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만의 검공-37화 (38/81)

<37. 케르발의 희망>

<미녀와 허약해 보이는 녀석의 공통점은 둘 다 먹음직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건드리지 말아라. 다른 놈들도 다 그런 생각을 했을 텐데 이제까지 돌아다닐 수 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산적왕, 쿨칸

☆ ☆ ☆

암시장의 이권을 삼분하는 케르발 삼대 세력 중 하나, 검은 뱀의 간부인 스핀은 보고를 올리는 녀석의 이야기를 듣고 빤히 쳐다보았다.

“아공간 아티팩트라… 거기다 엄청난 미인에 희멀건 녀석 하나?”

“네. 일석이조 아닙니까. 후후후.”

“이 정보 팔러 온 녀석, 다른 데 이야기 못하게 잘해 놓았지?”

“당연합니다.”

아공간 아티팩트는 그 용량에 따라 가치 차이가 크지만 기본적으로 고도의 이적과 탈릭 스톤이 집결되어 만들어진 법도마학의 정수이기 때문에 그 가격이 상당하다.

게다가 옆에 미인까지 있다니… 일석이조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이 녀석은…….’

그러니 말단이나 하고 있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미인이 호위병 없이 돌아다닌다면 무조건 의심하고 봐야 한다.

눈앞의 얼간이 같은 녀석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고 그런 녀석들이 대단한 미녀가 지나가면 껄떡대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케르발의 암시장까지 돌아다닌다는 게 무얼 의미하겠는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한 수에 갈려나간 녀석들도 많을 것이고.

세상은 넓고 강자는 많다. 옆에 그 희멀건 녀석은 무장은 아닐지라도 강력한 엑서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 근방에서 작게 작게 해먹던 레토-켈 녀석들이 최근에 미인 셋을 데리고 다니는 만만해 보이는 애송이 하나를 덮쳤다가 갈려나가고 말았다.

물론 쫄아서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런 일에 어울리는 눈치 없는 녀석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니까.

“야, 우리 아래에 카쿠락이라는 녀석들 있었지?”

“아, 그 동쪽 지구에서 작게 작게 해먹는 밀수범 녀석들 말입니까?”

“그래. 거기 대장인 카쿠락 그 녀석이 익스퍼트였지?”

“네, 그렇지요.”

“그 녀석에게 이거 흘려. 다른 데 소문내지 말고.”

“네? 아니, 그러다가 그 녀석이 먹고 튀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으이구! 한심한 새끼야. 여기서 나오는 돈이 얼만데 겨우 아티팩트 하나 때문에 여기를 포기하기까지 하겠냐.”

작게 해먹어도 암시장에서 나오는 이문은 엄청났다. 그렇기에 힘들게 잡은 자리를 아티팩트 하나 때문에 포기할 리 없다.

“헛!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나가는 부하 녀석을 보며 스핀은 한숨을 쉬었다.

저 녀석은 이런 암흑가에서 보기 드물게 충성심이 굉장하기에 가까이 두고 있지만 도통 머리가 안 돌아갔다. 그래서 일일이 보고를 하고 명령대로만 움직이라고 해놓았다.

“흐휴… 언제 키워서 사람 만드나, 저걸…….”

스핀은 한숨을 쉬며 이번에 새로 들어온 마약의 유통을 위해 다른 구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흐음… 더 이상 어제 같은 물건은 없나 봅니다.”

시안은 살짝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암시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사실 군데군데 아티팩트들이 숨겨져 있기는 하였다. 다들 사용자가 가치를 모르기에 이곳, 암시장까지 흘러들어온 물건이었다.

하지만 시안은 어제 얻은 악사라이 때문에 눈이 너무 높아져버렸다.

그렇기에 웬만한 물건들은 그냥 보지도 않고 파장만으로 걸러내는 중이었다.

“후후. 설마 이 안에 전설의 신검이나… 그런 게 잠들어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뭐… 어제 같은 물건도 암시장에 돌아다니는데 그런 거라고 없을까 해서요.”

“그런 물건이 있으면 여기까지 들어오지도 않았을걸. 대단한 물건들은 대단한 티를 내는 경우가 많으니까.”

“쩝… 형 선물이나 하나 사려고 했는데 못 구하려나 봅니다.”

“아, 그 리안이라는 아이?”

“네.”

자신이 쓰는 물건을 주고 싶었지만 그 물건들은 형 정도 수준으로는 손만 가져다 대도 모든 기운이 빨려나가 죽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라-반더가 쓸 만한 물건들은 그랑-반더를 포함한 일반인들은 접근도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흐음… 내가 나중에 하나 찾아다 줄까? 마스터라고 했나?”

“네. 뭔가… 형에게 손만 대면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진다든가… 그런 게 있으면 좋겠군요.”

“…….”

“아니면 위기의 순간에 제가 그 옆으로 소환된다든가.”

아마 벼락을 맞는 게 시안이 소환되는 것보다 상대에게는 백배는 더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초인답지 않게 가족을 굉장히 아끼는 것을 본 스틸은 좋은 정보를 얻었다고 생각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순간 무언가가 다가와 스틸에게 부딪쳤다.

텅!

“아이고! 아이고!”

