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 만물상점-162화 (162/167)

<-- 162화 : 불의 기운-02 -->

“네, 네놈은?”

김선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접선 현장에 난입한 사람은 바로 동하와 수정이었던 것이다.

김선일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동하와 수정이 자신의 뒤를 따라왔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동하와 수정이 어떻게 알고 자신의 뒤를 따라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다. 우연히 따라온 게 아니야. 분명 오래전부터 내 주변을 감시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일들이 이해가 된다.

아까 동하와 수정을 만났던 것도 어쩌면 단순한 우연이 아닐 터였다.

김선일은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지만, 중국 측 사람들을 만나 돈을 받았으니 더 이상 빼도 박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비서관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정치로 잔뼈가 굵은 비서관이었지만, 지금은 표정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산업스파이는 전 세계적으로 비난 받을 만한 일이었다. 더구나 강화 배터리와 관련된 사안이라면, 그 여파는 상상할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 비서관의 마음이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동하가 사진을 찍은 것 같긴 한데, 그게 확실하지 않았다.

동하의 손에는 카메라라고 하기에는 이상한 기기가 들려 있었다.

바로 스마트폰이었다.

동하는 따로 카메라를 준비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는 스마트폰이라는 최고의 디바이스가 있었다.

지금까지 동하는 사람들에게 스마트폰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가장 가까운 가족들조차 스마트폰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그게 지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동하의 스마트폰은 이전 생애에서 최고 성능을 자랑하던 최고급 모델이었다.

하지만 동하가 기계 종족의 능력을 흡수한 이후 스마트폰을 개조했고, 지금은 전혀 새로운 디바이스로 거듭난 상태였다.

디자인은 조금 더 슬림하고, 전반적으로 스마트폰의 스펙이 대폭 강화된 것이다. 예전에 1080p까지 화질이 지원이 되었다면 지금은 4K. 즉 HD급 화질에 비해 4배 더 성능이 뛰어난 UHD로 변해 있었다.

동하는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동영상도 촬영했다.

하지만, 정작 김선일과 비서관 등은 자신들의 모습이 핸드폰이라는 기기로 촬영되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건 수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김선일이 누군가와 거액의 돈을 주고받으며 모종의 거래를 하는 모습에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정치인들이 불법 정치 자금을 건네받으면 이해라도 하지.

그렇다고 중국 측 인사들은 수정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적어도 그들이 다온그룹의 하청 업체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수정은 왠지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수정은 제발 ‘그것’만 아니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동하의 반응이었다.

동하는 품속에서 손바닥만 한 물건을 꺼내더니 접선 현장을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한 번 까딱할 때마다 거기에서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리는데, 신기한 마음에 시선을 주었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접선 현장의 모습이 기기를 통해 고스란히 보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 저게 뭐지?’

피는 속이지 못하는 법이다.

수정은 김선일 때문에 받은 충격도 잊은 채 동하의 손에 있는 스마트폰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 ☆ ☆

뚜벅뚜벅!

동하는 팔을 내리고 손바닥으로 스마트폰 전체를 감싸 쥔 채 서서히 다가왔다. 후면카메라가 김선일 쪽을 향하고 있었다.

누구도 동하의 스마트폰에 주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김선일이 눈살을 찌푸린 얼굴로 동하와 수정을 번갈아 노려볼 뿐이었다.

비서관은 상황판단이 빨랐다.

그는 본능적으로 김선일이 동하와 수정과 평범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감지했다.

“김 선생, 아는 사람들입니까?”

“이거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저를 따라온 모양입니다.”

“흐음. 김 선생, 무슨 일을 이렇게 하는 겁니까? 아무리 우리가 이번 일에 공을 들였다고는 해도 이런 식이면 거래는 불가능합니다.”

“으으.”

김선일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산업스파이는 한번 발각이 되면 그것으로 그의 인생은 물론이고, 지금의 중국도 벼랑 끝에 내몰리게 될 것이었다.

그나마 지금은 동하와 수정 말고 주변에 다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흐흐, 다행이군.’

김선일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건 다름 아닌 살기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던가?

