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만의 검공-6화 (7/81)

<6. 수호대의 귀환>

교육기간이 끝난 시안이 새로운 구간인 엘-루아(EL-LUA) 구역에 배치된 지도 어느덧 열흘이 지났다.

수습기간에는 두 명의 선임이 붙어 셋이 한 조로 운영하지만 실제로는 같은 구역을 3인이 흩어져서 순찰과 치안을 담당한다. 만약 사건이 생기면 한 명이 시간을 버는 사이 주위 순찰구역을 돌던 동료들이 달려오는 방식이다.

시안은 새로이 바뀐 자신의 생활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이 가란-티아란 곳은 마치 자신을 위해 있는 직장 같았다.

옆에 감시할 사람이 없으니 잔소리할 사람도 없고, 자신이 순찰을 돌고 있는 구역은 왕가와 고위귀족들이 몰려있는 구간이라 그런지 충돌이 일어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자고로 어중간한 놈들이 목소리 크게 내고 치고받는 법이지, 진정한 거물들은 그렇게 천박하게 싸우지 않는다. 그들의 전장은 이런 길바닥이 아니라 밀실 안, 혹은 전쟁터이다(정확히 말하면 거물들이 맞붙는 장소가 전쟁터가 된다).

게다가 이곳의 거리는 각 귀족가문들이 자신의 세력을 뽐내듯이 저택을 아름답게 치장해놓고 저택 앞의 거리를 명장들의 조각품과 전시물들로 채웠기 때문에, 그 거리 한가운데를 돌아다니고 있자니 자신이 고위귀족이나 왕가의 일원이 된 느낌이었다.

로만 백작가도 고위귀족이긴 하지만 굉장히 검소한 축에 속했기 때문에 이런 세력자랑에는 관심이 없었다.

듣기로는 자신의 위치 배정에 케르벨 백작님의 입김이 들어갔다고 하는데, 이래서 사람들이 ‘학연 지연 혈연’ 하는구나 싶었다.

엘-루아 거리는 평소에는 조용하였지만 시안이 배치된 근 열흘간은 굉장히 분주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시안이 배치된 기념으로 축하파티를 해주기 위해서는 물론 아니다.

<수호대의 귀환>

각 가문과 왕가에서 차출되었던, 대륙을 지키고 있던 영웅들이 귀환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각 가문에서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오히려 엘-루아 지역은 귀족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하여 최대한 조용하게 진행되었기에 이 정도이지, 다른 구역은 수도 바깥에서 공급되는 사람과 물자로 인하여 수도 전체가 터져 나갈 듯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시안은 모르고 있겠지만 현재 다른 구역들은 축제분위기로 전체가 들떠 있었다.

평민들은 새로이 귀환하는 영웅들을 먼발치에서라도 살펴보기 위해 하던 일을 접고 축제를 관람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장사꾼들은 그들이 원하는 축제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물량을 공급하고자 기쁨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오 년에 한 번 있는 대행사이니만큼 이때 두둑하게 주머니를 채워두어야 한다.

평민들은 축제분위기이지만 이곳, 엘-루아 거리의 귀족가와 왕가는 그 와중에도 서로를 견제하며 상대를 견제하고 정탐하기 위하여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들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대북벽의 수호대가 돌아오는 순간, 변화가 시작된다. 그 변화가 수도, 로아-티안과 티안 왕국을 어떻게 이끌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 변화에서 도태되는 순간 패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는 것을! 양 진영 모두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두려워 참을 만큼 참았지만 일단 격돌이 벌어지면 생존자들을 봐줄 만큼 자비로운 자들은 결코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시안에게 그런 건 남의 일이다. 수호자들이 돌아오건, 전쟁이 터지건, 자신의 일에만 집중하면 되는 것이다.

자신이 비록 왕실을 수호하는 로만가의 아들이긴 하지만, 로만가는 항상 외적으로부터 티안과 수도를 지키는 역할을 했지, 내부 정쟁에 휩쓸리지는 않았다.

만약 로만가가 한쪽 편을 들며 위태로운 줄타기를 해왔다면 지금쯤 자신은 여기 태어나 있지도 않을 것이다(이상하게 형이 다른 것은 다 잘하는데 정에 약해서 아버지는 항상 어느 한쪽에 휩쓸릴까 봐 걱정하고 계신다).

<무력을 갈고닦고, 편들지 않고, 자신의 소임에 충실할 것>

이것이 이제까지 로만가가 살아남아 왔던 길이며, 가문의 직계에게만 전해 내려오는 가문의 제2가훈이다.

1가훈은 알다시피 후손을 많이 낳는 것이다. 시안도 기회가 되면 1가훈을 열심히 지키겠다고 기회를 노리고 있다.

무력을 갈고닦는 건 포기했지만 나머지 두 가지를 지키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나, 자신의 소임인 이곳 엘-루아 거리의 분쟁 방지 및 치안 유지에 최선을 다한다.

단, 근무시간인 여덟 시부터 여섯 시까지만. 나머지는 교대근무자가 알아서 해줄 것이다.

둘, 어기면 귀족가든 왕가든 상관없이 공평하게 제재한다. 매뉴얼에 의거하여.

마음속으로 이렇게 원칙을 세운 시안은 틈틈이 매뉴얼을 읽어보며 거리를 순찰하며 돌아다녔다. 자신은 통 암기에 재주가 없었지만 급한 건 없었기에 그냥 취미생활 한다고 생각하고 마음 편하게 읽어보고 있었다.

이렇게 시안이 엘-루아 거리를 바리바리 돌아다니는 동안 수도의 북쪽 외곽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평원에서는 수호대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 ☆ ☆

수도의 북쪽 외곽, 바샤르 평원.

이곳에는 거대한 크기의 이적법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라-샤르-로아(RA-SHAR-ROA)>

태양신이 거닐었다는 ‘빛의 길’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대이적법진의 용도는 단 하나이다.