“뭐야, 무슨 일이야?”

스틸 양에게 부딪친 한 사람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고 그 옆의 동료로 보이는 남성들은 서둘러 남자를 살폈다.

“…스틸 양?”

“어머! 동생, 저렇게 갑자기 다가오는 걸 내가 어떻게 피할 수 있다고 그래.”

“…….”

스틸 양이 저런 녀석들을 몸에 부딪치게 놓아 둘 리가 없다. 분명 일부러 그런 것이다.

동시에 저기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야, 이제 일어나도 돼. 뭘 오바하고 그래.”

“…끄워억… 우웩… 이 새끼야… 오바 아니라고…….”

‘어이구…….’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의도를 가지고 스틸 양에게 부딪치려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녀석을 스틸 양이 가만히 놓아둘 리가 없었다.

저 친구도 아마 최소 가벼운 장마사지, 최대 내장꼬임이었다.

그 정도 되면 상황파악이 될 법도 한데 뒤에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크게 소리쳤다.

“이 자식들! 사람이랑 부딪혔으면 사과를 해야 할 거 아냐!”

시안은 일단 사과를 하기로 했다.

저 사람의 상태는 정말 사과 받아 마땅했으니까.

한 번 더 살펴보니 저 사람은 앞으로 변비로 고생할 일은 없을 것처럼 보였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이 개자식들이! 사과하면 다야? 보상을 해야 할 것 아니야!”

“…….”

‘이 사람은 눈치가 없는 건가…….’

한번 부딪힌 걸로 사람이 일어나지를 못하면 어느 정도 감을 잡아야 할 텐데 눈앞의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내는 별로 그런 감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보다 눈치 없는 사람을 본 것도 오랜만이라 신기하게 쳐다보던 시안은 그래도 자신의 손으로 마무리 지어 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손을 쓰기로 했다.

아마 저 사람들은 분명 사과-보상요구-폭행 삼단 콤보를 시전할 생각일 텐데 그렇게 되면 대참사가 벌어진다.

스틸 양이 손을 쓰면 이 안타까운 중생들은 폭행-폭행-폭행 삼단 콤보 후 한꺼번에 육인용 치료소에 들어가게 될 테니 말이다.

아니면 육인용 묘지나.

마침 손에 먹던 등심이 있기에 이 녀석을 한 번 더 쓰기로 한 시안은 터벅터벅 앞으로 걸어 나갔다.

자신은 자비로우니 폭행-폭행 정도만 사용할 것이다.

“야… 뭐야, 손에 들린 그게 설마 보상이냐? 이 자식이! 생각해보니 그 정도면 보상으로 충분할 것 같군.”

‘음?’

시안은 갑작스런 태세변환을 시전하는 남자를 보고 의문을 표했다.

분명 시안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고 뒤의 스틸 양도 재미있어하며 나설 생각을 하고 있지 않는데 갑자기 이 남자가 이럴 이유가 없다.

하지만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야, 빡빡이! 내가 그런 거 하지 말라고 했지!”

한 붉은 머리 여성이 이곳을 보고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아닙니다. 저 진짜 아무 짓도 안 했고 저기 저 사람들이 다가와서 부딪힌 거라고요. 사과만 받고 끝내려고 했습니다.”

“아니기는… 너 저번에 며칠 전에 우리한테 한 짓 기억 안 나?”

“하하… 그 이후로 완전하게 개과천선했습니다. 헤헤.”

‘제기랄! 저 연놈들이 왜 또 여기에!’

카쿠락은 저 멀리서 다가오는 1남 3녀를 보며 속으로 쌍욕을 퍼부었다.

저 망나니 같은 녀석들이 난데없이 암시장에 나타난 것은 일주일 전이었다.

허약해 보이는 사내놈과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미녀 셋의 조합.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수상해 보인다.

그렇기에 당분간 자신을 비롯한 패거리들은 지켜보기만 하며 접근하지 않았다.

하지만 웬 뜨내기가 남자에게 소매치기를 시전하였는데 저 사내 녀석은 그대로 소매치기를 당하는 것이 아닌가.

강대한 무장이 얼뜨기의 소매치기를 피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 소문이 암시장에 퍼지는 것은 일사천리였다.

사내놈이 허약하다는 소문이 퍼지자마자 사방에서 녀석들을 노리고 모여드는 것이다.

저런 미인이라면 가져다 팔 데도 무궁무진하고 정 못 팔면 자신들이 데리고 놀거나 사창가에 넘기면 된다.

먼저 줍는 놈이 임자다.

하지만 그게 실수였다.

위험한 건 사내놈이 아니라 옆의 계집들이었다.

사내놈에게 찰싹 들러붙어 있길래 남자만 아니면 별 볼 일 없는 계집들인 줄 알았는데 엄청난 오해였다.

천사같이 생겼는데 하는 짓이 악마 그 자체였다.

특히 레토-켈 녀석들은 멋도 모르고 저기서 가장 순해 보이는 여자의 엉덩이를 만졌다가 열일곱 놈 모두 전신복합골절로 치료소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물론 본거지는 모조리 털렸고 저기 저 녀석들은 그 돈으로 암시장에서 쇼핑을 하고 있었다.

