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타샤-다곤>
“흐흐…….”
숙소에 돌아온 스틸은 돌아오자마자 침대에서 기분 좋아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는 시안을 발견했다.
“동생, 무슨 일 있었어? 기분이 좋아 보이네?”
“흐흐. 좋은 걸 찾았거든요.”
그러면서 시안은 못 보던 목걸이와 반지를 보여주었다.
“어? 어제 그거 아냐, 그 악사라이에서 본 거? 그거 어디서 났어?”
스틸이 신기하다는 듯 되물었다.
“길 가다 찾았어요. 후흐흐흐.”
“흐음… 동생 생각보다 물건 운이 엄청 좋구나?”
“후후. 적극적인 자에게 운이 따라오는 법이죠.”
“그렇지. 강탈도 서슴지 않으니까. 동생이 빼앗겠다면 빼앗겨야지, 뭐.”
“…그나저나 스틸 양도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무슨 일 있었습니까?”
“음… 별건 아니고 근처에서 재미있는 걸 만들고 있는 것 같아서… 구경이나 하고 왔지.”
“…뭘 박살 내고 오신 건 아니지요?”
스틸 양의 구경거리가 보통 사람과는 조금 달랐기에 시안은 걱정부터 앞섰다.
“후후. 동생, 나를 뭐로 보고. 바깥에 짓고 있다는 법진을 보고 왔지. 흥미가 생겨서 말이야. 살펴보니… 지금 부수기에는 조금 아깝더라고.”
스틸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시안은 엄청나게 불안해졌다.
스틸이 저렇게 좋아할 때는… 반드시 귀찮은 일이 생긴다.
☆ ☆ ☆
“리비아스 님, 오셨습니까.”
데카두인은 리비아스를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리비아스는 데카두인을 시큰둥하게 쳐다보다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가 뭘 어떻게 해주면 되지?”
리비아스는 데카두인을 시큰둥하게 쳐다보았다.
“간단합니다. 법진의 중심에서 ‘길’로 에너지를 공급해 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그 뒤는 저희가 알아서 조종하겠습니다.”
“좋아, 간단해서 좋구나. 그나저나 대단하구나. 그걸 진짜 발동시킬 수 있다니. 그거 안전한 거 확실하지?”
리비아스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실험이라고 하여 원래 용도보다 작은 크기로 설치하기는 하지만 안 닫히고 계속 열려있으면 큰일이 난다.
“후후. 타키온 님이 설계하시고 이계의 지식으로 완성시켰으니 완벽합니다.”
“하긴… 타키온 그 양반이 똑똑하긴 하지. 라가오페 그 녀석은 어디쯤이야?”
“흠… 그게, 신입을 데리고 가서 좀 고생하셨다고는 하는데… 성공하셨다고 합니다.”
“햐… 그 신입 대단하네. 바라쿠나를 끌고 온다고?”
리비아스는 의외라는 눈으로 데카두인을 바라보았다.
자신도 바라쿠나를 안다. 예전 혈기왕성하던 시절에 썰어버리겠다고 배 타고 나갔던 적이 있으니까.
농담 아니라 그때는 정말 죽을 뻔했다.
상성이 안 맞는 것도 있고 환경도 안 좋았지만 무엇보다 정말 강했다.
아마 육지에서 싸웠어도 밀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녀석을 조련한다니.
“싹수가 있는 녀석이군. 마음에 들어.”
뭐, 듣기로는 아직 초인은 아니라고 하는데 어떤가.
그 정도 능력 있으면 동료로 인정할 수 있다.
“그럼… 여기 언제쯤 도착하지?”
“내일입니다. 내일 두 시쯤…….”
“좋아, 좋아! 바로 가자고.”
리비아스는 좋은 구경을 하게 될 것 같아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 ☆ ☆
“스틸 양, 기분이 어제보다 더 좋아 보이십니다.”
“후후. 그래 보여?”
‘네. 그래서 지금 매우 불안합니다.’
시안은 이 말은 안으로 삼켰다.
어제 심심해서 악사라이를 읽던 도중 스틸 양의 별명을 같이 읽었기 때문이다.
<스탄탈 1세. 재앙을 부르는 여신>
굳이 책에서 읽지 않더라도 스틸 양이 행복해할 경우 일이 편하게 끝난 경우가 많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누가 보아도 엄청나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무언가 터질 것 같은 날이었다.
“야! 너 거기 사기꾼!”
선량하게 살아온 자신을 부르는 소리는 아닐 것이기에 가던 길 가던 시안을 누군가 거칠게 한 번 더 불렀다.
“거기 어제 목걸이 훔쳐간 너 말이야!”
“어머! 시안 동생, 이제는 별걸 다 하네.”
“정정당당하게 딴 겁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자신을 부르는 것이 확실하자 시안은 뒤를 돌아보았다.
“음… 무슨 일이십니까?”
시안은 오늘 아무 일에도 엮이지 않고 싶었기에 조용히 대답했다.