각 대법진을 연결하는 공간이동의 통로.

고대 제국에서도 사용하기 쉽지 않았던 대이적법진을 엑자일 대법도회에서 수십 년간의 연구 끝에 재현해내었다. 너무나도 많은 양의 탈릭 스톤과 각종 희귀한 재료들이 설치에 필요했기 때문에 전 대륙에 채 스무 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효과만은 ‘대’이적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다.

수천 킬로미터의 거리를 무시하고 두 지점을 연결해주는 라-샤르-로아는 이 순간에도 각국이 단 하나라도 더 설치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매년 탈릭 스톤의 3퍼센트라는 막대한 양이 라-샤르-로아의 유지에 투입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대북벽의 수호대 본부에도 설치되어 있는 이 통로를 이용하여 각국은 매 오 년마다 수호대에 필요한 인재를 이동시키고 수호대가 필요로 하는 물자와 인력을 공평히 분배하여 공급하고 있다.

티안 왕국의 경우에는 수도인 티안 근처에 하나, 셀라인 백작령 근처의 왕실 직할령에 하나가 위치하고 있다.

그중 하나인 바샤르 평원의 라-샤르-로아를 통해 오늘 수호대가 귀환하게 될 것이다.

평원에 모인 엑자일-대법도회의 1급 법도사와 2급 법도사들은 주위 귀족과 왕가의 시선을 받으며 끊임없이 탈릭 스톤을 이용하여 엑사르를 운용하며 대법진의 가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구우우우우… 우우우우우우우…

웅장한 소리를 내며 작동하고 있는 라-샤르-로아는 엑사르의 흐름에 따라 대법진에 새겨진 각종 문양이 이동하며 휘황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법도사들은 엑사르의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더욱 집중하였고, 대법진에서 나오는 소리와 빛이 점점 커지더니 어느 순간 대법진의 한가운데, 허공에서 짤그락!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나며 허공에 균열이 갔다.

그리고 그 소리는 점점 더 커지더니 소리와 함께 생긴 균열도 점점 더 크기를 키웠고, 이윽고 반지름이 수 미터에 달하는 커다란 모양의 암흑색 구가 껍질을 깨고 나오듯 허공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쉽게 보기 힘든 그 광경에 대치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왕가와 귀족들은 검은색 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암흑색 구가 완성된 순간, 주위의 빛이 모조리 암흑색 구로 빨려 들어갔고 갑자기 밝아지며 폭발하듯 빛을 뿜어내는 구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인상을 찡그리며 눈을 감았다.

감았던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대법진, 라-샤르-로아가 완전한 작동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이 암흑색 구를 보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허공의 구멍에는 저 멀리, 수천 킬로미터 바깥에 위치하고 있는 대북벽 수호대 본부의 광경이 보이고 있었고, 그곳에는 사나운 인상을 한, 하지만 익숙한 얼굴들 여럿이 마찬가지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 드디어… 5년 만에 다들 돌아오는군요.”

안쪽을 보며 탈린 자작이 중얼거렸다. 저곳에 갈 인재의 대부분을 자신이 뽑아서 보냈으니 그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탈린 자작은 무수히 인재가 넘치는 나라샤 후작 주변에서, 배신을 하지 않고, 높은 성장가능성과 강철 같은 정신을 가진 열세 명을 뽑아서 집어넣었다. 그 많은 인재들 중에서도 적합한 인재는 단 열셋뿐이었다.

왕가에서는 자신들이 열한 자리를 가져갔다고, 그래서 비등한 협상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하겠지만 전혀 아니다. 그저 자신들이 열세 자리만을 필요로 했을 뿐이다. 그리고 저들에게 열한 자리를 주는 대가로 각종 광산의 이득을 가져왔으니 남는 장사였다.

하지만 그렇게 엄선하여 뽑아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 돌아온 인재는 왕가가 여섯, 자신들이 여덟뿐이라고 하니 탈린 자작은 혹여나 자신이 피어나지 못한 재능을 저물게 하여 전력을 약화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건 무장이 아닌 탈린 자작의 생각일 뿐이었다.

다른 무장들은 아직 건너오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수호대에게서 여기까지 피어나오는 강렬한, 마치 짐승과도 같은 반데르의 향에 자신의 투쟁심이 밑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고 그 느낌을 가라앉히고 진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 자신들의 옆에 서있는, 새로이 들어갈 수호대들도 각 진영에서 엄선한 동량들임에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사람을 숫자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옆의 인재들이 단 오 년 만에 저렇게 발전해서 온다면 열 중 다섯이 아니라 둘만 살아 돌아와도 남는 장사이다.

거기다 그들이 가지고 돌아올 탈릭 스톤까지 생각한다면… 열을 보내 하나만 돌아와도 남는 장사인 것이다. 처음 수호대를 본 무장들은 그때서야 왜 그리 각국이 수호대의 숫자의 균형 유지에 열을 올리는지를 깨달았다.

이렇듯 각 진영 사람들이 대법진을 통해 이루어지는 수호대의 세대교체를 지켜보며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 때, 이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단둘뿐이었다.

카란에 대한 티안의 수호후, 나라샤 후작.

티안 왕국 제일검객, 키라인 검공.

왕궁을 수호하며 중립을 표방하고 있는 로만 백작을 제외하면 티안 왕국의 양 진영을 대표하는 거인들은 이번에 돌아와 각자 진영으로 합류하는 수호대를 보며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구 수호대와 신 수호대의 세력교체가 모두 이루어진 후 라-샤르-로아는 작동을 멈추었고, 건너편에 보이던 대북벽의 광경은 순식간에 다시 암흑색의 구로 바뀌더니 마치 계란껍질이 다시 계란에 달라붙는 것처럼 암흑의 균열은 메워지기 시작했고 이윽고 아무것도 없는, 바샤르 평원의 황량한 광경만이 남았다.