자신은 계집이 아닌 사내에 관심이 있었기에 다행히도 몇 대 얻어맞는 것으로만 끝날 수 있었지만 자신도 만약 저 계집들에게 껄떡댔다면 그 정도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시는 마주칠 일 없도록 피해 다니고 있다가 만만한 녀석들이 보물을 들고 돌아다닌다고 하길래 분풀이를 하려고 왔는데 일이 재수 없게 꼬인 것이다.

“우리 앞으로 여기 한참 있을 건데 약한 사람들 괴롭히거나… 그러면 알지?”

“아이고! 제가 언제 그랬다고 그러십니까. 절대 그런 일 없습니다. 저희는 치안 유지에 힘쓰고 있는걸요. 야, 이 녀석들아! 어서 어서 일하러 가자!”

카쿠락은 혹시나 더 엮일까 두려워 잽싸게 챙겨서 자리를 피했고 암시장의 거리에는 순식간에 시안 일행과 미녀 일행만이 남았다.

졸지에 약한 사람들이 된 시안은 그래도 문제가 잘 해결된 것에 만족하며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해결되었습니다.”

“조심하세요. 여기에는 짐승 같은 녀석들밖에 없으니까. 보아하니 행정관 같은데 그렇게 돌아다니면 위험하다고요.”

“푸핫.”

뒤에서 스틸 양이 작게 웃었다.

보아하니 스틸 양은 사고가 안 터진 것을 굉장히 안타까워하고 있었는데 어디서 귀여운 녀석들이 와서 자신들 걱정을 해주니 헛웃음이 나온 것이다.

“음……?”

붉은 머리 여성은 그제야 남자 뒤에 서있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는지 그 쪽을 바라보았다.

‘…아, 뭐야…….’

자신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외모라고 항상 자부하고 다니는데 저 뒤의 여자는 상상 이상이다.

체격도 훤칠해서 그런지 다리도 엄청 길고 얼굴도 작아 9등신은 훌쩍 넘어 보였다.

거기다 피부는 어찌나 하얀지. 자신은 맨날 바깥에서 싸우느라 피부노화를 걱정 중인데…….

게다가 압권은…

‘…저런 거 달고 다니면 안 무겁나…….’

괜히 짜증이 난 여자는 뒤돌아서서 일행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더 짜증이 나고 말았다.

켈빈 녀석이 멍하니 여자 쪽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꽈악!

“으억…….”

“까득… 어디 보고 있는 거지, 켈빈.”

“아야야… 아니야, 아니야, 린나. 아, 제발…….”

켈빈이라는 남자는 린나라는 붉은 머리 여성에게 잡혀 질질 끌려갔고 나머지 두 명의 여성도 그 뒤를 따라 사라졌다.

“후후후후.”

“…스틸 양, 엄청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는 표정이십니다. 인간은 신경 안 쓰시는 것 아니었나요?”

“승리는 언제나 기분 좋은 법이지.”

그 말에 시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 셋도 미인이긴 했지만 스틸 양 같은 사람은 어딜 가서도 찾기 힘들었다.

☆ ☆ ☆

“오! 드디어 완성인가, 리마이누 군.”

데카두인이 법진의 공식을 보며 웃었다.

“네, 데카두인 님. 드디어 완성되었습니다. 자료만 있으면 금방 완성이 가능했으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완성되면 너무나도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뭔가 제가 모르는 수식의 변화가 있었는지요?”

원래 살던 곳에서도 천재 소리를 듣고, 여기서도 빠른 속도로 법도에 대한 지식을 습득해 나가는 중이었지만 아직 대법도사나 1급 법도사들에 비하면 어린아이 수준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이번 프로젝트에서 큰 역할을 했지만 전체적인 그림을 조망할 수 없었던 리마이누는 의문을 표했다.

“걱정 말게나. 최근에 그 에너지를 보충할 곳을 찾았기에 변화를 준 것이니 아무 문제 없을 걸세. 이제 설치만이 문제이지. 설치는 아마 케르발의 외곽에 하게 될 걸세. 라가오포라의 참변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말이지.”

리마이누는 그 이야기를 듣고 최근에 자신이 다녀온 케르발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곳에 찾아온 재앙도.

자신이 아는 한 이 법진의 목적이라면 케르발에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이 법진의 목적을 생각하면… 그게 최고의 효율을 낼 수 있겠군요.”

데카두인은 연구실 바깥으로 나갔고 리마이누는 법진을 더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자료를 이용한 검사에 들어갔다.

<워프-게이트>

이곳 말로는 아직 이름이 없기에, 자신이 붙인 이름.

라-샤르-로아와는 수준이 다른 전설 속의 대이적.

이것만 완성된다면, 라가오포라 따위는 구시대의 유물이 될 것이다.

케르발에 새로운 희망이 되어주리라.

리마이누는 모든 사람들이 워프게이트로 인해 행복해질 생각을 하며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 ☆ ☆

“야, 너 또 어디 가.”

리비아스가 남자를 보며 외쳤다.

“음… 리비아스, 이번에 완성시켰다는 소식 들었지?”

“그래. 후… 아슬아슬했네. 늦었으면 쪽 팔릴 뻔했어.”