“야! 이만 탈란트 가져왔으니까 목걸이 다시 내놔!”
“야… 쿠린, 그만해.”
의외로 자신을 거칠게 부른 여성은 금발이나 적발 여성이 아닌 푸른 머리 여성이었다.
오히려 양쪽의 두 여성이 쿠린이라는 여성을 뜯어말리고 있었다.
“후후. 우리 시안 동생, 많이 만만해 보이나 봐. 별게 다 꼬이네.”
스틸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음… 죄송하지만 어제 분명 돈이 없으면 물건으로 변상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알아서 이만 탈란트 어치 가져가라고 하셨고요? 그래도 전 목걸이랑 반지만 가져가지 않았습니까.”
“야! 너 알고 접근했지! 그건… 돈으로 따지면 이천만 탈란트도 넘는단 말이야!”
쿠린은 분이 터져 말을 잇지 못했다.
알아서 가져가라고 한 건 맞다.
녀석이 생각보다 강했지만 무장이면 검이나 갑옷 종류를 가져갈 줄 알았으니까.
그런데 <언약의 목걸이>를 가져가다니!
의외의 상황에 멍하니 있다가 들고 가는 것을 막지도 못하고 놓쳐버렸다.
“헉… 이천만…….”
그 정도 가치일 줄은 몰랐기에 시안은 살짝 양심에 찔리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알고 접근한 것도 맞았다.
하지만 절대 돌려줄 수는 없다.
이건 꼭 필요한 물건이니까.
어제부터 살짝 양심에 찔렸던 터라 배 째라고 하며 꼬우면 덤비라고 하기도 뭐했기에 시안은 고민에 빠졌다.
“후후. 동생, 내가 한 번 더 도와줄까?”
“음? 스틸 양, 전 두드려 팰 생각은 없습니다. 대신 두들겨 주실 필요는 없어요.”
“알아, 알아. 때려줄 생각이면 진작 그랬겠지. 지금 양심에 찔려서 그런 거지?”
“윽…….”
시안은 정곡을 찔리자 표정이 일그러졌다.
형 때문에 무리한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후후… 기다려봐.”
그리고 스틸은 쿠린이라는 여성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아가들아, 너희가 저 목걸이가 필요한 이유가 저 뒤의 애송이를 지키기 위한 거 맞지?”
“윽… 그렇습니다.”
시안은 겉보기에는 만만해 보였기에 어느 정도 대차게 나갈 수 있지만 눈앞의 여자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기에 쿠린은 자신도 모르게 존대를 했다.
잘못 입을 놀렸다가는 찢겨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 내가 해결책을 주마. 어차피 저 목걸이가 목숨 한번 구해주는 용도라면… 여기 우리 동생이 너희들 목숨이 위험할 때 한번 지켜주는 건 어때?”
“음… 스틸 양? 그런 약속을 함부로 하시면… 제가 24시간 쫓아다닐 수도 없고요.”
너무 섣부른 약속이 아닌가 하여 시안이 스틸을 걱정했다.
하지만 스틸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듯 이야기했다.
“24시간? 후후. 내가 예언 하나 해줄까?”
“어… 갑자기 안 듣고 싶은 이유는 왜일까요.”
“아니야. 너희도 들어보렴. 앞으로 너희는… 음, 그래… 한 시간 안에 그 약속을 지켜달라고 우리 동생에게 이야기하게 될 거야. 내가 장담하지.”
그제야 시안은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스틸을 바라보았다.
스틸은 어제 어딘가로 가서 무언가를 보고 온 것이다.
반면 시안의 눈앞의 넷은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눈앞의 여자가 너무 무섭긴 했지만 자신들도 어디 가서 한 실력 한다고 자부했다.
혹시 저 스틸이라는 여자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걸 시안이라는 남자가 막아준다는 것인가 하여 남자의 표정을 보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 말은 정말 죽을 위기에 처한다는 것이고, 시안이라는 저 녀석이 자신들을 구해줄 실력이 된다는 것이다.
“동생, 약속한 거지? 후후. 이런 쉬운 걸로 양심에 안 찔리면 남는 장사라고.”
그 이야기를 들으니 시안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후우…….”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인 시안은 갑자기 케르발 외곽을 향해 고개를 휙 하고 돌렸다.
그리고 스틸 양을 바라보았다.
“스틸 양… 저거였습니까?”
“어머, 생각보다 빨리 진행했네. 마음이 급했나봐.”
눈앞의 남녀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하고 쳐다보던 쿠린은 시안이라는 남자가 쳐다본 방향으로 고개를 휙 하고 돌렸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무언가가 케르발 외곽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수 킬로미터가 넘게 떨어진 이곳까지.
☆ ☆ ☆
“리마이누는 돌아갔나?”
“네. 안전하게 대피시켰습니다.”
데카두인이 옆에 서 있는 법도사에게 물었다.