이제 바샤르 평원에 남은 것은 대치하고 있는 각 진영들뿐이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나라샤 후작이었다.

“키라인 공작님, 이제 슬슬 수도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저희를 기다리고 있을 티안으로 돌아가 보아야지요.”

묘한 의미를 담은 대사를 키라인 검공에게 던진 후작은 검공의 대답을 기다렸다. 검공은 나라샤 후작은 지긋이 바라보다가 짤막한 대답을 던지고는 뒤의 왕가 진영 측을 향해 소리쳤다.

“그래야지, 우리를 기다리는 티안으로. 자! 다들 돌아간다! 도시에서는 수호대의 귀환을 기념하는 축제 시작만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양쪽 모두 묘한 긴장감을 남긴 채 각 진영은 수도를 향해 방향을 틀어 돌아가기 시작했다. 비록 오늘이 축제라지만 모두들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단 하나였다.

<오늘의 축제를 마지막으로 내일부터 거대한 변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그리고 마지막에 살아남는 쪽은 우리다!>

☆ ☆ ☆

수호대의 귀환식을 축하하는 왕실 파티가 열렸다.

토베-티안의 아름다운 대정원과 외궁에서 열린, 각 계의 유명인사들과 대귀족들이 모두 참여한 이 파티는 화려했지만 묘한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시안은 그 파티의 구석에 서서 과일을 주워 먹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둘러보고 있었다. 처음 와본 파티라 아직 적응이 안 된 상태였다. 하지만 처음 와본 자신도 지금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한 상황이 아닌 것은 알 수 있었다.

‘무슨 놈의 파티가 이렇게 살벌해… 원래 귀족가의 파티가 다 이런 건가?’

물론 그럴 리 없다. 애초에 적대적인 파벌에서 주최하는 파티에는 핑계를 대며 안 가는 경우가 많기에 친근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럴 경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파티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수호대의 귀환식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지금 파티장 안에는 귀족가와 왕가의 파벌들이 섞여있는 상태로 묘한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귀족가의 여식들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기대하고 있던 시안 입장에서 원래 귀족가 파티는 이렇게 전쟁터 같은 곳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저 가운데 녀석들은 뭘 그리 줄줄 기운을 흘리고 다니나… 쓸데없이…….’

이러한 긴장감이 단순히 양 진영과의 마찰 때문은 아니었다. 이번 파티의 주역인, 귀환한 수호자들. 파티장의 중심에 서있는 그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사방팔방으로 뿌려대고 있는 기세가 파티의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심약한 문관 출신 귀족가들은 이미 그 중심에서 멀어져 외곽 정원에서 주최하는 파티장으로 이동한 지 오래였고, 문관 출신임에도 이곳에 반드시 남아있어야 하는 인물들(대표적인 예로 저기 있는 탈린 자작과 땀을 뻘뻘 흘리며 창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케르벨 백작님이 있다)은 안색을 찌푸리면서도 이곳, 외궁에 머무르고 있었다.

샬롯 양은 아버지가 여기 있어 나가지도 못하고 그나마 영향력이 덜한 외궁의 외곽에 서서 안쓰러운지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샬롯 양은 부끄러움을 타는지 이상하게 자신 앞에서는 이야기가 별로 없었지만 아버지의 엄명으로 자신의 옆에서 사교계에 대한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이때 이쪽으로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을 느낀 시안은 그쪽을 바라보았다. 드레스 끌리는 소리를 들어보니 여성이 틀림없다! 동물 같은 청각으로 그 소리를 잡아낸 시안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쪽을 바라보았지만 곧이어 얼굴 가득 실망감을 드러냈다.

“또 뵙네요, 셀린 드 키라인 양.”

“그런 실망한 표정 집어치우지그래. 나도 네가 아니라 샬롯을 보러 온 거니까.”

그렇게 말한 셀린은 곧이어 샬롯을 바라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꼭 안아주었다. 샬롯 역시 셀린을 보고 너무나도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샬롯! 안녕! 오랜만이야. 그날 못 가서 미안해. 줄 선물도 샀었는데.”

“언니 괜찮아요! 하지만 그날 못 오셔서 마음이 아팠어요. 꼭 뵙고 싶었는데. 무슨 일이 있으셨다면서요?”

“…그렇지. 어떤 훌륭한 분이 나를 강제로 연행해가는 바람에…….”

그렇게 말하고 이를 으드득 간 셀린은 옆에서 딴청을 피우는 시안을 바라보았다.

그날 연행된 후 리안 단장의 신원보증을 받고서야 끌려간 그녀는 곧바로 키라인 공작가로 끌려갔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할아버지 앞으로.

할아버지에게 엄청난 꾸지람을 들은 그녀는 제발 꾸지람 선에서 끝나기를 바랐지만 세상 살기가 그렇게 녹록하지가 않았다.

정기적인 휴일을 제외하고 일 년에 단 10일 쓸 수 있는 휴가를 모조리 사용하고 할아버지의 개인연무장으로 끌려온 그녀는 지금까지 그곳에 갇혀 할아버지와의 특별수련을 받다가 수호대의 귀환식인 오늘에야 나온 것이다.

까드득.

그 일을 생각한 셀린은 안에서의 생지옥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이를 갈았다. 옆에 있는 이 녀석, 시안의 잘못이 아닌 건 알지만 밉상인 건 어쩔 수가 없다.

리안 3단장에게 듣고 나서야 그 녀석이 로만 백작가의 2공자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주먹을 가볍게 피한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간다. 로만 백작가의 녀석이 약할 리가 없으니까. 그 사기적인 혈통은 무장가 사이에서 이미 유명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강해 보이지는 않는데…….’