리비아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법진이 작동하려면 자신이 필요하다.

늦으면 쪽 팔릴 뻔했는데 법진이 완성되기 전에 예전의 경지를 되찾고 ‘길’을 다시 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에 그걸 케르발에 설치하기로 했거든.”

“케르발? 그 지름길 반대쪽에 있는 거?”

“응.”

그러자 리비아스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하필 그렇게 인구가 많은 데다 그걸 지어?”

“그게… 이게 공식적으로는 라-샤르-로아 강화법진이라고 알려져 있거든. 그런데 이번에 관이 없어지면서 그 길이 박살 났잖아? 그래서 거기다 짓는다고 하더라고.”

그제야 리비아스는 이해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러니까 그 케르발이랑 마르가란을 다시 연결한다는 핑계로 거기다가 설치하겠다는 거지?”

“그렇지. 이건 몰래 지을 수 있는 크기가 아니니까. 들어가는 탈릭 스톤만 해도 어마어마하다고. 인력이랑 물자도 엄청난 수준이고.”

하지만 리비아스는 또다시 의문을 품었다.

“야, 근데 너는 이번에 필요 없잖아. 그런데 왜 나가는 거야.”

이번 법진의 설계는 자신들 담당이 아니다.

리비아스 자신도 에너지 공급만 하러 가는 것이지 엑사르에 대하여 무지하였기에 법진 자체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굳이 도와줄 일이 없을 텐데 나가다니.

“후후… 본래 목적대로 효과가 잘 나오는지 한번 실험해 봐야 할 거 아냐. 그래야 나중에 필요할 때 쓸까 말까 결정을 하지.”

“그래서?”

“실험이라는 게 그래도 어느 정도 쓸 만한 녀석을 맞붙여 봐야 아는 거 아니겠어?”

리비아스는 여전히 이해가 안 갔지만 무슨 생각이 있겠거니 하고 돌아섰다.

저 음흉한 녀석이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일 녀석은 절대 아니었으니까.

리비아스가 사라지고 나서 남자는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 ☆ ☆

암시장에서 볼일을 모두 보고 케르발을 관광하고 있던 시안은 생각보다 케르발의 분위기가 평온하자 살짝 놀랐다.

지금쯤이면 마르가란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연락이 왔을 테고, 그렇다면 난리가 나도 한참 전에 났어야 한다.

마르가란만큼은 아니지만 이 도시에서 무역이 굉장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틀림없으니까.

한데도 이렇게 조용하다니.

궁금증이 발생한 시안은 살짝 귀를 기울였고 이윽고 원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야… 대법도회라는 곳, 대단한데요.”

“뭐가, 동생?”

“이번에 저희가 온 라가오포라가 망가졌잖아요.”

“그렇지.”

“그래서 길이 막힐 것 같으니까 이번에 아예 이곳이랑 마르가란 사이에 공간이동법진을 설치한다고 하더라고요.”

“음?”

그 말에 스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예전에 국가를 운영한 적도 있고 엑사르라는 것에 관심도 조금 있어 많이는 아니지만 그런 방면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다.

지금 이 라-샤르-로아만 해도 고대 제국의 기술이 밑받침되지 않았다면 결코 실현시킬 수 없는 오버 테크놀러지이다.

게다가 라-샤르-로아는 결코 하루 수백 척, 수천 척 분량의 배가 실어 나르는 물자를 이동시킬 수 없다.

질량에 비례하여 소모되는 에너지가 증가하기 때문에 물자까지 실어 나르기에는 탈릭 스톤의 소모량이 너무 크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돌아가도 육로로 가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다.

그런데 물자를 이동시키기 위해 공간이동 마법진을 설치하겠다니?

만약 그게 성공한다면 이렇게 도시가 안정적인 것도 이해는 갔다.

배로 실어 나를 때보다 훨씬 편하고 많은 양의 물자를 나를 수 있을 테니.

하지만 스틸은 이해가 되지 않아 자신도 귀를 기울였다.

자신의 상식으로 그것은 힘들었기 때문에.

그리고 나중에 한번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스틸의 뇌리를 강하게 자극했다.

☆ ☆ ☆

브로샨, 동부해안을 따라 올라가면 나오는 조그마한 어촌 마을 ‘로펠’

키라트는 천천히 로펠의 해변을 따라 걷고 있었다.

허공의 정보창이 끊임없이 정보를 울렸기 때문이다.

[퀘스트: 소중한 인연]

-마르가란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나오는 조그마한 어촌마을. 로펠에서 머물러라.

-보상: 경험치 0. <?>와의 인연

키라트는 이런 이상한 퀘스트는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얻을 것도, 유리할 것도 없어 보이는 퀘스트.

하지만 키라트는 의심을 가지지 않고 퀘스트가 시키는 대로 로펠을 향해 올라갔다.

이제까지 이 정보창이 자신에게 거짓을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정보창에 나온 말의 어감을 보니 그렇게 위험한 것 같지도 않았다.

‘여차하면 귀환으로 도망가도 되고…….’

생존보다 중요한 것은 없기에 <귀환> 스킬에 상당한 투자를 한 키라트는 어느 정도 안심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 스킬은 티안을 떠난 이후로도 퀘스트를 수행하며 자신의 목숨을 많이 구해주었다.

