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 세 번째 원소-02 -->
“오빠, 이게 다 뭐야?”
“벙커라는 거야.”
“벙커?”
가족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벙커는 평범한 농지 아래에 감추어져 있었다.
한쪽 바닥에 고리가 튀어나와 있는데, 그마저도 흙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동하가 그걸 잡아당기자 덜컹 거리며 밑으로 내려가는 문이 열렸다.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어졌는지 문이 열리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쪽에 기관장치가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입구는 어른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았다.
하지만, 그렇게 조금 밑으로 내려가다 보면 공간이 확 넓어지고 밟고 설 수 있는 발판이 나왔다. 그곳이 바로 승강기를 탈 수 있는 정거장 같은 곳이었다.
그렇게 승강기를 타고 지하 20미터 정도를 내려가야 벙커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나온다. 보느니 놀라운 장면들뿐이었다.
한번 벌어진 가족들의 입은 좀처럼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나마 영화에서 깊은 갱도를 내려갈 때 이런 식의 구조를 본 적이 있어서 그리 낯설지는 않았다.
쿵!
승강기가 멈추고 가족들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들의 눈앞에 단단한 철문이 나타났다. 드디어 벙커 입구에 도착한 것이었다.
벙커의 입구는 단단한 철문으로 되어 있었다. 심지어 벙커의 벽 역시 모두 괴수의 사체로 강화한 철벽으로 되어 있었다.
“앞으로 생활하게 될 곳입니다.”
동하는 새삼 벅찬 기운이 밀려왔다.
처음 회귀를 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오직 벙커를 만들어 가족들을 지키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일을 해서 돈을 벌기 시작한 것도 벙커를 만들기 위해 자금을 만들려고 시작한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래도 결국 해냈다는 생각에 이제야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이곳에 있으면 괴수들의 손에 죽을 일은 없을 것 같아.”
노아의 방주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지금 아파트에 사는 것도 충분히 안전했지만, 벙커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나저나 동하야, 이걸 어떻게 구했느냐?”
아버지 성진의 말에 가족들 역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벙커는 사고 싶다고 해서 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후후. 대통령님께서 주신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큰일을 하려면 가족들의 안전부터 챙기셔야 한다면서 전국에 있는 벙커 중 하나를 내주시더군요.”
“그렇구나!”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대통령이란 말 한 마디에 가족들 모두 납득한 모양이었다.
심지어 유일하게 동하의 비밀을 알고 있는 미현까지도 그런 줄 알고 넘어갔을 정도였다.
“생각보다 벙커가 넓구나!”
“대통령님께 듣기로는 천 평 정도 규모라고 들었습니다.”
“천 평이라고?”
“혹시 오빠, 남북전쟁이 벌어질 경우를 대비해서 정부에서 은밀하게 만들어 둔 거 아냐?”
“그러게.”
벙커의 규모가 너무 커서 온갖 추측들이 난무했다.
더구나 시설도 깨끗하고 녹이 슨 부분이 전혀 없어서 지어진지 그리 오래된 것 같지도 않았다.
동하는 원래 벙커의 설계를 지하 50미터 깊이에 3층 건물로 구상했다.
가장 위층은 물탱크를 설치하고 창고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고 2층은 주거지로, 3층은 독서와 운동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밀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애초 설계대로 이루어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동하는 수영장을 만들거나 독서할 수 있는 곳을 만들지도 못했다.
완공 시기를 대폭 앞당기기 위해서는 내부 인터리어나 완성도 면에서는 포기하고 넘어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3개의 층으로 나누는 것도 빠듯한 시간 안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은 1층 밖에 없었고, 그조차도 방과 거실 그리고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공간은 크고 넓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동하가 산 땅의 규모가 천 평이었고, 그것들을 전부 활용하다 보니 방과 공간이 크고 넓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휑하다는 느낌도 있었다.
하긴, 만물상점에서 얻은 기계종족의 아이템들이 아니었다면 벙커를 만드는 것조차 불가능한 일이었을 터였다.
대신 안전성 면에서는 애초 설계보다 더 튼튼하게 만들었다.
동하가 처음 벙커를 설계할 때만 해도 필드 2관에서 얻었던 괴수의 사체들이 전부였었다.
동하는 그 사체들을 녹여서 벙커에 들어갈 자재들을 강화할 생각이었다.
한데, 지금은 그때 얻었던 사체보다 몇 단계 업그레이드 된 3성급 몬스터였다.
이 정도면 적어도 7차 침공 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건 이전 생애를 기준을 생각했을 때의 일이었다.
만일 예전 같았다면 동하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안심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나비효과로 인해 모든 것이 엉망진창 뒤죽박죽으로 변하지 않았던가?
2차 침공에 3성급 몬스터가 등장을 했고, 또 3성급 몬스터의 위력이 비약적으로 강해졌다.
그렇다면 3차 침공에 어떤 괴수들이 나타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 ☆ ☆
그 시각 마크와 제인은 벙커 근처를 돌아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은 오전에 동하가 가족들을 데리고 어딘가로 갈 때만 해도 크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가족들과 함께 나들이 나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데, 도착한 곳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이었다.