거기까지 생각한 셀린은 더 이상 이 녀석에 대한 생각은 그만두고 눈앞의 샬롯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언니, 그런데 분위기가 무거워서 그런지 너무 힘드네요. 이런 파티 분위기는 처음이에요. 뭔가 끈적끈적한 게…….”

“아, 그렇지. 샬롯 너는 무장이 아니니까 힘들 수 있겠다. 손을 줘볼래?”

샬롯의 손을 잡은 셀린은 반데르를 운용하여 샬롯에게 흘려보냈다. 그러자 샬롯의 손에서 푸른색의 안개가 피어나더니 샬롯을 한 바퀴 휘감았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샬롯은 갑자기 가벼워진 자신의 몸을 보고 신기한 듯 셀린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 언니, 몸이 엄청 가벼워졌어요. 어떻게 된 거죠?”

“저기 가운데 있는 녀석들이 경쟁적으로 기세를 흘려보내서 지금 외궁의 분위기가 이렇게 무거운 거야. 무장들의 기세는 반더가 아닌 일반인들에게는 큰 영향을 미치니까… 특히 저 정도로 난폭한 기운이라면 더욱 그렇지.”

무식한 녀석들… 이라는 소리를 뇌까린 셀린은 한편으로는 도대체 어떤 세상에서 살아 왔길래 저런 기세를 가지게 된 건지 궁금해졌다. 대북벽이라는 곳이 흉험한 곳이란 건 들었지만 저 정도라니…….

저 가운데 있는 녀석들은 대부분이 자신과 비슷한 연배였다. 30에서 40 사이의 인재들. 나이가 많을수록 강해지는 반더의 특성상 핵심전력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그런 나이였다.

5년 전에는 말이다.

5년 만에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서 돌아왔다. 그곳에 가기 전에는 자신과 비슷한, 혹은 자신보다도 아래인 익스퍼트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모두 마스터 급, 그것도 상당한 수준급의…….’

갓 마스터에 진입한 실력들이 아니었다. 이미 산전수전을 다 겪고 마스터라는 경지를 자신의 몸 안에 올올히 새겨 넣은, 실전무장들.

지금이라면 자신은 한 명을 상대하기도 벅차리라. 리안 단장 정도는 되어야 맞상대가 가능할 듯하였다. 3대 무력집단 중 하나인 근위기사단의 제3근위기사단의 부단장인 자신이 이 정도라니. 셀린은 자신을 다그치던 할아버지, 키라인 검공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이제 수도는 격전지가 될 것이다. 그렇게 어중간한 실력으로 사고 치며 돌아다니다가 수호대의 녀석들과 붙으면 팔다리가 성할지 모르겠구나. 열흘밖에 없지만 정신을 개조해주마.’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셀린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는 강해 보았자 얼마냐 강하겠느니 했는데… 보니 알겠다.

그들은 괴물들이 사는 곳에서 괴물들과 싸우고, 괴물들과 같이 살면서, 같은 종류의 괴물이 되어온 것이다.

그러한 그들과 같이 싸울 생각을 하며 셀린은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 ☆ ☆

옆에서 샬롯과 셀린이 의기투합하며 대화를 시작한 바람에 바다 한가운데 섬에 고립된 것처럼 붕 뜨게 된 시안은 갑자기 심심해졌다.

‘아, 그러고 보니 여기에는 형도 있겠구나. 오랜만에 얼굴이라도 한번 봐야 되겠어.’

자신의 형, 리안이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다고 저택에서 나간 뒤로 형의 얼굴을 볼 일이 거의 없었다. 형은 저택 안에 있을 때도 항상 연무장 안에서 살다시피 하여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얼굴을 볼 일이 많이 없었는데 집을 나가니 얼굴을 보기가 더 힘들어졌다.

근위기사단의 단장이라고 하니 이 안에서 찾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그는 눈으로 좀 두리번거려 보았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눈으로는 확인하기가 힘들었다. 생각해보니 형이 외궁 쪽이 아닌 정원 쪽에 있음을 깨달은 시안은 지금이 아니면 또 얼굴 보기 힘들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잠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파앙!

시안의 몸속에서 잠시 소리가 들린 후 묘한 파동이 쭉 뻗어 나갔다. 미약한, 그래서 일반인들은 결코 느끼지 못한 파동은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순식간에 외궁을 넘어 쭉쭉 퍼져 나갔다.

시안은 곧 로만가 특유의 익숙한 기운 두 개를 느낄 수 있었다. 하나는 이곳 외궁 쪽에서, 하나는 자신의 본가인 로만가에서.

지금 이 시간에 아버지가 파티에 와 있을 리가 없으니 외궁 쪽에 있는 기운이 형이리라. 아버지는 이러한 정치적 모임을 굉장히 꺼려하여 웬만하면 참석하지 않으시니까(그리고 아버지의 기운이라고 치기엔 그 기세가 약했다).

정원에 있을 줄 알고 살핀 거였는데 의외로 형은 파티장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단지 사람들이 바글바글 몰려있는 장소라서 보이지 않았던 것일 뿐.

저 난장판 안으로(시안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들어가서까지 형을 만나야 하나 고민했던 시안은 좀 있다 대화가 끝나면 만나러 가기로 하고 조용한 곳을 찾아 파티장 구석으로 위치를 옮겼다. 그런데 뜻밖의 인물이 찾아왔다.

☆ ☆ ☆

‘음?’

눈앞의 귀환한 수호대의 아이들과 이야기하고 있던 나라샤 후작은 갑자기 피부로 미세하게 느껴지는 파동을 느끼고는 흠칫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후작님?”

나라샤 후작의 앞에서 대화를 하고 이던 이번 수호대의 귀환자 중 하나인 쿠알 자작가의 대공자, 쟈크는 갑자기 후작이 왜 그러는지를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느낌이었나…….’

