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 군림-02 -->
개고생을 한 보람이 있었다.
국무장관은 한국에 들어온 지 한 달 정도가 되어서야 드디어 동하와 만날 수 있었다.
사실 동하는 오랜만에 가족들을 만나고 싶었다.
만물상점에서 보낸 시간까지 하면 거의 한 달 가까운 시간을 가족들과 떨어져 있었던 셈이었다. 또 국무장관이 무슨 목적으로 자신을 찾아왔는지도 대충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동하에겐 이제 돈은 그리 중요한 대상이 아니었다.
사체로 강화한 무기를 팔면서 동하는 그야말로 돈방석에 앉았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미셜 화장품의 주가가 천정부지로 뛰고 있어서 동하는 굳이 일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데도 재산이 매일 불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에 모든 세금이 면제 아닌가?
동하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대손손 떵떵 거리며 먹고 살 수 있을 터였다.
하나 마크와 국무장관이 자신을 만나기 위해 삼고초려보다 더한 정성을 지극히 기울였다는데 차마 거절할 수는 없었다.
“대신 딱 10분만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하아.”
남들이 들으면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감히 그 어떤 나라도 이렇게 대할 수 없었다.
국무장관은 미국의 외교업무를 총괄하는 자리로 어떤 면에서는 부통령보다 영향력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10분만 시간을 내준다는 것도 황당한 일이지만, 그걸 듣고도 별로 화가 나지 않는 국무장관도 어이가 없었다.
동하는 그들을 차에 태우고 가까운 커피숍으로 갔다.
커피숍에도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국무장관은 보안을 위해 부평기지로 장소를 옮기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제법 걸린다는 게 문제였다.
제인은 이래도 되나 싶었다.
“국장님, 이런 중요한 이야기를 커피숍에서 해도 되나요?”
“우리가 뭐 산업스파이도 아니고. 법에 접촉되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야?”
“그래도 적어도 호텔 같은 곳에서 은밀하게 접촉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네요.”
영화를 보면 이런 상황에선 무척 긴장감이 흐르던데, 지금은 무슨 친구들이 만나서 수다 떨려고 커피숍을 찾아온 듯한 느낌이었다.
긴장감? 그런 건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하기야 그들의 꼬락서니가 하나같이 형편이 없는데, 무엇을 더 기대할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미스터 최를 미국으로 스카우트 하고 싶습니다.”
국무장관은 자리에 앉자 거두절미하고 용건부터 꺼냈다.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동하를 설득하기에는 10분이란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국무장관은 자신이 있었다.
그는 미국 대통령에게 전권을 위임받은 상태였고, 동하를 설득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미스터 최. 여기 받으시죠.”
국무장관이 내민 건 바로 백지수표였다.
그곳에 얼마를 써서 내든 미국에서는 모두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겨우 연봉이었다. 연봉으로 백지수표를 내민 것이니 미국의 스케일이 남다르다 할 수 있었다. 연봉으로 10억 달러를 제시해도 선뜻 수용할 듯한 분위기였다.
사실 이 정도만으로도 엄청난 파격적인 대우였지만, 국무장관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몇 가지 혜택을 더 제시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세금을 면제받고 있지요? 우리도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국회의원에게만 적용이 되는 면책특권도 드리고 저택과 자동차도 제공해드리겠습니다.”
단순히 집을 주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거대한 저택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어떠냐? 도저히 거절할 수 없겠지?
국무장관은 그런 눈빛으로 동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충 시간을 보니 자리에 앉은 지 5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동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뜻은 고맙지만 글쎄요. 돈은 지금도 차고 넘쳐서…….”
“예?”
국무장관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이런 조건을 듣고도 거절할 줄이야.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미국 정부에서는 제시할 수 있는 모든 카드를 동원했기 때문이었다. 국무장관은 혹시 동하가 흥정을 하려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에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미스터 최가 원하는 조건이 있습니까? 미국 정부는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모두 맞춰 드리겠습니다.”
