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 만물상점-116화 (116/167)

<-- 116화 : 극강-03 -->

한 여인이 취조실 한가운데에 결박을 당한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미약에 취해 눈동자가 풀려 있었지만, 그렇다고 자세까지 완벽하게 허물어진 것은 아니었다.

대단한 정신력이었다. 카일이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그녀에게 자백 포션을 먹였던 것이다. 하지만, 성녀는 기본적으로 신성마법을 다루고 있어서 독을 해독하고 정화하는 치유의 능력이 탁월했다.

카일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때문에 조금 더 특별한 자백 포션을 사용해서 성녀의 정신을 조금씩 파괴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성녀는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이를 악물고 버텼다. 여기서 그녀가 무너지면 판타지 종족은 물론이고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종족의 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었다.

카일은 그녀의 의지에 감탄을 하면서도 더욱 집요하게 그녀의 정신을 파괴해 나갔다. 그리고 서서히 카일의 집념이 빛을 발해가고 있을 때 하필이면 동하가 나타났던 것이었다.

동하가 성녀를 부르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봐요?”

“그, 그대는 누구죠?”

성녀가 흐릿한 초점 속에서도 동하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녀는 동하가 로이를 밖으로 유인하고 난 다음 변장을 풀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을 지켜보았던 것이다.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그건 상상도 못할 충격이었다. 마법으로도 할 수 없는 완벽한 변신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수상하게 생각했다.

적어도 대항세력 가운데 동하와 같은 능력을 지닌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카일이 그녀의 신임을 얻는 방법으로 전략을 바꾸어 동하를 접근하게 만든 것은 아닌지 덜컥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군.”

동하는 그녀에게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서 동하는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동하는 즉시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 안에는 엘가나가 숨어 있다가 심지를 제압당한 성녀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성녀님.”

“아, 엘가나. 그대였군요.”

“저에요, 성녀님. 이분이 동하 님이에요.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었죠?”

“그, 그렇군요.”

성녀가 그제야 동하를 향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이라도 동하를 의심한 것이 못내 미안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엘가나를 보는 순간 긴장이 풀어졌고, 이내 의식을 잃고 깊은 수면에 빠져 들었다.

☆ ☆ ☆

“여기에 놈이 나타났단 말인가?”

B블록은 테스터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B블록은 상당히 인기가 많은 곳이어서 다른 곳보다 테스터들이 많았다. 당연히 B블록을 봉쇄하는 것도 어렵지만, 이 안에서 놈을 찾아내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래서는 무작정 B블록 안으로 밀고 들어갈 수도 없었다.

카일은 하는 수 없이 랑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났는데도 랑트는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누가 제보를 했는지 물어보지도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눈살을 찌푸리며 한참 랑트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로이가 헐레벌떡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카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로이를 향해 물었다.

“아니, 자네가 여긴 왜 온 건가?”

“대, 대장님!”

놀라기는 로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로이는 귀신이라도 만난 것처럼 두 눈을 크게 치뜨고 한참을 카일을 쳐다보았다.

“대장님께서 저보고 대신 이곳으로 가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내, 내가?”

카일은 지금 로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평상시 로이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할 리가 없었다.

“자네가 여길 오면 취조실은?”

“그건 대장님께서 대신 계시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자네 아까부터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저, 저도 뭐가 뭔지 모르겠군요. 그러는 대장님께서는 언제 오신 겁니까?”

이쯤 되면 뭔가 카일은 물론이고 로이 역시 뭔가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흐음. 나는 아까 랑트와 함께 나왔을 때 이곳으로 바로 왔었네.”

“예에? 그럼, 다시 돌아와서 저에게 말씀하신 건 어떻게 된 겁니까?”

“내, 내가 다시 자네에게 돌아갔었다고?”

“예, 대장님.”

“나는 맹세코 그런 적이 없네.”

“그, 그럼 아까 제가 봤던 대장님은 어떻게 된 거죠?”

로이의 얼굴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카일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했다. 자신에게 쌍둥이가 없으니 누군가 변장을 하고 자신인 척 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 자가 자네에게 뭐라고 말을 했나?”

“그게 그러니까…… 지금까지 아무 흔적도 찾을 수 없었는데, 이 시점에서 그놈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 수상하다면서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대장님을 유인하기 위한 속임수일지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아차. 우리가 당했네.”

“예?”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어서 취조실로 가세.”

카일이 무서운 속도로 통제 센터로 내달렸고 로이가 그 뒤를 따랐다. 카일과 로이는 순식간에 취조실에 들이닥쳤지만, 정작 취조실은 텅 비어 있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로이는 망연자실 할 말을 잃었고, 카일은 치가 떨렸다.

