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 군림-03 -->
그건 폭탄발언이나 마찬가지였다.
국무장관과 마크는 멍하니 동하를 쳐다보았고, 제인은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두 눈을 깜빡거렸다.
“미, 미스터 최. 우리가 잘못 들은 거 같은데 다시 한 번 말해주겠습니까?”
“조만간 인류는 멸망의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겁니다. 던전은 일종의 속임수죠.”
“소, 속임수라면……?”
“방심이죠. 모두가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가 언제 임박하는 지 알면 모두 거기에 대비를 하겠죠. 하지만, 지금 전 세계는 던전이 인류의 축복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괴수들의 침공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걸 벌써 잊은 거지요.”
“으음.”
국무장관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당장 미국만 해도 신인류를 확보하는 데 사활을 걸고 있었고, 동하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지금부터라도 대비를 해야겠군요.”
“후후. 그래도 소용없을 겁니다. 지금 인류의 능력으로는 멸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동하는 자신이 죽던 날의 참혹했던 모습을 떠올렸다.
이전 생애에서는 17년 후에 벌어질 일이지만, 어쩌면 그것이 대폭 앞당겨져서 전 인류를 휩쓸고 지나갈지도 몰랐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나도 확실하게 알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쉽게 말할 수 없는 부분이죠. 하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제 알겠어요. 동하 씨가 얼음 던전에 가서 동료를 만들었던 건…….”
“으음.”
제인은 겁에 질린 나머지 말을 잇지 못했고, 마크와 국무장관이 신음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그것이 멸망을 대비하기 위한 움직임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미스터 최는 정말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을 가진 겁니까?”
“노스트라다무스처럼 인류의 멸망을 본 게 맞는 건가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굳이 멸망을 준비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그, 그렇군요.”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하긴, 동하는 본인의 입으로 미래를 예견한다는 둥 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었다.
그래도 사안이 사안인 만큼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설마 이것 때문에 그동안 대한민국이 전 세계적으로 왕따를 당하고 있는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일까? 왠지 그런 것 같았다. 예전에는 무기 출시 국가 명단을 발표할 때마다 동하가 나섰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대한민국이 벼랑 끝에 내몰렸는데도 동하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물론이고 모든 정부에서 그런 동하의 행동에 저마다 분석을 내놓았지만, 딱히 설득력 있는 분석은 없었다. 그나마 가장 신빙성 있는 내용은 무기 강화 사업이 몰락을 하면서 동하의 위치도 덩달아 몰락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 ☆ ☆
“그, 그럼 멸망에 대한 준비는 어느 정도 진척이 된 겁니까?”
“진척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중단한 무기 강화 사업을 다시 시작했고, 저를 도와줄 동료들을 만들고는 있지만 여전히 인류의 멸망을 막기에는 역부족입니다.”
“하지만, 아까 대한민국이 가장 안전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전 세계를 커버하기 어렵다는 뜻이었지요.”
“아!”
“어떤 식으로든 대한민국은 구할 수 있겠지만, 전 세계가 멸망을 당하면 그 다음엔 대한민국이 괴수들의 집중 타깃이 될 수밖에 없지요. 그럼,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국무장관은 동하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몰랐다.
동하가 거짓말을 하는 건 확실히 아닌 것 같았다. 더구나 동하의 능력을 보면 조만간 인류에 엄청난 재앙이 또 다시 불어 닥칠 게 틀림없었다.
하나 과연 인류가 멸망을 하느냐에 대한 문제는 솔직히 인정하기 어려웠다.
괴수들의 힘이 강하면 얼마나 강하다고.
신인류들 역시 계속 장비를 업그레이드 하며 능력을 높여가고 있었다.
더구나 지금 추세대로라면 신인류의 숫자는 앞으로 계속 증가하기 때문에 대비만 잘한다면 그 어떤 재앙이라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면에서 동하가 미국에 와 준다면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든든해질 터였다.
“미스터 최. 어떻게 하면 미국에 오겠습니까? 원하는 조건이 있다면 무조건 맞춰드리겠습니다.”
국무장관은 끈질겼다.
그는 도무지 포기할 줄 몰랐다.
하긴, 동하의 능력 중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을 확인했는데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들면 달려들었지 포기할 리 없었다.
“그건 오히려 제가 하고 싶은 말이군요.”
“그게 무슨……?”
“이제부터 미국이 저를 도와주었으면 합니다.”
“예?”
“한마디로 미국을 스카우트하고 싶다는 말입니다.”
풉!
국무장관은 커피를 마시다 내뿜고 말았다.