파격을 넘어 천지가 개벽할 만한 일이었다.
만에 하나 이번 협상이 외부에 알려지면 미국이 발칵 뒤집어질 수도 있었다.
하나 그럼에도 미국 정부는 동하를 스카우트 하고 싶었다.
동하는 사실상 대한민국 정부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동하가 있으면 대한민국 정부는 살아남겠지만, 동하가 떠나면 대한민국은 그날로 침몰하게 될 것이었다. 그건 다른 나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하가 있는 곳은 어떤 나라가 되었든 세계의 중심으로 올라설 수 있을 터였다.
미국의 의도는 동하를 스카우트해서 압도적인 힘을 가지는 동시에 다른 나라가 세계의 중심이 되는 걸 원천봉쇄하겠다는 뜻이었다.
백지수표 연봉? 세금 면제와 면책특권?
물론 엄청난 혜택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기존의 신인류 중에서도 이런 조건을 제시받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동하는 신인류의 시초. 그런 건 동하를 스카우트해서 얻게 되는 부가적인 것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 ☆ ☆
꿀꺽!
옆에서 제인이 통역을 하고 있었다.
국무장관이 동하에게 조건을 제시할 때마다 제인은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조건의 내용들이 하나같이 어마어마하다 보니 통역을 하고 있는 그녀의 목이 다 바싹 마를 판이었다.
제인은 곁눈질로 동하를 슬쩍 쳐다보았다.
원래 남자는 능력이다.
못생긴 사람도 능력이 뛰어나면 잘생겨 보이는 법이다. 하물며 동하는 배우 뺨치듯 잘생긴 얼굴이었고, 거기에 능력까지 어마어마하게 뛰어나다 보니 잠시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부실 정도였다.
확실히 갖고 싶은 남자였다. 동하와 결혼만 하게 되면 팔자가 바뀌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평생을 공주 대접을 받으며 사람들의 존경 속에서 살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나? 이미 그림의 떡인데.
대부분의 남자들은 금발의 미녀에게 환상을 품기 마련인데 동하는 그런 게 없었다. 동양의 남자들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녀는 나름 자신이 있었다. 어디 가서 미모로 꿀려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동양 남자 한 명 유혹하는 건 그녀에게 일도 아니었다.
텐 미니트.
10분만 있으면 바로 동하를 꾈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한데 이게 웬걸?
제인은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해 동하를 유혹도 해보고 저돌적으로 육탄공격도 해보았지만, 동하는 눈 한번 깜빡거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자존심도 상하고 기분도 나빴지만, 동하는 도저히 그녀가 넘볼 수 없는 나무였다.
지금은 모든 미련을 버리고 기자로써 원칙에 충실하려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동하 씨, 다른 요구사항이 있으면 얼마든지 말하라고 하네요.”
“아마 미국에서 어떤 조건을 제시하든 내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저, 정말요?”
제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프로는 정이나 의리보다 돈을 보고 움직인다. 그런 문화에 익숙한 제인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유가 뭐죠?”
“그거야 한국에 있는 게 가장 안전하기 때문이죠.”
“혹시 벙커 말인가요? 하지만, 이미 괴수들은 사라졌어요. 설령 그것들이 다시 나타난다 해도 신인류가 있으니 그리 문제될 것도 없고요.”
제인은 굳이 벙커에서 살 이유가 없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이야기한 것이다.
그리고 그건 마크나 국무장관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지금 거리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거리마다 울려 퍼지고 있는 캐럴.
사랑하는 연인들의 데이트와 사랑하는 가족들의 외출. 그리고 바쁘게 움직이는 평범한 시민들까지. 사람들의 얼굴에는 이미 평화가 깃들어 있었고, 정부와 신인류가 앞으로도 자신들을 안전하게 지켜줄 거라 믿고 있었다.
