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 극강-01 -->
오늘만 벌써 두 번째였다.
만물상점에서 쇼핑을 하는 테스터들이 아까보다 더 많아졌지만, 그만큼 경계도 삼엄하게 변했다.
차원의 전사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루고 주변을 순찰하다 이상하게 여겨지는 자들은 무조건 불러 세워 놓고 인증 검사를 했다. 곳곳에는 동하의 얼굴이 그려진 포스터가 붙여져 있었다. 그리고 포스터 밑에는 동하를 발견하고 제보를 하는 테스터들에겐 2천 포인트를 주겠다는 현상금까지 걸려 있었다.
2천 포인트면 엄청난 것이었다.
필드를 뛰는 것보다 차라리 동하를 밀고해서 포인트를 버는 게 어떻게 보면 더 효과적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일까?
테스터들은 쇼핑을 하면서도 옆 사람을 힐끔 쳐다보곤 했다.
동하를 찾아내서 현상금을 받아내겠다는 사람들의 열기가 생각보다 뜨거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동하는 사람들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게 만물상점을 활보하고 있었다.
누구도 동하를 주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동하는 지금 남궁혜의 모습으로 변장한 상태였다.
그의 변장은 완벽했다. 옷차림은 물론이고 걸음걸이와 사소한 손동작까지 모든 게 남궁혜와 똑같았다. 차원의 전사들은 자신들 옆에 지나가는 동하를 그냥 놔두고, 엄하게 다른 사람을 불러 세워 인증을 실시했다.
“그나저나 F블록에서 포클레인 같은 걸 본 것 같았는데…….”
F블록은 기계 종족과 관련된 곳으로 서쪽 끝자락에 위치했다.
만물상점이 워낙 크고 넓어서 F블록까지 걸어가는 데만도 한참이 걸렸다. 그 과정에서 몇 번이나 차원의 관리자들을 만나고 검문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동하는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고 무사히 통과했다.
“역시.”
포클레인이 있긴 있었다.
종류도 다양해서 동하는 하나부터 자세히 살펴봐야 했다.
기계 종족이 만든 것이라 하나같이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그중에 유독 동하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얼핏 보면 평범한 포클레인처럼 생겼지만, 땅 속 깊이 파고 들어가 순식간에 지하 터널을 만들 수 있는 포클레인이었기 때문이다.
[터널용 포클레인: 오직 땅을 뚫고 파는 것이 전부지만, 순식간에 터널을 만들 수 있다.]
딱 동하가 원하는 종류의 포클레인이었다.
터널용 포클레인만 있다면 어쩌면 처음 동하가 계획했던 것보다 더 지하 깊은 곳에 벙커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신 넓은 공간을 확보하긴 어려워 보였다.
또한 예전에 동하가 예측 안경으로 스케치해서 만들었던 설계 도면을 대폭 변경해야 했다.
수영장을 만들고 운동장을 만들기에는 시간상으로나 포클레인의 속성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떻게 보면 F블록에서 가장 평범한 것에 속하는 것이었다.
며칠 만에 대규모 단지의 지반조성을 완성해 주는 ‘마법의 굴삭기’도 있었고, 순식간에 건물을 만드는 ‘기적의 크레인’, 그리고 인테리어는 물론 배관과 전기와 식수 등을 해결해 주는 ‘만능의 로봇’까지.
보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감탄이 절로 흘러 나왔다.
[만능의 로봇: 자동화 시스템으로 되어 있어서 입력만 하면 스스로 움직이고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동하는 혀를 내둘렀다.
기계 종족의 기술과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새삼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마법의 굴삭기와 기적의 크레인, 만능의 로봇은 아파트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 아이템들이었다.
동하는 그것들에서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벙커를 만드는 게 더 중요해서 다시금 터널을 만드는 포클레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것만 있으면 벙커를 만드는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가격은 3만 포인트로, 상당히 고가의 아이템이지만 동하는 처음부터 포인트를 주고 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가격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포클레인을 복사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동하의 복사 능력은 예전보다 한층 더 강해져 있었다.
일전에 만능의 손을 흡수한 이후로 동하는 기계 종족의 능력까지 각성이 된 상태였다.
이제 단순히 대상을 복사만 하던 것에서 끝나지 않고, 원하는 부분을 업그레이드 하거나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바꿀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두 가지 이상의 아이템을 합칠 수도 있을까?”
동하는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한 개의 아이템만 복사 했지, 여러 개의 아이템을 한데 섞어서 전혀 새로운 것으로 만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긴,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없으니 과연 그게 실현이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도전한다고 딱히 손해 볼 것도 없지 않은가?
오히려 아이템 간에 복사가 성공하면, 단순히 벙커를 빨리 완성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터널용 포클레인에 만능 로봇의 자동화 시스템을 결합시키면 동하 혼자서도 땅을 파고 터널을 만들 수 있을 것이었다. 여기에 마법의 굴삭기와 기적의 크레인 능력까지 더하면 더 이상 설계도면을 변경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벙커 내부에 수영장도 만들 수 있고, 운동장도 지을 수 있었다.