너무나도 미세한 파동이었기에 주변에서 딱히 이상한 징후를 느끼지 못한 나라샤 후작은 자신의 착각이라 생각하고 다시 대화로 주제를 옮겼다.

“아니다. 다시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대북벽에 있다가 돌아온 느낌이 어떠한가?”

“후후… 아직도 실감이 잘 나지 않습니다. 이 포근한 공기와 평화로운 분위기… 어서 적응해야겠지요.”

“그래. 그동안 바뀐 것이 많지만 어서 적응해야 할 테다. 앞으로 더 많은 것이 변할 테니까.”

“네, 후작님. 앞으로 잘 이끌어 주십시오.”

간단한 대화를 마친 후작은 고위귀족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어차피 이곳은 자세한 이야기를 하는 자리가 아니다. 진정한 이야기는 지금부터 자리를 옮겨, 내궁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혼자 남겨진 쟈크는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기 전에 주위를 여유 있게 한번 둘러보았다. 주변의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서이다. 왕가 쪽에서도 자신들과 같은 귀환자들을 중심으로 고위귀족들이 모여 대화가 한창이었다.

하지만 귀환자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북벽에서 지겹게 봤거니와 곧 있을 충돌에서도 지겹게 보게 될 것이니까.

고위문관들 역시 그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그는 정치에 대하여 그렇게 해박한 편은 아니었다. 가기 전에는 어느 정도 촉을 세우고 있었지만 수호대로 간 뒤로는 정치적인 감각은 더욱 죽어 버렸고, 5년 만에 돌아오니 그나마 있던 인맥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정치와 사교를 담당하는 귀족들은 따로 있으니까. 그들은 그들의 일을 하면 되고, 자신은 자신의 일을 하면 된다. 정쟁은 그의 전문분야가 아니었다.

그가 궁금한 것은 그들이 수호대에 가있는 동안 자리를 지키던, 왕가 쪽의 무장들이다. 그들이야말로 자신들의 새로운 상대가 될 자들이니. 그중에서도 가장 궁금한 자는 단연코 로만가의 대공자였다.

수호대에 속해있다고 하여도 외부와의 소식이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완전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수도의 정세와 유명인물에 대한 소식 정도는 수호대에서도 끊임없이 들을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들려온 인물이 로만 백작가의 대공자, 리안 폰 로만이었다.

로만가의 젊은 사자,

60에 달하는 반데르 수치,

최연소 마스터,

최연소 가란-티아 최고간부 승진,

최연소 왕실 근위기사단 입단,

최연소 왕실 근위기사단장.

키라인 검공과 나라샤 후작, 로만 백작들이 골고루 세웠던 모든 기록을 혼자 갈아치우며 혜성같이 등장한 영웅. 듣기로는 겨우 24살이란다. 자신의 나이가 41인 걸 생각하면 정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나이인데 옆에 써 있는 기록들을 보면 정말 믿을 수가 없을 정도이다.

때문에 자신은 수호대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얼굴도 보지 못한 리안 폰 로만에 대해 이를 갈았다.

무장의 가문에서 태어나 뼈를 갈고 살이 찢어지는 고련을 하여도 마스터란 벽에 막혀 십 년 가까이 헤맸다.

이 벽을 넘기 위해 일부러 대북벽으로 가는 수호대에 지원했다. 살아 돌아오기만 하면 마스터가 될 수 있으리란 희망에. 이렇게 대북벽으로 넘어가 수십 번씩 죽을 위기를 넘기며 재작년에 겨우 도달한 경지가 마스터이다.

그런데 이 리안이라는 녀석은 등 따시고 배부르게 수도에서 놀고먹으며 수련을 하여도 타고난 반데르의 재능과 로만가의 비전 반데르-로아, <사자의 길>의 힘을 빌려 마스터에 도달하다니.

때문에 수도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이 어린놈의 뼈마디를 잘근잘근 부숴놓으리라 생각했다. 모르긴 몰라도 자신의 동료들 중 몇 명은 그런 생각을 했으리라.

정신 나간 미란 년은 예외로 치기로 했다. 이년은 리안 대공자가 훤칠한 미남이라는 소리를 듣고 수도로만 돌아오면 어떻게든 꼬셔버리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도둑년이 따로 없다. 비록 반데르의 힘으로 동안을 유지하고 있다지만 39살이 24살을 꼬실 생각을 하다니!

이리저리 둘러보던 쟈크는 마침내 구석에서 로만 백작과 똑 닮은 녀석을 찾고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사고 칠 생각은 없지만 자신의 손에 불구가 될 놈인데 미리 인사 정도는 해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왕족가 사이에 있었으면 껄끄러웠을 테지만 마침 파티장의 구석에 위치하고 있는 것을 본 쟈크는 하늘이 자신을 돕는다고 생각하고 천천히 그쪽으로 걸어갔다.

☆ ☆ ☆

시안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남자를 보며 오늘 자신은 영 일진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교계에 가면 어여쁜 귀족가의 여식들도 만나고, 어여쁜 여귀족들도 만나고, 어여쁜 여기사라든가… 어여쁜 여법도사라든가… 어여쁜 여사제라든가… 이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게 아니었나? 분명 자신이 알기로는 그랬다.

실제로 가끔 형에게서 이야기를 들으면 파티를 가면 다가오는 여성들 때문에 부담스러워서 파티에 못 가고 있다고 그랬었다. 시안은 아직 될 놈만 된다는 세상의 진리를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자신에게 이 파티에서 꼬인 사람이라고는 별명이 전차라고 불리는 다혈질의 여기사 하나이고(여자의 별명에 전차가 들어가다니… 듣기만 해도 평소 어떻게 하고 다녔는지를 알 수 있다), 곧 꼬일 사람은 딱 봐도 자신에게 시비를 걸기 위해 기세를 풍기며 오는 냄새나는 남정네 하나이다.

