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 압도-01 -->
불사의 능력을 지닌 괴수 종족.
일명 불사 종족으로 더 유명한 그들은 만물상점에서 상징적인 존재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샤이언 종족이 그들의 생김새를 본 따서 필드를 설계하고 우주 멸망 프로젝트에 사용할 괴수들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불사 종족의 모습은 다양했다.
사자의 얼굴에 인간의 육체를 지닌 자들도 있었고, 유니콘의 몸체에 메두사의 머리를 하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그렇게 모습은 제각각 다르지만,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목이 잘리지 않는 한 절대 죽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보게, 루한. 자네는 랭킹 1위야. 그렇다면 당연히 그쪽에서 예의를 갖췄어야 하네. 한데, 예의는 고사하고 아랫사람 부리듯 하는 건 너무 하지 않나?”
“하긴, 협조를 구하는 일이라면 이런 식으로 해서는 곤란하지.”
“자존심을 세워주어도 부족할 마당에 홀대하는 느낌이라니.”
“자네들 생각도 그렇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루한을 무시하는 것을 넘어 우리 종족 전체를 무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세.”
가이거는 불사종족 내에서 제법 명망이 두터운 자였다.
처음에는 동하를 도와 샤이언 종족과 맞서 싸우자는 여론이 우세했다.
하지만, 가이거가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하자 불사종족의 기류가 순식간에 달라지기 시작했다. 무시를 당한 듯 막말을 쏟아내는 자도 있었고, 당장 통제 센터로 달려가 동하에게 따져 물어야 한다는 자들도 있었다.
루한은 사람들이 이렇게 흥분해서 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더 냉정해질 필요가 있는데, 동족의 테스터들은 너무 흥분해 있었다.
그는 동족의 테스터들을 다독이며 자제시키려 했지만, 이미 폭발 직전까지 올라온 불사 종족의 여론을 잠재우는 건 불가능한 상태였다.
‘흐흐.’
가짜 가이거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더 이상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여기서 조금만 더 충동질하면 불사 종족은 동하와 사생결단도 마다하지 않을 기세였다.
그는 카일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이 모든 것이 카일의 머릿속에서 나왔던 것이다.
카일은 동하가 최상위 랭커들을 끌어들여 샤이언 종족과 맞서려고 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카일은 만물상점을 버리고 도망치기 직전 차원의 관리자들 중에서 능력이 뛰어난 자 몇 명을 선발해서 테스터들 속에 침투시켰다.
가짜 퉁크는 통제 센터를 재 해킹하는 것이었고, 가짜 가이거는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해서 동하와 이계 종족 사이에 자중지란을 일으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통제 센터를 해킹하는 데 실패했지만, 나는 성공했다.’
그래서 더 뿌듯했다.
그리고 어쩌면 그가 통제 센터를 해킹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자중지란이 일어나면 만물상점이 무척이나 혼란스러워질 건 불을 보듯 뻔했다. 그 틈을 이용해 통제 센터에 잠입하면 어렵지 않게 해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
가짜 가이거는 좀 더 대담하게 움직였다.
그의 입술 끝에서 불사 종족은 춤을 추듯 놀아났다.
정교한 인피면구를 뒤집어 쓴 그의 모습을 의심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모든 것이 카일과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꿈에도 알지 못했다.
아까부터 자신의 행동을 지켜보는 시선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 ☆ ☆
“드디어 찾았습니다.”
“나도 그런 것 같네. 바로 저기 저자 아닌가?”
“그렇습니다. 다른 불사 종족의 테스터들이 흥분해 있는 것에 비해 저자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습니다.”
“여기서 저자의 눈빛이 보인단 말인가?”
“후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다 들립니다.”
이게 바로 신안통과 천이통을 대성한 동하의 위력이었다.
곤륜노자와 켄지는 나지막한 소리로 탄성을 터뜨렸다.
“대, 대단하군.”
“여기서 저기까지 족히 오십 장은 넘는 거리이거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일 장에 3미터. 그러니 오십 장이면 150미터였다.
곤륜노자와 켄지는 각자 최고의 경지에 오른 고수들이었지만, 인간의 능력으로 150미터 밖의 대화를 듣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육안으로 지켜보고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동하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일이었다.
지금 그들은 지금 통제 센터의 지붕 위에서 만물상점을 내려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통제 센터는 중세 왕궁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뾰족한 탑 위로 올라가 주변을 살펴보면 만물상점의 모습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었다.
