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 길드의 탄생-03 -->
큰일을 당하게 되면 생각이 바뀌기 마련이다.
학습효과는 무서운 법이다.
동하의 말을 믿지 않았다가 한번 된통 당한 마크와 국무장관이 지금 동하의 뜻을 거스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종류의 일이다.
인류의 종말…….
동하의 말은 더 이상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인류의 종말이 머지않아 온다고 했으니 분명 그렇게 전개될 게 틀림없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하물며 자신들이 보았던 로우피림이 지구의 종말을 야기하는 괴수가 아니라는 말에 그들은 더할 나위 없는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지금 인류의 유일한 희망은 동하 밖에 없었다.
동하의 능력을 두 눈으로 확인한 국무장관은 더 이상 이 모든 것들이 허풍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국무장관은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실세 중 한 명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동하에게 고개가 숙여졌다.
“미스터 최.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종말을 피하고 싶다면 무조건 미국이 제 말에 따라 줘야 합니다. 가능하겠습니까?”
한 마디로 ‘알아서 기라’는 소리였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화가 치밀어 오른 국무장관이었다.
동하의 안하 무인한 태도에 자존심도 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게 당연하게 느껴졌다.
“쉽진 않겠지만 한번 해보겠습니다.”
지상 명령과도 같았다.
대통령을 설득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당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 야당의 반발도 만만치 않을 터였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금 대한민국이 전 세계적으로 왕따를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대한민국을 적극적으로 돕는다면 미국 역시도 전 세계적으로 웃음거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류의 멸망 앞에서 다른 나라의 시선이 무에 그리 중요할까.
“그나저나 미스터 최. 그 무서운 괴수를 상대로 승산이 있는 겁니까?”
“글쎄요. 저도 장관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는 나름 자신이 있었는데, 지금은 확신을 하지 못하겠군요.”
그만큼 로우피림은 강했다.
그리고 이전 생애에서 보여주던 능력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동하도 쉽게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국무장관이 뭐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동하가 팔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지하 깊은 곳이었고, 사방이 완전히 밀폐된 벙커 안이었다.
하지만, 동하의 귓가로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놈이다.’
동하의 안색이 살며시 바뀌었다. 로우피림이 마크와 국무장관의 뒤를 쫓아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무, 무슨 일입니까?”
“아무래도 놈이 두 분을 따라온 것 같습니다.”
“예에?”
마크와 국무장관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사방이 꽉 막힌 동하의 방에서 로우피림이 보일 리 만무했다.
그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로우피림이 따라온 걸 어떻게 아냐고 묻고 싶었지만, 동하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세 분은 잠시 이곳에 있으세요.”
특히 제인에게는 가족들을 부탁하고는 공간이동을 펼쳐 밖으로 나갔다.
이미 마크와 국무장관 그리고 제인은 한 배를 탄 동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능력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서 이제 굳이 능력을 감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는 자신의 능력을 조금씩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
“억?”
마크와 국무장관 그리고 제인이 동하가 공간을 이동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외마디 비명을 터뜨렸다.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막상 동하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그 놀라움은 몇 배나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 ☆ ☆
그건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하이피림과 로우피림이 지구에 등장했다.
어떤 나라는 10미터가 넘는 거대한 거인인 하이파림이 나타났고, 어떤 지역에는 로우파림이 나타났다. 하이파림과 로우피림의 막강한 능력 앞에 전 세계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다들 이전의 괴수들의 침공과는 수준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전에 괴수들이 침공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패턴이었기 때문이다.
하이피림과 로우피림이 겨우 하나씩만 나타났던 것이다.
세계 각지에 생겨난 던전에 하루에도 수많은 신인류가 각성을 하고 목숨을 건 훈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투기가 날아오르고 군대가 동원이 되었다.
능력을 각성한 신인류가 온갖 아이템으로 무장을 하고 로우피림과 맞섰다.
하지만, 하이피림과 로우피림은 신인류가 대적하기에는 아주 강한 상대였다.
놈들은 일인군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인류의 무기는 아예 그들에게 통하지도 않았고, 신인류의 능력 역시도 그들에 비하면 조잡한 잡기에 불과했다.
기본적으로 하이피림과 로우피림은 금속 액체 능력과 불사의 능력이 조합을 이루어 어떤 것으로도 파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두 팔에는 기계 종족의 능력이 장착이 되어서 가공할 화력을 보여주었다.