한숨을 푹푹 내쉰 시안은 다가오고 있는 저 귀환자라는 남자가 자신을 향해 오는 것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오늘 전쟁신은 시안을 저버린 것 같았다.

어느새 자신의 앞까지 온 사내는 다짜고짜 자신의 소개를 했다.

“안녕하신가, 유명인사. 이번에 돌아온 쿠알 자작가의 쟈크라고 한다네. 로만가의 명성에 대해서는 평소에 많이 들어왔다네. 반갑네.”

그의 인사말을 듣는 순간 시안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이제까지 수도 외곽에 박혀 있다가 수도로 들어온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자신이 유명인사일 리가 없다. 눈앞의 이 쟈크라고 하는 작자는 자신을 형인 리안으로 착각하여 온 것이다.

로만 백작의 외모는 워낙 유명하였으니, 똑 닮은 자신을 처음 보는 사람은 리안 대공자라고도 착각할 수 있다(형은 오히려 어머니를 닮아 얼굴 선이 가는 미남자였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시안에게는 자신에게 두 가지 방안이 있음을 깨달았다.

1. 계속 오해하도록 놔두고 대화를 한다.

2. 오해를 풀고 형인 리안에게 이 쟈크라는 남자를 떠넘긴다.

평소 같았으면 고민할 것도 없는 문제이다. 당연히 2.

자신은 귀찮은 것을 싫어하거니와 형에게 보내면 알아서 잘 처리할 것이다.

문제는 이 남자가 적의를 풀풀 풍기고 있다는 것(눈동자를 보니 사고 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다).

그리고 이 남자가 안타깝게도 형보다 더 강하다는 것.

모르긴 몰라도 이 민폐덩어리를 형에게 떠넘겼는데 형에게 가서 시비라도 걸면 형은 상당히 곤란할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그리고 딱 봐도 이 남자는 그 곤란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싶은 게 눈에 보였다.

그렇다면 형을 사랑하는 동생으로서 자신의 선에서 정리할 수 있도록 노력해보기로 했다. 다행히 이 남자는 자신이 리안이라고 직접적으로 물어본 일이 없으니 나중에 자신이 둘째라는 것이 들통 나도 뭐, 어물어물 지나간다면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였다.

시비가 안 붙으면 베스트고, 만약 붙으면 적당히 두들겨주기로 결정한 시안은 입을 열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자크 경. 대북벽에서 귀환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이거 참 후배를 보니 반갑군. 자네에 대한 소식이 대북벽 너머까지 들려 오길래 궁금해서 한번 찾아와봤네.

그래, 안락한 수도를 지키는 생활은 어떤가? 등 따습고 배부르니 아주 풍채가 좋을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구먼! 어째 비실비실한 것이 누가 보면 문관인 줄 알겠어!”

성격 안 좋은 사람이 들으면 바로 표정이 일그러질 정도로 말투 하나하나에 정성 들여 시비를 걸고 있었지만 시안 입장에서는 모두 맞는 말인지라 긍정해주기로 했다.

등 따습고 배부르고 안락한 수도를 지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 그리고 자신이 매우 만족해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네. 수도 생활이 워낙 안락해서 굉장히 편안합니다.

자크 경은 딱 봐도 험난한 인생을 살아오신 것 같습니다. 얼굴을 보니 그 생활이 고스란히 배어 있네요.

쟈크 경도 이제부터는 저처럼 좀 편안한 생활을 즐기셔야 할 듯합니다.”

시안의 대답을 들은 쟈크는 자신의 판단이 아주 정확했음을 느꼈다. 틀림없이 리안이라는 녀석은 틀림없이 재수 없을 거라고 대북벽에서부터 노래를 부르고 다녔는데 이제 미란도 자신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리라.

노안은 쟈크 경의 콤플렉스 중 하나였다. 대북벽을 지키며 그 누구보다도 절친한 동료들도 노안이라고 부르지는 않을 정도로.

육체를 활성화시키는 반데르의 수련자들은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이번의 귀환자들도 모두 30대 중후반에서 40대 중후반까지 분포가 다양했지만 생긴 것은 모두 20대처럼 보였다. 눈앞의 쟈크 경만 빼고.

쟈크 경은 젊었을 적부터 노안이었던지라 젊은 시절부터 그가 사교계에 나타났다 하면 귀족가의 여식들이 그를 피해 은근슬쩍 구석으로 피해 가고는 했다.

자신의 콤플렉스를 정확히 짚어오는 놈의 대답에 이마의 혈관이 삐죽 하고 튀어나오는 것을 느낀 쟈크 경은 아직은 대놓고 사고를 칠 수 없었기에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하… 하하하하! 그렇게 내 몸을 생각해주니 고맙구먼그래. 자네를 대북벽에서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네.”

‘그랬으면 그 얄팍한 팔다리를 반대로 꺾어놓았을 텐데.’라는 말은 속으로 삼킨 쟈크 경이 웃으며 악수를 건넸다.

악의가 풀풀 담긴 그 악수를 보며 시안은 슬슬 마무리를 해야겠다고 느꼈다.

한마디 툭 던져보고 폭발하면 자신의 선에서 처리하려고 했는데 별로 넘어올 것 같지가 않았다. 물론 노안 이야기는 도발하려고 지어낸 것이 아니라 보이는 그대로 말한 것뿐이었다.

자신의 뼈마디를 부러 트리고 싶어 하는 남정네와 길게 이야기하는 취미도 없거니와, 더 길어져 자신이 대공자가 아닌 2공자임을 들키면 일이 복잡해진다.

자신의 형에게 가서 사고 치기 전에, 귀환하자마자 파티에 참석하여 피곤할 것이 분명한 이 남자를 푹 쉬게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한 시안은 손을 마주잡았다.

“예. 반갑습니다, 쟈크 경.”