사실 키라트는 많이 답답한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찾아올 누군가를 기다리는 동안 답답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해소하려고 해변을 걷고 있었다.

‘내가 그 자식을 죽일 수 있을까…….’

처음에 자신의 능력이면 어떻게든 힘을 모아서 죽일 수 있을 줄 알았다.

대륙에 있는 퀘스트를 깨고 대륙의 신비를 해결하고 나면 설마 저 녀석 죽일 힘 하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마어마한 착각이었다.

자신이 라-반더라는 종자들의 실체에 대해 자세히 몰랐기 때문에 생긴 착각.

키라트는 갑자기 자신의 <동료> 기능에 추가되어 있던 자에게 위험 표시가 뜨자 허겁지겁 마르가란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사람들이 대피해 있는 언덕 위에서 시안이라는 녀석이 하는 짓을 모조리 지켜보았다.

녀석이 마르가란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는 꼴을 처음부터 끝까지.

녀석은 해변가에 서서 작은 산 하나를 통째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때려잡고 끌고 오는 것도 아니었다. 순전히 완력만으로 저 뿔 여섯 개짜리 거대한 녀석을 육지로 끌어내고 있었다.

게다가 얼굴을 보니 전혀 힘들지도 않아 보였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이런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다른 방법을 모른다. 단지 허공의 정보창만을 따라 움직일 뿐.

“후우…….”

복잡한 마음에 걸음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오, 여기 있었구나. 그런데 어떻게 여기서 딱 기다리고 있었지?”

“엇!”

키라트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생존을 최우선시하는 키라트는 탐지와 관찰 쪽으로 스킬이 많이 투자되어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뒤를 잡히다니!

돌아보니 한 갈색 머리의 남자가 생글생글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극히 평범한 인상, 그렇기에 길을 가다 보아도 다시 기억하지 못할 것 같은 남자는 무엇이 그리 신기한지 키라트를 요리조리 살피고 있었다.

“보자… 소녀, 관을 가지고 있지?”

“…….”

키라트는 안 그래도 잔뜩 긴장해 있던 몸이 더욱 굳는 것을 느꼈다.

“오우! 안 놀라도 돼. 미리 손을 좀 써놨거든, 어디를 가도 알 수 있게. 내가 뭐 신이라서 알고 그런 건 아니야. 신호 따라온 거지.”

키라트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어차피 누구냐고 물어보았자 제대로 대답해줄 리도 없다.

그렇기에 키라트는 조용하게 스킬을 발동시켰다.

[<그랑-라의 눈> 발동]

태양신, 그랑-라의 매, <아랑가르드의 눈>의 상위 스킬인 <그랑-라의 눈>

아랑가르드의 눈보다 훨씬 더 은밀하고, 훨씬 더 정확하게 상대를 살필 수 있다.

어차피 자신이 무력을 담당하기는 무리라고 판단한 키라트였기에 시안이라는 녀석의 약점을 찾기 위해 극도로 노력한 끝에 최근에 얻어낸 스킬이었다.

곧이어 허공에 정보창이 주욱 올라갔다.

그리고 키라트는 눈을 의심했다.

“…당신…….”

“어? 소녀, 방금 뭐한 거지?”

사내는 놀라는 키라트를 보면서도 여전히 싱글벙글이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손바닥을 쳤다.

“아하… 어떻게 관의 위치를 알아내고 여기서 딱 기다리고 있었나 했더니… 너 악사라이의 접속자구나?”

“……!”

아까도 놀랐지만 이번에는 더욱 놀랐다.

“하하! 너무 놀라지 마. 나 정도 살면 산전수전 다 겪는다고.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어서 그래. 그나저나 이러면 예정이 좀 달라지는데.”

당황해서 그런지 말이 없는 소녀를 앞에 두고 남자는 고민에 빠졌다.

처음에는 그냥 관만 가져오려고 했다. 어차피 관만 있으면 사용이야 자신이 하면 되니까.

하지만 저 소녀가 탐이 났다.

악사라이 접속자는 정말 흔치 않게 나타난다.

자신도 오랜 세월을 살면서 단 한 번 보았을 뿐이다.

저 아이가 있으면 정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남자는 소녀를 데리고 가기로 결심하고 입을 열었다.

관도 중요하지만 소녀도 같이 가면 금상첨화이다.

“혹시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

“뭐라고요?”

키라트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상대에게 나온 예상치 못한 권유에 되물었다.

“워워, 참고로 절대 강권은 아니야. 내 모토가 ‘절대 강요하지 않는다’ 거든.”

“…….”

“정 의심스러우면 그… 뭐냐… 허공에 막 보일 거 아냐. 악사라이에 접속할 수 있으니까. 그거 보고 결정하면 되잖아. 그리고 계약 조건도 엄청 좋다고.”

그리고 자신과 함께 하면 무엇이 좋은지를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남자를 무시하고 키라트는 자신의 허공에 맹렬하게 떠오르는 퀘스트를 살폈다.

그리고 그에 따르는 연계 퀘스트도.

모든 것을 살핀 키라트는 드디어 자신에게 방법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이 남자와 함께한다.

