을 알았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살고 있는 베타 녀석들을 본 로르발은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깔끔하게 포기했다.
아, 불행인 점이 하나 더 있었다. 혹시나 살아남은 신혈이 없을까 하여 끝없이 대륙을 찾아 헤매었지만 살아남은 신혈은 자신 혼자였다는 것.
그렇기에 살아남은 인간종을 그러모아 어떻게든 세력을 확장하려고 한 로르발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멀쩡한 녀석들을 모아서 키워내도 모자랄 판에 대륙에 살아남은 녀석들은 보통 힘을 숭배하던 양아치나 도적놈 같은 범법자 녀석들밖에 없었다. 그들의 융성했던 문화와 이적을 살려낼, 고도의 인력은 정말 거짓말처럼 단 하나도 살아남지 못 하였다. 애초에 동쪽 대륙은 그들 입장에서는 사람이 살기 위해 개발된 곳이 아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더 큰 문제는 게르나 녀석들이 보호를 잃은 인간종 녀석들을 미친 듯이 지배하기 시작했다는 것. 신혈이 공급할 수 있는 <인장>의 숫자는 한계가 있었다. 모든 인간종들을 게르나로부터 보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대로 절망할 수는 없었기에 로르발은 자신의 종속들을 기반으로 강해보이는 녀석들을 키워내며 인장을 박고 게르나로부터 자신들의 몸을 지키며 세력을 불리는 데에 주력했다. 로르발 자신도 베타의 경지에 오른 강자였고 인간종 중 강대한 녀석들을 인장으로 먹어치우며 세력을 키우니 적어도 인간 가운데서는 최고의 세력을 가질 수 있었다. 인간들은 그들을 <로르발 공작가>라고 부르며 추켜세웠지만 로르발은 이 상황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종을 예전처럼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신혈과 신민들이 있으면 무엇하는가. 자신들을 지켜줄 신이 없는 인간들은 너무나 나약하고 무력했다. 게다가 나라도 없고 태생이 범죄자라 그런지 무식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100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악사라이의 접속자라는 신비한 이능도 그사이에 얻었다. 처음에는 흥분하여 이 능력으로 인간종을 강하게 하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끊임없이 인간종을 강하게 할 생각을 하던 로르발은 계속해서 인간을 도우며 그들의 숫자를 늘려나갔지만 결국엔 게르나에게만 이득이 되는 일이었다. 힘이 부족하여 눈 뜨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찾은 것이 있기는 했다.
<전쟁신의 창>
<태양신의 칼>
새로 얻은 이능, 악사라이에 선명히 뜨는 그들의 흔적. 퀘스트를 따라가다 보니 나온 두 개의 무기를 본 로르발은 애증의 대상인 전쟁신의 흔적을 찾아 극도로 흥분했다. 그가 살아있기만 하다면 인간종의 세력이 아무리 미약해도, 신혈이 자신 하나뿐일지라도 순식간에 나라를 일으켜 세울 수 있으니까. 신국에서 신을 탄생시킨 것이 아니다. 신이 신국을 탄생시킨 것이지.
하지만 악사라이에 뜬 무기에 대한 정보를 본 로르발은 극도의 실망감에 빠졌다.
<전쟁신의 창>
-전쟁신이 쓰던 유품.
-능력치: ??
<태양신의 칼>
-태양신이 쓰던 유품.
-능력치: ??
유품.
이 한단어가 그 둘이 죽었다는 것을 명확히 알려주고 있었다. 게다가 이 무기는 자신에게는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였다. 간신히 들 수만 있을 뿐 감히 휘두를 수는 없었다. 이걸 휘두르면 자신은 반동으로 몸이 박살 날 것이다. 너무나 실망한 로르발은 이 두 무기를 어디에 쓸까 하다가 우선 챙겨두었다. 어딘가에 쓸 데는 있을 테니까.
그리고 신이 죽었다는 소식은 감추었다. 그나마 인간족의 사이에는 신이 다시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희망이 퍼져 있었으니까. 물론 수천 년이 지나면서 감출 필요도 없어졌지만. 녀석들은 신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렸다.