손을 잡는 순간 쟈크 경은 옳다구나 하여 놈의 손아귀를 뭉갤 정도로 쥐어짜며 동시에 쿠알 가문 고유의 반데르-로아 ‘붉은 전차’를 운용하며 반데르를 녀석의 손으로 맹렬하게 쏟아부었다.

예전에 초록 비늘의 쿠라탄을 자신의 애병인 둔-켈 해머로 때려잡을 때도 이 정도의 힘이 들어가진 않았던 것 같은데, 감정이 실려서 그런지 더 강한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어차피 상대도 마스터라고 하니 이 정도는 견뎌내리라. 손가락 한두 개정도야 나갈 순 있지만.

‘아… 어머니가 읽어주신 책에서 나온 그러한 수법들이 다 지어낸 얘기 아니었나? 이거야 참…….’

너무나 상투적인 상대방의 대응에 시안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꾹 쥐며 손가락 한두 개 정도는 날려주어야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상대방을 보니 자신도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하였다.

으드득.

‘크아악!’

쟈크 경은 갑작스럽게 상대방의 손이 자신을 맹렬하게 쥐어짜오자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생긴 건 호리호리한 놈이 무슨… 그 예전에 하리쟌과 싸우다가 놈의 손아귀에 팔이 비틀릴 뻔했던 때의 그 느낌이 손아귀로부터 전해지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신이 쏟아부었던 반데르가 그 이상 튕겨져 맹렬하게 자신의 안을 침범해 들어오고 있었다. 난폭한 반데르의 흐름에 내장이 온통 박살 나는 느낌이 몸 내부를 강타했다.

손가락뼈가 으스러지는 느낌이 드는 중에도 상대가 멈출 생각을 안 하자 쟈크 경은 더는 참지 못하고 자신의 왼 주먹을 녀석에게 휘두를 준비를 했다. 사고를 치면 안 된다지만 이러다가 정말 오른손을 영영 못 쓰게 될 것 같았다.

그 순간, 상대가 자신을 붙잡고 있던 손을 딱 놓았다. 내부를 휘젓던 기운도 원래 없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모두 사라졌다.

“으헉!”

그 순간 짧은 단말마를 내뱉은 자크 경은 온몸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어, 이런……. 쟈크 경, 왜 그러신지요? 아무래도 피곤하셨던 모양이군요.

역시 수호대에서 돌아오시자마자 파티는 조금 무리였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집에 가서 쉬시는 것이 좋으시겠군요.”

그러고는 시안은 마침 형의 대화가 끝난 것을 느끼며 형을 만나기 위해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자크 경을 뒤에 두고 발걸음을 옮겼다.

☆ ☆ ☆

시안은 오랜만에 보는 형을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형! 오랜만이야. 하하!”

“그래, 시안. 너도 오랜만이구나. 이번에 가란-티아에 들어갔다는 얘기는 들었다. 장하구나. 그래, 너 같은 인재가 집에서 놀고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하던 중이었던 그의 형, 리안은 오랜만에 보았지만 평소와 같이 반갑게 자신을 맞이하여 주었다.

“그나저나 귀족가 진영이 갑자기 시끄럽구나.”

파티장의 구석, 정확히 말하면 방금 전까지 시안이 서있던 곳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것을 본 리안은 반데르를 끌어 올려 그쪽에서 일어나는 대화를 얼핏 듣고 대답했다.

“아, 형… 신경 안 써도 돼. 쟈크 경 정도면 가만히 놔둬도 회복하겠지…….”

그 이야기를 들은 리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동생은 정치나 이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다. 수호대에도 관심이 없다. 그 말인즉, 이번에 돌아온 쿠알가의 대공자인 쟈크 경을 동생이 알고 있을 리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정확히 저곳의 문제가 쟈크 경의 문제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시안, 크게 일을 벌이지는 않았겠지?”

리안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자세한 상황은 모르겠지만 저곳에 나자빠져 있는 인물은 자크 경일 것이고, 범인은 눈앞에서 웃고 있는 자신의 동생일 것이다.

“별거 아니었어. 사소한 해프닝 정도……? 저쪽도 뭐라고는 말 못 할 거야.”

“그래, 네 성격상 알아서 잘 했겠지만…….”

자신의 동생에 대해 누구보다, 심지어 아버지인 로만 백작이나 동생 본인보다 잘 파악하고 있는 리안은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시안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걱정되긴 하지만 크게 번지지 않도록 처리했으리라 믿기로 했다.

‘형은 나중에 나한테 선물이라도 해야 돼, 진짜.’

딱히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기에 시안은 이 말은 속으로 삼켰다.

그 뒤로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부모님에 대해 주변이야기를 하며 소소한 이야기를 진행했다. 그런 두 형제를 주위에서 바라보는 시선들이 있었다.

비록 중요한 대화가 끝나 조금 한산해졌다고 하지만 리안 기사단장의 주위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이 포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갑자기 나타나 리안 기사단장을 형이라고 부르는 사람을 보고 신경을 집중했다.

소문으로만 듣던 로만가의 2공자라니. 듣기로는 반데르 수치가 57이라고 하였다. 형만은 못해도 형 못지않은 재능을 소유하고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인물이니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다가왔다.

“오, 소문으로만 듣던 로만가의 2공자이신가 보군요. 처음 뵙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리안 경?”

걸어 나온 그 남자는 정중하게 리안을 보며 물었다.

“네. 여러분, 여기는 제 동생 시안 폰 로만입니다. 열일곱 살이 된 올해부터 가란-티아로 들어가서 근무하고 있지요. 로만, 여기는 론 경이시다. 이번에 수호대에서 귀환한, 카란 자작가의 3공자이시다.”

“오! 시안 공자도 가란-티아서부터 시작하시는가 보군요. 리안 경, 긴장되시겠습니다. 리안 경이 세운 최연소 기록이 깨지는 거 아닌가 해서요. 하하!”