“좋습니다. 같이 가지요.”

“…월급도 세고… 그리고 보험도 들어주고 대우도 엄청 좋고, 여차하면… 엉? 결정한 거야? 아직 조건 다 말 안 했는데?”

“뭐… 그런 거야 차차 가서 들으면 되니까요.”

“하하! 잘 생각했어, 소녀. 역시 접속자야. 내가 너무 열심히 설명했나 보네. 좋아… 원래는 우리도 수습기간이 있는데… 우선 좀 해줘야 할 일이 있거든. 같이 가자고.”

남자는 기분 좋게 웃었고 그 옆의 키라트 역시 복수의 길이 보이기 시작하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 ☆

리마이누는 곧 있으면 완성될 대이적법진을 보며 흥분에 몸을 떨었다.

이쪽 세계로 떨어진 것이 가끔 슬플 때가 있지만 이런 순간만큼은 정말 즐거웠다.

워프게이트라니!

공간이동만 해도 놀라운데 공간과 공간을 비틀어 연결한다니.

그쪽 세상에서는 꿈도 못 꿀 대단한 기적이었다.

이곳의 이적과 자신들의 과학이 합쳐져 이루어진 놀라운 결과를 보니 리마이누는 마음 한구석이 뿌듯해졌다.

이곳은 과학이 덜 발달하기는 했지만 그런 점은 이해가 갔다.

이곳의 엑사르는 과학 이상의 기적이었으니까.

사람은 필요에 의해 발전한다. 엑사르를 통한 법도마학이 존재하는데 과학의 발전이 더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리마이누 군,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데카두인이 와서 말을 걸었다.

“아, 데카두인 님. 잘 오셨습니다. 이제 저곳에 에너지를 공급할 원천만 넣으면 될 듯합니다.”

그러면서 리마이누는 저 멀리 보이는, 법진 한가운데의 작은 탑을 가리켰다.

“그런데… 처음에 들어가는 에너지가 정말 만만치 않습니다.”

리마이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걱정 말게. 다 방도를 마련해놓았으니.”

사실 리마이누는 지금도 이 계획이 현실성이 있는지가 궁금했다.

저 차원문을 여는 이적을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에너지는 지구에서도 구하기 힘들었다.

정말 온갖 이적을 사용하고 차원 에너지를 끌어 쓰도록 설계하여 법진을 만들어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문을 여는 에너지의 필요량은 어마어마했다.

핵융합에 버금가는 에너지가 필요한데 그런 것을 이런 중세시대에서 구현해낼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흠… 리마이누 군,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되었지?”

“…3년 정도 되었지요.”

데카두인은 자신의 비밀을 아는 사람 중 하나였기에 리마이누는 거리낌 없이 입을 열었다.

이곳에 떨어진 지 3년.

정말 많은 일이 있었고, 그 와중에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며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법도회의 고위층을 만난 것은 자신들에게는 정말 행운이었다.

이곳에서 법도회를 만나지 못했다면 자신은 지금쯤 길거리의 시체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초인이라는 존재들도 본 적이 없겠군?”

이곳에 온 지 삼 년이라면 초인의 존재를 보았을 리 없다.

“네. 말로만 들었습니다.”

초인. 이곳에서 읽은 책에서 알게 된 존재.

하지만 자신은 이성적이기에 그냥 그 책을 뒤로 던져버렸다.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적어놨기 때문이다.

“후후… 그러면 이번 기회에 영상기기로 잘 봐두게나.”

리마이누는 지금 이게 무슨 소리인가 고민하다가 곧 그 말뜻을 이해했다.

“설마… 저 한가운데… 사람이 들어간단 말입니까?”

“사람이라니. 방금 내가 초인이라고 하지 않았나.”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짓는 리마이누를 보며 데카두인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자네가 할 일은 우선 마무리되었네. 여기부터는 이적이 간섭하는 범위이니… 우선 법도회로 돌아가 있게나…….”

그 말에 리마이누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자신의 지식이 큰 역할을 했지만 여기서부터는 이적의 영역.

아직 3급 법도사 수준인 자신으로는 손도 못 댈 고위의 이적들로 이루어진 법진은 법도사들이 다루게 될 것이다.

☆ ☆ ☆

키아란 해의 중간.

라가오포라가 끊겨 하리쟌들이 득실대는 위험한 바다에 작은 배 한 척이 떠가고 있었다.

이 배는 돛도, 노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로 만들어진 이 배는 정말 빠른 속도로 바다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배는 전혀 공격을 받지 않았다.

“…어디로 가는 거죠?”

키라트는 남자에게 물었다.

그 말에 자신을 ‘라가오페’라고 부르라 한 남자는 대답했다.

남자를 <그랑-라의 눈>으로 살폈던 키라트는 그의 본명이 따로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그렇게 부르라고 하니 더는 묻지 않고 앞으로 라가오페라고 부르기로 했다.

“음… 실험 대상을 찾으러 가는 거지.”

무슨 뒷산 실험용 토끼 잡으러 가듯 남자는 말했다.

“실험 대상? 무엇을 실험하는 건가요?”

“우리가 이번에 뭘 좀 만들었거든. 새로운 이적인데… 친구가 새로 만들었다고 도와달라고 하더라고.”

