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 만물상점-149화 (149/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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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한이었다.

그의 눈빛은 지금 혼백이 사라진 것처럼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참담하기 짝이 없을 정도였다.

샤이언 종족에게 행성을 잃고 일가친척들이 노예로 전락했을 때도 이렇게까지 절망적이진 않았다.

차원의 관리자들은 강했다.

그들의 압도적인 힘 앞에 불사 종족은 별다른 반격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그때는 수십 명의 차원의 관리자들이 각개 격파로 불사 종족을 정복했다면 지금은 동하 한 명의 손에 무너진 것이다.

이건 도저히 비교 대상이 되지 않았다.

세상에 이렇게 강한 자가 있을 수 있을까?

루한은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했다. 아니, 싸움이라 할 수도 없었다.

루한은 불사 종족이 이렇게 나약하고 무능력한 집단이었나 하는 회의감마저 들었다.

하긴, 일대 삼백으로 싸운 것 자체가 불사 종족에겐 충분히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샤이언 종족을 제외하고는 우주에서 최고라고 자부하던 루한이었다.

삼백 대 일의 싸움은 치사하고 야비한 일이었다.

한데 그들은 그렇게 하고도 이기기는커녕 일방적으로 몰리고 있었고, 이제는 불사의 능력이 파괴되기 일보직전의 상황까지 내몰린 상태였다.

루한은 보고도 믿기 어려웠다. 당해도 너무 심하게 당한 것이다.

불사의 능력을 가진 그들조차도 회복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루한은 이게 과연 한 명의 손에 당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이런 식이라면 굳이 목이 잘리지 않아도 오래지 않아 전부 몰사할 수도 있었다.

“우리가 졌습니다.”

진작 이랬어야 했다.

사실 승패는 오래전에 결정된 것이었다.

그래도 그들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싸웠던 것은 불사 종족이 동하 한 사람에게 졌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이상은 만용이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늦으면 샤이언 종족의 손에 망하기 전에 동하의 손에 불사 종족이 운명을 고할 판이었다.

“글쎄. 나는 한 번 시작한 일은 반드시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서 말이지.”

동하는 쉽게 끝낼 생각이 없었다. 이미 주도권은 동하에게 있는 상황이었다.

“그, 그건…….”

루한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대개 이런 경우 상대가 패배를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면 관용을 베푸는 차원에서라도 그냥 넘어가기 마련인데 동하는 아예 그런 게 없었다.

그래서 더 어려웠다. 샤이언 종족 외에는 평생 패배를 모르며 살아온 루한이기에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내가 이미 말했을 텐데? 내 뜻을 거스르고도 살아남을 수 있겠냐고 말이지.”

“모든 일의 시초는 저로 비롯된 것이니 제 목숨을 취하고 동족들은 용서해 주십시오.”

루한은 자존심을 모두 내팽개치고 동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동족들을 위해 몇 번이고 동하에게 간절하게 간청했다.

이것도 갑질이라면 일종의 갑질이다.

원래 쉽게 용서해주면 그만큼 빠르게 고마움을 잊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었다.

그건 괴수들인 불사 종족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동하는 마지막 순간에 못이기는 척하며 루한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사실 처음부터 불사 종족에게 유감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모든 종족들에게 자신의 뜻을 거스르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기 위해 최대한 불사 종족을 몰아붙였던 것뿐이었다.

이제 불사 종족 내에서 누구도 동하의 뜻을 거스르는 자가 없었다.

오히려 동하가 가볍게 기침만 해도 그들은 심장이 멎을 듯한 충격에 빠졌다.

동하는 불사 종족을 확실하게 굴복시킨 다음에야 가짜 가이거의 정체를 밝혀냈다.

이미 동하의 기세에 완벽하게 눌린 불사 종족이기에 더 이상 동하를 막아 세우는 자가 없었다.

“으으.”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가짜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불사 종족은 또 한 번 뒤집어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간세의 혓바닥에 놀아났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갈았다. 가짜 가이거만 아니었어도 그들은 적어도 지금처럼 동하의 손에 개 박살 나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 ☆ ☆

-불사 종족이 무릎을 꿇었다.