지금 이곳에는 모두 자신의 충실한 심복들만이 남아있었다.
법진을 가동시키기 위한 최소 인원만이 말이다.
“좋아. 그렇다면… 우리는 리비아스 님이 들어가자마자 법진을 가동시키고 라-샤르-로아로 도망간다. 영상기기 잘 설치하였나?”
“네. 언덕 위에 서른여섯 개 모두 설치하였습니다.”
“측정 기기들도 모두 설치했고… 좋아, 가자.”
“네, 데카두인 님.”
데카두인이 법도사들을 이끌고 법진의 핵심적인 위치로 이동했다.
그리고 법진의 한가운데서 리비아스는 하품을 하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후… 하여간 머리 좋은 놈들 실험이라는 게… 준비가 뭐 이리 많이 필요한지.”
자신이 여기 서 있은 지 한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도 오랜만에 힘을 끌어낼 생각을 하니 신이 난 리비아스는 눈앞의 에너지 공급용 진을 바라보았다.
“이 위에서 힘을 끌어올리면 된다고 하였나… 흐흐.”
그리고 리비아스는 자신의 길, <태양>을 발동시키기 시작했다.
그러자 리비아스의 육체, 몸 안의 모든 법칙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몸의 내구도는 올라갔다.
새로운 기관이 생겼다.
적은 에너지로도 입자를 가속할 수 있게 변하였다.
충돌시켜 발생한 거대한 흐름을 제어할 수 있는 기관이 추가로 생성되었다.
몸이 점점 재정렬되고 재정렬되었다.
몸 안에 ‘태양’을 만들어 내기 적합한 구조로.
이윽고 리비아스의 몸 안에서 터질 듯한 빛이 터져 나왔다.
리비아스의 <길>, <태양>.
말 그대로 태양과 같다.
리마이누가 이 광경을 보았으면 기겁을 했으리라.
일개 인간의 몸이 핵융합을 시전하고 있으니.
정말 어마어마한, 태양과 같은 에너지가 리비아스의 몸을 중심으로 휘몰아쳤다.
하지만 그렇게 터져 나온 에너지도 법진을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먹을 것이 생겼다는 듯 활성화되며 게걸스럽게 모든 에너지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크억… 다들 조심해라. 엑사르 사역에 주의해라!”
데카두인이 법진으로 휘몰아쳐 들어오는 거대한 에너지의 흐름 안에서 간신히 중심을 잡으며 외쳤다.
여기서 컨트롤에 실패하면 끝장난다.
실험은 성공하겠지만 저 거대한 흐름에 휩싸여 자신들은 뼈까지 불타버릴 것이다.
자신 휘하의 법도사들도 그 심각성을 깨닫고 있었던지라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에너지를 통제하고 있었다.
그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어느덧 법진은 리비아스의 몸에서 나온 어마어마한 에너지로 가득 찼고, 거칠지만 잘 정렬된 상태로 끊임없이 휘몰아쳤다.
“좋아… 끝났다. 모두 도망가라.”
데카두인은 휩쓸릴까 봐 허겁지겁 도망가기 시작하였다.
가운데의 리비아스도 그 모습을 보고 몸을 날렸다.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있었지만 직경이 수백 미터가 넘는 거대한 법진은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막대한 빛을 토해냈다.
어느 순간, 법진 위의 모든 빛이 리비아스가 서 있던 자리로 쭈욱 하고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빛을 게걸스럽게 삼키던 법진 가운데의 허공에 붉은 구체가 떠올랐다.
아니, 붉은 구체가 아니었다.
붉디붉은 구멍.
이윽고 어른 머리만 하던 그 구체는 폭발적으로 그 크기를 늘리더니, 이윽고 수백 미터에 달하던 법진을 모두 집어삼키고 1킬로미터가 넘는 크기로 변하였다.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고 타키온의 머릿속으로만 전해지던 흉악한 대이적.
지옥문, ‘타샤-다곤’이 열렸다.
<타샤-다곤>
고대어로 지옥문.
이 이름은 대법도회의 수장, 타키온이 붙인 것이다.
실제로 지옥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타키온이 생각하기에 저 안에 들어가게 되면 그자는 마치 지옥에 들어간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기에 그렇게 이름 붙인 것뿐이다.
단지 타키온은 장시간의 연구 끝에 다른 차원의 존재를 알아냈고, 그 차원에 사는 존재들과 ‘우연히’ 알게 될 기회가 있었을 뿐이다.
타키온은 두 가지 이유로 이 차원과의 접촉을 포기했다.
하나는 법도회의 힘을 모두 동원해도 차원문을 열 만한 자료와 지식이 부족하여 차원문을 열기 힘들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이 차원에 사는 녀석들이 건너오면 너무나 위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대로 포기하기에는 힘들게 알아낸 다른 차원의 존재가 너무 아까웠다.
날카로운 칼은 위험하긴 하지만 어떻게든 쓸모가 있기 마련이니까.