“그게 실험 대상이랑 무슨 상관이 있나요?”

“상관이 있지. 이번에 투자한 거 생각한다면 여섯 뿔 정도는 가볍게 죽여줘야 한다고.”

키라트는 정신없이 커지는 스케일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럼… 설마…….”

“그래.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은… 아, 맞다. 너도 저번에 봤다고 했지? 그 바쿠론이라는 녀석. 그 녀석의 모체가 있는 곳으로 간다.”

‘…미친…….’

자신은 저번에 그 바쿠론이라는 녀석의 정보를 확인한 적이 있었다.

레벨 203.

갓 여섯 뿔에 오른 녀석이었지만 그 힘은 도시 하나를 가볍게 씹어 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만약 시안 그 자식이 없었다면 그날 브로샨의 동부해안은 박살이 났을 것이다.

그런 녀석의 모체라니.

일반적으로 하리쟌은 나이를 먹을수록 강해진다.

그 말은 저번의 바쿠론이라는 녀석보다 훨씬 강할 가능성이 99퍼센트라는 뜻이다.

눈앞의 남자도 강하지만 둘이 싸우게 되면 자신은 휩쓸려 개죽음을 당할 것이다.

특히 이런 바다 위에서는 도망칠 곳도 없다.

라가오페에게 대략적인 정보를 듣자마자 허공에 퀘스트가 등장했다.

[퀘스트: ;‘바라쿠나>를 <케르발>로 인도하라.]

-<라가오페>의 도움을 받아 키아란 해 멀리 존재하는 <바라쿠나>를 조련하라.

-<바라쿠나>를 찾고 <케르발>로 이끌어라.

-보상: 경험치 3,900,000.(단, 도움을 받을 경우 1/10로 감소), <바라쿠나>의 임시 조종권 획득.

“전 아직 죽기 싫은데요.”

키라트는 허공에 뜨는 상태창을 보자마자 대답했다.

쓰여 있는 문장과 단어의 느낌은 평이했지만 내용 자체는 흉악하기 그지없었다.

저런 녀석을 무슨 수로 조련하라는 말인가.

“후후. 내가 키라트 너보고 죽으라고 데려왔겠니. 다 방법이 있으니 그러는 거지.”

“무슨… 아?”

키라트는 손에 들고 있던 관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래. 너 머리에 쓰고 있는 그 관. 그거 엄청 좋은 물건이라고. 만들기 힘들었어. 그리고 재료 구하다가 진짜 죽을 뻔했다고.”

정보가 뜨지 않는 정체불명의 관.

자신도 대략적인 정보는 알지만 그 진정한 정체는 모르고 있었다.

“…이런 거 하나 가지고 될까요?”

“이런 거라니. 그거 정말 좋은 거라니까.”

라가오페는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는 악사라이의 접속자니까… 아마 바라쿠나를 다룰 수 있을 거야. 상성이 좋거든. 내가 도와주지. 그래도 완전히는 무리겠지만 어차피 케르발까지만 데리고 가면 되니까 무리 없을 거야.”

그러고 나서 라가오페는 배를 조종하여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키라트는 이 남자를 따라오기를 정말 잘 했다고 생각했다.

이 남자를 따라다니다 보면 기회가 생길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 ☆ ☆

시안은 케르발의 거리를 혼자 돌아다니고 있었다.

갑자기 스틸이 일어나더니 잠깐 어디 다녀오겠다고 말하고는 사라졌기 때문이다.

저녁에 숙소에서 보자고 하길래 시안은 알았다고 말하고 나와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케르발을 돌아다니던 시안은 재미있는 것을 보았다.

저번에 보았던 1남 3녀였다.

그들은 길거리에서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켈빈, 이 멍청아! 또 털렸어?”

“아니… 이번엔 털린 게 아니고 잊어버린 거라니까…….”

“그거나 그거나! 덕분에 이게 뭐야!”

“…근데 네가 너무 먹어서 얼마 남지도 않았어.”

“닥쳐!”

시끄럽게 떠들던 그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등에 메고 온 깃발을 높이 들어올렸다.

깃발을 들고 있는 파란 머리를 한 여자는 쪽팔려 죽겠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돈 놓고 돈 먹기: 팔씨름 이기면 건 돈의 열 배!>

시안은 망둥이 등심살을 오물거리며 그들이 하는 것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흔하디흔한 좌판이었지만 세우자마자 인기가 폭발이었다.

승산이 있어 보여 호황인 것은 전혀 아니었다.

여성들은 놀라운 괴력의 소유자들이었으니.

특히 빨간 머리를 한 여성은 지금 상황이 엄청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상대의 팔을 책상에다 메다꽂고 있었다.

하지만 장사는 엄청나게 잘 되었다.

왜냐면 미인들이 진행하는 팔씨름이었으니까.

남자들은 질 걸 알면서도 돈을 걸고 팔씨름을 신청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렇게 하고 손을 쪼물딱거리다가 팔이 꺾일 뻔한 남자들도 많았지만 팔씨름은 대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그걸 유심히 보고 있는데 시안은 남자의 목에서 본 목걸이가 낯익음을 깨달았다.

