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 만물상점-110화 (110/167)

<-- 110화 : 알아서 기어-02 -->

마크 국장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농담을 하는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공개석상에서 미국을 대놓고 무시하는 발언을 할 리 없었다. 이번 사안은 결코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말해 주겠소?”

마크의 말은 곧바로 통역관을 거쳐 동하에게 전해졌다.

하지만, 통역관도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동하의 말을 액면 그대로 전해야 할지 아니면 순화해서 듣기 좋게 통역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상식적으로 동하의 말을 그냥 전하면 대미 관계가 크게 악화될 것 같았다.

“그냥 있는 그대로 통역하세요.”

동하의 말에 통역관이 경직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한민국은 미국에 어떤 무기도 공급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으으, 이유가 뭐요? 미국과 대한민국은 오랜 동맹국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이오?”

마크가 단단히 따지고 들었다.

순간 모든 기자들의 시선이 마크와 동하에게 쏠렸다.

찰칵! 찰칵!

카메라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졌다.

대한민국이 전 세계에 무기를 공급하는 것도 특종이었지만, 유일하게 미국이 출시 대상 국가에서 제외된 것도 토픽이었다.

동하의 눈빛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이유가 궁금하면 스미든 대사와 톰슨 주한미군사령관을 찾아가 물어보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싶군요.”

그리고는 슬쩍 스미든과 톰슨을 쳐다보았다.

“응?”

사람들의 시선이 동하를 따라 스미든과 톰슨을 향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스미든과 톰슨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렇다고 크게 당황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차가운 시선으로 동하를 노려보았다. 그 표정에는 네까짓 어린놈이 무얼 할 수 있겠느냔 자신감이 어려 있었다.

“며칠 전에 저 두 사람이 찾아와 대한민국 정부를 협박했습니다. 무기를 내놓고 기술이전을 하라고 말이지요. 대한민국 정부는 전 세계에 무기를 공급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에 미국에만 무기를 줄 수 없었고, 결국 미국의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하의 말은 곧바로 각 나라의 언어로 통역이 되었다.

장내가 크게 술렁거렸다. 기자들이 경악어린 표정으로 스미든과 톰슨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저들은 도무지 막무가내더군요.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심지어 주한미군을 빼겠다고까지 했습니다.”

동하의 말은 거짓과 사실이 교묘하게 섞여 있었다.

스미든과 톰슨이 대통령을 찾아와 주한미군을 빼겠다고 협박했을 때는 무기를 전 세계에 공급할 계획이 전혀 없었다.

하나 동하는 그런 계획을 스미든과 톰슨에게 말했다고 한 적은 없었다.

그저 그럴 계획이라 미국의 제안을 거절했다고만 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대한민국 정부에서 스미든과 톰슨에게 충분히 상황을 설명했다고 들렸고, 그런데도 미국 정부에서 주한미군을 빼겠다고 협박한 것처럼 전해졌다.

“자, 이제 마크 국장님께 묻고 싶군요. 아까 미국과 대한민국이 오랜 동맹국이라 하셨는데, 이렇게 협박을 일삼는 게 동맹국가가 할 짓입니까?”

“그, 그건…….”

마크는 당황한 나머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종군 기자로 활동하며 죽을 번한 경험도 여러 번이 있었고, 사선을 넘나든 적도 수없이 많았지만, 지금처럼 황당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주한미군을 빼고 싶으면 얼마든지 빼십시오. 대한텔레스에서는 절대 미국에게 무기를 공급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야말로 폭탄발언이었다.

각 나라의 기자들이 스미든과 톰슨을 향해 따져 물으며 춘추관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동하의 말은 전 세계로 중계도 되고 있었다.

텔레비전을 시청하던 각 나라의 국민들은 크게 분개했다.

괴수들의 침공으로 인류는 커다란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인류가 다 같이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도 부족할 마당에 미국은 자기 혼자 살겠다고 대한민국을 협박하고 무기를 독점하려 했다.

전 세계의 비난이 미국에게 쏟아졌다.

그와 동시에 출시 대상 국가 명단에서 미국의 이름을 제외시킨 대한민국의 행동에 찬사를 보냈다.

☆ ☆ ☆

한편 그 시각 동하의 집에서 김성혜 여사 역시 한창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었다.

이번 특별기자회견은 전 국민의 관심사였다.

괴수들을 피해 밀폐된 공간에 숨어 있던 사람들도 특별 기자회견을 시청하고 싶어서 거리로 나올 정도였다. 하물며 김성혜 여사는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김성혜 여사는 소파에 앉아서 특별 기자회견을 보다 갑자기 단상 위로 동하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두 눈을 의심해야 했다.

“서, 성미야. 저 사람 왠지 동하 닮은 것 같지 않니?”

“그러게. 어쩜 저렇게 똑같게 생길 수가 있지?”