그러한 고민 끝에 타키온은 발상의 전환을 하였다.
<저 차원의 안으로는 들어갈 수 있으나 바깥으로는 나올 수 없는, 그런 구조의 차원문을 만들자.>
안에 있는 놈들은 워낙 위험하기에 꺼내기가 꺼려진다.
하지만 충분한 크기의 차원문을 만들고, 그 안에 목표물을 집어넣을 수만 있다면, 확실하게 살해할 수 있다.
아니, 가능하다면 아예 목표를 중심으로 차원문을 열어버린다면 더욱 좋다. 담글 필요도 없으니 이러한 개량은 만약 타샤-다곤이 쓸 만하다 싶으면 이루어질 예정이다.
이렇게 되면 세 가지 이점이 생긴다.
하나, 차원문 자체가 안쪽에서 나오는 것을 막으니 목표의 공격을 약화시켜준다.
둘, 안쪽에 사는 존재들이 침입자에 대한 공격을 실시하니 협공의 효과를 노릴 수 있다.
셋, 여차하면 차원문을 닫아 그쪽 차원에 던져버린다.
정말 강대한, 자신들로는 상대할 엄두도 안 나는 적이나 하리쟌이 나타났을 때를 대비하여 타키온이 구상한 이적.
이러한 장점을 바탕으로 연구에 들어간 타키온은 이 대이적이 완성만 된다면 마치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과 같을 것이라고 예상하여 타샤-다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다른 차원에 대한 연결은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기에 자료가 너무 부족했다.
지속적인 연구에도 획기적인 진전이 없자 타키온도 점점 지쳐갈 때쯤, 그 녀석이 나타났다.
리마이누.
다른 차원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녀석.
리마이누는 법도회가 자신을 돌보아주니 고마워하고 있지만 타키온은 갑자기 나타나준 그 녀석이 훨씬 더 고마웠다.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하며 연구를 도왔다.
다행히 이자는 그쪽 세상에서도 머리가 좋은 축이었고,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지식체계를 쌓아왔기 때문에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연구는 가속에 가속을 거듭했고, 마침내 리마이누가 가져온 자료를 바탕으로 타키온이 머릿속으로만 그려내던 대이적, 타샤-다곤을 완성시켰다.
완성하였지만 여전히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이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하는 점.
또 하나는 자신의 예상대로 제대로 작동이 될까 하는 점.
처음 해보는 이적이니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실험을 준비했다. 뭐든지 해보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
자신의 힘으로는 조금 부족할 수도 있기에 연락 안하고 지내던 동료에게 연락을 했다.
그들은 흔쾌히 도와주었다.
자신들의 예상대로 작동하고, 바라쿠나 정도는 처리할 수 있다면 대성공이다.
☆ ☆ ☆
“후후. 어때, 얘들아. 지금 살려달라고 소원을 비는 게 낫지 않겠니?”
켈빈이라는 녀석은 외곽에서 뻗어 나오는 거대한 엑사르의 흐름에 이미 졸도한 지 오래였다.
쿠린을 비롯한 세 여성은 심각한 표정으로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어서 이 도시를 떠나야 한다는 것.
하지만 이 정도면 아직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기운은 거대했지만 악의는 없었으며 아직까지 무슨 영향을 끼치는 것 같지는 않았고, 반대쪽으로 달리면 문제없이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도와달라고 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레카와 린나는 켈빈을 등에 업고 서둘러 저 기운 반대편 방향으로 뛰려고 하였다.
반대편 쪽에 못 보던 산이 보이기 전까지는.
“어머, 그쪽으로 가게? 후후… 그럴 거였으면 좀 일찍 출발했어야지.”
쿠워워워워!
못 보던 산이 괴성을 지르며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바다 쪽에서 거대한 해일을 일으키며 올라오고 있는 녀석은 아직 족히 수 킬로미터는 넘게 떨어져 있었는데도 눈에 보이고 있었다.
그것도 정확히 이 도시에서 빠져나가는 방향으로 오며 말이다.
☆ ☆ ☆
“으윽…….”
키라트는 머리에 쓴 관을 부여잡았다.
머리가 지끈지끈거렸다.
‘이거 정말 두 번은 못하겠군…….’
[지능이 퇴화하려고 합니다. <르칸의 지혜> 저항 성공! 지능의 감소를 방어합니다.]
[지능이 퇴화하려고 합니다. <르칸의 지혜> 저항 일부 성공! 지능이 잠시 감소되었다가 24시간 후 회복됩니다.]
[과도한 엑사르 사용으로 몸에 부하가 걸리고 있습니다. 현재 잔여량 35%]
[<악사라이의 접속자> 호칭으로 모든 아티팩트의 사용 시 75% 가중치를 받습니다.]