김선일은 이때만큼은 겁도 없이 달랑 동하만 데려온 수정에게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예전에도 한 번 수정을 죽이려고 청부살인을 했던 김선일이었다. 하물며 지금은 수정에게 접선 현장을 들킨 이상 그녀를 죽여서 입을 막는 것 말고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걸 찾으려고 온 모양인데…….”

김선일이 품속에서 사진을 꺼냈다.

그의 행동에는 더 이상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동하와 수정 말고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너무 늦었다.”

“악! 그, 그 사진들은…….”

“흥! 연기가 서툴군. 여기까지 따라와 놓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면 누가 속을 줄 알고?”

김선일은 코웃음 쳤다.

언제부터 수정이 자신을 감시했는지 생각할수록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래놓고는 순진한 표정이라니.

김선일은 자신이 지레짐작으로 증거 사진을 보여주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 사진들을 중국 측에 넘겨주면 어떻게 될까? 아마 다온그룹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버릴 걸?”

쿵!

수정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김선일의 배신은 충격과 경악 그 자체였다.

사실 수정은 동하를 따라 접선 현장에 올 때만 해도 무슨 일인지 몰라 속으로 수많은 의혹을 떠올렸지만, 그래도 강화 배터리 정보를 중국에 빼돌린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충격적이었다.

“어, 어떻게 그런……. 할아버지가 오빠를 얼마나 믿었는데. 오빠가 그러고도 인간이야?”

“흥! 먼저 배신한 건 그 영감탱이야. 영감탱이는 처음부터 능력도 안 되는 네 들러리를 세우려고 나를 이용했던 것뿐이었다.”

“거짓말 하지 말아요. 나는 당당히 오빠와 경쟁해서 이겼고 할아버지는 매사에 공정했어요. 그건 주주들도 인정한 사실이잖아요.”

“닥치지 못해?”

김선일이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그런 그의 눈빛에서는 광기마저 흘렀다.

사실 수정의 말은 하나 틀린 거 없었다.

수정의 기획이 연이어 히트를 치자 김선일을 지지하던 주주들마저 외면하고 말았다. 엄밀하게 말하면 수정과의 경쟁에서 밀린 게 아니라 동하와의 싸움에서 밀린 것이지만.

아무튼, 엘리트 코스만 밟아왔던 김선일은 자신의 패배를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이 모든 것이 다 한 회장 때문이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니 수정이 승승장구할수록 분노가 치솟았다.

결국 자신이 가질 수 없다면 다온그룹을 부셔버리겠다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었다.

☆ ☆ ☆

흠칫.

김선일의 악다구니에 수정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평상시의 신사다운 김선일의 모습이 아니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김선일의 본 모습이 저렇게 치졸하고 야비한 작자였을 줄이야. 수정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수정이 경멸의 눈빛으로 김선일을 쳐다보았다가 이내 동하의 손을 잡아끌었다.

“동하 씨, 우리 그만 가요.”

하지만, 그녀는 몇 걸음 걸어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김선일이 그녀의 앞을 가로 막았던 것이다.

“흐흐, 누구 마음대로. 올 때는 네 마음대로 왔을지 몰라도 갈 때는 허락을 받아야지.”

처음부터 수정을 곱게 돌려보내줄 생각이 없었던 김선일이었다.

이제는 노골적으로 수정을 향해 살기를 드러냈다.

그는 비서관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이심전심이라 했던가?

비서관은 설령 김선일이 수정을 보내주려 해도 그가 용납할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김선일의 표정을 보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김 선생. 저들의 문제는 강룡에게 맡기시고 우린 못 다한 일을 마무리 지읍시다.”

강룡은 그들을 수행하기 위해 따라온 신인류였다.

그의 능력은 중국 내에서도 상위 랭킹에 들어갈 정도로 상당한 편이었다.

김선일이 야비한 표정으로 수정을 쳐다본 다음 이내 비서관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흐흐, 그럴까요?”

그는 수정의 앞을 막고 있던 곳에서 벗어나 비서관 앞으로 다가왔다. 대신 강룡이 동하와 수정의 앞을 막아섰다.