전세계의 이목이 쏠려 있는 특별기자회견장에 동하가 있을 리 없었다.

더구나 동하가 대한텔레스의 대표로 무기 공급과 관련해 출시 국가를 발표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근데, 언니. 왠지 목소리도 비슷한 거 같지 않아?”

“네 귀에도 그렇게 들려?”

김성혜 여사도 계속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얼굴은 닮을 수 있어도 목소리까지 비슷하기 쉽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동하가 안 보이네. 어디 갔어?”

“볼일이 있다고 새벽 일찍 밖에 나갔어.”

“설마 저 사람, 동하 아냐?”

“너도 참. 동하는 지금 대학교 2학년인데 저런 대단한 곳에 갈 수 있을 리가…….”

김성혜 여사는 말을 하다 말고 멍하니 넋을 잃고 텔레비전을 쳐다보았다.

뒤늦게 동하를 소개하는 자막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름 최동하.

서일대학교.

대한텔레스 대표이고 방위산업체와 정부의 조직을 통합.

새로 창설된 기구의 대표를 역임하고 있음.

자막은 그리 길지 않았다.

심지어 나이가 나와 있지 않아서 학교를 졸업했는지 어땠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김성혜 여사와 성미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쩐지 얼굴은 물론이고 목소리까지 똑같아서 이상하다 싶었다.

“서, 성미야. 동하가 지금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무기 출시 국가 리스트를 발표하고 있는 거 맞지?”

“아마 그럴 걸?”

성미는 무언가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언니, 동하 말이야. 국문학과에서 화학과로 편입한 건 아니지?”

“얘는 그게 지금 말이 되니? 대학교 2학년이 무슨 수로 편입을 해? 새로 학교에 들어갔으면 또 몰라도.”

“언니도 참. 그럼 저건 말이 돼?”

하긴, 어느 것 하나 말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언니. 동하가 대통령과 알고 지내던 사이였어? 어떻게 정부에서 새로 창설한 기구의 대표를 역임할 수가 있는 거야?”

“으음. 나는 동하가 어떻게 대한텔레스의 대표가 되었는지도 모르고 있었어.”

최근에 동하와 관련해서는 모든 것들이 서프라이즈 한 것들뿐이었지만, 지금 텔레비전에 나온 동하의 모습이 가장 쇼킹했다.

“엄마, 아까부터 무슨 일이야?”

“이모? 텔레비전에서 뭐 특별한 거라도 하고 있어요?”

미진과 미현이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저길 봐봐. 지금 동하가 대통령을 대신해서 특별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중이야.”

“예에?”

미진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득달같이 텔레비전 앞으로 달려왔고, 미현 역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빠에게 어떤 말도 듣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대충 기자회견을 보고서야 감이 잡혔다.

대한그룹과 대통령 모두 예전부터 오빠를 자기들 쪽으로 끌어들이고 싶어서 엄청난 조건과 파격적인 대우를 약속했으니 동하가 지금 저 곳에 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건 없었다. 대신 사전에 미현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약간 괘씸할(?) 정도였다.

“저, 정말 오빠네.”

미진은 무기 출시 대상 국가를 발표하는 오빠의 모습에 도무지 믿기지가 않은 듯 몇 번이나 볼을 꼬집어야 했다.

바로 그때였다.

김성혜 여사와 성미의 핸드폰에 불이 났다.

텔레비전을 보고 오래전에 연락이 끊겼던 가까운 형제자매는 물론이고 먼 친척들까지 전화를 해서 축하해 주었다.

-동하가 살이 많이 빠져서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었다니까.

-될 성 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고 나는 예전부터 동하가 큰일을 할 줄 알았다고.

-요즘 대한텔레스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주가를 올리는 기업인데, 동하가 그곳의 대표라니 괜히 내가 뿌듯해지더라니까.

김성혜 여사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동하가 사고를 칠 때마다 그렇게 동하를 욕하고 흉보던 사람들이 뭐가 어쩌고 어째?

예전에 집안이 망해서 어떡해야 좋을지 몰라 막막했을 때 따듯한 말 한 마디는커녕 차갑게 외면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동하가 높은 자리를 떡 하고 차지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하나같이 예전에 친하게 지냈던 일들을 꺼냈다.

원래 취업하기가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려운 시대였다.

청년 실업은 갈수록 높아져서 최근엔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었다.

한데, 괴수들이 침공을 해서 가뜩이나 어려운 취업이 이젠 낙타가 바늘을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게 변한 상태였다.

집도 잃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들의 속내는 뻔했다.

아마 동하에게 부탁을 해서 취업을 청탁하거나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고 하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김성혜 여사에게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였다.

사람의 진가는 어려울 때 알 수 있는 법이다.

김성혜 여사가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 철저히 외면해 놓고 지금 동하가 잘 되니까 살갑게 구는 건 역겨울 뿐이었다. 김성혜 여사에게 진정한 식구는 성미 한 명 밖에 없었다.