눈 뜬 채 코 베인다고 하더니 정말 보기 좋게 당한 것이다.

“으으, 이런 찢어 죽일 놈.”

카일은 어찌나 화가 치밀어 오르던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랑트가 돌아오지 않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단 생각은 들었지만, 설마 놈이 대담무쌍하게 랑트로 변신을 해서 자신을 유인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니, 애초에 그런 완벽한 변신술이 가능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자네의 염력으로 놈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추적해 보게.”

만물상점의 경계는 어느 때보다 삼엄했다

곳곳에 차원의 관리자들이 경계를 서고 검문소에서 인증을 실시하고 있으니 쉽사리 도망치진 못했을 터.

지금이라도 추적하면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진짜 랑트가 헐레벌떡 취조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대장님.”

그는 F블록을 봉쇄하고 한참 동안 카일을 기다렸지만, 도무지 나타날 기미가 없자 결국 통제 센터를 찾아 왔던 것이다.

하지만, 카일과 로이는 한 번 속지 두 번 속지 않았다.

“으으, 네 이놈.”

로이는 말보다 주먹이 먼저였다.

퍽!

로이의 주먹이 랑트의 얼굴에 작렬했다.

“컥!”

랑트가 피를 뿌리며 뒤로 나가 떨어졌다.

무방비 상태에서 당한 것이라 그 타격은 몇 배는 더 컸다.

염력이 실린 로이의 주먹에는 엄청난 위력이 담겨 있었다.

랑트의 얼굴은 뼈가 으스러지고 광대뼈가 함몰이 되어서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일 정도였다.

로이는 너무 쉽게 잡았다는 생각에 약간 흠칫 했지만, 이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랑트에게 다가갔다.

“네 이놈. 우리가 또 속을 줄 아느냐? 당장 변신을 풀지 못할까?”

로이가 랑트의 얼굴을 잡아 당겼다.

이 정도면 아무리 변신 능력이 강력해도 풀어져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랑트의 얼굴은 망가진 그대로였다. 그제야 로이는 물론이고 카일 역시 뭔가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서, 설마…… 진짜 랑트, 너란 말이냐?”

그렇게 묻는다고 이미 기절해서 의식을 잃은 랑트가 대답할 리 없었다.

카일에게는 이 상황이 충격과 경악 그 자체였다.

로이는 자신의 손으로 충성스러운 수하를 반병신으로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나 충격과 경악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뒤늦게 카일로 변신한 동하의 말에 랑트가 속아 모든 병력이 F블록으로 이동했다는 보고를 듣고 나서야 카일과 로이는 절규하고 말았다.

철통같았던 만물상점의 경계는 허술하게 변했고, 추적을 해 봐야 더 이상 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으아악! 이놈!”

완벽한 패배였다.

수치와 절망이 거친 파도가 되어 밀려왔다.

이것이 몇 번째인지 몰랐다.

이젠 우주 말살 프로젝트 때문이 아니더라도 동하를 죽이지 않고는 도저히 울분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 ☆ ☆

옛말에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라고 했다.

샤이언 종족의 행성이 어디에 있는지만 알 수 있다면 전쟁의 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을 터였다. 물론 목숨을 장담하기 어려울 만큼 위험천만한 일이긴 하지만, 모험을 걸어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적어도 지금처럼 샤이언 종족에게 일방적으로 끌려 다니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동하는 샤이언 행성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인 성녀를 구해서 남궁세가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남궁세가는 환호성에 휩싸였다.

경사도 이런 경사가 없었다.

동하가 무사히 돌아온 것은 물론이고 엘가나까지 다시 온 것은 다시없을 만한 감격적인 일이었다. 거기에다 샤이언 종족의 행성에 갈 수 있는 단서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다들 할 말을 잃었다.

왠지 절대 불가능하던 일에 일말의 희망이 생겨난 기분이었다.

자고로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 하지 않았던가?

대항세력들을 모두 규합해서 샤이언 종족의 행성에서 승부를 본다면 승리를 한다고 장담은 못 해도 조금이나마 샤이언 종족에게 타격을 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성녀에게 향했다.

사람들의 눈빛에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었다.

성녀는 아직까지 자백 포션에 취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상적인 사람의 경우에는 평생 의식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자백 포션의 위력은 대단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성녀의 정신을 조금씩 파괴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동하가 인벤토리에 넣어둔 약을 꺼내서 먹이자 성녀는 서서히 정신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아직 완벽한 상태는 아니었다. 두 눈의 초점은 여전히 흐릿했다.