하이피림과 로우피림은 그 어떤 공격에도 신경 쓰지 않고 마구잡이로 도시를 파괴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전 세계는 아수라장에 휩싸였다.
간신히 되찾았던 평화가 무너지고 도시가 파괴되어갔다.
각 정부에서는 황급히 대피령을 내렸지만, 그때는 이미 하이피림과 로우피림의 손에 수많은 국민들이 죽은 후였다.
☆ ☆ ☆
지구인들이 아무리 도망을 쳐도 뛰어봐야 벼룩, 부처님 손 안의 손오공이었다.
로우피림의 몸에는 야수종족의 초인적인 감각이 탑재되어 있어서 한 번 맡은 냄새는 1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어도 귀신같이 찾아낼 수 있었다.
놈이 마크와 국무장관의 뒤를 쫓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로우피림의 머릿속에 깔려 있는 프로그램에 따르면 그의 검은 무엇이든 자르고 파괴해야 했다.
한데, 자신들의 무기로 몇 번을 휘두르고 찔러도 마크와 국무장관이 입은 강화 티셔츠를 뚫을 수가 없었다.
시얀은 이런 경우 딱 하나의 명령어를 입력해 놓았다.
‘최동하.’
샤이언 종족의 철천지원수인 최동하와 관련된 물건이 아니고서는 절대 로우피림의 검을 당해 낼 수 없었다.
그래서 로우피림은 오히려 중간에 마크와 국무장관을 따라잡을 수 있었지만, 일부러 놓아주기까지 했다. 그건 바로 본능적으로 마크와 국무장관의 뒤를 따라가면 동하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로우피림은 상황을 철저히 파악하기 전까지는 절대 추격을 멈추지 않는 존재다.
드르르륵!
로우피림이 사방을 훑어보았다.
그의 망막 사이로 여러 가지 그림들이 복잡하게 떠올랐다.
그중 하나는 마크와 국무장관의 발자국을 비교 대조하며 그것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바닥에는 여러 개의 발자국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동하의 것도 있었고, 제인의 것도 있었다.
로우피림은 또한 한창 벙커 공사를 할 때는 수많은 인부들의 발자국 자국도 나 있었다.
하지만, 로우피림의 시스템은 다른 사람들의 발자국은 모두 버리고 귀신같이 마크와 국무장관의 발자국만 찾아냈다.
드드륵!
마침내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벙커의 입구가 있는 곳이었다.
마크와 국무장관의 발자국이 그곳에서 사라져 있었다. 로우피림은 굳이 입구를 열 수 있는 버튼 따위를 찾는 일을 하지 않았다.
놈이 무지막지한 힘으로 벙커의 입구를 뜯어내려는 찰나였다.
“어딜.”
동하가 공간이동으로 로우피림의 등 뒤에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재빨리 로우피림의 다리를 잡고 하늘 높이 번쩍 들어 올렸다. 그야말로 번개보다 빠른 동하의 손속에 로우피림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쐐애액!
동하가 망설임 없이 로우피림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하지만, 갑자기 놈의 몸이 바닥에 부딪치기도 전에 로우피림의 발을 잡고 있던 손이 허전해지는 것이 아닌가?
“억?”
동하가 외마다 비명을 질렀다.
로우피림이 한줄기 바람이 되어 동하의 손에서 빠져나갔던 것이다.
펑!
마치 폭탄이 수십 개 터진 듯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이번에는 로우피림이 동하의 등 뒤로 돌아가 무지막지한 장력으로 동하의 등을 후려갈겼던 것이다.
동하의 상체가 흔들렸다.
로우피림의 장력이 동하의 강기 막을 뚫고 거인의 힘을 흔들고 동하의 몸을 강타했다.
대단한 일격이었다.
동하는 능력을 각성한 이후로 이런 식으로 상대에게 등을 보이고 타격을 입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놀라기는 로우피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로우피림은 자신이 일격을 가했을 때 부수지 못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일격을 맞은 동하는 중심이 살짝 흔들린 것이 전부였다.
드르륵!
톱니바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로우피림의 팔이 레이저 건으로 바뀌는 것이 아닌가?
그 변화가 인간의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재빨랐다.
