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화 : 초월자-02 + 에필로그 -->
1월 5일 정오 무렵.
인류에겐 영원히 잊지 못할 날이었다.
던전의 잠금장치가 풀리면서 전 세계가 던전으로 변했다.
고층 빌딩이 우뚝 솟은 화려한 도시들 위로 풀과 나무가 생겨나고 울창한 밀림이 만들어졌다.
드디어 인류 최후의 날이 시작된 것이었다.
문득 하늘에서 공간이 열리고 상위 등급의 괴수들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단순히 놈들을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과 공포심이 생겨났다.
상위 등급의 괴수들의 능력은 압도적이었다.
인류의 그 어떤 무기도 놈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특히, 7성급 몬스터와 8성급 몬스터 앞에는 수십, 수백 명의 신인류가 달려들었지만, 조그만 상처 하나 만들어내지 못했다.
“으아악!”
“사, 살려줘.”
세상은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순식간에 북한이 사라지고 중국의 절반이 날아갔다.
일본 열도는 완전히 물속에 잠겼고, 유럽은 피로 얼룩졌다.
그 어떤 나라도 상위 등급의 괴수들을 막을 수 없었다.
모든 나라들이 괴수들의 세상으로 변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괴수들의 이빨에 찢겨 죽었고, 거대한 발에 짓밟혀 죽었다.
심지어 지하와 밀실에 숨어 있던 사람들조차 액운을 벗어나지 못했다.
인류에겐 그 어떤 희망도 없었다.
그렇게 인류는 수만 년의 역사를 뒤로 한 채 종말을 고하기 직전의 상황에 이르렀다.
바로 그때 대한민국과 미국에서 반격이 시작되었다.
먼저 신인류들로 구성된 군대가 사체로 강화한 무기를 앞세워 괴수들을 공격했다.
그들은 만물상점에 가서 훈련을 받은 건 아니지만, 대한민국 정부와 미국 정부에서 동하의 지시를 받고 은밀하게 훈련시켜온 정예 군대였다.
탕탕탕!
소총에서 불을 뿜을 때마다 괴수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기관포가 난무했고, 미사일이 괴수들을 덮쳐갔다.
6성급 로우피림과 하이피림의 사체로 강화한 무기들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특히, 신인류의 능력까지 더해져 괴수들을 학살해 나갈 수 있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계 종족의 테스터들이 파티를 맺고 상위 등급의 괴수들에 맞서갔다.
태풍이 몰아치고 마법과 강기와 검무가 난무했다.
지수가 이끄는 대한민국 신인류와 제임스 무어가 이끄는 미국 신인류들도 빠질 수 없었다.
그들은 각자 대한민국과 미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상위 등급의 괴수들과 전쟁을 벌여 나갔다.
여기서 그들이 밀리면 대한민국과 미국 역시 무너지게 될 것이었다.
그들은 만물상점에서 훈련받은 것처럼 능숙하게 파티를 맺고 괴수들을 공략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또 수많은 괴수들도 죽일 수 있었다.
만물상점에서 훈련을 받고 능력을 업그레이드하지 않았다면 결코 상위 등급의 괴수들과 맞서 싸우는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대한민국과 미국이 괴수들의 힘에 밀리는 형국이었다.
무엇보다 세상이 던전으로 변하고 그 안에 있던 괴수들이 밖으로 튀어 나온 것이 타격이 컸다. 그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격차가 벌어졌다.
동하는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실정이었다.
그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괴수들을 죽이고 사람들을 구했다.
전력상 열세에 처해 있던 곳도 동하가 나타나면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었다.
심지어 동하는 대한민국에서 미국으로 날아가 사람들을 도와주었다가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모습이었다.
서서히 괴수들 쪽으로 기울던 승패가 동하 한 명으로 인해 다시금 균형의 추가 맞춰졌다.
하나 그것도 잠시.
이번엔 시간이 지날수록 대한민국과 미국 쪽으로 조금씩 승기가 기울기 시작했다.
시얀은 물론이고 란테 등은 괴수들이 보내오는 홀로그램을 보며 전장의 분위기를 살피고 있었다.
“으으.”
그들은 동하의 활약에 치를 떨었다.