“별말씀을요. 반갑습니다, 론 경.”

풍기는 기세를 보고 혹시나 했는데 옆에서 대화를 하고 있는 사람들 역시 왕가 측 수호대의 귀환자들이었다. 역대로 로만가는 중립을 지켜왔지만 나라와 왕가에 충성하려는 마음이 과도한 형은 이미 왕가 측 인사들과 상당히 친해져 있었다.

곧이어 주위 왕가 측 수호대와 인사를 나누기 시작한 시안은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느낌이었다.

‘이게 아닌데…….’

어느 한쪽에 휩쓸리는 것은 자신이 바라지 않는 상황이다. 이렇게 인사를 하고 소개를 받게 되면 철저하게 중립을 지키려던 계획이 무너진다. 자신이 귀족 측의 수호대 하나를 다져놓았으니 그럴 가능성은 더 커진다.

간단하게 인사만 하고 형만 보고 나오려고 했던 시안은 점점 상황이 이상해져감을 느꼈다. 한술 더 떠서 귀족 측에서 일단의 무리가 우르르 몰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 젠장… 치사하게 이른 겁니까, 아저씨?’

몰려오는 무리의 기세를 읽어보니… 보나마나다. 귀족 측 수호대들이다. 쟈크 경 쪽의 상황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이야기를 듣고는 이쪽으로 오는 것이리라.

“리안 대공자! 어디 있나. 우리 쪽에 이렇게 인사를 해놓고 조용히 거기 숨어있으면 되는 일인가?”

이 말에 리안은 어리둥절해하며 앞으로 한 발짝 나섰다. 자신은 아까부터 중앙에서 대화를 하고 있으며 귀족 측 인사와는 엮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제가 리안 폰 로만입니다.”

“난 나라샤 후작가의 대공자 레논이라고 한다. 근위기사단장이면 사람 손을 뭉개놓아도 되는 건가?”

“무슨 소리십니까, 아까부터 계속 여기에서 있었습니다만…….”

“흥! 오리발을 내미는 건가. 쟈크 경이 말하길, 로만가의 자제가 자신의 손가락을 부러트렸다고 했는데. 중립을 표방한다는 왕실 근위기사단이 우리 수호대를 이렇게 푸대접하는지 몰랐군. 목숨 걸고 대륙을 지키러 대북벽에 다녀왔는데 말이다.”

“……!”

그제야 상황을 대충 짐작한 리안은 뒤의 시안을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동생아… 손가락을 부러트리다니. 좋게 좋게 넘어갈 일이 아니지 않느냐.’

뒤에 서있던 시안은 오해가 커지기 전에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하고 형이 미처 말리기도 전에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로만가의 시안 폰 로만이라고 합니다. 그 일은 형이 아닌 저와 일어난 일이니 저와 이야기하시지요.”

그러자 레논 대공자는 고개를 돌려 옆의 시안을 바라보았다.

로만가의 2공자. 소문으로만 들었지 처음 보았다. 로만가의 인물임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로만 백작과 똑같이 생겼으니.

하지만 레논은 2공자의 나이도 알고 있었다. 열일곱. 배 속에서부터 무술을 익혀도 쟈크 경을 어떻게 하기란 불가능한 나이다. 그 유명한 태양검도 스물이 넘는 나이에 마스터에 올랐다.

여기까지 생각한 레논은 코웃음을 쳤다. 리안 대공자가 상황을 회피하려 동생과 말을 맞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리안 경, 실망이구려. 동생 뒤에 숨다니. 듣기로 2공자의 나이가 열일곱이라 들었는데. 그럼 수호대의 역전의 용사인 쟈크 경은 지금 배 속부터 무술을 익힌 2공자에게 손이 뭉개진 것이구려. 그게 말이 된다 생각하오?”

주변 사람들도 그 이야기를 듣고 웅성대었다. 이미 마스터에 오른 리안 경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만, 겨우 열일곱 나이인 2공자가 그러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 그런 짓을 왜 한단 말입니까. 쟈크 경에게 물어보면 바로 나올 일임을.

그리고 악력이 무력은 아니지 않습니까. 쟈크 경과 악수를 했을 뿐인데 생각보다 그 손아귀가 보드라웠을 뿐이니 너무 흥분하지 마시지요.”

시안은 있는 그대로, 사실대로 말을 했지만(사실 형을 비꼬는 것을 보고 감정이 좀 상한 것도 있었다) 레논 대공자에게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이 기회에 리안 대공자를 압박을 하러 온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몰아붙이기도 뭐하다. 그렇게 되면 목표로 했던 리안 대공자는 쏙 빠져나가 버리고 쟈크 경은 열일곱 살 뼈마디도 여물지 않은 어린놈에게 박살 난 모양새가 되니까. 게다가 자신들은 열일곱 살 소년을 핍박했다고 소문이 나게 될 것이다.

리안 대공자가 이렇게까지 머리가 좋았나… 라고 생각한 레논은 리안에 대한 경계수치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 단순히 무력만 높은 자인 줄 알았는데… 거기다 여차하면 동생이 위험할 수도 있는데 동생을 끌어들이는 비정함까지 갖추다니.

“으드득! 좋소. 무언가 착오가 있었나 본데… 미안하오. 그리고 어린 친구와 악수한 것 가지고 일을 크게 만드는 것도 옳지 않지.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소. 그리고 시안 2공자는…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되길 기대하리다.”

이를 갈며 레논은 뒤로 물러났고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자신의 뒤에 서있던 왕가 측 인물들도 긴장을 풀었다.

‘일 났네…….’

나이 40이 넘은 사람이 그렇게 치사하게 이를 줄은 몰랐다.

생각보다 더 커진 일에 앞으로 자신의 평화로운 생활이 반쯤 물 건너갔음을 깨달은 시안은 인상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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