-차원의 관리자가 은밀하게 숨어서 부정적인 여론을 조장했었다.

-초청에 응하지 않은 자들은 낭패를 당할 것이다.

소문은 빠르게 만물상점을 강타했다.

불사 종족이 동하의 손에 얼마나 당하고 어떻게 전멸의 순간까지 갔었는지. 듣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처질만큼 무서웠다.

다른 종족들은 더욱더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도 찔리는 게 있으니 덜컥 겁이 났다. 특히, 동하의 초청을 받고도 외면한 자들은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금방이라도 동하가 그들에게 쳐들어 올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자도 있었다.

그들은 바로 기계 종족이었다.

그들은 테이커의 명에 동하에게 협조하기로 뜻을 정했지만, 일각에서는 불만을 품는 자도 있었다. 기계 종족이 그리 약한 종족이 아닌데, 싸워보지도 않고 수하를 자청하는 건 노망에 가까운 것이라며 테이커를 비난했다.

하지만, 불사 종족이 전멸 직전까지 갔다는 말을 듣고는 누구 하나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하긴, 자신들의 자존심만 생각한다고 처음부터 그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동하는 만물상점을 빼앗는 과정에서 차원의 관리자들을 백 명이나 상대해서 이긴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 기계 골렘이 두 개나 있었지만, 그렇다고 동하의 압도적인 능력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바로 그럴 즈음이었다.

만물상점에 또 한 번의 회오리바람이 불었다.

동하가 다시 한 번 최상위 랭커들을 통제센터로 초청했던 것이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를 리 없었다. 최상위 랭커들은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왠지 고마운 마음마저 들었다.

처음에는 정중하게 부탁을 해도 오지 않았던 자들이 이번엔 대충 아무나 보냈는데도 한달음에 달려왔다.

불참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불만이 있거나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자도 없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동하의 뜻을 거스르면 자신은 물론이고 동족들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 상황에서 동하의 눈에 거슬릴 만한 행동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여기에 각 종족에서 명성이 높고 명망이 두터운 자들도 초청했다.

그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통제 센터를 찾아왔다.

“여러분들을 한자리에 부른 건…….”

동하는 그들이 모두 모였을 때 정중하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

이때만큼은 힘으로 찍어 누르지 않았다. 동하의 모습에 당황한 자들도 있었다. 오히려 부드러운 표정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하지만, 옛말에 당나귀를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먹게 할 수는 없다고 했다.

동하는 모든 종족이 자신과 함께 샤이언 종족과 맞서길 바라고 있었지만, 여러 가지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쉽게 결정하기 어려웠다.

최상위 랭커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마음 같아서는 그들 역시 샤이언 종족과 맞서고 싶지만, 부모와 형제 그리고 일가친척들이 샤이언 종족의 손에 노예로 잡혀 있었다.

더구나 샤이언 종족은 테스터들 중에 VIP와 VVIP가 나오면 그들의 종족이 정착할 수 있도록 행성을 돌려주거나 새로 내준다고 약속했었다.

그 말은 곧 뒤집어서 설명하면 샤이언 종족의 눈 밖에 나면 종족들을 죽이고 행성을 완전히 파괴하겠다는 뜻이었다.

그건 동하도 모르지 않았다.

하나 동하의 생각은 약간 달랐다.

샤이언 종족의 능력에 지구를 파괴시키고자 했다면 진즉에 그랬을 것이었다. 고도로 발달한 그들의 문명과 과학 기술이라면 행성 하나 날려버리는 건 일도 아닐 테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동하의 존재를 감지한 이후에도 우주 말살 프로젝트에 박차를 가할 뿐 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동하는 여기에서 샤이언 종족의 오만과 자존심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우주 말살 프로젝트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건 마치 불사 종족이 동하의 손에 졌다는 걸 인정할 수 없어서 무모하게 계속 덤벼든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 예는 의외로 어디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단말기유통구조개선법은 국민과 여론은 물론이고 다른 정부 부처에서조차 실패한 정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정작 해당 부처에서는 그걸 폐지하긴 커녕 오히려 정책을 더욱 강화하려 한다.