자신들 쪽으로 기울던 승부가 겨우 동하 한 사람 때문에 패배 직전으로 내몰리는 상황이 황당하다 못해 기가 막힐 정도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동하 한 명 때문에 샤이언 종족의 대업이 번번이 가로막히고 있었다.
동하를 죽이지 않고는 마지막 전쟁도 승패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
이제는 길고 긴 악연을 끝낼 때였다. 동하만 죽이면 지구라는 행성은 별 볼일 없는 그저 그런 곳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시얀은 동하를 잡을 수 있는 최종병기를 완성한 상태였다.
불의 기운을 머금어 완벽에 가까운 9성급 몬스터가 바로 그것이었다.
시얀은 즉시 와카를 호출했다.
“와카 대장. 준비 되었습니까?”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던 중이오.”
“좋습니다.”
시얀은 동하가 있는 곳의 좌표를 찍고 공간을 열었다.
슈슈슉!
두 개의 신형이 공간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와카와 카일의 모습을 한 9성급 몬스터였다.
☆ ☆ ☆
쇄애액!
동하의 팔이 허공을 갈랐다.
순간 그의 손끝에서 무형의 강기가 흘러나왔다.
검법 최고의 경지라는 수중무검 심중유초라는 절기였다.
동하의 손에는 검이 없었지만, 마음만 먹으면 그 어떤 명검보다 더 날카로운 강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케에엑!”
무형의 강기가 눈앞의 8성급 몬스터를 일도양단했다.
놈을 잡기 위해 이계 종족의 테스터들과 만물상점에서 훈련을 받은 신인류 등 수십 명이 달려들었지만, 오히려 놈의 발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뿌리며 죽어갔다.
8성급 몬스터는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동하가 새롭게 강화한 무기도 통하지 않아서 사신으로 불리고 있었다.
한데 그런 사신을 동하는 단 한 번의 손짓으로 온몸을 두 동강 냈던 것이다.
사람들은 겨우 목숨을 건진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동시에 동하에게 경의와 존경의 마음을 보냈다.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하늘에서 두 개의 인영이 무서운 기세로 떨어져 내렸다.
쿵!
와카와 카일의 모습을 한 9성급 몬스터였다.
동하는 차갑게 웃었다.
“누군가 했더니 그날 자기 혼자 살겠다고 수하들을 버려두고 도망쳤던 자로군.”
꿈틀!
와카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동하의 말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의 가슴을 후벼 팠다.
“잊지 않고 기억해 줘서 고맙구나. 그날 이후로 난 네놈을 다시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려왔다.”
“글쎄. 다시 만난다고 한들 그때와 다를 게 뭐가 있을까?”
“흐흐, 자신이 없었다면 애초에 네놈을 먼저 찾아올 리가 있을까?”
와카가 곁눈질로 슬쩍 카일의 모습을 한 9성급 몬스터를 쳐다보았다.
그것의 의미는 뻔하다.
동하도 카일의 모습을 한 것을 보고 바로 느낌이 왔으니까.
‘9성급 몬스터다.’
이전 생애에서 만났던 9성급 S몬과는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카일의 능력까지 스며들었으니 어쩌면 이전 생애의 9성급 S몬 보다 더 강하면 강했지 결코 약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9성급 카일의 눈동자에서 번쩍 빛이 일더니 동하를 스캔했다.
- 스캔 완료. 주적 확인.
9성급 카일이 어느새 전투 모드로 돌입했다.
와카가 비릿하게 웃으며 동하에게 말했다.
“흐흐,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네놈이 상대하기에는 무척 벅찬 상대일 테니 말이다.”
그것을 끝으로 와카가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와카는 이미 9성급 카일의 능력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바 있었다.
동하의 능력에 충격을 받은 그였지만, 9성급 카일의 능력에는 공포와 경외심이 느껴졌다.
투명화 능력과 그림자 종족의 능력, 거기에 타임 리버스 능력과 공간 도어까지.
시얀은 동하를 잡기 위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능력을 사용했다.
9성급 카일은 오직 파괴하고 전투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였고 그 어떤 것도 파괴할 수 없었다.
스스슥!
먼저 움직인 쪽은 9성급 카일이었다.
9성급 카일이 허깨비처럼 동하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바로 공간 도어 능력이었다.
그리고 불행히도 동하에겐 공간 도어 능력이 없었다.
