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 사람 잘못 건드렸어-04 -->
계획은 치밀했다.
동하는 단순히 차종호의 정치 인생을 끝장내는 것만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다. 동하는 자신의 가족을 건드리려 했던 차종호를 그냥 살려둘 만큼 그리 관대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너무 쉽게 죽이는 것도 어찌 보면 차종호에게 관용을 베풀어 주는 것이었다.
동하는 차종호에게 좀 더 고통을 주면서 깊은 절망과 좌절을 안겨주고 싶었다.
그래서였다. 차종호 같은 인간은 가진 것을 빼앗길 때 오히려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워하는 법이다.
돈과 권력 그리고 명예까지…….
동하는 먼저 차종호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릴 생각이었다.
지금까지는 정치인생에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승승장구 하며 야권의 유력한 차기 대선 후보로 떠올랐지만, 그것들을 송두리째 빼앗긴다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과 좌절을 경험하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진정한 공포는 가네무라와 일본의 우익세력들이라 할 수 있었다.
차종호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 가네무라와 일본의 우익세력을 배신한 셈이었다.
하나 뒤통수를 맞고 가만히 있을 가네무라와 일본의 우익세력들이 아니었다.
아마 야쿠자라도 동원해서 차종호를 죽이려 들 게 뻔했다.
그리고 그건 누구보다 차종호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차종호가 가네무라를 배신할 때만 해도 나름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었다.
자신은 대한민국의 유력한 정치인이란 생각에 가네무라의 복수를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고, 대통령이 되어서 적당한 선에서 기분을 풀어주면 언제든 화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쉽게 생각했던 것이다.
동하는 처음부터 차도살인지계를 염두에 두고 계획한 일이었다.
한마디로 이이제이였다. 가네무라와 일본의 우익세력의 손을 빌려 차종호의 목숨을 제거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 ☆ ☆
“자네 방금 그자가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꾼다고 했나?”
“예, 박사님. 카일도 완벽하게 속았다고 하더군요.”
“흐음.”
“지구의 기운이 심상치 않습니다. 아무래도 다음 패치 업데이트를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박사님.”
하지만, 타누스 박사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이건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들이 애초에 1성급부터 9성급까지 괴수들의 등급을 세분화시켜서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했지만, 그중에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건 프로젝트 상에는 없던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갑자기 튀어나온 기분이었다.
‘설마 능력이 진화를 하고 있는 것일까?’
분명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하나 동하의 능력은 자신의 상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설령 그들이 9성급 몬스터를 완벽하게 만들어 낸다고 해도 과연 동하를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샤이언 문명에 의해 샤이언 종족이 멸망하리라!>
왠지 예언이 점점 현실화되어 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계속 연구가 진행되면 결국 샤이언 종족은 파멸을 맞이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타누스 박사 자신의 손으로 샤이언 종족을 멸망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이쯤에서 동하와 적당히 타협을 하고 우주 말살 프로젝트를 철회하는 게 샤이언 종족을 지키는 마지막 방법 같단 생각이 들었다.
하나 그건 당장 시얀부터 반대했다.
하물며 원로들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타누스 박사는 좀처럼 연구에 집중할 수 없었고, 우주 멸망 프로젝터는 잠시 주춤거리고 있었다. 다음 패치 업데이트가 벌써 나왔어야 하는데 아직 연구가 절반 정도 밖에 진행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야말로 실패의 연속이었다.
샤이언 종족은 계속 3성급 몬스터 위주로 던전을 운용했고, 그 결과는 거의 참패 수준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지구는 동하를 중심으로 빠르게 대처를 해 나가고 있었고, 샤이언 종족은 더 이상 3성급 몬스터로는 지구를 어떻게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덕분에 지구는 뜻하지 않게 잠시나마 평화로운 시기를 맛볼 수 있었다.
원로들이 크게 분노한 것은 당연지사.
그들은 타누스 박사와 연구진을 연일 강하게 질타했지만, 타누스 박사는 조금씩 우주 멸망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원로들은 예전부터 강경파에 속해 왔었다.
애초에 우주 멸망 프로젝트를 계획한 자들도 강경파에 속한 원로들이었고, 우주에 산재한 수많은 외계 종족을 멸망시킬 계획을 품은 것도 원로들이었다.
그들은 좀처럼 타누스 박사의 말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우리가 만든 것이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과거로 돌아온 것 같다고?”
“그래서 뭐 어쩌자는 말인가?”
“샤이언 종족은 어떤 이유에서건 절대 타협을 하지 않아. 하물며 지구의 미개한 종족과 타협을 하라고?”
“자네가 그보다 더 뛰어난 것을 만들면 그만 아닌가?”
타누스 박사는 원로들을 만나서 설득을 하려 했지만, 그들은 이번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애초에 그들은 동하가 미래에서 과거로 왔다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설령 타임 슬립을 인정한다 해도 왜 자신들이 만든 무기가 자신들을 향해 칼끝을 겨냥하고 있는지 납득하지 못했다.