그의 옷에 커피가 묻었지만, 그는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어지간해야 대꾸라도 하겠는데, 동하의 제안은 너무 황당해서 말도 안 나올 지경이었다.
오랜 시간 정치를 해온 그였지만, 표정관리도 되지 않았다.
하긴, 세계 최강 미국을 일개 개인이 스카우트하겠다는데 제정신이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터였다.
“미, 미스터 최. 아무리 농담이라도 그건…….”
“제가 지금 농담하는 것으로 보입니까?”
동하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는 내심 자신이 있었다. 미국을 스카우트 하겠다는 말은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지만, 멸망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명확한 지휘체계가 필요했다.
그러자면 현실을 정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었다.
국무장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미국을 마치 동하보다 아래로 대하는 듯한 행동에 자존심마저 상했다.
하긴 그럴 법도 했다. 스카우트라는 것도 그 대상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이 되어야 가능한데, 일개 개인이 미국을 품기에는 터무니없이 말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미스터 최. 방금 그 말은 못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더 이상 권하지는 않겠습니다.”
동하는 아무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회는 그리 자주 오는 게 아닙니다. 한번 떠난 버스는 다신 돌아오지 않죠. 생각할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 ☆ ☆
“으음.”
국무장관은 불쾌한 표정을 애써 참았다.
더 이상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이건 명백히 미국을 무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젠 동하를 스카우트 하겠다는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 그는 내일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인류의 멸망?
그런 건 미국을 중심으로 다른 나라들이 똘똘 뭉쳐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었다.
더구나 인류가 정말 멸망의 순간에 직면해 있는지도 생각해볼 일이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동하의 입에서 나온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었다.
“미스터 최. 오늘 일을 후회하게 될 겁니다.”
국무장관은 따끔하게 충고했다. 이 정도까지 호의를 베풀었는데 동하가 자신들을 무시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화가 날 법도 했다.
동하가 그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어떻게 보면 대화를 나누고 상황이 더욱 악화된 것 같았다.
하지만, 동하는 굳이 이런 결과에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국무장관의 기분 따위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아쉬운 건 자신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지금이야 터무니없는 소리로 일축하겠지만, 조만간에 미국 쪽에서 제발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게 되어 있었다.
“참, 두 분은 당분간 이걸 꼭 입고 다니세요.”
동하가 마크와 국무장관 앞으로 사체로 강화한 티셔츠를 내밀었다.
“이, 이게 뭡니까?”
“제가 특수하게 제작한 장비입니다.”
“장비?”
“무기를 강화하듯 옷도 강화한 겁니다. 지금 신인류들이 사용하는 아이템보다 몇 배는 진화한 것이죠. 평범한 옷처럼 보여도 총알은 물론이고 괴수들의 이빨이나 발톱에도 끄떡없을 겁니다.”
“호오?”
마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티셔츠를 만지작거렸다.
겉으로 봤을 때에는 사람들이 평소 즐겨 입는 티셔츠와 재질이나 감촉이 똑같았다.
한데, 신인류들이 사용하는 아이템보다 몇 배 진화했다니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신인류들이 사용하는 아이템은 보통 괴수들의 가죽을 이용하기 때문에 디자인이나 색깔이 판이하게 달라진다. 그에 반해 동하가 제작한 티셔츠는 전혀 아이템 같지가 않아서 일반 옷이라고 착각하기 쉬웠다.
“한데 이걸 우리에게 주는 이유가 뭡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두 분은 조만간에 괴수들에게 죽습니다.”
“뭐, 뭐라고요?”
“유감이지만, 그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두 분 모두 가슴이 꿰뚫려 죽게 될 겁니다.”
사실 동하는 아까부터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바로 예측 안경의 능력이었다.
동하는 처음에 그들의 모습을 보고 흠칫 놀랐다.
예측 안경의 능력은 사람이나 사물의 모습이 180도 변하면 저절로 동하의 망막으로 정보를 보내준다. 예전에는 안경을 써야만 가능했다면 그 능력을 몸으로 흡수한 지금은 단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가능했다.
아마 자신이 본 환영이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었다.
하지만, 정확한 시기나 장소는 알 수 없었다. 동하는 테이블 밑에서 인벤토리를 열고 국무장관과 대화를 하는 와중에 두 개의 티셔츠를 꺼냈던 것이다.
“우, 우리가 언제 죽는단 말입니까?”
“시기는 언제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동하가 시간을 언급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망막 사이로 도형과 기하학 문양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로딩중이라는 표시가 나타났다.
‘어?’
동하는 깜짝 놀랐다.