그날 동하가 능력을 흡수했던 로우피림과 하이피림의 몸속에 공간 도어 능력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하의 등 뒤에서 공간이 열린다 싶은 순간 9성급 카일이 빠져나왔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육안으로는 절대 구분할 수 없었다.
쐐애액!
허공에 귀청을 찢어발길 듯한 파공성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9성급 카일의 팔이 날카로운 검으로 변해 있었는데, 검에서 뜨거운 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공간도어 능력에 불의 기운을 담은 검법까지.
9성급 카일은 모든 능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능도 뛰어났다.
동하의 금속 액체 능력을 깨뜨리려면 상극인 불의 기운이 필수이기 때문이었다.
“역시.”
와카는 9성급 카일의 움직임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이미 한 번 공간 도어 능력을 본 적이 있지만, 아직도 그의 능력으로는 9성급 카일이 언제 사라져서, 언제 나타난 건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이는 무조건 당하고 난 다음에나 느낄 수 있었다.
그건 동하도 마찬가지였다.
동하 역시 9성급 카일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놓쳤던 것이다.
당연히 9성급 카일이 동하의 등 뒤에 나타난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동하는 뒤늦게 맹렬한 기세로 자신의 등 뒤를 찔러오는 기운을 감지했지만, 그때는 이미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도저히 피할 수 없었다.
공간이동은 고수들과의 싸움에서 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공간이 열리고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까지 많게는 2초 정도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성공이다.”
와카가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동하가 머릿속으로 거대한 장벽을 떠올렸다.
순간 그가 머릿속에 생각한 일들이 현실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땅에서 거대한 기운이 올라오더니 단단한 장벽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콰콰쾅!
요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9성급 카일의 검이 단단한 장벽에 막혀 동하의 등을 찌르는데 실패했다.
“이, 이럴 수가…….”
와카는 두 눈을 크게 치떴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동하가 어떻게 손을 써서 막은 것인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다, 단순히 우연의 일치겠지.”
세상에 공간 도어 능력보다 더 빠르게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카일의 9성급 살기가 폭발했다.
놈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공격이 막히자 더욱 강하게 동하를 밀어붙였다.
이번엔 타임 리버스 능력으로 동하를 공격했다.
기본적으로 타임 리버스는 시간을 마음대로 조절하는 것이었다.
본인의 시간은 평소와 똑같이 흐르지만, 주변의 시간을 천천히, 혹은 빠르게도 만들 수 있었다.
타임 리버스를 이용한 공격을 펼치면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움직임이 엄청나게 빠르게 되기도 하고, 슬로모션을 취한 것보다 더 느리게 변할 수도 있었다.
사사삭!
9성급 카일은 주변의 시간을 천천히 흐르도록 만들었다.
당연히 9성급 카일의 움직임만 평소와 똑같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몇 십, 혹은 몇 백배 더 빠르게 느껴졌다.
동하의 눈에도 9성급 카일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그것이 타임 리버스 능력이라는 것을 알 리 없었다.
하지만, 본능은 무서운 법이다.
동하는 카일의 모습이 사라지는 순간 머릿속으로 대기 중의 공기를 끌어 모으는 상상을 했다.
순간 머릿속에 떠올린 것이 그대로 현실이 되어 두 겹 세 겹으로 공기의 장막을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주변의 공기가 두 배 세 배로 무겁게 변했다.
그건 곧 중력이 강해져 상대의 움직임을 둔하게 만드는 효과로 이어졌다.
“잡았다.”
눈앞에서 사라졌던 9성급 카일의 모습이 동하의 눈에 나타났다.
타임 리버스 능력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펑!
땅속에서 솟구친 기운이 거대한 주먹이 되어 9성급 카일의 몸을 후려갈겼다.
이 역시 동하가 머릿속으로 생각한 것이 그대로 현실로 나타난 것이었다.
일격을 당한 9성급 카일은 뒤로 튕겨져 저 멀리 날아갔다.
9성급 카일은 꼴사나운 모습을 연출했지만, 겨우 그런 것으로 어찌될 놈이 결코 아니었다.
놈이 벌떡 일어나 으르렁 거리며 동하에게 달려들었다.
자신의 가진 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려 공간 도어 능력과 타임 리버스를 연이어 펼쳤다.
하지만, 이미 한 번 동하의 손에 깨진 수법들이었다.