더구나 던전을 공략하면 신인류의 능력을 업그레이드 할 수 있고, 세상이 조금씩 발전해 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한때 괴수들이 인류의 재앙이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오히려 인류의 축복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역시.’
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다.
지금 이 세상은 노아의 방주 시대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아마 샤이언 종족이 최후의 침공을 가해올 때도 사람들은 멸망의 대비는 전혀 하지 못한 채 시집도 가고 장가도 가며 지금처럼 일상을 즐길 것이다.
동하는 그게 고민이었다. 샤이언 종족과 최후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대한민국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지금도 지수와 몇 명의 대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새로운 동료를 찾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대한민국에는 신인류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설령 지수가 결정체를 많이 확보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각성시킨다고 해도 대한민국의 인구는 이미 한계가 있어서 신인류의 숫자가 늘어난다 해도 한계가 있었다.
대한민국을 보조해 줄 나라가 있어야만 했다. 그러한 나라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만, 지금 대한민국 정부는 전 세계에 왕따를 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무기 강화 출시 때문에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기 때문인데, 아무튼, 순순히 대한민국과 뜻을 함께할 나라가 나타나긴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던 참에 국무장관이 동하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어쩌면 이것도 운명인지도 몰랐다. 그동안 계속 동생들을 속이려고 미국 드립을 입에 달고 살았더니 그야말로 기적처럼 동하에게 미국이 다가온 것이다.
제인은 동하의 능력을 눈앞에서 지켜본 유일한 외국인이고, 마크는 지난 한달 남짓 동하를 감시하기 위해 잠복근무를 했었다. 더구나 미 국무장관은 동하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그 어떤 나라보다 열성적이었다.
‘좋아.’
동하는 계획을 살짝 변경했다.
국무장관이 자신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설득하는 자리였지만, 이제는 오히려 동하가 미국을 스카우트할 생각이었다. 하긴, 이계 종족 위에 군림하고 있는데, 굳이 여기에 미국 하나 더 얹어 놓는다고 새삼 달라질 것도 없었다.
“제인,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예에?”
“만약 인류의 미래가 얼마 남지 않았다면 제인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물론 가정이긴 하지만, 조만간 신인류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무시무시한 능력을 가진 괴수들이 등장해서 지구를 파멸시킬 수도 있지 않습니까?”
“서, 설마요.”
제인은 결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동하는 가정이란 전제하에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표정도 진지한데다가 왠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줘요. 무슨 일이 있는 거죠?”
“글쎄요.”
“동하 씨는 벙커를 만들었잖아요.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 같은 것을 각성한 거죠? 그래서 벙커도 미리 만들 수 있었던 거죠?”
제인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있었다.
동하가 하고 싶은 말은 그녀가 대신해 주고 있으니 동하는 오히려 할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제인의 말을 인정하면 효과가 떨어진다. 이럴 때는 살짝 발을 빼는 게 더 먹히는 법이다.
“글쎄요. 저는 처음 듣는 말이군요.”
“속이려 하지 말아요. 미래를 예견하지 않고 어떻게 벙커를 만들 수 있단 말이에요?”
제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마크와 국무장관의 얼굴도 딱딱하게 변했다.
그들은 동하에게 수많은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지 그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무서운 것인지는 확실하게 알지 못할 뿐이었다.
아무튼, 그런 동하가 난데없이 멸망 운운하고 있으니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철학자 스피노자 같은 사람은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지 몰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당장 지구가 멸망한다고 하는데 한가하게 일상을 보낼 수 있는 강심장의 사람은 거의 전무할 것이었다.
그건 제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지금 죽기에는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솔로였다.
“미스터 최. 어제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만나서 밀담을 나눈 것이 이것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그, 그건…….”
“역시 대답을 못하는 군요.”
“그렇다면 어제 얼음 던전에서 동료만 만들고 사라진 것도 이것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겠군요.”
어느새 시간은 10분을 훨씬 넘어 있었다.
그리고 동하를 스카우트 하려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