이건 통제 센터를 고칠 때 나타났던 현상이 아니던가?
예측 안경의 능력과 기계 종족의 능력은 완전히 달랐다.
예측 안경은 마법이 인챈트 되어서 마법 아이템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능력들 간의 연쇄반응은 이미 예전부터 진행이 되고 있었다.
만능의 손의 능력은 물론이고 함께 연동이 되는 매직 카메라와 예측 안경 그리고 매직 워치까지 능력치가 동시에 올라가 동하는 자신도 모르게 또 다른 차원의 환골탈태를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캔을 완료했습니다.
사망 예정 시간은 12시간 안팎입니다.
‘으음.’
이 정도면 거의 정확하다고 봐야 한다.
결국 12시간 안에 일이 발생한다는 뜻인데, 예전에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때는 자세한 시간이나 장소를 알지 못해서 최대 2-3년 정도를 감안하고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오늘 하루만 더 조심하세요. 그럼 당분간은 두 분에게 별다른 일은 없을 겁니다.”
“저, 저는요. 저는 왜 옷을 안 주는데요.”
“글쎄요. 제인의 신상에는 별 문제가 없네요.”
제인은 그제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원래는 마크와 국무장관을 따라 부평기지로 가려고 했지만, 이젠 두 사람을 따라갔다가는 괜히 자신도 죽을 것 같아서 덜컥 겁이 났던 것이다.
“도, 동하 씨. 같이 가요.”
제인은 동하가 커피숍을 나가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동하를 따라 나섰다.
☆ ☆ ☆
커피숍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마크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무척이나 미묘한 상황이었다. 그 역시 미국을 마치 발톱의 때 정도로 생각하는 듯한 동하의 모습에 화가 나긴 마찬가지였다.
평범해 보이는 티셔츠에 무슨 대단한 능력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더구나 지금은 괴수들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고, 설령 나타난다 해도 군대와 신인류가 즉각 출동할 수 있는 체계가 갖춰져 있어서 민간인들의 피해가 그리 발생하지도 않고 있었다.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동하의 말을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기에는 그동안 동하가 보여주었던 능력들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이것 참.’
마크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상의를 벗더니 동하가 건네준 티셔츠를 입고 그 위에 옷을 걸쳐 입었다.
국무장관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봐요, 마크 국장. 자존심도 없습니까?”
“험험. 자존심도 살고 난 다음에 생각할 수 있는 문제 아닐까요? 오늘 하루만 지나면 알 수 있겠죠. 장관님도 일단 옷을 입는 게 어떻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이게 다 우릴 겁박해서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겠다는 미스터 최의 의도입니다.”
국무장관은 어딘가로 전화를 했고,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군인들이 차를 끌고 커피숍에 도착했다. 그는 동하가 건네준 티셔츠를 내버려 두고 차에 탔지만, 마크 국장이 대신 챙겨서 옆자리에 탔다.
“그 옷은 왜 가지고 타는 겁니까? 그냥 버리세요.”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 아닙니까?”
“아이템이라면 여기도 있습니다.”
국무장관이 자신의 발밑을 가리켰다.
주한 미군에도 능력을 각성한 신인류가 있었다.
그들은 군사 훈련 대신 파티를 결성해 레이드를 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
그들이 사용할 아이템은 주한 미군에서 자체 제작을 하고 있었고, 미국 본토에서도 주한 미군을 위한 아이템을 조금씩 지원하고 있었다.
그중에 능력을 각성하지 않은 사람도 보호해주는 장비가 있었다.
그건 괴수의 가죽으로 만든 조끼였다.
국무장관은 외투를 벗고 갑옷을 걸친 다음 다시 외투를 입었다. 그리고 마크에게도 하나 건네주었다. 마크도 조끼를 걸쳤다. 머리를 보호하는 헬밋도 있었지만, 굳이 차 안에서 쓰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저는 내일 미국으로 돌아갈 겁니다.”
“그럼, 스카우트는…….”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대통령께서도 보고를 받고 나면 무척 화를 내시겠지요. 아마 대한민국은 오늘 이후로 완전히 왕따를 당하게 될 겁니다.”
국무장관의 반응은 냉담했다. 동하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진 상태였다.
마크도 갈등했다. 동하가 멸망을 대비한다고는 하지만, 모든 나라가 등을 돌린 지금 딱히 믿음직스러운 건 아니었다. 대한민국에 남아서 동하를 계속 취재하는 건 더 이상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마크 국장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도 따라 가야겠지요?”
마크가 끝내 결정을 내리고 대답할 때였다.
쿵!
엄청난 굉음과 함께 차가 뒤집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