아무리 전력을 끌어올려 대항한다 해도 삼라만상과 우주만물과 싸워서 이길 수는 없었다.
그랬다.
동하가 머릿속으로 떠올려 대기 중의 공기를 이용하고 땅의 기운을 사용한 건 바로 다섯 가지 원소들이었다.
그날 동하는 조각을 들고 있던 팔에서 묘한 울림이 전해지는 경험을 했다.
사실 동하가 가지고 있던 것은 네 개의 조각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방금까지 네 개의 조각들이 하나로 합쳐지던 기운이 아직까지 남아 있었던 것이다.
동하는 뒤늦게 그것을 깨닫고 그 기운들을 몸속으로 흡수했다.
생각도 못했던 기연이었다.
동하는 고작 하나의 조각에서 불의 기운을 모두 얻을 수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불과 물. 그리고 불과 조화까지.
공기 원소만 빼고 나머지 네 개의 원소가 동하의 손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동하는 아쉬운 대로 음양조화선풍신무를 이용해 네 개의 원소를 하나로 합치려 했다. 공기 원소에 대한 단서는 아직도 오리무중이었고, 지금은 가지고 있는 능력이라도 극대화시키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한데, 음양조화선풍신무로 네 개의 능력을 하나로 합치는 순간 대기 중의 공기가 미친 듯이 요동치는 것이 아닌가?
순간 동하는 불현 듯 머릿속에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동하는 미친 듯이 요동치는 대기 중의 공기를 자신의 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처음에는 계속 실패를 거듭했고, 좀처럼 공기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동하는 포기하지 않고 정신을 집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네 개의 능력이 조금씩 융화가 될수록 대기 중의 공기도 조금씩 동하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랬다.
다섯 번째 원소인 공기는 흔히 사람이 숨을 쉬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공기였다.
하나, 네 개의 원소가 한자리에 모이고 그것들이 하나로 합치지 않으면 결코 특별한 공기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동하가 다섯 개의 원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순간 괴음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띠링!
- 각성의 조건이 완성되었습니다. 드디어 완성체로 향합니다.
- 마나가 8서클로 올라섭니다.
- 마나가 9서클로 올라섭니다.
- 염력이 100%로 복구됩니다.
- 불사지체가 100%로 복구됩니다.
띠링!
띠링!
괴음이 쉴 새 없이 울려댔다.
동하는 정신이 없었다.
인생 한방이라더니, 지금이 딱 그 짝이었다.
그토록 완성체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세월이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단지 이렇게만 되었다면 9성급 카일과 비슷한 수준이거나 어쩌면 약간 부족했을 것이었다.
이전 생애에서 9성급 S몬에게 없던 새로운 능력들.
즉, 동하가 새로 흡수해서 얻은 능력인 기계 종족과 액체 금속 능력과 투명화 능력, 그리고 그림자 종족의 능력까지 극한으로 각성을 하면서 동하는 전혀 새로운 완성체로 우뚝 올라섰던 것이다.
우주만물이 곧 동하였고, 동하가 우주만물이었다.
동하는 땅과 하늘. 그리고 우주만물의 모든 것들을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고 조종할 수 있었다.
무엇이든 만들어내고 무엇이든 창조해 낼 수도 있었다.
초월자.
그것 말고는 동하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동하는 지금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완벽한 신이 되어 있었다.
☆ ☆ ☆
“케에엑!”
9성급 카일의 몸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처음에는 대등하게 싸우는 것 같았지만, 균형의 추가 깨진 건 오래지 않아서였다.
동하의 눈에 낯설었던 능력들이 한 번씩 깨진 이후부터 카일은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급속도로 승패가 동하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9성급 카일의 몸을 지탱하던 불사지체는 깨진 지 오래. 온몸이 성한 곳을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금속 액체 능력 역시 불의 기운에 맥없이 무너졌고, 타임 리버스와 공간 도어 능력 등 동하에게 통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결국 거듭된 동하의 공격에 9성급 카일의 몸을 이루던 수많은 능력들이 빠르게 약해지더니 종국에는 회복불능 상태로 이어지고 말았다.
“으으.”
와카는 물론이고 홀로그램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시얀과 란테 등은 사색이 되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이건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아무리 봐도 결과가 뒤바꿔야 정상이었다.