모든 종족들은 각자 한 구역을 차지해서 쉬고 있었다. 더구나 만물상점의 모든 매장이 문을 닫은 상태였고, 테스터들이 쇼핑을 즐길 수 없어서 거리가 한산한 편이었다. 그래서 더 동하는 자세히 불사종족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었다.
“확실히 자네 말처럼 주변을 충동질하고 다니는군.”
“저 자가 지나간 곳마다 크게 흥분하는 기색이 역력해.”
거리가 멀어서 불사 종족들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가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경험이 풍부한 노익장들이었다. 살아온 연륜도 많아서 대충 흘러가는 분위기만 보아도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머릿속에 그려졌다. 하물며 지금 가짜 가이거의 모습은 누가 봐도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동하가 이미 말해둔 것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마 아무것도 모른 채 불사 종족을 살펴보았다면 무슨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단순히 동하에 대한 반발 때문에 불사 종족이 모두 흥분해 있다고 생각했을 터였다.
“이런 식으로 쥐새끼를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네.”
“우린 자네가 힘으로 상대한다고 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르네.”
동하의 능력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기계 종족 전부가 달려들어도 동하 한 명을 감당하기 어려운 마당에 불사종족이라고 크게 다를 리 없었다.
하지만, 힘을 사용해도 명분이 있을 때와 없을 때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크다.
쥐새끼를 찾겠다고 무작정 들쑤시고 다니면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은 것처럼 모든 이계 종족의 반감을 살 수 있었다.
그래서였다.
그들은 동하를 말리기 위해 쫓아 나섰던 것인데, 오히려 동하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가. 그리고 상식을 뒤엎는 일이 벌어졌다.
동하는 간세를 찾겠다며 불사 종족의 진영으로 간 것이 아니라 통제 센터의 탑 위로 올라와 한동안 불사 종족의 모습을 관찰했던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할 건가?”
“일단 저자의 얼굴에 뒤집어 쓴 인피면구를 벗기는 것이 먼저일 것 같네만.”
오해에서 비롯된 여론 악화였다. 힘으로 찍어 누르기보다는 가짜 가이거의 정체만 밝히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 같았다.
하나 동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믿기 어려운 법. 저들에게 제 능력을 확실하게 보여주지 않으면 진심으로 따르지 않을 겁니다.”
그건 통제 센터로 동하를 만나러 왔던 최상위 랭커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하는 가볍게 바닥을 박차고 하늘 높이 날아 올랐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동하는 150미터나 떨어진 곳을 날아갔다.
쐐애애액!
쿵!
동하는 정확히 가짜 가이거 앞에 떨어져 내렸다.
세찬 바람이 주변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바닥이 들썩거리고 건물과 매장이 부르르 흔들렸다. 가짜 가이거는 중심을 잃고 뒤로 밀려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버터지 못해 결국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불사 종족 내에서도 그의 능력은 손가락 안에 들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편이었다.
하나 다른 테스터들이라고 사정이 다른 건 아니었다. 주변에는 삼백여 명의 테스터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뒤로 밀려나거나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그나마 루한과 몇몇 능력이 뛰어난 자들만이 중심을 잡고 버텨냈지만, 동하의 등장은 경천동지할 일인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 ☆ ☆
‘엄청난 자다.’
루한은 목이 타고 입술에 침이 말랐다.
살아 생전에 이런 충격적인 장면은 처음이었다.
사실 이 정도 속도와 충격이면 지반이 꺼지고 바닥에 구덩이가 깊게 파여야 정상인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릴 때 충격을 완화했다는 뜻.
세상에 떨어져 내리는 속도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자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불사 종족의 테스터들 역시 동하의 모습에 압도당한 나머지 쥐 죽은 듯 조용하게 변했다.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네놈은 누구냐?”
“어억? 너, 너는 바로 지구라는 행성의 인간 종족?”
누군가 동하를 알아보고 소리를 질렀다.
순간 삼백여 명의 시선이 일제히 동하에게 쏠렸다.
그들의 표정과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가뜩이나 부정적인 여론이 높아지고 있던 상황에서 그들을 도발하는 듯한 동하의 등장이 끝내 불사 종족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동하는 그들의 눈빛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동하는 이미 힘으로 밀어 붙이려고 마음먹은 뒤였다. 그렇다면 굳이 상대의 기분을 맞춰줄 필요도 없거니와 오히려 지금보다 더 거만하고 안하무인으로 나갈 필요가 있었다.
동하는 다짜고짜 격공섭물을 펼쳐 가짜 가이거를 끌어 당겼다.
“네놈에게 확인할 것이 있다.”
“으헉?”