또한 실내 인테리어를 보다 럭셔리하게 만들 수도 있을 터였다.
“배관이나 전기 문제도 해결이 되겠군.”
동하는 즉시 네 개의 아이템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순간 매직 카메라와 예측 안경, 그리고 만능의 손과 복사 능력이 한데 섞여서 동하의 능력을 증폭시켜 주었다.
살짝 만지는 것만으로도 네 개의 아이템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고, 무슨 부품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일목요연하게 동하의 머릿속에 새겨졌다. 이건 포클레인의 설계도를 들여다보는 것보다 더 상세한 정보였다.
☆ ☆ ☆
샤이언 종족의 연구진들은 발칵 뒤집어졌다.
괴수들의 능력을 새로 업데이트한 지 몇 시간 되지 않았는데 벌써 괴수 중 하나의 시스템이 완전히 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박사님, 아무래도 자이언트 검치 호랑이가 죽은 것 같습니다.”
“어이가 없군. 이번에도 대한민국이란 곳에서 벌어진 일인가?”
“그렇습니다.”
“지금 자료를 볼 수 있나?”
“여기 있습니다.”
시얀이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모니터에 자료를 띄웠다.
순간 놀랍게도 그곳에서는 동하가 자이언트 검치 호랑이를 때려죽이는 동영상이 흘러 나왔다.
“으음.”
동영상을 보던 타누스 박사의 안색이 점점 흐려졌다.
그러다 동하가 밀종의 대수인을 펼쳐 주먹을 크게 증폭시키는 장면에서는 두 눈을 크게 치떴다.
“역시 복합 능력이로군.”
타누스 박사는 한눈에 밀종의 대수인 안에 거인의 힘이 섞여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여기 보이시죠? 자이언트 검치 호랑이를 끌어당길 때 썼던 수법은 격공섭물이란 것으로 무림 종족의 무공입니다. 비록 상승의 절기이긴 하지만, 거인의 힘이 섞이지 않았다면 엄청난 크기와 무게를 자랑하는 자이언트 검치 호랑이를 끌어당길 수 없습니다.”
영상은 자이언트 검치 호랑이 눈을 통해 전송이 된 것이라 조금의 왜곡 없이 전해졌다.
모든 게 동하를 찾아내기 위해 타누스 박사가 계획한 일이었다.
이번 패치 업데이트는 단순히 지구를 침공하기 위해 괴수들의 능력을 높인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능력을 높여서 지구를 궁지에 몰지 않으면 쉽사리 동하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할 것 같아서 벌였던 일이다.
타누스 박사는 자신의 계획이 성공했지만, 결코 안색이 밝지 못했다.
“그나저나 저 얼굴은 상당히 익숙하군.”
“만물상점에서 차원의 관리자들을 죽이고 도망친 자와 동일인물입니다. 드디어 놈을 찾아냈으니 누구보다 카일이 좋아하겠군요.”
카일은 예전부터 동하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잔뜩 벼르고 있었다.
그건 차원의 관리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심장에는 결정체가 이식이 되어 복합 능력의 전사로 환골탈태했고, 더 이상 동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과연 그럴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박사님?”
“자네의 생각에는 저자의 능력이 얼마나 될 것 같은가?”
타누스 박사가 눈짓으로 모니터 속의 동하를 가리키며 물었다.
“글쎄요. 자이언트 검치 호랑이를 2분도 채 되지 않고 때려죽일 정도면 5성급 이상은 되어야 가능하지 않을까요?”
“나는 그 이상으로 보네. 적어도 6성급 이상이야. 어쩌면 7성급 이상도 될 수 있겠지.”
“그건 무립니다. 저희도 지금 4성급 이상의 괴수를 실험하고 있는 단계인데, 어떻게 7성급 이상의 능력을 가질 수 있는 자가 존재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지금 우리 앞에 있지 않은가?”
“아, 아무리 그래도 7성급 이상이라니…….”
“자네는 우리가 어째서 우주 말살 프로젝트를 시작했는지 기억하고 있겠지?”
“그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샤이언 문명에 의해 샤이언 종족이 멸망하리라!>
모든 건 대 예언가 율리언트의 예언에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타누스 박사는 오래전부터 동하의 정체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샤이언 종족의 문명과 기술보다 더 앞선 능력을 지닌 의문의 사내.
그런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러다 영상을 보고 나서 확신이 들었다.
“만약 율리언트의 예언이 실행되고 있다면 자넨 어쩔 텐가?”
“서, 설마?”
“우리는 1성급부터 9성급까지 괴수들의 등급을 세분화시켜서 프로그램을 만들 생각이었네. 그 중에서도 프로그램의 최종 단계는 시간과 공간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존재이지.”
“그랬었죠.”
지금은 불가능한 영역의 기술이었다.
무엇보다 4성급 이상부터는 연구 진행이 원활하게 진행이 되지 않고 있었다.
동하에게 강탈을 당한 생명의 씨앗이 결정적이었다.
하물며 프로그램의 최종 단계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타누스 박사나 시얀은 샤이언 종족의 문명과 기술을 굳게 믿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걸릴 뿐 언제고 반드시 프로그램의 최종 단계인 9성급 S몬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이다.