[알 수 없는 기운이 들어와 몸의 회복속도를 높여줍니다. 엑사르 회복속도 550% 증가]
[알 수 없는 기운이 들어와 아티팩트의 사용을 돕습니다. <크로나의 뿔로 만든 관> 가중치 200%]
뒤에서 라가오페가 도와주고, 모든 스킬을 발동시키고 있는 상태였는데도 이렇게 걸어오게 하는 것이 한계였다.
이 녀석을 지배할 틈을 만들어주기 위해 라가오페가 바라쿠나와 치고받지 않았으면 아예 시도조차 실패했을 것이다.
이토록 대단한 물건을 사용하고 있는데도 겨우 걷게 하는 것이 다라니… 바라쿠나의 강함이 간접적으로 느껴졌다.
뒤에서 키라트에게 기운을 불어넣어주고 있던 라가오페가 말을 걸었다.
“어때, 만만치는 않지만 할 만하지?”
“…네.”
“뭐… 내가 하면 좀 낫겠지만 그러면 못 쓰지. 너보다 훨씬 잘 할 자신도 없고,. 게다가 너도 한 사람 몫은 해야 한다고. 저번 악사라이의 접속자는 정말 대단했어. 그리고 아마 너도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
라가오페는 그동안 외로웠는지 상당히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키라트는 거기에 집중할 여력이 없었다.
바라쿠나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감각과 감정, 본능을 다스리기에도 바빴으니까.
<…죽인다.>
<…찢어버린다…….>
<…부순다…….>
<…먹는다.>
온갖 흉포한 감정들이 키라트에게로 쏟아져 들어왔고 키라트는 이 모든 감정을 제어하며 <지옥문>이 설치되어 있다는 케르발 쪽으로 바라쿠나를 끌고 가고 있었다.
“…이 녀석을 그 지옥문이라는 것 안에만 넣으면 일단 마무리가 되는 건가요?”
“음… 그렇지. 그리고 어떻게 되나 살펴봐야지. 타키온이 부탁했거든, 어느 정도 효력이 있는지 관찰해달라고.”
이번 지옥문은 원래의 설계에 비하면 상당히 작게 만든 편이다.
만약 그 효력이 생각한 만큼 나오지 않는다면 이 이적은 폐기될 것이고, 쓸 만하면 더 큰 투자가 이루어질 것이다.
‘실험의 스케일이 다르구나…….’
초인들이 하는 짓은 실험에 사용되는 도구 사이즈도 장난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키라트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초인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되었다.
대장로님의 이야기가 맞다.
이들은 인간을 신경 쓰지 않는다.
이번 실험도 단순히 한 초인이 이번에 만들어낸 이적을 실험해볼 곳이 없다고 하여 실행되는 것이다.
케르발에 설치하는 이유도 아주 단순했다.
그곳이 바라쿠나를 끌고 가기 편하고 실험에 필요한 물자를 수송하기 편하기 때문에.
옆에 수십, 수백만이 넘는 인구가 있는 도시가 있는데 그런 걸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눈앞의 이 남자도 다를 바 없다.
만약 자신이 악사라이의 접속자가 아니었으면 순식간에 눈앞의 남자에게 살해당하고 관을 빼앗겼을 것이다.
단순히 자신이 이용가치가 있으니 아끼고 있는 것뿐이다.
하지만 키라트는 개의치 않았다.
자신도 이들과 다를 바 없다.
이들을 이용할 수 있을 것 같기에 조직에 들어온 것뿐이고, 종족이 다른 인간 따위 자신도 신경 쓰지 않는다.
키라트가 마음을 다잡은 순간 눈앞에 정보창이 떠올랐다.
[<바라쿠나>를 이끌고 <케르발>로 이동하라: 완료!]
-보상: 경험치 270,000. <?로 만든 관> 사용 숙련도 2.5% 증가.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 뒤로 연계 퀘스트가 떴다.
[퀘스트: <천고의 기회>가 발생하였습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YES/NO]
갑자기 뜬 퀘스트창에 키라트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 내용을 읽어보고는 희열에 가득 찼다.
“음? 키라트, 너 갑자기 기분이 엄청 좋아 보이는데?”
라가오페가 키라트를 보여 물어보았다.
키라트는 그 말에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 다 도착했다는 생각을 하니 즐거워서요.”
“오, 그렇지. 이제 보이는구나, 케르발이. 수고했어.”
저 멀리 보이는 케르발을 보고 라가오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키라트는 저 멀리 보이는 붉은 구체를 바라보았다.
웅대한 엑사르가 휘몰아치고는 있지만 겉보기에는 별로 위험해보이지 않는 붉은 구체.
“…저게 그렇게 위험한가요?”
키라트가 의아해서 물었다.
그러자 라가오페가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후후. 그렇게 위험해 보이면 조종 받고 있다고 해도 이 녀석이 기어 들어가려고 하겠어? 타샤-다곤을 만들 때 그런 것도 다 감안해서 만들어진 거야. 저건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라고.”
그 말에 키라트의 입에 띤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 ☆ ☆
시안은 저 멀리서 느껴지는 붉은 구체를 바라보았다.