의식을 차리긴 했지만, 기억까지 온전할 지는 의문이었다. 그나마 동하가 먹인 약은 괴수들의 능력이 응집된 것이라 자백 포션이 더 이상 성녀의 정신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막아주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습니까?”

“동하 님이시군요.”

다행히 동하를 기억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억이 있다는 건 정신이 온전하다는 뜻이었다.

“동하 님께서 저를 치료해 주신 건가요?”

성녀는 한눈에 자신의 몸속에서 이질적인 기운이 자백 포션을 막고 있다는 것 감지했다.

그리고 그 이질적인 기운은 동하의 몸에서도 느껴지고 있었다.

“완벽하게 치료한 것은 아닙니다. 성녀님께서 신성마법으로 스스로의 몸을 치료하고 정화해 나가야 할 겁니다.”

카일이 사용한 자백 포션은 상당히 강력해서 만병통치약과도 다름없는 동하의 약으로도 치료가 되지 않았다.

성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머릿속이 멍하고 깨질 듯 아팠지만, 취조실에 갇혀 카일에게 심문을 받을 때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성녀 님. 살아 계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엘가나는 성녀를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두 사람의 해후를 보며 사람들은 괜히 코끝이 시큰거렸다.

동하는 잠시 기다렸다가 엘가나의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을 때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성녀 님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혹시 샤이언 종족의 행성에 가는 것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알고 있어요.”

“아!”

동하는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의 안색이 밝아졌다.

하지만, 반대로 성녀의 얼굴이 점점 어둡게 변해갔다.

“공간을 열고 샤이언 종족의 행성에 가려면 반드시 에스테리아의 눈물이 필요해요.”

에스테리아는 달의 여신이었다. 고대 신화에 따르면 창세신이 인간을 멸망시키려고 하자 에스테리아가 눈물을 흘리며 자비를 구했고, 결국 창세신이 뜻을 돌이켜 다시금 인간에게 기회를 주었다고 한다.

그때 에스테리아가 흘린 눈물이 땅에 떨어져 천년도 넘게 상징처럼 전해져 내려왔는데, 그 안에는 에스테리아의 예언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달이 사라지고 세상이 어둠에 잠기면 눈물로 호소하라. 그럼 에스테리아가 그대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다.

에스테리아의 눈물에는 구원의 힘과 소원을 들어주는 속성이 있었다.

판타지 종족은 지난 세월 동안 에스테리아의 눈물에 숨은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노력했지만, 누구도 풀지 못했었다.

“정말 에스테리아의 눈물의 비밀을 성녀님께서 푸셨단 말인가요?”

역시 가장 놀라워 한 사람은 엘가나였다.

“그건 정말 우연이었어요.”

수수께끼의 비밀은 개기월식이라고 한다.

판타지 종족의 행성은 달이 두 개여서 개기월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대항세력을 결성하고 다른 행성으로 본거지를 옮긴 곳은 달이 하나였고, 몇 년이 지난 뒤에 개기월식이 진행되는 것이 아닌가?

성녀는 달이 사라지고 세상이 어둠에 잠기고 나서야 수수께끼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어찌 보면 무척이나 단순한 것이었지만, 판타지 종족의 행성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아낼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에스테리아의 예언은 단순히 개기월식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에스테리아는 판타지 종족이 어떤 운명에 처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구원의 의미로 자신의 눈물을 전해주었던 것이다.

“흐음.”

동하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개기월식이라는 것이 자주 있는 것이 아니었다.

빠르면 일 년. 늦으면 5년이 걸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나중 문제였다.

“에스테리아의 눈물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 그게…… 카일에게 빼앗겼어요.”

카일은 성녀를 생포하고 난 직후 그녀의 소지품을 모두 빼앗아 버렸다.

하지만 에스테리아의 눈물은 낡은 나무 조각 모양이라서 카일은 정확히 그것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 ☆ ☆

동하는 무거운 마음으로 지구로 되돌아왔다.

성녀는 남궁세가에서 지내며 상처를 회복하기로 했고, 조금씩 동하의 진영에는 새로운 사람들이 합류해서 힘을 보태고 있었다.

하지만, 에스테리아의 눈물이 카일의 손에 있다는 건 상당한 부담감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번에 변신술을 사용해서 성녀를 구했으니 동하의 능력 중 하나가 완전히 노출된 셈이었다.

앞으로는 변신을 해도 만물상점에 무사히 갔다 올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래도 동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지구의 운명이 걸려 있으니 카일이 에스테리아의 눈물의 정체를 알아차리기 전에 어떻게든 손에 넣어야만 했다.

동하가 집에 돌아온 것은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졌을 때였다.

힘든 시간을 보낸 동하에게 생각지도 못한 반가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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