타누스 박사의 의문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만약 자신들이 만들어낸 절대적인 존재가 어떤 일로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과거로 되돌아왔다면? 그리고 그 절대적인 존재 안에 심어진 프로그램에 버그가 생겨서 오히려 샤이언 종족에 맞서려 한다면?
모두 가정일 뿐이지만, 지금 상황에 대입하면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듯 딱딱 맞아 떨어졌다.
시얀의 얼굴도 하얗게 변했다.
이건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소리였지만, 타누스 박사의 말에는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특히, 율리언트의 예언을 생각하면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건 미래와 현재의 샤이언 종족끼리 싸우는 꼴이었다.
하지만, 싸워 봐야 승산이 없었다.
당연히 샤이언 종족의 모든 기술이 총 집약된 미래가 이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단 원로들을 만나봐야겠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겠지.”
여기서 우주 말살 프로젝트를 멈추고 동하와 화해를 하던가, 아니면 지금보다 더욱 강경하게 밀어붙이던가.
어떤 것을 선택하든 상황은 점점 예측하기 어렵게 변해가고 있었다.
☆ ☆ ☆
“2천 포인트라…….”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현상금이 이렇게 높은 거지?”
“이유야 어쨌든 저 자만 찾으면 완전 땡 잡는 거 아닌가?”
“그렇긴 하지. 요즘은 예전처럼 필드를 자주 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아니라나. 사고 싶은 아이템도 많은데, 내 눈에 띄면 좋겠구먼.”
테스터들이 벽에 붙어 있는 동하의 포스터를 보며 수군거렸다.
필드를 뛰어도 2천 포인트를 벌지 못하는 테스터들이 허다했다.
하물며 최근에는 울트라 베타테스트로 시스템이 바뀐 이후에는 필드를 뛰는 사람보다 뛰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그것이 바로 눈에 불을 켜고 동하를 찾아 나서는 자들이 많아지는 이유였다.
피식!
동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서 사람들이 하는 말을 모두 듣고 있었다.
자신이 바로 옆에 있는 것도 모른 채 현상금 운운하는 게 한편의 코미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하는 그곳을 떠나 사람들이 없는 장소를 찾았다.
“저곳이 좋겠군.”
야수 종족 전용 매장은 거리가 한산했다.
동하가 건물 사이로 들어가 막 차원이동을 펼치려는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거친 호흡 소리와 함께 누군가 다급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대략 100미터 앞이었다. 건물과 건물에 가려서 자세한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동하는 천이통이 열려서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사람들이 귓속말로 속삭이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여자로군.”
그 짧은 사이에 벌써 그녀는 붙잡힌 모양이었다.
비명과 함께 바닥에 고꾸라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아악!”
“흐흐, 이거 어이가 없군. 겨우 그 따위 실력으로 대항세력의 수장을 구하려고 잠입을 했단 말이냐?”
“퉤. 네놈들을 죽이지 못하는 게 한스러울 뿐이다.”
여인의 목소리는 듣기만 해도 독기가 가득 서려 있었다.
동하는 더 이상 상관하지 않고 그냥 무시하고 차원이동을 하려고 했다.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여인의 목소리가 결코 낯설지 않았다.
“혹시?”
동하는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결국 동하는 차원이동을 포기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판타지 종족의 블록인 정령의 관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금발의 엘프 미녀가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고, 망토를 두른 자가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리에는 지나가는 테스터들이 많았지만, 누구도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망토를 두른 자는 차원의 관리자들이었다. 요즘 그들은 복합 능력을 얻어서 예전에 비할 수 없을 만큼 강해진 상태.
예전에도 차원의 관리자들은 공포의 대명사였지만, 지금은 아예 지옥의 사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물며 엘프 미녀가 불쌍하다고 그녀를 도울 만큼 간이 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엘가나.’
동하는 살짝 혀를 찼다.
그날 엘가나가 대항 세력의 본부로 돌아간 이후 소식을 알 수가 없어서 막연하게 죽었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다시 만난 것도 인연이었다.
하지만, 거리에는 너무 많은 테스터들이 있어서 천하의 동하라고 해도 엘가나를 구해주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현상금이 무려 2천 포인트였다.
동하를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던가?
테스터들이 많은 곳에서는 무조건 몸을 사려야 정상이었다.
더구나 남궁혜의 모습을 하고 사고를 쳤다가는 자신뿐만 아니라 자칫 남궁혜까지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 동하는 그녀를 모른 척 외면할 수 없었다.
‘엘가나도 판타지 종족이니 판타지 종족과 관련된 생명의 씨앗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엘프들은 숲속의 요정이라 할 정도로 자연친화적인 존재들이었다. 생명의 씨앗과 관련이 있을지도 몰랐다.
동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엘가나를 구하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엘가나를 구하는데 꼭 차원의 관리자와 싸우고 그를 죽일 필요는 없었다.
츠츠츳!
동하는 어느새 남궁혜에서 망토를 두른 차원의 관리자로 변해 있었다.
선이 굵은 인상이 영락없이 카일과 똑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