붉은 구체는 1킬로미터라는 거대한 크기를 가진 것 외에 특이한 점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살피니 그게 아니었다.
붉은 구체 안에는 무언가 거대한 녀석들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작게는 수 미터에서 크게는 수백 미터에 이르는 녀석들.
크기가 다양한 만큼 생김새도 다양했다.
하지만 공통점은 있었다.
흉측하기 이를 데 없이 생겼다는 점.
말도 못하게 사악한 기세를 내뿜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쪽으로 나오고 싶어서 붉은 구체의 표면 안쪽을 벅벅 긁고 있다는 점.
지금 저 붉은 구체가 저 녀석들의 기세까지 모조리 차단하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엑사르의 광폭한 유동만 느낄 뿐이지, 만약 저 기운이 바깥으로 새어 나왔으면 도시 사람들 중 절반은 미쳤을 것이다.
녀석들은 마치 우리에 갇힌 맹수가 바깥에 있는 먹잇감을 찾고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바깥으로 나오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다.
하지만 시안은 저쪽은 걱정하지 않았다.
위험하긴 했지만 말 그대로 우리에 갇혀 나오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문제가 되는 쪽은 반대쪽이었다.
저번의 망둥이 녀석은 저 녀석에 비하면 송사리에 불과했다.
같은 여섯 뿔이라지만 크기부터 시작하여 기세 자체가 아예 달랐다.
저 녀석은 묶여있지도 않을뿐더러 이대로 도시를 쭉 밀고 갈 생각으로 접근해오고 있었다.
이미 해안가는 녀석이 찰박거리며 생긴 해일 때문에 박살이 나고 있었다.
어차피 쓸 일이 없어진 배이니 별 상관은 없을 것이다.
저 녀석이 왜 이런 때 오는지 모르겠지만 저 붉은 구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도시는 쳐다보지도 않고 있고 저 건너편의 붉은 구체만 노리며 걸어가고 있으니.
동시에 시안은 스틸 양을 보며 한숨을 지었다.
재앙의 여신.
스틸 양 때문에 벌어진 일은 전혀 아니지만 그 별명이 절실하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시안은 주위를 살피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었음을 기억해냈다.
“…이런 거인 줄 알고 있었습니까.”
“음. 아니. 사실 나도 저 반대쪽은 전혀 몰랐어.”
스틸은 자신의 예측이 빗나갔다고 말했다.
실제로도 그랬고.
엄청 재미있는 일을 만들어 줄 것이라고 예상했던 저쪽의 붉은 구체는 예상과는 다르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아주 안전한 구체였다.
저런 걸 저기다가 왜 만들어놓았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말이다.
물론 들어가면 이야기가 아주 달라지겠지만 제정신이라면 저런 엑사르의 흐름이 느껴지는 구체에 들어갈 녀석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반면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아주 위험한 녀석이 튀어나왔다.
저 멀리 다가오고 있는 산을 바라보는 스틸은 기세를 재어보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허… 저거 내가 지겠는데…….”
일곱 행성의 대갑주를 입고 있어도 밀릴 것 같았다.
시안은 양쪽을 이리저리 바라보더니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켈빈 일행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약속은 약속이니… 말씀하십시오.”
자신을 향해 말을 거는 시안을 어처구니없이 보던 쿠린이 입을 열었다.
“하하… 무슨 재주로 이 상황을 해결하겠다는 거죠? 설마 저기 오는 저 녀석을 때려잡기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그러자 시안이 미친 거 아니냐는 표정을 지으며 쿠린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도망가야죠.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저런 거랑 왜 싸웁니까.”
“…….”
예상치 못한 대답에 모두가 당황했다.
생각해보니 자신들은 여기서 도망가기 힘들지 몰라도 저기 여성 정도라면 자신들을 데리고 도망가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스틸이라는 여성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아… 뭐야, 동생. 저거랑 안 싸워? 나는 질 거 같지만 동생은 이길 수 있잖아.”
그 말에 모두가 아연한 표정으로 시안을 쳐다보았다.
한 수 있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저기 저 산만 한 녀석을 때려눕힐 수 있다니.
스틸이라는 여성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말을 들은 쿠린의 얼굴은 특히 새파랗게 질렸다.
자신은 지금 범 아가리에 어디까지 머리를 집어넣을 수 있나 들이밀고 있었던 것과 같으니.
놀란 셋의 표정을 보고 시안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저거랑요? 어이구… 힘이 남는 것도 아니고.”
‘얘 진짜 특이하네…….’
스틸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장 자신만 해도 눈앞의 저 녀석이랑 한바탕 해보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렸다.
질 걸 알지만… 도전할 만한 상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물론 정신이 나간 건 아니기에 죽기 싫어 덤비지는 않을 것이다.
평소라면 덤볐겠지만 지금은 더 관심 있는 대상이 있으니 죽기는 아직 이르다.
하지만 시안 입장에서는 해볼 만한 상대이다.