로우피림은 동하가 숨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장력을 펼쳤다가 레이저 건을 사용하는 건 일종의 초식과 초식이 바뀌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로우피림의 동작에는 전혀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놈은 동하의 중심이 살짝 흔들린 것을 놓치지 않고 가지고 있는 자신이 가진 최강의 공격을 퍼부으려 하고 있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로우피림의 시스템 안에 시얀이 심어놓은 동하의 정보가 바로 눈앞의 인간이란 사실에 경고등이 들어왔다.
동하는 공력이 12성에 올라선 이후 몸속의 감각이 신의 경지에 이른 상태였다. 등짝을 맞는 순간 로우피림의 다음 공격이 어떤 식으로 이어질지 눈앞에 펼쳐졌다.
동하는 천근추의 수법으로 재빨리 중심을 잡고 벼락처럼 몸을 뒤집었다.
이는 ‘연와선풍’이란 수법으로 제비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듯 무척이나 역동적인 상승의 신법이었다.
슈슉!
동하가 번개처럼 팔을 뻗어 로우피림의 가슴을 후려갈겼다.
소림사의 용조권 중 제7의 초식인 ‘비응탈명권’이었다. 세찬 바람 소리와 함께 로우피림의 동작이 와르르 무너졌다.
쾅!
로우피림이 동하의 주먹에 뒤로 튕겨져 나갔다.
가공할 일격이었다. 단 한방에 로우피림의 단단한 갈비뼈가 모조리 부서져 나가고 처참하게 뭉개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레이저 건에서 붉은 빛이 쏟아져 나왔지만, 그건 방향을 잃고 하늘높이 솟구쳐 올랐다.
하지만, 로우피림의 회복속도는 불사 종족을 뛰어 넘었다.
처참하게 뭉개졌던 가슴이 정상으로 회복되고 부러진 갈비뼈가 다시 붙은 건 그야말로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그렇군.”
동하는 이미 예상한 일이었기에 그리 놀라울 것도 없었다.
천근추와 상승의 신법.
그리고 소림사의 용조권까지.
동하는 단번에 세 개의 절기를 쏟아냈다.
이는 음양조화선풍신무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개 서로 각기 다른 무공을 한 번에 펼쳐내는 건 아무리 공력이 극강한 고수라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었다.
로우피림의 장력에 등짝을 얻어맞은 동하는 기어코 무공으로 복수를 하고 나서야 직성이 풀렸다.
처음에는 로우피림이 한줄기 바람으로 변해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줄은 생각도 못한 일이었기에 당했던 것뿐이었다.
우드득!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까?”
손 관절을 꺾은 동하가 천천히 로우피림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 ☆ ☆
쾅쾅쾅!
그건 가히 신들의 전쟁이라 할 수 있었다.
번개가 작렬하고 토네이도가 주변을 휩쓸고 지나갔다.
동하의 손에서 수많은 능력들이 펼쳐졌다.
그에 반해 로우피림은 가공할 장력과 레이저 건으로 동하에게 맞섰다.
하지만, 로우피림은 끝내 고 서클 마법과 염력을 앞세운 동하의 공격에 막혀 끊임없이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로우피림은 피로 얼룩져 있었고, 피부는 번개에 맞아 새카맣게 탄 상태였다.
자고로 가랑비에 옷 젖는 법이다. 가공할 만한 회복속도를 보이던 로우피림도 계속된 동하의 공격에 조금씩 회복 속도가 더뎌지기 시작했다.
‘맙소사.’
‘저, 저게 과연 인간이란 말인가?’
동하와 로우피림의 싸움을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마크와 국무장관이었다.
벙커의 문을 완전히 열어둘 수는 없어서 살짝 올린 채 고개만 살짝 내밀었지만, 그럼에도 모든 상황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그건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로우피림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끔찍한 마물이었다.
한줄기 연기로 변하는 것은 물론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움직임과 가공 무쌍한 무공 그리고 각종 무기로 변하는 두 팔까지…….
그들이 처음 로우피림을 보았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모습이었다.
두려움과 공포심에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들었다.
로우피림이 마음만 먹는다면 세상에 파괴하지 못할 게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로우피림 또한 동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동하는 한 손에는 마법을 펼치고 다른 한 손에는 무공으로 대적해 나갔다.
그것으로 부족해서 닌자의 인술과 염력 그리고 두 팔을 무기로 만들어 로우피림을 무섭게 압박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