그건 곧 정책을 폐지하는 순간 자신들의 실수를 만천하에 인정하는 꼴이고 그렇게 되면 장관부터 차관에 이르기까지 책임여부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자신들의 능력이 우주에서 최고라고 자부하고 있는 샤이언 종족이라면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래서였다.

동하는 샤이언 종족이 고도의 무기로 지구를 파괴하기보다는 우주 말살 프로젝트를 더욱 연구하고 발전시켜서 자신을 죽이고 지구를 정복해 나간다는 생각에 확신을 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우주 말살 프로젝트보다 더 쉽고 편한 길이 있지만, 샤이언 종족에겐 오직 이 방법 밖에 없었다.

“어떻게…… 나와 함께 하는 영광을 누리겠습니까, 아니면 평생 이렇게 샤이언 종족의 노예로 살겠습니까?”

“으음.”

“기회는 한 번 가면 다신 오지 않습니다.”

동하는 강요하지 않았다. 당장 자신과 뜻을 같이 하지 않는다 해도 동하는 그들에게 보복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선택에는 책임이 주어지는 법.

지금 동하와 뜻을 같이 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영원히 함께 할 수 없을뿐더러 혹시라도 나중에 동하가 샤이언 종족과의 전쟁에서 이긴다 해도 그들의 행성이 어떻게 되든 그건 동하가 알 바 아니었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전쟁에 패하면 흔히 평화협정을 체결하는데, 동하는 자신을 도운 종족과 행성의 자유만 보장해 주겠다는 뜻이었다.

통제 센터의 분위기가 무겁게 변했다.

누구도 말을 하지 못했다. 종족의 운명이 걸린 일이기에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생각했다. 자신들의 목숨만 걸려 있는 일이라면 생각할 것도 없이 동하를 선택했을 것이다.

하나 종족의 운명과 행성이 걸려 있는 일이기에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노예근성에 젖어 편하게 가느냐, 아니면 동하의 무지막지한 능력에 기대를 걸고 일생일대의 도박을 하느냐의 문제였다.

침묵은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바로 그때였다.

동하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대신 뜻을 함께 하는 종족에게는 필드를 오픈하고 만물상점을 개방하겠습니다.”

☆ ☆ ☆

동하가 현실로 돌아왔을 때는 오전 10시를 막 넘어가고 있을 때였다.

만물상점에서 보낸 시간은 며칠이 넘었지만, 현실에서는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이었다.

기계 종족의 도움으로 시간의 흐름을 고치고 예전처럼 느리게 흐르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동하는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만물상점의 일은 완벽하게 정리된 상태였다.

동하가 내민 당근책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모든 종족들은 만물상점을 개방하겠다는 동하의 말에 마침내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동하는 처음엔 최상위 랭커들만 끌어들일 생각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든 종족의 테스터들이 샤이언 종족과 싸우기로 뜻을 모았다.

그야말로 기념비적인 일이었다.

역사의 한 획을 긋다 못해 불멸의 신화가 되고도 남을 일이었다.

샤이언 종족은 그들을 침략해서 굴복시켰지만, 동하는 그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건 우주가 생겨나고 수많은 행성과 이계 종족이 나타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또한 이계 종족이 뜻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샤이언 종족과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 것 역시 실로 의미심장한 일이라 하겠다.

동하는 이제야 샤이언 종족과 해볼만하단 생각이 들었다.

동하는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최후의 전쟁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아마도 그건 지구에서 벌어질 가능성이 많았다.

그때가 되면 괴수들의 능력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해져 있을 터.

지구의 각성자들의 능력이나 사체로 강화한 무기 등으로는 그것들을 막아낼 수 없을 건 불을 보듯 뻔했다.

그래서였다.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계 종족의 힘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무엇보다 지구의 각성자들의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과연 샤이언 종족이 최후의 반격을 가해오기 전까지 모든 준비를 끝낼 수 있을지 그것이 문제였다.

동하는 필드와 만물상점의 운영은 남궁혜에게 맡겼다.

만물상점의 일이 대부분 정리가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현실의 일에 매진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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