강룡은 이런 일이 별로 내키지 않았다.

이건 건장한 청년이 어린 아이를 상대로 싸우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강룡의 표정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이번 일은 중국 정부에서 사활을 걸고 추진하는 것이라 강룡에게도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어떻게 죽여줄까?”

물론 그의 입에서 중국어가 흘러나왔다.

동하와 수정이 알아들을 리 없겠지만, 본능적인 행동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게 웬걸?

동하는 무림 종족의 언어를 완벽하게 듣고 구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국어는 무림 종족의 언어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았다.

“글쎄. 네놈에게 그럴 능력이 있을까?”

“어?”

강룡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동하를 쳐다보았다.

한국인이라고 생각했던 동하의 입에서 중국어가 나온 것도 놀라운 것이었지만, 요즘에는 거의 쓰지 않는 고어로 말하는 느낌이 들었다.

“네놈도 신인류냐?”

강룡의 능력은 염력 계열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노력도 하고 던전에 들어가 장비도 업그레이드 한 탓에 지금은 10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중형차 네다섯 대는 너끈히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정신을 조금 더 집중하면 트럭 한 대 정도는 젓가락 구부리듯 부셔버릴 수 있었다.

대단한 능력이었다.

이 정도면 C등급 능력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에 반해 대한민국 신인류의 능력은 그리 대수롭지 않았다.

전 세계가 신인류의 시대로 접어든 상황에서 대한민국이 급속도로 몰락한 이유도 바로 신인류의 능력이 다른 나라에 비해 많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피식.

꼴에 신인류라 이건가?

강룡이 대놓고 동하를 비웃었다.

“흐흐, 좋아. 그렇다면 가볍게 맛 좀 보여줄까?”

강룡이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정상적이라면 그의 팔 동작에 따라 동하와 수정도 천천히 떠올라야 했다.

“참고로 나는 염력의 능력자다.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동하와 수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응?”

이럴 리가 없었다.

그는 동하에게서 아무런 기운도 감지하지 못했다.

염력이 안 통하는 건 크게 두 가지 이유다.

하나는 상대의 능력이 훨씬 높아서 공격이 가로막히던가 아니면 정신이 분산 되어서 염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았거나.

강룡이 처음 능력을 각성했을 때엔 염력을 성공할 때보다 실패할 때가 더 많았다.

지금은 장비도 업그레이드가 되었고, 꾸준한 연습을 통해 능력을 제어할 수 있게 된 지금은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이상하군.’

강룡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동하에게 염력이 막혔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동하에게 아무런 기운도 느끼지 못했고, 설마 동하의 능력이 자신보다 훨씬 높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긴, 중국을 대표하는 강룡이 고작 대한민국의 신인류보다 못하다는 건 생각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정신을 집중하지 못한 모양이군.”

강룡은 이번엔 고도로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두 팔을 사용해 염력을 일으켰다.

이번엔 확실했다.

처음보다 두 배는 더 강력한 염력이 걸렸으니 트럭 두 대 정도는 가볍게 들어 올릴 수 있을 터였다.

스스슥!

그의 팔이 조금씩 위로 올라갔고, 동하와 수정의 몸도 그에 따라 위로 올라가야 했다.

한데, 동하와 수정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고, 그제야 강룡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하는 팔짱을 낀 채 강룡을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지루한 표정을 지으며 귀를 후비기까지 했다.

“아까부터 뭐하냐?”

몰라서 묻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동하의 능력 중에서 염력이 가장 낮은 수치를 보이고 있지만, 그래도 중국 내 상위 랭커인 강룡에 비하면, 하늘보다 높고 심해보다 깊었다.

동하는 처음부터 강룡이 염력을 펼치는 걸 알았지만, 별다른 대비도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어떻게…… 조금 더 기다려 줄까, 아니면 이번엔 내가 공격을 할까?”

맙소사.

강룡은 기겁했다.

어찌나 놀랐는지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질 뻔했던 것이다.

그제야 그는 처음에 정신을 집중하지 못해서 실패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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