쓸 수 없는 무기 두 개만 찾았을 뿐, 전 대륙을 헤집어도 방법을 발견할 수 없어 절망하던 로르발의 앞에, 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고 라가오페가 나타났다. 물어보니 그 연구소 안에 숨어있었다고 한다. 이는 로르발에게는 천운이었다.
라가오페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신혈인 로르발이 필요했고, 놀랍게도 로르발의 꿈과 라가오페의 꿈은 일치했다.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새로운 신을 탄생시키기 위한, 알파를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를.
<우선 게르나부터 몰아내야 합니다. 녀석들이 있으면 죽도 밥도 안 되니>
<그것참 좋은 생각이군!>
로르발은 인간종을 지배하던 게르나가 안 그래도 눈엣가시 그 자체였다. 방법이 없을 때야 무리였지만 방법이 생겼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이는 스웜과 무라칸이 도맡았다. 그러고는 게르나의 침입을 막을 거대한 결계, 키큘러스를 세우고 인간종을 강하게 할 아크라를 뿌렸다.
하지만 원래 아크라와 키큘러스, 스웜, 무라칸은 이런 목적으로 쓰일 용도가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인간종 전체를 강하게 만들었을 뿐, 원래 다른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알파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라가오페가 세운 계획은 간단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브록시안의 피를 타고난 신혈들은 베타1의 벽에 막혀 있다. 라가오페는 아마 이것이 평범한 인간의 피가 섞여서 그런 것이 아닌가라고 추측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간단했다. 인간의 피를 조금씩 씻어내고 브록시안의 흔적만을 남기고 일깨워 강제로 다음 단계로의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것. 라가오페는 실험실, 악사룸에서 홀로 남아 연구를 거듭했고 마침내 이 계획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라가오페의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했다.
기본적으로 신혈을 타고난 자, 알파인 브록시안의 피의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것이니 그 직계 자손이 필요했다.
다른 하나는 인간의 피를 씻어내 줄 만한 강대한 종족의 근원, 혹은 정수. 베타1의 피를 씻어내려면 최소 베타1에 해당하는 정수가 필요했다.
마지막으로 정말 막대한, 신국 시절에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어마어마한 에너지.
첫 번째는 신혈이 있으면 해결되는 문제이지만 나머지는 개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신혈인 베타1을 알파로 만들려면 최소 네 번은 강제로 그 경지를 끌어올려야 한다. 그렇기에 라가오페는 실험실 안에서 연구를 거듭하여 장애물을 치우기 위한 수단으로 키큘러스와 아크라, 스웜을 만들어냈다.
아크라와 키큘러스는 막대한 에너지를 끊임없이 끌어모으고 코어에 모인 에너지는 스웜으로 운반한다.
각종 종족의 정수는 무라칸으로 해결했다. 진화한 무라칸의 정수를 대상자가 될 로르발이 먹어치워야 그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하려면 기본적으로 무라칸을 진화시키고 에너지를 공급할 인간종을 번성시켜야 했기에 라가오페와 로르발은 일단 게르나를 몰아내야만 했다. 게르나를 몰아내는 것까지는 정말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지만 프로젝트를 진행해 나가던 라가오페와 로르발 앞에 두 가지의 변수가 나타났다.
첫 번째, 게르나가 사라지자마자 반도 너머 있던 녀석들이 미친 듯이 넘어오기 시작했다는 것. 그래서 게르나를 모조리 소탕하지 못 하고 미친 듯이 방어를 해야 했다는 것.
두 번째, 끊임없이 진화해야 하는 무라칸들이 이상하게 벽에 막혀 진화를 하지 못 하였다는 것.
예정대로라면 키큘러스를 통해 막대한 에너지를 모아야 했다. 하지만 갑작스레 반도를 넘어 침입해오기 시작한 괴물 녀석들 때문에 게르나를 마무리하지 못하여 하는 수 없이 남는 에너지를 이용하여 결계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쉴 새 없이 귀족들을 키우고 평민들의 숫자를 늘렸지만 결계에 사용되는 에너지가 워낙 막대하여 그 정도로는 자신들이 목표로 한 에너지를 모을 수가 없었다.