결국 프로젝트가 주춤거리자 원로들은 모든 책임을 물어 타누스 박사를 해임했다.
하지만, 원로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연구진들에게 일종의 경고를 하기 위해 타누스 박사를 구속했다.
그리고 새로운 연구 책임자로 시얀을 임명했다. 시얀은 타누스 박사의 구속에 마음이 아프면서도 한편으로는 강한 욕망이 꿈틀거렸다.
그는 지금까지 타누스 박사의 보좌에 만족하며 살았지만, 사실 우주 멸망 프로젝트는 샤이언 종족에겐 최고의 명예였다. 우주 멸망 프로젝트의 수장이 되었다는 건 모든 과학자들 중에서 최고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시얀은 타누스 박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건 잠깐 뿐이었다.
시얀을 중심으로 연구진은 다시 힘을 냈다.
그렇게 우주 멸망 프로젝트는 다시금 탄력을 받기 시작했고, 성과는 바로 나타났다.
시얀은 오래지 않아 4성급 몬스터 개발에 성공했던 것이다.
그건 곧 지구에 또 다른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 ☆ ☆
모두가 잠이 든 새벽 무렵.
기자들 앞으로 한 통의 문자가 발송되었다.
그건 국내에 상주하고 있는 외신기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다들 졸린 눈을 비벼가며 핸드폰 문자를 확인했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이 번쩍 떠지고 졸음이 확 달아났던 것이다.
“특별 기자회견을 하겠다고?”
청와대에서 보낸 문자였다.
기자회견 시각을 보니 바로 오늘 오전이었다.
지금까지 이러한 전례가 없었다.
아무리 특별 기자회견이라도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문자를 발송하기 마련인데, 조금의 시간적인 여유 없이 오늘 바로 진행한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란 뜻일 터였다.
기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출시 국가 순서에 무슨 변동이 있는 걸까?”
그것 외에는 딱히 짐작되는 구석이 없었다.
어느새 무기 공급은 꾸준히 이루어져서 총 15차 출시 국가 중에서 오늘이 13차였다.
이틀 뒤에 15차 출시 국가를 발표하면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1차적인 출시 국가 선정이 마무리되는 셈이었다.
그렇게 되면 다시 순서에 따라 1차 출시 국가들에게 무기를 다시 공급하게 되는데, 지금 상황에서 이것 말고는 청와대에서 급히 특별 기자회견을 자청할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13차와 15차 사이에 순서를 바꾸려는 걸까?”
“설마. 고작 이틀 차이라고 해도 반발이 심할 텐데.”
“하긴, 1분 1초가 아쉬운 상황에서 이틀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지.”
기자들은 세수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새벽같이 밖으로 나왔다. 초가을의 싸늘한 기온이 밀려왔지만, 지금 이따위 추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특종의 기운이 느껴졌다.
청와대에서 특별 기자회견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빨리 알아낼 수만 있다면 전 세계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자들은 청와대 관계자들을 시작으로 대한텔레스의 직원들 그리고 대한그룹의 임원들까지… 모든 사람들을 들쑤시고 다녔지만, 정작 힌트가 될 만한 것을 얻어낸 사람조차 없었다.
속보였다.
세계의 시선이 대한민국에 쏠리고 있었다.
겨우 문자 한통에 불과했지만, 그것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전 세계는 앞 다투어 방송을 중단하고 속보를 전했고, 특집 방송을 만들어 청와대에서 특별기자회견을 하는 이유와 향후 전망에 대해 예측했다.
나라마다 해석이 분분했지만, 대부분 13차와 15차 출시 국가 순서에 변동이 있을 것 같다는 예측이 조심스레 설득력을 얻고 있었다. 15차 출시 국가 명단에 들어 있는 나라들은 일말의 기대를 품고 텔레비전 앞에 모였고, 13차 명단에 들어있는 나라는 밀려드는 걱정에 시위를 벌이는 자들도 생겨났다.
일각에서는 두 번째 무기 공급부터 순서가 바뀌는 것이 아니냐며 상위 출시 국가들 사이에서 불만이 제기되었다.
“국장님, 어제 사건과 관련이 있는 걸까요?”
“글쎄.”
마크와 제인은 지난 밤 자동차 안에서 잠복근무를 하며 추위와 사투를 벌였다.
그러는 와중에 그들에게도 문자가 날아왔고, 직감적으로 어제 동하의 주차장에서 생긴 일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왠지 단순하게 출시 국가 순서에 변경이 있는 것만으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요?”
“일단은 밀고 들어가 보자고. 정식으로 인터뷰할 핑계 거리가 생겼으니까 집안에 들어가 보면 어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는 게 좋겠죠?”
이번에는 제인도 반대하지 않았다.