어떻게 모든 능력을 집어넣은 9성급 몬스터가 동하의 손에 맥없이 패할 수 있는지 두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얼마나 이를 갈고 준비해왔던 시간들이었던가?
동하에게 복수하기 위해 절치부심했던 모든 시간들이 허무하게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동하는 초월자가 된 이후 시력이 예전보다 몇 배는 더 좋아졌다.
물론 기감 역시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동하는 아까부터 누군가 자신의 모습을 훔쳐보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9성급 몬스터의 눈에 마이크로 카메라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전에는 절대 눈치 채지 못했을 일들이었다.
동하는 마이크로 카메라를 통해 샤이언 종족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하가 카메라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기다려라. 이제 네놈들 차례다.”
쇄애액!
한줄기 빛이 번쩍 일어나 9성급 카일의 몸을 갈랐다.
평범한 괴수로 전락한 9성급 카일의 몸이 마침내 두 동강으로 잘라졌다.
흠칫.
시얀과 란테 등은 기겁했다.
이것이야말로 동하가 자신들에게 보여주는 경고이리라.
그들은 금방이라도 동하가 샤이언 행성으로 쳐들어올 것 같아 무서웠다.
그들은 재빨리 모든 공간을 차단했다.
지금은 지구를 공격하는 것보다 동하가 샤이언 행성에 오지 못하게 모든 공간을 차단하는 것이 먼저였다.
동하가 차원이동을 하지 못하게 공간만 차단하면 나중에 언제든 반격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을 터였다.
우주 멸망 프로젝트는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그것도 겨우 동하 한 사람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게 다 끝난 건 아니었다.
빌어먹을 놈의 대 예언가 율리언트의 예언도 아직 성취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샤이언 행성은 아직까지 멀쩡했다.
“와와!”
동하와 9성급 카일의 대결을 숨죽여 지켜보던 이계 종족과 대한민국의 신인류가 함성을 질렀다.
모두 승리를 예감할 수 있었다.
기세를 잡은 그들은 더욱 힘을 얻어 괴수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와카는 동하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동하는 와카의 손목에 있던 귀환 장치를 눌렀지만, 공간이 열리지 않았다.
그제야 동하는 샤이언 행성에서 공간을 차단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젠장.”
괜한 도발을 했던 것일까.
동하는 다시 한 번 샤이언 행성으로 차원 이동할 수 있는 기회를 눈앞에서 놓치고 울분을 토했다.
이제는 영영 샤이언 행성에게 반격할 수 있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이대로 모든 게 다 끝나는 것일까?
한데 바로 그때였다.
“응?”
동하가 갑자기 눈을 반짝거렸다.
9성급 카일의 몸이 두 동강 나는 순간 낡은 나무 조각 모양이 바닥에 떨어졌던 것이었다.
“아! 에스테리아의 눈물.”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유일하게 공간을 열고 샤이언 행성으로 갈 수 있는 물건.
원래 카일이 성녀의 품에서 빼앗았던 에스테리아 신전의 보물인데, 그것이 아이러니하게도 9성급 카일이 죽는 순간 동하의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기다려라. 이제부터 시작이다.”
<-- 에필로그 -->
평화로운 주말이었다.
날씨도 좋고 하늘엔 구름 한점 없이 쾌청했다.
샤이언 종족들은 평소와 똑같이 휴가를 즐기거나 가족들과 여가를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정오가 지나 저녁이 되어갈 무렵이었다.
영원히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질 것 같던 하늘에 난데없이 공간이 열리고 괴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차 침공.
1성급 몬스터부터 시작해서 5성급 몬스터까지 수많은 괴수들이 샤이언 행성을 덮쳤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도시가 무너지고 건물이 붕괴되었다.
어디서 많이 익숙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랬다.
지금 이건 샤이언 종족이 지구에 했던 모습 그대로 동하가 재현한 것이었다.
괴수들을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구에 넘쳐나는 것이 괴수들이니까.
동하는 이미 모든 것을 초월한 신적인 존재였다.
그는 죽어가던 괴수들을 다시 회복시키고 본래의 능력을 되찾아 주었다.
대신 프로그램을 바꿔서 적을 지구에서 샤이언 종족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제아무리 샤이언 종족의 문명이 고도로 발달했다고 해도 갑작스러운 괴수들의 침공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했던가?