더 큰 문제는 정체된 무라칸. 애초에 로르발과 라가오페의 계획은 베타1로 진화한 무라칸을 먹어치워 자신은 베타2로 진화하고… 무라칸들을 지배하며 또 베타2로 만든 후 그들을 이용하여 진화하고… 이런 계획이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무라칸은 그대로 진화가 멈추어버렸다, 로탄 급에서. 베타1은 단 한 마리도 태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반도를 넘어 쳐들어오는 괴물 녀석들 때문에 그 숫자를 불릴 수도 없었다.
그렇게 전전긍긍하던 상태로 3000년이 지났다. 사실 말이 전전긍긍이지 로르발은 포기한 상태였다. 현상유지도 급급했기에.
“그런데… 그것들이 최근에 모두 해결되었다네. 그것도 모두 자네 덕분에. 어찌 프로젝트의 성공을 자네 덕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시안의 피를 통해 강화된 무라칸은 그간 무슨 문제가 있었냐는 양 순식간에 베타1으로 진화했다. 처음에 로르발 공작은 성공적으로 진화한 베타1과 결계를 해제하고 남는 에너지를 흡수해 우선 스스로 베타2로 진화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아차 하는 사이 서로를 잡아먹으며 동족 포식을 통해 베타2로 진화했다. 베타2로 진화한 것도 모자라 시안과 싸우며 베타3으로 진화했다.
로르발은 처음에 무라칸들이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난 것을 보고 엄청나게 당황했지만 동시에 깨달았다. 시안이란 자가 이기기만 한다면, 그리고 남아있는 무라칸의 정수를 자신들이 먹어치울 수만 있다면 자신이 그동안 멈추어 두었던 진화 계획을 다시 시행할 수 있음을. 자신의 눈앞에 뜬 퀘스트창이 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기에 때를 기다렸다. 무라칸이 베타3으로 진화한 후 빈사 상태에 이를 때까지. 자신들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약해지고 그 정수를 채취할 수 있을 때까지. 다행히 시안은 기대 이상으로 잘 해주어 무라칸들을 모조리 쓸어버린 것도 모자라 녀석을 자신들이 제압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었다.
게르나들도 모조리 쓸어버렸으니 결계도 필요 없다. 결계를 유지하는 데 사용할 에너지를 아크라와 키큘러스로 모아 스웜을 통해 가져오면 된다.
에너지와 정수가 동시에 해결되었으니 로르발 입장에서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고 라가오페의 도움을 받아 그대로 프로젝트를 실행하였다.
“…무라칸은 다 처리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다 처리했지. 후후. 정수로 만들어서. 지금은 이 안에 있다네.”
그러면서 로르발은 자신의 가슴을 통통 튀겨 보였다. 어찌나 얄미운지 시안은 턱을 돌려버리고 싶었지만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그런 식으로 여기서 치고받으면 이 나무가 뿌리째 뽑혀나갈 것이다.
“노리고 하신 겁니까?”
“뭐… 그렇다고 보기에는 너무 운이 좋았지. 이것저것 굉장히 잘 맞았어.”
“그냥 제 피 가지고 진화하면 되는 일 아닙니까?”
그러자 로르발이 웃으며 말했다.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네. 그런 건 무라칸들이나 가능한 거지. 인간인 나는 불가능하네. 그렇게 하면 자네에게 이미 부탁했겠지 뭐 이리 복잡하게 가겠나.”
“허… 그러면 찍어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누구는 죽을 고생을 하며 강해졌는데 이렇게 단번에 경지를 올리는 방법이 있다니 시안은 약간 허탈해졌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로르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 되지. 쉽게 한 게 아닐세. 삼천 년의 준비를 한 번에 모두 투자한 거지. 코어와 아크라야 남아있지만… 이번 한 번으로 스웜에 무라칸을 몽땅 갈아 넣었거든. 게다가 이건 브록시안의 직계가 필요해. 이제는 나밖에 없다네.”
로르발은 한숨을 쉬며 말했지만 표정은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다. 하긴 시안이 생각해도 그런 걸 바쳐서 로르발 공작과 같은 강자를 만들어냈다면 남아도 한참 남는 장사였다.
