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 신인류-02 -->
세상은 무서운 속도로 급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결코 동하와 샤이언 종족과의 싸움과 무관하지 않다.
전 세계에 평화가 찾아오고 능력을 각성한 자들이 생겨나 인류에겐 무한한 축복이라 생각하고 방심하기 쉬웠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폭풍전야였다.
폭풍이 오기 직전이 더 고요하듯 인류는 지금 멸망의 기로에 서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이전 생애의 기억 따위는 필요 없었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새롭게 리셋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동하는 앞으로 샤이언 종족의 전략이 어떻게 바뀔지 예측할 수 없어서 절로 눈살을 찌푸렸다.
동하는 일정을 바꿔야만 했다.
원래는 가장 먼저 집에 돌아가 가족들을 만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대통령을 먼저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동하는 수정에게 양해를 구했다.
“수정 씨, 미안하지만 내일 다시 만나면 어떨까요?”
“예? 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무래도 지금 급히 누굴 만나야 할 것 같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상대 여인의 마음을 배려해 주는 것이 예의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 자리를 박차는 건 한 마디로 ‘너 별로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히잉, 설마 나 동하 씨에게 까인 건가요?”
“풉!”
수정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하는 바람에 동하는 빵 터지고 말았다.
“피이. 나는 지금 심각한데, 동하 씨는 웃음이 나와요?”
“하핫! 미안해요. 수정 씨가 귀여워서 그래요.”
“쳇. 이럴 때 보면 꼭 오빠처럼 군다니까.”
수정은 입술을 삐죽였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울적하던 기분이 조금은 풀어진 상태였다.
가뜩이나 동하보다 7살이 많아서 감당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녀의 가족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친구들조차 동하의 나이를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것을 떠올리면 아직도 약이 올라서 견딜 수 없는 수정이었다.
그래서 더 그런지도 몰랐다. 동하가 지금처럼 자신을 동생 대하듯 하면 왠지 나이가 어려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좋아요. 그럼 내일 어디서 만날까요?”
“내가 다온텔레콤으로 찾아갈게요.”
“굳이 그럴 필요 없어요. 매번 인천에서 서울까지 오는 것도 힘들텐데 내일은 내가 인천으로 내려갈게요.”
“아닙니다. 나를 만나려고 했던 게 다음 사업 아이템 때문에 그런 거죠?”
“그, 그렇죠.”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온그룹이 어려운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몇 가지 아이템이 있습니다. 내일 그것들을 가지고 갈 테니까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라보십시오.”
“그것들 모두 마음에 들면 어떻게 하죠?”
“후후. 수정 씨는 우수고객이니까 특별히 할인해서 줄게요. 하나만 골라도 되고 전부 선택해도 괜찮습니다.”
돈은 이제 벌만큼 벌었다.
자자손손 돈 걱정 하지 않고 살아도 될 정도로 돈은 차고 넘쳤다.
다온그룹이 어렵다는데 굳이 아이템을 비싸게 팔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어려울 때 수정이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 할 수도 있었다.
☆ ☆ ☆
대한민국 정부는 지금 거의 마비 상태였다.
지난 열흘 동안 무기를 강화하지 못해 전 세계로부터 비난 여론이 거세어졌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무기 강화에 필요한 재료를 더 이상 구할 수 없게 되었다며 전 세계에 양해를 구했지만,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무기 가격을 높이기 위한 대한민국 정부의 꼼수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었고, 대한민국 혼자 살아남기 위해 다른 나라의 어려움을 모른 척 한다며 대한민국 정부의 무한 이기주의를 비난하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전 세계는 철저한 을의 입장이었다. 모든 나라가 대한민국의 눈치를 보고 전전긍긍하고 있었고, 그 어떤 나라도 대놓고 대한민국 정부를 비난하지 못했다.
한데, 어느 날 갑자기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공간이 없어지고 괴수들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능력을 각성한 자들이 나타나면서 인류의 문화가 백팔십도 달라졌다.
전 세계는 더 이상 대한민국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하긴 그럴 법도 했다. 강화 무기가 필요 없어졌으니 대한민국에서 무기를 수입하는 것도, 출시국가에 들어가기 위해 로비를 벌이는 일도 불필요해진 것이다.
대한민국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가끔씩 괴수들이 나타나 도시를 파괴하고 시민들을 죽였지만, 그때마다 능력을 각성한 자들을 투입했다.
우호국들이 등을 돌렸고, 비난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끓었다.