동하는 대한텔레스의 사장이었고, 출시 국가 명단을 발표하는 정부의 핵심 관계자였다.
마크와 제인은 동하의 인터뷰를 따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사 거리가 될 거란 판단이 섰던 것이다.
“내가 미스터 최의 인터뷰를 진행할 테니까 제인은 집안 구석구석을 잘 살펴보라고.”
“알겠어요.”
그들은 손발이 척척 맞았다.
만에 하나 동하가 시치미를 뗄 것을 가정해 만반의 대책을 세워 두었다.
다행히 이른 새벽 시간이라 아직 다른 기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절호의 기회였다.
그들은 즉시 벨을 눌러 동하의 가족들을 깨웠다.
그것이 새벽 5시 무렵이었다.
“누구시죠?”
“우린 CNN에서 나왔습니다.”
제인이 동하의 가족들에게 한국말로 자신들을 소개하고 있을 때 미현이 졸린 눈을 비비며 다가왔다.
“제, 제인?”
“헤이, 미현. 그동안 잘 지냈어?”
“제인이 여긴 어쩐 일이에요?”
“동하 씨를 인터뷰하고 싶어서 왔어. 그나저나 동하 씨는 어디 있지?”
미현과 제인은 서로 구면이었다. 1차 침공 첫째 날 백화점에서 만난 이후 하루 동안 같이 지낸 적이 있었다.
“인터뷰?”
“오늘 청와대에서 특별 기자회견을 한다고 갑자기 문자를 보냈거든.”
제인이 핸드폰을 열고 문자를 보여주었다.
미현은 처음 듣는 소리였다.
동하에게 미리 전해들은 건 없었지만, 항상 오빠는 이런 식이라 이젠 그러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청와대에서 문자까지 보냈다니 틀림없는 사실일 터이다.
아마 어제의 일 때문인 것 같았다.
동하는 가족들이 걱정할까 봐 별일 아니라고 했었지만, 미현에게는 살짝 귀띔해준 게 있었던 것이다.
“정말 차종호 인천시장하고 일본의 우익세력들이 관련된 일이라고?”
“이미 증거를 모두 확보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대신 아버지 어머니가 여쭤 보시면 잘 둘러대고. 알았지?”
어제 동하는 그렇게만 말했었다.
미현도 이제 동하와 한 배를 탄지 오래인지라 어지간한 상황에서는 거짓말이 술술 흘러 나왔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그녀는 동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보고는 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오빠는 새벽에 출근하고 없어요.”
“새, 새벽에 출근을 했다고?”
“그때가 새벽 3시쯤이었나? 물을 마시려고 거실에 나왔다가 오빠 방에 불이 켜져 있기에 들어갔더니 대통령님께 연락이 왔다며 출근 준비를 하고 있더라고요.”
“말도 안 돼. 동하 씨가 나간 걸 본 적이 없는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 아니야.”
더 이상 말을 하다가는 잠복근무 하고 있다는 게 들통 날 것 같아서 마크와 제인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들이 잠복하는 것을 알고 은밀하게 빠져나갔다고 해도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입구에서 나오는 길목은 오직 하나, 바로 1층 현관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마크와 제인은 추위와 덜덜 떨면서도 계속 감시를 했기 때문에 동하가 빠져나갔다면 분명 그들의 이목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 ☆ ☆
웅성웅성.
기자들이 하나둘 춘추관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새벽 내내 허탕을 치고 돌아다닌 관계로 하나같이 눈동자가 풀려 있었다.
대한민국의 위상을 반영이라도 하듯 전 세계 방송과 기자들이 대거 몰려와 있었고, 이는 곧 라이브로 전 세계에 방송될 예정이었다.
그렇게 11시 정각이 되는 순간 대통령이 나와 담화문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동하는 뒤로 빠져 있었다.
그것이 기자들의 호기심을 더 자극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지금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어제 최동하 군이 테러를 당했습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말에 춘추관에 잠시 정적이 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찰칵! 찰칵!
카메라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지며 기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최동한 군은 어찌 되었습니까?”
“누가 테러를 자행한 겁니까?”
“의도가 무엇입니까?”
대통령은 강한 어조로 말했다.
“의도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역시……?”
“맞습니다. 그자들은 무기를 독점하기 위해 최동하 군을 회유하려 했지만, 이에 실패하자 아예 죽이려고 했습니다.”
기자들이 크게 경악했다.
이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테러를 자행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미국도 무릎을 꿇은 마당에 감히 누가 있어서 대한민국을 건드리려 했는지 멍청하다 못해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도대체 그자들이 누구입니까?”
“증거는 있는 겁니까?”
또 다시 질문세례가 쏟아졌다.
대통령은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증거는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 기자회견을 통해 다시 한 번 전 세계에 경고합니다. 15차 출시 국가 리스트에서 일본을 제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