가짜 가이거는 바닥에 쓰러져 있다가 막 몸을 일으키려던 참이었다.
그는 불가항력의 힘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을 느끼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의 몸이 속절없이 질질 동하 쪽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는 발버둥을 치고 대항하려 했지만, 동하의 격공섭물은 수십 톤의 괴수들조차 당해내지 못할 정도로 무지막지한 것이었다.
루한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는 이를 갈았다. 이건 명백히 불사 종족을 무시하는 태도였다.
“당장 그 손을 놓지 못할까?”
그는 동하를 향해 몸을 날렸다.
놀라운 점프력에 강철 같은 체력, 그리고 과감한 쇄도에 이은 능숙한 박투술까지…….
그것만으로도 불사 종족의 능력은 가히 최고라 할 수 있었다. 한데 입속에서 토해내는 불덩어리까지 더해져 그들은 이계 종족 중 최고의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다.
쐐애액!
루한은 과감하게 동하의 품을 파고든 다음 두 팔로 동하의 허리춤을 잡으려 했다.
불사의 능력을 지닌 루한이기에 그는 동하의 공격을 무서워하지 않고 과감하게 파고들었다. 당연히 그의 쇄도에는 무시무시한 위력이 담겨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동하는 살짝 몸을 비틀어 루한의 공격을 흘려 보냈다.
루한의 두 팔이 허공을 갈랐지만, 어느새 동하의 품으로 질질 끌려오던 가짜 가이거의 신형이 중심을 잡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다행히 인피면구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동하가 그를 한 번 힐끔 보고는 시선을 루한에게 돌렸다.
“그대는 누군가?”
“내가 바로 루한이다.”
2미터의 거구에 인간처럼 근육질 몸매를 하고 있었다.
하나 머리는 사자였고, 팔은 네 개가 달려 있었다.
그의 몸에는 여러 가지 아이템이 장착되어 있었다. 특히 그의 목에는 교룡의 힘줄로 만든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이는 목을 지키는 보호대인데, 어찌나 질기고 튼튼한지 검이나 칼에는 상처조차 나지 않았다. 불사 종족은 목이 잘려지지 않는 한 영원히 죽지 않는다.
때문에 목 주변에 A급 방어 아이템만 착용하면 불사 종족은 무적이나 다름없었다.
동하는 루한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자네에게도 용건이 있었는데 잘 됐군. 아까 내가 사람을 보내 초청을 했는데, 오지 않았더군.”
“자네가 내 상관도 아닌데 굳이 자네의 부름에 가야할 이유가 있을까?”
“후후.”
동하가 차갑게 웃었다.
그리고 싸늘한 시선으로 루한을 쳐다보았다.
“죽고 싶나?”
“뭐, 뭐라고?”
“감히 내 뜻을 거스르고도 불사 종족 모두 살 수 있을 거냐고 물었네.”
루한은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광오해도 정도가 있지.
이건 아예 머리가 돌아도 심하게 돈 것이 틀림없었다.
샤이언 종족 말고는 누구도 두려워해 본 적이 없는 불사 종족이었다.
더구나 루한은 최상위 랭킹 1위.
테스터들 중에 누구도 루한에게 시비를 걸지 못한다. 하물며 죽고 싶어 환장한 자가 아니고서야 불사 종족 앞에서 대놓고 뜻을 거스른다느니 죽는다느니 표현을 사용할 수 없었다.
루한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입이 거친 자로군. 한 번 흘린 물은 주워담을 수 없는 법이다. 뒤늦게 네놈의 오만방자한 행동을 후회한다 해도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후후. 좋은 말이다. 제법 기개도 있어 보이고. 하지만, 눈은 형편없군. 그런 말은 상대를 봐 가면서 해야지. 꼬맹이가 어른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라고 보는데.”
“으으.”
동하는 일부러 루한을 자극했다.
그의 안하무인에 불사 종족이 크게 분노했다.
뒤늦게 동하를 따라온 곤륜노자와 켄지는 어이가 없었다.
화해를 하고 다함께 가짜 가이거의 정체를 밝혀도 부족할 마당에 동하는 일을 점점 크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동하에게도 다 생각이 있었다.
불사 종족은 다른 종족에게 보여주는 일종의 본보기라 할 수 있었다.
한 놈만 찍어서 패면 눈치가 있는 자들이라면 알아서 길 것이다.
모든 종족을 일일이 찾아가 상황을 해결하려 들면 한도 끝도 없었다.
손을 쓰기로 한 이상 독하게, 그리고 압도적인 힘으로 밀어 붙여서 두 번 다시 말이 나오지 않게 만들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