“그래도 너무 급하게 진행한 것 아닙니까?”
얼핏 보기에는 척척 맞아떨어진 것 같았지만 군데군데 도박에 가까운 요소가 많았다. 애초에 무라칸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날 가능성도 많았고 이번에도 무라칸들이 조금만 더 강했어도 모조리 쓸려나갔을 것이다.
그러자 로르발이 웃으며 대답했다.
“뭐… 나에게는 아주 특이하고 좋은 능력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후후. 그리고 이제 시간이 얼마 없다네. 신혈이라고 영생불사는 아니거든… 종속된 자들은 죽지 않지만 신혈은 늙어 죽는다네. 그리고 나는 너무 오랜 시간을 살았고. 주변에는 적들이 너무 많아. 버티기도 힘들다네.”
“뭐… 어찌 되었건 축하드립니다. 성공하셨군요.”
그러자 로르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야기했다.
“뭐… 엄청 잘난 척하며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계획은 결과적으로 보면 실패라네.”
“흠… 왜 그렇습니까?”
“아까 말해주지 않았나. 나는 새로운 신이 되어야 한다네.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 알파는 되어야지. 알파와 그 아래 베타는 정말 천지차이라네.”
단순한 강함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선 알파에만 오른다면 그 뒤로는 수련을 통해 강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대로 벽에 막혀있다면 평생 강해지지 못 한다. 스스로 올린 경지가 아닌, 강제로 올린 경지이기에 그럴 가능성은 더욱 컸다. 게다가 자신의 피로는 새로운 신혈을 만들어낼 수 도 없었다. 종을 이끄는 권리는 베타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권리였다.
“흠… 그렇군요.”
시안이 듣고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베타 3레벨에 이른 무라칸의 정수밖에 없었으니까. 지금 이 정도에 오른 것이 한계였지. 알파가 되어도 갈 길이 먼데 겨우 베타4라니. 이 정도로는 어림없지. 그렇기에 이 프로젝트는 실패라네, 아직까지는.”
말을 끄는 로르발의 말에 불안해진 시안이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흠? 아직까지요? 성공할 방법이 있습니까?”
“그럼, 있고말고. 이번에 무라칸의 정수를 흡수하면서… 아주 놀라운 특성도 흡수했다네. 애초에 이렇게 될지 알고 있었지만.”
“…어… 음… 안 들으면 안 될까요?”
시안은 점점 더 불길해지는 느낌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로르발은 고개를 저었다.
“뭐… 그래도 결과는 바뀌지 않겠지만 싫다면 듣지 마시게나.”
“…계속하시지요.”
“그래. 이번에 흡수한 특성이 있는데… 이게 놀랍게도 죽을 위기를 겪으면 강해지는 특성이라고 하지 뭔가? 정말 놀라운 특성이지. 수련이 아닌, 이런 방법으로 벽을 넘을 수 있다니. 거참.”
“…후… 라가오페 씨… 끝나고 진짜 좀 맞읍시다.”
시안은 큰 숨을 내쉬었다. 사실 무라칸들을 보며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다. 싸우고 먹어치우는 것만으로 그 정도로 강해지기는 부족하다. 아마 자신의 피가 어느 정도 작용을 했으리라고는 예측을 하고 있었다. 안타까운 것은 그 특성이 무라칸의 정수를 흡수한 눈앞의 공작에게 그대로 옮겨갔다는 것이지만.
“뭐… 이 정도 이야기하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는 알겠지? 맘에 드는 걸로 하나 뽑게나. 그래도 저런 걸 들고 싸워야 진짜 위기가 느껴지지 않겠나.”
그러면서 공작은 눈앞의 창과 칼을 가리켰다. 시안은 상황이 점점 악화되는 것을 느끼고 땀을 흘렸다. 저런 걸 들고 로르발과 싸우면 진짜 위험하다. 살아남아도 어디 한 군데는 날아가거나 반병신이 될 확률이 높다. 자신들의 힘이 강대하다지만 저기 있는 무기는 너무 위험했으니까. 알파도 되지 못 한, 베타가 다룰 만한 무기가 아니었다.