일각에서는 본보기 차원에서 경제제재를 하고 대한민국을 국제무대에서 완전히 매장시켜야 한다며 강경하게 주장하는 곳도 있었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던 곳도 하나둘 동참하기 시작했고,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에서 철저히 고립되어갔다.
그동안 대한민국의 도움으로 괴수들을 죽이고 나라를 지켜냈던 기억들은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이것이 불과 열흘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태는 더욱 악화될 게 틀림없었다.
대통령은 연일 국무회의를 주재하며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한번 돌아선 국제사회의 민심은 돌이킬 수 없었다.
국제사회는 철저히 약육강식의 세계였다.
모든 것에 힘의 논리가 작용했다. 어떻게 보면 조폭의 세계와 별 다를 바가 없었지만, 힘이 있는 나라가 곧 정의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도저히 해결책이 없는 건가?”
대통령은 지친 표정으로 2층 집무실에 들어섰다.
평소였다면 비서실장이 대동했겠지만, 지금은 혼자 있고 싶었다.
미국은 더 이상 대한민국의 우방이 아니었다. 유럽은 물론이고 아시아 역시 대한민국을 적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특히 오늘 중국에서 양국 간의 모든 교역을 끊겠다고 연락이 온 것이 타격이 컸다.
자원이 없는 대한민국은 무역에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는데, 중국과의 교역이 끊어지면 엄청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마음속에서는 괘씸한 생각도 들었다.
아무리 힘의 논리가 작용하는 국제사회라고 해도 그렇지. 이건 너무 심했다. 불과 십여 일 전만 해도 무기를 달라며 온갖 로비를 벌여왔던 중국이 하루아침에 태도가 돌변할 수 있는지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쉬운 쪽은 대한민국이었다.
이러다 정말 모든 나라가 경제제재 조치에 동참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그나마 지금의 난국을 타개하는 방법은 다른 나라보다 많은 능력을 각성한 자들을 보유하는 길이었다.
전 세계의 정부는 지금 능력을 각성한 자들을 보유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이들을 신인류라 불렀다. 구석기와 신석기를 지나 산업혁명과 정보화 시대에 이른 지금까지. 인류의 한계는 정해져 있었다.
한데, 능력을 각성한 신인류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초인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하늘을 날기도 하고 마른하늘에 번개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또한 엄청난 힘을 지니기도 했고, 무형의 장풍을 마구 날릴 수도 있었다.
각 정부에서는 신인류에게 특별대우를 보장했다. 국회의원과 마찬가지로 면책특권이 주어졌고, 엄청난 연봉은 물론이고 온갖 세재 혜택을 약속했다.
신인류의 능력은 개인마다 천차만별이었다.
설령 같은 계열의 능력자라 해도 더 강한 자들이 있고, 약한 자들도 있었다. 괴수의 사체로 능력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했지만, 각자의 능력에 따라 업그레이드 할 때의 위력도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컸다.
당연히 각 정부에서는 능력이 더 높은 신인류를 확보하기 위해 스카우트도 마다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알려진 내용에 따르면 미국이 가장 많은 능력자를 보유했고, 중국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인도나 러시아 파키스탄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불행히도 대한민국엔 능력자가 얼마 없었다.
어쩌면 그것이 이 모든 사태의 시작인지도 몰랐다.
신인류의 확보는 인구수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아무래도 결정체와 반응이 나타날 확률이 낮다 보니 인구가 적은 대한민국이 여러모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휴우.”
대통령이 한숨을 내쉬었다.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을 생각하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대통령님.”
“어? 자, 자네는……?”
대통령이 두 눈을 크게 치떴다.
언제 들어왔는지 동하가 의자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 ☆ ☆
“마크 국장, 미스터 최는 아직도 행방이 묘연한 것이오?”
“그게 정말 이상합니다. 미스터 최와 각별한 사이인 대한전자의 서용훈 사장도 모르고 있는 눈치더군요.”
“흐음.”
국무장관은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동하의 행방이 묘연해진 시점부터 대한민국 정부에서 더 이상 무기 강화를 하지 못해 전 세계의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르지만, 국무장관은 이것으로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동하가 없으면 대한민국 정부는 아무것도 아니고, 무기 강화에 필요한 기술들 역시 오직 동하만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런 정보들은 각국의 첩보기관들도 인지하고 있었지만, 미국은 그에 더해 한 가지 더 특별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동하가 지금의 신인류라 불리는 능력을 각성한 자들의 시초라는 것을.
하지만, 단순히 시초가 아니었다.
비공식 루트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동하는 당시 3성급 몬스터인 자이언트 검치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죽였다. 이건 능력을 각성한 신인류 중에서 가장 상위에 속하는 자들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더 미국 정부는 몸이 달았다.