그들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괴수들에게 대항하려는 순간 또 다시 공간이 열리고 더욱 강력한 괴수들이 나타났다.
2차 침공.
이번엔 6성급 몬스터부터 시작해서 8성급 몬스터까지.
모두 상위 등급의 몬스터들이었다.
괴수 대 샤이언 종족의 고도로 발전한 문명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샤이언 종족은 겨우 2차 침공을 막아냈지만, 그 피해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거의 모든 것들이 파괴되고 수많은 동족들이 죽어나갔던 것이다.
그에 반해 동하의 진영은 아무런 피해도 없었다.
오직 죽은 게 있다면 샤이언 종족들이 만들어낸 괴수들뿐이었다.
샤이언 종족들이 겨우 숨을 돌리기도 전에 3차 침공이 일어났다.
이번엔 9성급 몬스터를 앞세운 동하와 지구의 신인류, 그리고 이계 종족들까지.
그렇게 지금까지 샤이언 종족에게 당한 모든 종족들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었다.
☆ ☆ ☆
지구는 평화를 되찾았다.
최후의 전쟁 이후 많은 나라들이 사라지고 무너졌지만, 그래도 들판에 봄은 오는 법이다.
지구를 멸망 직전으로 몰고 갔던 괴수들이 더 이상 인류를 침공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샤이언 종족은 3차 침공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우주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노예로 전락한 사람들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왔다.
샤이언 행성이 파괴되기 전에 이계 종족들은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을 극적으로 구출했던 것이다.
남궁세가에도 가족들이 돌아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샤이언 종족이 사라지며 우주에도 평화가 찾아온 셈이었다.
하지만, 정작 동하는 전혀 안녕하지 못했다.
지구와 우주에는 평화가 찾아왔는지 몰라도 동하의 인생은 오히려 예전보다 더 꼬여가는 기분이었다.
먼저 전세계의 기자와 언론이었다.
예전에도 신인류의 시초가 누구인지 논란이 일었었지만, 그때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관심이 사라졌다.
하나 이번에는 달랐다.
이건 아예 광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광풍의 진원지는 바로 대한민국과 미국이었다.
수많은 나라들이 무너지고 사라진 가운데 유독 대한민국과 미국만이 최후의 전쟁에서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이다.
각 정부에서는 뒤늦게 땅을 치고 후회했다.
그때 미국이 먼저 머리를 숙이고 대한민국 밑으로 기어들어 갔을 때 그들 역시 그랬어야 했는데, 끝까지 자존심을 내세웠던 것이 화근을 불러온 셈이었다.
“역시 대한민국에 신인류의 시초가 있었던 거야.”
온갖 소문에 소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뉴스와 언론에서는 연일 신인류의 시초가 누구인지 떠들어댔고, 사람들의 관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커져갔다. 얼굴도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세계적인 톱스타보다 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했던가?
기자들과 언론 그리고 각 정부에서 조금씩 동하의 실체를 알고 접근해 오기 시작했다.
하긴, 그날 동하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사람들을 구해주는 과정에서 제법 많은 사람들에게 얼굴이 알려졌던 것이다.
처음에는 한두 명에 불과하던 기자들이 하루가 지날 때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 이제는 수백 명이 넘는 세계 각국의 취재진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동하가 어딜 가든 따라다니며 특종에 열을 올렸다.
상황이 이쯤되다 보니 동하는 오히려 능력 사용에 제한이 생겼다.
공간이동이라도 사용하는 날엔 꼼짝없이 자신이 신인류의 시초라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리는 꼴이었다.
그렇다고 마음 편히 람보르기니를 타고 다닐 수도 없었다.
이건 만능자동차로 절대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 중 하나였다.
동하는 이래저래 행동에 제약이 걸렸다.
엄청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 평범하게 사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동하의 정체를 알고 있던 사람들이 철저히 비밀을 함구한 탓에 겨우 버티고는 있지만, 최근의 상황을 보면 한계 상황에 도달한 게 틀림없었다.
“최동하 씨, 그날 어디에 계셨습니까?”
“당시 자세한 행적을 말씀해 주시죠.”
“가족들 모두 무사히 살아 있는데,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나요?”
“혹시 최동하 씨가 신인류의 시초이기 때문은 아닙니까?”