‘…아… 어디서 봤더라. 아, 맞다!’

시안은 악사라이를 펴 들고 <라시안 대륙 보구 사전-최신판>을 불러내었다.

어제 심심해서 살펴보다가 너무나 구하고 싶었던 아이템.

누군가 분명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해서 만든 아이템이 틀림없었다.

<언약의 목걸이>

-예전에 한 대법도사가 자신의 연인을 지키기 위해 만든 목걸이. 반지와 한 쌍을 이룬다.

-현재 카란의 로르안 백작가에서 소유 중.

-기능 1 <뇌운>: 사용자의 주위에 작은 벼락 구름을 소환해 위기 시 사용자를 보호한다. 사용자의 마력이 추가되면 더 강력한 벼락 구름을 소환한다.

-기능 2<라-샤르-로아>: 착용자가 위험해질 경우 충전되어 있는 모든 마력, 혹은 착용자의 마력을 사용하여 반지의 착용자를 소환한다. 다시 충전하지 않으면 모든 기능이 정지된다.

‘이걸 누가 가지고 있나 했더니…….’

아주 적절한 상황에서 눈앞에 나타나 주었다.

마침 반지도 금발머리 여성의 손에 끼어져 있는 상태였다.

이윽고 시안은 결심한 듯 저들을 향해 걸어갔다.

저 장사가 끝나기 전에 자신이 참가해야 한다.

☆ ☆ ☆

“…레카,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시끄러, 린나! 네 밥값 벌려면 지금 아니면 언제 벌어놓는다고!”

금발을 한 여성은 스물일곱 번째 도전자의 팔을 꺾어버리며 린나라는 붉은 머리 여성을 타박했다.

린나는 민망한지 입을 열지 못했다.

“좋아… 다음… 음?”

레카는 어디선가 본 얼굴이 자신의 앞에 앉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 그때 그 가슴 괴물이랑 같이 있던 남자다.”

‘…그런 식으로 기억하고 있었군…….’

시안은 한숨을 쉬었고 그제야 레카도 기억이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때 그 친구네. 그런데 여긴 무슨 일?”

“뭐… 별건 아니고. 저도 한번 참가해볼까 해서요.”

시안은 자신이 너무 치사하다고 느꼈지만 저 목걸이가 너무 탐났기 때문에 얼굴이 붉어지는 걸 참으며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시안이 얼굴을 붉어지는 것을 본 레카는 다른 생각을 한 듯 씨익 하고 웃었다.

“친구, 바람 피우면 어떻게 해. 내가 매력적이긴 하지. 히히.”

“…손 잡으려고 여기 앉은 거 아닙니다.”

“으잉?”

레카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여기 얼마까지 걸 수 있습니까?”

“허허허… 이 친구 큰일 날 사람일세. 집에 돈이 많나 봐.”

레카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뭐, 걸고 싶은 만큼 거세요. 저희는 무제한 배팅이 기본입니다.”

푸른 머리를 한 여성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흠… 진짜요? 혹시… 배상할 여력이 없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자 푸른 머리 여성도 왠지 시안이 수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저런 자세는 무조건 이길 자신이 있을 때 나오는 태도였다. 하지만 이윽고 고개를 돌렸다.

자신들은 켈빈의 호위가 임무이기 때문에 대륙에서 자신들을 위험하게 할 만한 모든 대상을 외우고 있었다. 그들보다 강한 자가 대륙에서 이백을 안 넘기에 가능한 행위였다.

기억 속에 저런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푸른 머리 여성, 쿠린은 안심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물건으로 갚을 테니까요.”

“휴우… 좋습니다. 무르기 없기입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시안은 스틸이 용돈으로 쓰라고 주고 간 탈란트를 몽땅 올렸다.

“……?”

“…야, 쿠린. 이거 얼마야.”

“음… 이천 탈란트는 넘어 보이는데…….”

레카를 비롯한 네 명은 시안을 너무나도 수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자신 없으십니까?”

“허허허… 행정관 씨가 무슨 재주가 있으신 모양인데… 후회할 텐데…….”

“저기… 레카… 지금이라도 안 하면 안 될까?”

“저리 가, 켈빈.”

레카라는 여성은 자존심이 잔뜩 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살짝 불안했는지 쿠린을 곁눈질했다. 이런 녀석 아느냐는 표정이었다.

쿠린은 고개를 저었다. 리스트에는 없다는 뜻이다.

그제야 레카는 딱 걸렸다는 표정으로 시안을 바라보았다.

‘꼭 이런 놈들이 있지… 뻥카 치는 녀석들…….’

도박이건 뭐건 돈질에서 밀리면 끝이다.

“어디서 기가 약한 친구들만 보고 살아오셨나 본데… 후회할 거야.”

“그러면 하시는 건가요?”

시안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서 안 한다고 하면 별수가 없기 때문이다.

“흐흐. 이제 와서 쫄리시나. 늦었다. 이리 와!”

그리고 레카라는 여성은 거칠게 시안의 손을 잡아챘다.

‘어째 나는 좀 거친 여성들이랑 엮이는 느낌이 드는데…….’

하지만 목적을 달성했으니 상관없다.

“자… 그럼 시작합시다.”

그리고 경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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