아니, 저렇게 찍어 누를 만한 상대를 찍어 누르는 것은 초인들에게 몇 안 되는 쾌감 중 하나이다.
개미나 어린아이를 찍어 누르는 건 재미없지만 경쟁자를 찍어 누르는 것은 재미있으니.
아니면 시안 이 아이의 입장에서는 저 녀석도 어린아이 수준으로 보여서 그러는 건지 스틸은 아리송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레카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 싸워서 이길 수 있는데도 안 싸운다고 하시는 건가요?”
“음… 해보기 전에야 모르겠지만… 저 정도라면…….”
“…당신이 싸워서 이긴다면 이 도시의 수십만 명이 살아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음… 그렇겠지요.”
시안이 계산해보다 대답했다.
싸움에 휩쓸려 많이 죽기야 하겠지만 안 싸우는 것보다야 훨씬 많이 살아남을 것이다.
“그런데 안 싸운다니! 당신 정말 무책임하군요.”
레카를 비롯한 세 여성이 시안을 벌레 보듯이 바라보았다.
기사도를 숭상해온 카란 왕국의 그들 입장에서는 약자를 보호하지 않는 그가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경멸이 공포를 짓누르고 표정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하지만 시안은 신경 쓰지 않으며 대답했다.
“음… 그러면 세 분은 저기 저 녀석과 싸우시겠다는 거군요? 그러면 그냥 저희끼리 가겠습니다. 아 혹시 스틸 양도 여기 남으실 겁니까?”
그 말에 스틸이 왜 그러냐는 듯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어머! 동생, 왜 그래. 후후. 나야 동생이랑 함께 가는 거지.”
“흠… 엄청 싸우고 싶어 하시는 것 같기에 그냥 내버려두려고 했지요.”
“하하. 착각이야, 착각.”
‘매정한 자식…….’
스틸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좋습니다. 그러면 스틸 양은 같이 가는 거고… 여러분께서는 여기 남으신다는 거지요?”
그 뜻을 존중하겠다는 듯 담담하게 말하는 시안의 말에 셋은 화들짝 놀랐다.
“아니… 그게 아니고…….”
“음? 방금 전까지 도시를 지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까와는 왜 다른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해진 시안은 진심으로 되물었다.
“우리는 끼어들어봤자 한 명도 구할 수 없잖아요!”
레카가 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시안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무슨 소리입니까. 그럼 결과가 좋지 않으면 하지 않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요.”
“…그건…….”
“결과가 좋을 줄 알고 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건 보통 책임을 지는 행위가 아닐 텐데요.”
“…….”
“결과가 불확실하거나 안 좋을 줄 알아도 하는 게 용기 있고 책임지는 것이지요.”
‘오, 말발이 좋아졌네?’
뒤에서 스틸이 감탄했다.
하지만 이건 시안의 말발이 좋아진 게 아니라 어린 시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여서 그랬다.
“게다가 애초에 무책임이라는 게 책임질 사람들을 책임 안 지는 것 아닙니까. 제가 저 사람들을 왜 책임집니까? 저는 그래도 여러분 넷은 책임지려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이 생각은 아버지 생각에 동의하지 않은 시안의 생각이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당신 정도의 힘이 있다면 책임이 뒤따라야 마땅합니다!”
린나가 거의 악에 받혀 말했다.
“음… 여러분들께서 교육을 잘 받기는 하셨습니다. 아주 올바른 사상, 존중합니다.”
시안이 아버지와 똑같은 말을 하는 세 여성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잘못 알고 계시는 게 있습니다. 큰 힘에는 큰 권리가 따릅니다. 큰 힘에 큰 책임이 왜 따라옵니까, 힘이 권리랑 같은데. 단지 다른 사람들이 큰 힘을 가졌으니 큰 책임을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이지요.”
“…….”
“물론 평범한 인간들이야… 큰 권리에 큰 책임을 지지 않으면 사회에서 고립되니 어쩔 수 없이 책임을 지기는 하지만……. 그나저나 제가 도덕 선생님도 아닌데 왜 이렇게 설명이 길어지는지 모르겠군요.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니 무시하셔도 됩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하실 겁니까?”
시안은 재촉했다. 더 이상 끌면 탈출이 귀찮아진다.
세 여성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데려가 줘요.”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다음 대답은 시안의 예상과 조금 달랐다.
“켈빈만 데려가 줘요. 우린 여기에 남겠습니다.”
“허…….”
시안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들은 지금 목숨보다 사상을 지키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시안은 예상외의 대답에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러면 곤란한데…….’
약속을 지키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약속이야 양쪽이 이행하자고 할 때 지키는 것이지, 저쪽이 먼저 거절하였으니.
문제는 자신 내면의 외침이 계속 커진다는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외침>과 초인으로서의 <외침>이.