그제야 마크와 제인은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국장님, 이거 벙커 맞죠?”
“아마 그럴 걸?”
마크는 종군기자로 활약하면서 이라크에 숨겨진 벙커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깊이를 정확하게 가늠하긴 어려웠지만, 그래도 승강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갈 정도라면 충분히 핵폭탄에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국장님, 이거 잘하면 특종이 될 수도 있겠는데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설마 특종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요?”
“이봐, 제인. 이걸 보라고.”
마크가 바닥에 있는 고리를 잡아당겼다.
덜컹 거리는 소리와 함께 밑으로 내려갈 수 있는 입구가 열렸다. 입구 역시 단단한 철로 만들어져 있었다.
“녹이 슨 부분이 전혀 없어. 그렇다는 건 최근에 지어졌다는 뜻이지.”
“저, 정말 그러네요.”
“제인은 이게 무얼 의미하는지 아나?”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쩌면 미스터 최가 이런 일을 예상하고 벙커를 만들었을 수도 있단 뜻이야.”
“아!”
제인이 짧게 탄성을 터뜨렸다.
충분히 말이 된다.
노스트라다무스도 아니고 인간이 어떻게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상대가 동하이기에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드는 게 문제였다.
“그럼, 뭐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설마 지금보다 더 무서운 괴수들이 나타날 수도 있단 소리잖아요?”
“내 생각도 그래.”
이미 인류는 괴수들의 능력이 한차례 진화된 것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 또 한 번 진화된 괴수들이 나타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제인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그렇다면 정말 큰일이잖아요.”
인류는 이제 겨우 자이언트 악어와 자이언트 검치 호랑이 등 3성급 몬스터에 대항할 능력이 생겼고, 평화를 되찾아 가고 있는 중이였다.
여기서 능력이 더 높은 괴수들이 나타나면 그땐 인류의 운명도 끝이란 생각이 들었다.
“제인, 자네의 식구들을 모두 불러 와.”
“서, 설마 지금 우리만 살자는 건가요?”
“가족들만이라도 지키자는 거야. 미스터 최가 처음부터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고 벙커를 만들었다면 이곳이야 말로 유일한 구원의 방주인 셈이지.”
그들이 동하를 따라 이곳까지 온 것만 해도 그랬다.
이제 그들은 동하가 자신들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런데도 동하는 벙커를 가는데 굳이 그들을 따돌리지 않고 데려왔다는 건 경고해 주는 것일지도 몰랐다.
멀지 않은 미래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으니 충분히 대비하라고 말이다.
물론 그것이 너무 앞선 해석일수도 있지만, 마크는 자신의 생각에 확신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우린 기자들이에요. 진실을 알릴 의무가 있다고요.”
“국무장관이 한국에 와 있으니 얼마든지 알려도 되겠군.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알아두라고. 벙커의 공간은 한정되어 있고,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온갖 사람들이 몰려올지 모른다는 거 말이야.”
순간 제인도 멈칫 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긴 하지만…….”
제인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곳이야말로 지구에서 유일한 구원의 방주라는 생각은 제인도 동의하는 바였다.
하지만, 동하가 과연 허락해줄지 아직은 미지수였다.
벙커가 구원의 방주라면 이미 들어갈 사람이 정해져 있을 터.
모든 건 동하의 뜻에 달려 있었다. 설령 승선하는 사람이 정해져 있지 않더라도 전혀 친분이 없는 자신들의 식구들을 들여보내 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 ☆ ☆
동하는 가족들의 안전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고 곧장 남궁세가로 넘어갔다.
다행히 남궁혜와 약속했던 3일이란 시간보다 하루 일찍 오는 게 가능했다.
남궁혜는 물론이고 곤륜노자까지 동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르신, 폐관수련은 끝나신 겁니까?”
“후후.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나올 수 있었네.”
곤륜노자가 폐관수련을 끝내고 나온 건 동하가 현실로 돌아가고 난 직후였다.
비록 며칠 앞당긴 것에 불과했지만, 그건 그만큼 곤륜노자의 무공이 예상보다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곤륜노자는 대부분 공력을 회복한 것 같았다.
전에 보았을 때보다 한층 눈빛이 맑고 깊어져 있었다.
그게 불과 한 달 남짓한 시간이란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일이었다.
“어르신, 기연을 얻으셨군요.”
“헛헛! 그걸 어찌 알았나?”
“기연이 없고서야 어찌 파괴된 단전을 이토록 빨리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도 그렇군. 사실 음양조화선을 연구하던 중에 부채를 따라 아주 미세하게 기운이 흐르고 있다는 걸 발견했네.”
“기운이라 하시면……?”
“바로 이것일세.”
곤륜노자가 다짜고짜 동하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억?”