시간이 갈수록 동하의 가치는 점점 증폭하고 있었다.
국무장관은 어떻게 해서든 접촉을 하고 동하를 스카우트해야 하는데, 동하가 좀처럼 그럴 만한 여지를 주지 않았다.
속이 타기는 마크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하는 식구들을 벙커 안에 들여보낸 이후 연기처럼 증발한 상태였다.
마크와 제인은 가족들을 모두 대한민국에 데리고왔는데, 그 이후에 괴수들이 사라지고 세상이 평화롭게 변해서 여간 당황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바로 그때였다.
국무장관의 보좌관이 헐레벌떡 달려와 귓속말로 속삭였다.
“방금 미스터 최의 핸드폰에 전원이 켜졌다고 합니다.”
“그게 정말인가?”
“인천 근방인 것 같습니다.”
“좋아. 당장 미스터 최의 위치를 추적해.”
“알겠습니다, 장관님.”
보좌관이 총총 걸음으로 밖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국무장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크 국장. 우리도 서둘러야 할 것 같소.”
“그래야겠군요.”
마크와 국무장관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 동하를 놓치면 언제 또 동하가 사라질지 몰랐다.
☆ ☆ ☆
대통령은 동하의 능력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유경과 서용훈 사장 등이 알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대통령은 동하가 죽어가는 외계인을 구해주었다가 그 답례로 외계 종족의 능력을 전해 받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는 동하가 설명하기 쉽게 대충 둘러댄 것이었는데, 어쨌든 인류에게 닥친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별 무리가 없었다.
대통령 역시 동하를 신인류의 시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신인류의 등장이 낯설지 않았다.
대통령은 이미 동하가 3성급 몬스터인 자이언트 검치 호랑이를 한주먹에 때려죽이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었다.
그때의 충격 때문인지 신인류의 등장은 오히려 담담하게 느껴졌다.
지금 전 세계에 광풍이 불고 있는 신인류와 동하 사이에는 그 차이가 현격했다.
신인류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들은 고작 1성급 몬스터와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괴수들의 사체로 장비를 강화하면 2성급 몬스터와도 대등하게 싸울 수 있지만, 3성급 몬스터는 어림도 없었다.
애초에 신인류는 동하와 비교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동하의 부재가 아쉬웠던 대통령이었다.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매장되고 있는 걸 해결해줄 사람은 동하 밖에 없었다. 한데, 동하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대한민국의 상황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었다.
침몰하는 배를 가만히 지켜보는 선장의 마음은 죽을 만큼 괴로운 법이다.
“자네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대통령은 반가운 나머지 금방이라도 두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잠시 지구를 떠나 있었습니다.”
“지, 지구를 떠나 있었다고?”
대통령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리 외계 종족의 능력을 지녔다고, 그런 것까지 가능한 가 싶은 표정이었다.
“그건 차차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나저나 괴수들이 사라지고 던전이 생겨났다고 하던데 어떻게 된 겁니까?”
“아!”
그제야 대통령은 정신을 차리고 신인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우호국들이 모두 등을 돌리고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매장을 당하기 일보직전인 상황을 말해 주었다.
“오늘 중국이 교역을 끊겠다고 연락이 왔었네.”
“그렇습니까?”
“그렇게 남의 일처럼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네. 이러다 정말 경제제재를 당할지도 모른단 말일세.”
미국을 악의 축이라고 말했던 이란과 이라크 북한 정도나 경제제재를 당했는데, 졸지에 대한민국이 리스트에 들어갈 판이었다.
경제제재를 당하면 모든 금융거래가 막혀서 자원이 없는 대한민국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부도가 날 게 뻔했다.
동하는 겨우 열흘 만에 상황이 이렇게까지 악화되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어떻게 보면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쁜 건 나쁜 것이었다.
예전에는 출시국가 앞에 들어가기 위해 온갖 로비를 마다하지 않던 자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돌변한 것에 배신감마저 들었다.
“대통령님, 그런 건 더 이상 신경 쓰지 마십시오.”
“무슨 해결책이라도 있는 건가?”
대통령이 잔뜩 기대감이 어린 눈빛으로 동하를 쳐다보았다.
“어차피 약육강식의 세상입니다. 우리와 교역을 끊은 곳은 똑같이 교역을 끊으면 되고 경제제재 조치에 찬성한 곳은 똑같이 경제제재로 맞불을 놓으면 그만입니다.”
“아, 아니 그게 지금 가능하다고 말하는 건가?”
대통령은 어이가 없어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동하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건 앞으로 두고 보시면 알게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