<뭐하냐, 너 지금… 가서 저거 안 짓밟고.>
<생각해보니 저 덩치로는 조금 모자란다. 들어가, 저 안에.>
<하나로는 재미없지. 덩치랑 같이 들어가.>
<그게 좋겠다. 둘 다 짓밟아라.>
자신의 내면의 자아와 힘이 계속해서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저번의 라그랑 지방처럼 간단하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진짜 위험했다.
이제까지 자신이 죽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스틸 양은 저기 저 덩치 큰 녀석을 걱정하고 있었다.
아마 붉은 구 안의 녀석들의 실체가 제대로 느껴지지 않아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저 녀석은 저 붉은 구 안에 비하면 진짜 아이들 장난이나 다름없다.
스틸 양은 붉은 구 안에 들어가면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찢겨 죽을 것이다.
애초에 저걸 열어놓은 녀석이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아니… 저런 걸 어디다 쓰려고 열었지…….’
겨우 저 눈앞의 덩치 하나 잡기에는 과했다.
그렇기에 시안은 내면의 외침을 꾹꾹 눌러버리고 있었다.
인간이 생존을 추구하는 것은 본성이니 자신이 잘못하는 것이 아니라고.
실제로 도시는 지금 난리가 난 상태였다.
다른 사람들이 죽건 말건 제 목숨 챙기기 위해 사방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 반례가 나타나니 싱숭생숭해진 것이다.
마치 저것이 진짜 인간들과 섞여 사는 방법이라고 하는 것 같아서…….
시안은 머리를 벅벅 긁다가 해결책을 찾아냈다.
“에이 씨…….”
“엉? 동생, 지금 뭐 하려고?”
스틸이 놀라서 시안을 쳐다보았다.
시안이 머리를 긁적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설마 도와주려는 건가?’
이제까지 시안을 살핀 스틸 입장에서는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설마 쟤들이 마음에 들어서 도와주려는 건가?’
아직 인간의 마음이 남아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순간 시안의 손이 날았다.
따다닥!
“윽…….”
그리고 도시 쪽으로 나아가던 세 명은 풀썩 쓰러졌다.
“…….”
“자, 이제 도망가죠.”
주섬주섬 쓰러진 여성 셋과 남자 하나를 챙기며 시안이 스틸을 돌아보았다.
“어… 저거 막아주려던 거 아니었어, 동생? 살짝 방향만 틀게 해서 도시 피해 가게 하는 수도 있잖아.”
사실 스틸이 예상하고 있던 게 이거였다.
시안 동생 특성상 저기 산만 한 녀석을 두들겨 잡거나 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딱 보아도 저 덩치는 도시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오로지 붉은 구체 쪽으로만 걸어가고 있었으니.
시안에게 도시를 살짝 비켜서 붉은 구체 쪽으로 유인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나서는 걸 보았을 때 유인 정도는 해줄 줄 알았는데 셋을 기절시키다니!
“아… 그럴까 고민도 살짝 해봤는데… 이번에 진짜 느낌이 안 좋거든요.”
아버지의 말도 있기에 그 방안도 고민했지만 시안은 자신의 생존본능을 따르기로 했다.
폭탄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불안하다.
시안은 저 위험한 붉은 구체 옆에서 조금이라도 떨어지고 싶었다.
유인하려면 저 덩치를 끌고 붉은 구체 쪽으로 가까이 가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본능이 맹렬하게 경고를 날리고 있었다.
“허… 그 정도야?”
“네. 그리고… 이 목걸이 주인은 저 남자니까… 저 남자가 가장 원하는 대로 약속을 이행해 주는 게 최선 아닐까 해서…….”
사실 저 셋의 의지를 존중하여 내버려둘 수도 있겠지만 목걸이 주인을 존중하여 도와주기로 했다.
저 셋이 죽는 건 저 남자가 바라는 건 분명 아닐 테니까.
설령 도시 사람들은 모두 죽는다고 하여도 말이다.
“흐음… 그래서 이 넷은 구해서 가겠다, 이거지?”
“네. 스틸 양이 한 약속도 있으니까 스틸 양도 두 명 어깨에 메시지요.”
시안이 책임 분담을 요구했다. 네 명을 다 들고 가기에는 손이 모자라니.
“아니야, 아니야, 동생. 내가 네 명 다 들고 갈게. 그리고 동생, 생각보다 촉이 엄청 좋구나.”
“네?”
스틸의 예상 못한 대답에 놀란 시안이 대답했다.
“원래 도와주려고 했는데… 동생이 이 넷을 살려야 한다니 어쩔 수 없지. 우선 얘들 저 멀리 좀 놔두고 올게. 동생, 힘내.”
“이 무슨…….”
시안이 놀라고 있을 때 스틸은 네 명을 둘러메더니 저 멀리 바다 반대편의 산 쪽으로 빛살처럼 달려갔다.
“어……?”
쿠지지지직!
그리고 그런 스틸을 멍하니 바라보던 시안을 어마어마한 푸른빛 에너지가 강타했다.
<5권에서 계속>
5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