동하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곤륜노자의 주먹은 천천히 날아와서 하품이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날아오는 궤적이 문제였다. 곤륜노자의 주먹은 동하의 온몸을 짓누르고 있어서 동하가 어떤 식으로 반격을 해도 모조리 파훼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동하는 곤륜노자가 주먹을 휘두르기 전부터 이미 모든 공간을 선점 당한 기분이었다.
동하는 어찌 막아야 할지 몰라서 일단 뒤로 피했다.
그의 움직임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뒤였다.
머릿속으로 피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자 동하의 신형은 공간이동이라도 한 듯 어느새 저 멀리 물러서 있었다.
일반적이라면 이렇게 한 번 피하고 거리를 벌리고 나면 반격할 기회를 얻어야 정상이었다.
하나 곤륜노자의 주먹은 찰거머리처럼 따라붙었다.
여전히 곤륜노자의 움직임은 느렸다.
한데도 동하는 쉽사리 곤륜노자의 주먹을 떨쳐내지 못했다.
동하는 오기가 들었다.
분명 곤륜노자의 주먹은 음양조화선에서 얻은 무공일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는 건 무림종족의 무공을 두루 꿰고 있던 샤이언 종족조차도 생소한 것이다.
동하에게는 자신의 능력이 어디까지가 한계인지 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동하는 자신이 가진 무공을 총동원해서 곤륜노자의 주먹을 파훼하려고 했다.
동하는 9성의 공력을 얻은 이후 수많은 무공비급이 머릿속으로 다운로드 되었다.
그건 구파일방과 육문칠가 그리고 사파와 마도를 가리지 않았다.
동하의 몸에는 무림종족 전부의 능력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히 융단폭격이었다.
동하는 정파의 무공을 펼쳤다가 갑자기 사이하기 짝이 없는 사파의 무공으로 곤륜노자의 눈을 어지럽혔고, 마도의 패도적인 무공으로 강하게 밀어붙였다.
하지만, 동하는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동하가 어떤 식으로 반격을 하든 곤륜노자는 공간을 선점해갈 뿐이었다. 길목이 차단당하고 궤적이 막히자 백약이 무효였다.
간담이 서늘해졌다.
등 뒤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런 식으로라면 백날이 되어도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동하가 거인의 힘을 사용하면 결국엔 무지막지한 힘으로 곤륜노자의 주먹을 파훼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이기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르신, 제가 졌습니다.”
동하는 순순히 패배를 시인했다.
하나 곤륜노자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는 지지 않았네. 오히려 진 사람은 나인 것 같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난 처음부터 자네의 힘을 이용해 공격한 걸세. 그게 바로 음양조화선풍신무의 능력 중 하나이지.”
음양조화선풍신무는 신의 무학이라 할 수 있었다.
무림종족 내에 존재하는 그 어떤 무공보다 강력하고 파괴력이 높아서 곤륜노자는 음양조화선풍신무를 수련하는 내내 전율이 일 정도였다.
상대의 힘이 크면 클수록 음양조화선풍신무의 능력도 그만큼 강해진다.
부드러운 기운은 부드러운 기운으로 제압하고 패도적인 기운은 패도적인 기운으로 제압한다.
그건 곧 상대의 능력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형식으로 그 어떤 무공도 음양조화선풍신무를 능가할 수 없었다.
“상대의 능력으로 상대를 제압한다라…….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군요.”
“자네도 방금 전 일을 잘 떠올리면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거네.”
“아. 그러고 보니 확실히 달랐던 것 같습니다.”
동하는 그제야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는 정사마의 무공을 모두 사용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각자 특색이 분명했다.
정파의 무공은 장중하면서도 도도했고, 사파의 무공은 기괴하면서도 악랄했다. 마도의 무공은 힘을 앞세운 패도일색이었다.
바로 그것이었다.
동하가 정파의 무공을 사용하면 곤륜노자 역시 장중하면서도 도도한 기운으로 동하를 상대했고, 동하가 마도의 패도적인 기운으로 몰아붙이면 곤륜노자도 이내 비슷한 힘으로 동하의 수법을 파훼해 왔던 것이다.
결국 동하는 자기 자신과 싸운 꼴이었다.
음양조화선풍신무는 상대의 힘을 안으로 끌어들였다가 다시 되돌려 준다.
상대가 느낄 때는 그것이 자신의 힘인지도 모르고 대경실색하게 된다.
그리고 더 강한 힘으로 상대를 찍어 누르려고 하다보면 결국 빈틈을 보이고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동하가 대단한 건 신의 무공이라 하는 음양조화선풍신무를 앞세워 시종일관 동하를 윽박질렀지만, 곤륜노자는 끝내 동하를 쓰러뜨리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내일 혜와 함께 만물상점에 간다고 들었네.”
“예, 어르신.”
“전에 자네 때문에 만물상점이 쑥밭이 되었는데 위험하지 않겠나?”
“그래도 생명의 씨앗을 찾는 일에 혜 씨 혼자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렇군.”
곤륜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그렇다면 하루의 시간이 있으니 다행일세. 어서 준비하게.”
곤륜노자는 자신이 깨닫고 터득한 음양조화선풍신무를 동하에게 전수해 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