“대한그룹과 다온그룹 뒤에도 최동하 씨가 있다는 소문이 사실입니까?”
하루에도 수백 번은 듣는 질문이었다.
이젠 귀가 아프다 못해 딱지가 생길 지경이었다.
동하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의 관심에서도 자연스럽게 멀어질 줄 알았다.
보통 가십거리들의 경우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의 관심에서도 자연스럽게 멀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인류를 구한 슈퍼 히어로의 경우는 보통의 가십거리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건 결코 만화나 영화 속의 일이 아니고 실제 현실 속의 일이었다. 여간 해서는 기자들이 쉽게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까짓 거.
정체를 숨기나 밝히나 별 차이가 없다면 굳이 숨길 이유가 있을까?
오히려 능력 사용 제한으로 불편한 일들 투성이다.
“좋습니다. 사실을 말씀드리죠.”
순간 시끄럽게 질문을 던지던 기자들의 입이 조용하게 변했다.
긴장이 되는 순간이었다.
모든 기자들이 숨을 죽이고 동하를 쳐다보았다.
“제가 바로 신인류의 시초입니다.”
쿵!
그건 가히 메가톤급 충격이었다.
여기저기서 기자들의 비명과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 ☆ ☆
그날 전 세계의 모든 뉴스와 언론은 동하의 기사로 도배가 되었다.
그야말로 동하의 말 한 마디에 전 세계가 발칵 뒤집어진 것이다.
방송국에서는 동하와 관련된 특집 방송까지 내보냈다.
심지어 오래전에 동하와 말 한마디 나눈 것이 전부였던 사람이 뉴스에 나와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동하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준수하고 잘생긴 외모에 온갖 소녀팬들이 생겨났다. 또한 인류를 구한 영웅을 향한 전 세계 사람들의 퍼레이드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동하가 정상적인 생활을 되찾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다.
여전히 동하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당당히 1위로 뽑혔지만, 그래도 예전처럼 기자들에게 둘러싸이지는 않았다.
또한 남의 시선이나 눈치를 보지 않고도 당당하게 능력을 사용하며 살 수 있었다.
역시 시간이 약이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도 결코 풀지 못할 문제가 있었다.
그건 바로 유경과 수정이었다.
소재는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삼각관계였다.
동하는 별로 재미없는 일이었지만, 유경과 수정은 꽤나 심각했다.
더구나 그녀들은 서로 그룹과 연계되다 보니 만나기만 하면 티격태격 싸우기 일쑤였다.
그녀들은 지금까진 인류의 멸망을 대비하는 문제로 인해 자신들의 마음을 확실하게 내비치지 않았었다. 하나 샤이언 종족이 사라지고 인류에 평화가 찾아오는 순간 본격적인 삼각관계를 시작했던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동하는 충분히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데, 여기에 남궁혜까지 가세를 하면서 파란을 예고했다.
사실 남궁혜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동하에게 알몸을 보여준 게 몇 번인지 모른다.
무림 종족의 여인이 아무리 법규에 얽매이지 않는다 해도 그녀는 정절을 목숨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외간 남자에게 알몸을 보여주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 참.”
이래저래 동하는 고민이었다.
이전 생애에서는 사고로 얼굴을 다치고 불구가 되어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하지 못했다면 지금은 주변에 여자들이 넘쳐나서 문제였다.
하지만, 동하는 당장 누구 한 명을 선택하고 싶진 않았다.
동하는 가능하면 그녀들과 친구처럼 편하게 지내고 싶었다.
누군가는 그게 어장 관리라며 욕할지도 모르겠지만, 이게 지금 동하의 솔직한 생각이었다.
지금 나이 스물두 살.
이전 생애에서 살아온 것을 따지면 60살이나 되지만, 어쨌든 지금 현재 나이는 스물두 살이었다.
결혼을 생각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더구나 동하는 회귀를 하고 난 이후 동하는 제대로 자신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었다.
계속 긴장하며 살아야 했고, 벙커를 만들기 위해 돈을 벌고 필드에 가서는 목숨을 건 레이드를 펼쳤다.
이제부터는 이전 생애에서도 즐기지 못했던 인생까지 제대로 살아보고 싶었다.
어쩌면 동하의 인생은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제 2막이 시작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