“이런 것까지 계산하셨습니까?”
그러자 로르발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정말 운이 좋았다고. 베타4가 된 것도 모자라 눈앞에 알파가 될 기회가 떡하니 나타났는데 어찌 운이 좋지 않은가. 이제 나는 시간이 별로 없는데 전쟁신께서 나를 돕는 게지. 뭐, 어차피 싸울 거니 말해주는 건데… 자네를 보내줄 생각도 별로 없었다네.”
“…그냥 평화적으로 해결하면 안 됩니까? 아니면 제가 정말 죽을 만한 곳 하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남쪽으로 쭉 내려가면…….”
“아, 거기 알고 있네. 금지? 그런데 안타깝게도 내 실력이 크로나나 드라고나랑 싸울 수 있을 정도는 아니라네. 가면 알파가 되기 전에도 죽겠지. 내가 알파가 되면 그쪽으로 가서 수련할 생각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길은 나도 잘 알고 있네.”
“…다른 베타4는 없습니까?”
“내가 없으니까 눈앞의 자네를 보며 이러고 있지 않겠나? 그리고 말했지 않은가. 나에게는 좀 특이한 능력이 있다고. 뭘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지.”
로르발은 자신의 눈앞에 떠 있는 퀘스트창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퀘스트: 최종 진화]
-죽음의 위기를 뛰어넘고 몸속에 남겨진 신혈의 흔적을 쫓아 재탄생하라.
-성공 시: 알파로의 진화.
-실패 시: 사망
“…진짜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정말 싸우기 싫어 당장 턱주가리를 돌려버리고 싶은 걸 참으며 존대까지 쓰고 있었지만 상대는 전혀 피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당장 창과 칼을 뽑아 기습할까 생각해봤지만 로르발 공작은 그 정도는 예측했다는 듯 두 무기 옆에 바짝 붙어있었다. 여유 있는 듯 말하지만 언제든지 날아들 기습에 대비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칼.”
“그거 반갑구먼. 그래도 선조의 유물을 내가 들고 싸우는 것이 더 의미가 깊을 것 같아서 말일세.”
로르발은 전쟁신이 썼다는 창을 뽑아들더니 옆에 있는 그랑-라의 칼을 시안에게 던져주었다.
시안은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어차피 싸울 거니까 이제 막나가기로 했다.
“나와 싸운다는 건 너도 죽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도 괜찮으냐?”
그러자 로르발이 웃으며 말했다.
“알파가 되지 못하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네.”
“뭐?”
“이번 기회가 없어지면 내가 언제 비슷한 상대를 만날지를 모르는데… 내가 어찌 이 기회를 놓치겠는가? 이 기회를 놓치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나는 어정쩡한 베타 따위에 머무르는 걸 원하지 않는다네.”
“빌어먹을…….”
그제야 시안은 로르발의 태도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알파라는 거대한 벽에 막힌 둘. 둘 모두에게 죽음을 이겨내면 벽을 뚫을 수 있는 특성이 있다. 서로를 죽음으로 몰아갈 만한 강대한 무기도 있다.
서로가 미친 듯이 싸우면 적어도 둘 중 하나는 무조건 알파가 된다. 무조건 알파가 되어 새로운 신이 되어야 하는 로르발 입장에서는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뭐… 자리를 좀 옮길까?”
“여기서 싸우지 않고?”
“후후. 뭐하러 여기서 싸우겠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자네한테 악감정이 전혀 없다네. 오히려 엄청나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지. 그렇기에 자네가 아끼는 여자가 이 싸움에 휘말려 죽는 건 별로 내키지 않는군.”
“…눈물 나게 고맙네.”
로르발은 빙긋 웃으며 전쟁신의 창을 들고 몸을 날렸고 시안은 그 뒤를 따라 지상으로 날아올랐다.
‘뒤에서 찔러버릴까?’
시안은 기습을 고려했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상대는 여유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같은 경지에 잔뜩 긴장하고 있는 상대였다. 그딴 것이 먹힐 리가 없었기에 시안은 고개를 흔들며 로르발을 따라 하늘로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