☆ ☆ ☆

“어?”

선화는 텔레비전을 보다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괴수들을 피해 도망치다 다쳐서 지금은 병원에 누워 있었다.

다행히 그녀가 입원한 병원은 안전구역이었고, 군대에서 병원 일대를 지키기 위해 삼엄한 경계도 펼치고 있었다. 덕분에 그녀의 가족들도 병원에서 함께 지내고 있었는데, 워낙 다친 사람들이 많아서 병원이 아니라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었다.

“선화야, 갑자기 왜 그래? 수술한 곳이 아직도 아파서 그래?”

엄마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 아니야.”

선화는 고개를 흔들었다.

차분한 표정으로 무기 출시 대상국가 리스트를 발표하고 있는 사람은 그녀가 잘 알고 있는 과 선배인 동하였기 때문이었다.

선화는 귀신에 홀린 듯 동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일까?

서일대학교는 서울에 있지만, 결코 명문대학은 아니었다. 소위 하위권에 분류되는 삼류대학에 가까웠다.

때문에 선배들 중에서 고위공직에 올랐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한데 국문학과 최악의 ‘개진상’으로 악명이 자자한 동하가 지금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특별 기자회견의 중심에 서 있었다. 학교를 졸업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하가 무기와 관련된 화학과나 하다못해 공학도도 아니었다.

“선배님은 여전하시네.”

선화는 왠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학교 축제를 같이 준비 하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동하는 소문과는 다르게 상당히 유머러스하고 자신감이 넘쳐흘렀었다. 더구나 관상에도 조예가 깊어서 사람 얼굴만 보고도 신상내역을 알아맞혔다. 그러고 보면 확실히 동하에게는 남과 다른 신비한 구석이 많았다.

한편 서일대학교는 발칵 뒤집어졌다.

이건 역사에 길이 남을 엄청난 사건이라 할 수 있었다.

유난히 학벌 차별이 심한 대한민국에서 삼류대학생이 고위 공직에 오른 건 미지의 영역을 개척했다고도 볼 수 있었다.

“우리 학교에도 저런 멋진 선배님이 계셨구나! 언제 졸업을 하셨을까? 생각보다 꽤 동안이시네.”

“동안은 무슨. 아마 우리가 선배일 걸?”

“그게 무슨 소리야?”

“내 기억이 확실하다면 국문학과 2학년생이 맞을 거야.”

“엥? 국문학과? 공학도가 아니고?”

“나름 꽤 유명한 친구야. 국문학과에서는 개망나니로 통했거든. 싸가지 없고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로 말이지.”

“지금 농담하는 거지?”

“진짜라니까.”

“야야,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이제 겨우 2학년생이 무슨 수로 고위 공직에 오를 수가 있어?”

“그리고 뭐? 개망나니? 저런 사람이 개망나니면 우리는 뭐냐? 구제불능 인간쓰레기야?”

“아니, 나는…….”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이다. 같은 학교 출신이 잘 됐으면 축하를 해줘라. 배 아프다고 시기질투 하지 말고.”

“아 놔. 이거 진짜라니까.”

국민들의 반응이 가히 폭발적이었다.

특히, 동하가 미국 대사와 주한미군사령관을 앞에 두고도 당당히 자기의 할 말을 다 하는 모습에서는 통쾌한 마음마저 들었다.

“잘했다.”

“나이는 어려도 제법 소신이 있네.”

“주한미군을 빼고 싶으면 얼마든지 빼라고 해.”

“자기들은 제대로 기술이전을 한 번도 해준 적도 없으면서 어디서 협박질이야?”

국민들은 열광적인 지지와 성원을 보내주었다. 간혹 안보를 걱정하며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다르게 별다른 힘을 얻지 못했다.

강승민 회장은 텔레비전을 보며 술을 마셨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술이 쓰고 매웠다.

“혜주야, 저 청년이 바로 최동하 군이냐?”

“예, 아빠. 동하 씨가 대한텔레스 대표를 맡을 줄은 몰랐어요.”

“허허, 그것 참.”

강승민 회장은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고 그때 동하를 만났어야 했었다.

예전에 혜주의 연락을 받고 강승민 회장은 부리나케 대한전자 사옥으로 달려갔지만, 그때는 이미 동하는 볼일을 다 끝내고 집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이무기가 여의주를 얻고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하듯 지금 대한그룹이 그랬다.

대한그룹은 동하라는 여의주를 얻어 전 세계적으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생각만 해도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직 포기한 건 아니었다.

강승민 회장은 어떤 금액이라도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 ☆ ☆

미국이 발칵 뒤집어졌다.

전 세계의 비난이 쏟아지는 가운데 자칫 잘못하면 국제 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될 판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대한민국에서 미국을 무기 출시 국가에서 완전히 배제해 버렸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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